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의 모티프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지구라트의 모습
(작품의 탑 구조에 모티프가 된 것으로 보인다)

 

피테르 브뤼헐의 〈바벨탑〉, 1563년작,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중세 시대 이슬람의 말위야 탑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배경

「바빌론의 탑」의 모티프가 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 유수 시절에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지구라트(높이와 너비가 90미터인 거대한 신전)를 짓던 여러 언어권의 사람들을 보고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다양한 국가 간 교류를 접한 적 없던 유대인에게 고대의 바빌론은 혼란(바벨에는 혼란이라는 뜻이 있다)스러워 보였을 것이다.「바빌론의 탑」의 배경이 되는 바빌로니아와 엘람은 각각 기원전 2000년과 기원전 2700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2000년 이상 존속했던 고대 국가였다(소설에서 “몇 세기” 동안 탑을 지어왔다는 언급이 있는데, 오랫동안 국가 규모의 공사가 가능한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줄거리

주인공 힐라룸은 엘람 출신의 광부로, 바빌론에 가서 “야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일”로써 탑의 건설을 돕기로 한다. 그는 처음 탑을 보며 그 규모(너비 100미터, 높이는 몇천 미터)에 놀라고, 수레에 짐을 싣고 올라가면서 점점 세계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세계의 구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주인공이 탑을 오르며 ‘밤의 정체’를 깨닫고, 양파와 구근을 키우고 옷을 꿰매며 탑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태양의 고도를 넘어서 올라간다. 금속 재질의 별이 탑에 부딪혀 박히기도 하고, 마침내 하늘의 ‘천장’에 다다른다. 화강암으로 된 천장을 뚫다가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힐라룸은 결국 천장을 뚫자마자 쏟아진 물에 휩쓸리게 되는데...

 

 

실험적으로 건설에 도전하고 있는 우주 엘리베이터의 상상도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작,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테드 창은 작가 노트에서 친구에게 바벨탑 신화의 더 ‘정교한 버전’을 듣자마자 이 그림이 떠올랐다고 밝혔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실제로 기원전 시대에 존재했던 과학기술과 현재의 과학기술이 힐라룸의 관점에서 마주친다는 점이다. 벽돌을 구워서 쌓아 올리는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 건축 기술을 이용해 천장까지 탑을 쌓게 하고, 화강석을 캐서 피라미드 내부의 석실을 만들던 이집트인의 건축 기술을 이용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천장을 뚫는다. 천동설의 세계관처럼 태양이 지구를 돌고 별들이 그 위로 돌아다니는 하늘의 상황은 기원전 시대의 과학적 우주관을 구현한 것이지만, “원통 인장”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한 지구의 모습은 현대 우주론의 주장과 상통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이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우주 전체로 볼 때 우주는 그 자체로 완전히 휘어져 들어오는 닫힌 시스템이다. 따라서 우주는 유한하지만, 안팎이 따로 없으며, 경계나 끝도 없고, 가장자리나 중심도 따로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한 방향으로 똑바로 무한히 나아간다면 이윽고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우주가 너무나 거대한 규모로 휘어져 있어, 한 940억 광년 거리를 달려야만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510601002

‘원통 인장 세계관’은 실질적으로 SF의 워프(warp) 이론 얘기가 아닙니까? 은유적으로나, 서술적으로나.(웃음)

테드 창: 그렇습니다. 원통 인장이라는 표현은 이 작품의 우주가 양의 곡률(positive curature)을 가지는 4차원 시공연속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입니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초판의 「인터뷰」 중에서. 421쪽)

「바빌론의 탑」이 놀라운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을 뛰어넘게 만드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을 작품 안에서 이중으로 구현한다는 데 있다. 현대의 과학으로 인식할 수 있는 우주의 구조를, 작품 속 지구의 구조와 등치 개념으로 묶어내면서, 단지 고대인의 우주관을 현대의 시점에서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대인(주인공 힐라룸)이 느꼈을 경이감을 현대인인 독자 또한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짜여진 구조인 것이다. 

저는 과학적 발견이 야기하는 경이감과 종교적인 경외심 사이의 관계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는 이 두 가지 감각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 둘이 완전히 일치하는 우주에 사는 사람의 경험을 소설화하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초판의 「인터뷰」 중에서. 420쪽)

또한, 이 작품은 종교와 과학의 가르침을 아우르면서 인간에게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야훼의 가르침은 또한 현대 과학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종교인이자 고대인인 힐라룸의 깨달음은 또한 비종교인이자 현대인인 독자에게도 깨달음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이다. 이 단편을 처음 읽은 2004년에 나는, 26세의 나이에 처음 발표한 단편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이중의 은유법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여낼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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