시한부 인생은 슬픔만이 아니라오

손진원 텍스트릿·고려대학교

로맨스를 많이 읽어 보지 않은 독자들이라도 로맨스라는 장르의 이 ‘공식’만큼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로맨스의 엔딩은 해피엔딩이다!’ 예,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새드엔딩이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여주인공이나 남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거나 결코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상황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면서 소설은 이런 멘트를 던지지요.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니까,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 아무리 이렇게 강조할지라도,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는 최후의 수단은 죽음입니다. 독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평생 동안 변함없이 이어지는 안정적인 애정 관계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로맨스에서는 여주인공이나 남주인공의 죽음을 잘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로맨스판타지 장르 안에서의 죽음은 다릅니다. 죽음은 인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는 역할을 하지요. 흔히 ‘회귀, 빙의, 환생’의 앞 글자를 따서 ‘회빙환’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과거로 돌아가거나(회귀),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되거나(빙의), 혹은 다시 태어나는 식으로(환생), 어떤 방식으로든 인물들은 삶을 계속 이어 나가게 됩니다. 로맨스판타지 장르 안에서의 죽음은 새롭고도 더 나은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으레 거쳐야 하는, 다소 가벼운 통과 의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로맨스판타지에서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작품의 초반에만 잠깐 나올 뿐, 여주인공의 모험과 남주인공과의 관계 속에 본격적으로 개입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죽음이 사랑과 함께 다루기 어려운 문제인 것일까요? 죽음을 앞둔 이와의 로맨스라면, 필연적으로 새드엔딩일 것이라 생각하는 우리의 편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근 로맨스판타지 장르 안에서는 #시한부라는 해시태그를 단 작품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시한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들로, 이전의 많은 로맨스와는 달리 죽음이 작품 전면에서 다뤄지게 됩니다. 예로부터 여주인공의 수난이 일종의 클리셰로 쓰이고는 했던 로맨스 장르이지만, 시한부의 삶을 중점적으로 제시하는 작품들이 군집을 이루어 독자들의 관심을 끈 사례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죽음을 앞둔 여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부각시켜 남녀 관계의 애절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라기엔, 밝은 분위기의 작품들도 꽤 보입니다.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려는 목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죽어가는 여주인공을 애틋하게 보살피는 남주인공의 절절한 사랑을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망이 포함된 것이겠지요.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 둘 것은 로맨스판타지라는 환상적인 세계관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인공들이 어떻게 시한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지 상상해 보세요. 이것이 #시한부 키워드를 즐기는 방법입니다.

「건강이 없습니다」 이하론 지음, 카카오페이지, 완결, 2019

여주인공은 소설 속 조연인 니네이아 세이아의 몸에 빙의하고 맙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인 루베니오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니네이아는 몸이 아주 약한 나머지 올해 겨울이면 죽게 될 운명입니다. 죽음을 앞둔 니네이아의 몸에 빙의한 여주인공은, 원작과 다르게 오래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지요. 그런데 웬걸, 정말 니네이아는 ‘건강이 없습니다’. 제 발로 서있기는커녕 덮어쓰고 있는 이불이 무거워 돌아눕지도 못할 정도의 ‘최약체’ 몸이었던 것입니다. 남주인공 가이사는 루베니오의 의뢰를 받아 니네이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습니다만, 난데없이 니네이아의 병수발을 들게 됩니다.

여주인공이 스스로를 ‘두부 인형’이라 지칭할 정도로 니네이아의 저질 체력은 매우 과장되게 그려지고, 이런 여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가이사의 고군분투도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까딱하면 여주인공이 죽을 수도 있는 상태지만 포복절도할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지요. 건강이 없는 여주인공의 웃픈(?) 대활약과, 무뚝뚝한 얼굴로 살뜰하게 병수발을 하는 남주인공의 매력, 그리고 애틋한 부녀 관계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 자은향 지음, 카카오페이지, 완결, 2019

카리나는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가문을 이어갈 믿음직한 첫째나 부모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쌍둥이 동생들과는 다르게 ‘어중간한’ 둘째의 서러움을 받으며 자랍니다. 가족들로부터 방치된 카리나는 자신이 ‘예술병’이라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예술병에 걸리면 천부적인 재능을 얻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남기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기도 합니다. 카리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온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이 생명을 얻어 한나절 정도의 삶을 사는 기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기적을 행할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깎인다는 것인데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카리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결국 카리나의 남은 수명은 겨우 1년뿐이며, 예술병의 광기가 그 1년의 시간마저 앞당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가족의 사랑을 포기한 카리나는 남은 인생만큼은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며 집을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카리나는 정략으로 약혼을 맺었지만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밀라이언의 영지로 떠나고, 카리나와 밀라이언의 인연이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카리나는 그림이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림을 놓지 못합니다. 그림이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그림 그리기는 카리나의 전부이니 죽음을 불러온다고 해도 쉽사리 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딜레마가 이 작품의 매력입니다. 물론 카리나를 사랑하게 된 밀라이언이 연인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군분투하는 긴장감 역시 작품의 묘미를 더합니다.

「시한부 악녀의 해피엔딩」 하라쇼 지음, 카카오페이지, 완결, 2019

사교계에서 악녀로 통하는 클레아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마왕과 계약합니다. 클레아의 영혼은 자신의 몸에 다른 누군가가 대신 들어가, 자신이 생전에 짝사랑했던 아이작과 결혼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죽은 클레아의 몸에 빙의하게 된 여주인공은 몸의 주인인 클레아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대신 여주인공은 마왕에게 약간의 보상을 받기로 했거든요. 죽은 몸을 억지로 살려내서 기한은 딱 6개월. 6개월의 시한부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은 게임 시스템을 도입해,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여주인공의 상태를 수치화하여 보여줍니다. 예컨대 여주인공이 발걸음을 한 번 뗄 때마다 체력이 ‘1씩’ 마이너스되고, 위험할 땐 머릿속에 경고 메시지도 뜨고요. 문제는 앞에서 소개한 「건강이 없습니다」의 주인공처럼 상식을 뛰어넘는 저질 체력에, 이런 게임 시스템까지 도입하다 보니 웃픈(?)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된다는 것입니다.

6개월 안에 아이작과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낼 수 있을지, 연약한 클레아의 몸은 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작품 중후반부에서는 몸의 원래 주인인 클레아의 죽기 직전 사연과 클레아의 몸에 빙의한 여주인공의 사연이 각각 소개되면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유리나 유희』 어느날달에게 지음, 리디북스, 2019

다른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의 소설입니다. 여주인공은 소설 속 조연인 유리나라는 인물로 환생을 합니다. 유리나는 온몸이 보석으로 변하는 희귀병에 걸린 상태고, 이제 6개월 뒤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원작 소설 속에서는 유리나가 죽고 난 뒤, 정략으로 맺어졌던 약혼자가 소설의 진짜 여주인공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전개되는데요. 환생자인 유리나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약혼자 레이븐에게 꽃을 보냅니다. 꽃말을 통해서 약혼을 깨자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지요.

유리나의 작은 이 장난으로 인해, 약혼만 맺어 놓고 서로에게 관심도 없었던 남녀 주인공의 사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주인공이 죽음을 마주하는 태도는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라며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에게 남겨진 6개월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지요. 마지막까지 세상을 만끽하고 살다 죽겠다는 유리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가족들과 레이븐은 애써 미소를 짓고 유리나의 아픔을 모른 체합니다. 유리나와 사랑에 빠진 레이븐은 마지막까지 그런 유리나의 유희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인물입니다. 유리나의 유희는 죽음 이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마지막 반전을 기대하며 읽어 보

시길 바랍니다.


손진원 님의 '이 주의 큐레이션' 연재가 수록된 <기획회의> 497호는 10월 5일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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