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하고 전생하는 협객들의 시간

서원득 텍스트릿·연세대학교

 

 

 

 

 

 

 

 

 

 

 

 

무협이 다 거기서 거기지.”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2000년대 후반의 대여점 무협 또한 천편일률적인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이 많았으니까요. 소년과 청년 사이인 연령대의 주인공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연을 만나 수련을 통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는 무림의 강자가 되어 자신의 적을 설정하고 물리쳤죠. 그 적이 무림을 위협하는 마교든지, 아니면 위선적인 정파이든지 간에요. 엔딩은 물론 주인공이 영웅의 권좌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독자들은 독서를 통해 그 주인공에 이입하며 대리만족의 욕망을 채워나갔죠.

 

무협에서 특정한 서사 구조가 반복되는 건 어느 정도 당연한 일입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밸이 설정한 영웅 서사 도식만 보아도 <스타워즈><해리포터> 시리즈는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죠. 그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대중의 이야기는 민담처럼 정해진 서사 구조가 서로 다른 버전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기 마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계속 볼까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반복되기는 하지만 매번 새로운 버전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같은 영웅 서사라도 <스타워즈><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는 맛은 완전히 다르죠.

 

2000년대 무협의 경우 무림 세계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다시 조명하여 새로움을 찾곤 했습니다. 주인공만 해도 소림사 같은 무림 정파 출신은 물론 사파, 마교, 낭인 집단, 세외, 3류 무인 등등 다양한 출신이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판타지 세계의 뱀파이어가 무림 세계에 전송되어 주인공을 맡기도 하였죠. 그리고 이 다양한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서로 다른 버전의 무협 영웅 서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헌데 이 반복되는 이야기는 시대별로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1980년대 무협지의 주류 전개는 2000년대 무협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중문학자 정동보의 말에 따르면 1980년대 무협소설은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다가 적에게 좌절당하는부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2000년대의 무협소설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플롯 구조죠. 그렇기에 각 세대의 플롯 구조는 그 세대의 심리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 문득 2000년대 무협 영웅 서사에 시간적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제주인공들은 어딘가로부터 귀환하고, 어딘가에서 전생하기 시작하죠. 그 시간적 변화들은 무협소설의 플롯이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란 것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오채지,『 칼끝에 천하를 묻다』 (전 13권), 파피루스, 2019, eBOOK.

『칼끝에 천하를 묻다』(전 13권)1) 오채지 지음, 파피루스, 2013∼2017, 절판

 

 

 

예로부터 무림에 귀환한 주인공이란 게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귀환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유행이 만들어진 것은 성상현의 낙향무사(2009 출간, 파피루스, 2015eBOOK 출간)가 출간된 이래입니다. 그리고 소위 귀환물2000년대의 플롯과는 다소 다른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고수가 적을 물리친다는 기본적인 대리 만족 플롯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귀환물의 절대고수들은 어딘가에서 귀환했기 때문에 20대를 훌쩍 넘긴 경우가 많았고, 무림 제패 같은 것 대신에 고향에서 가족을 꾸리고 소소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누리는 걸 목표로 합니다.

 

어찌 보면 직장에서 퇴직한 남성들이 가정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된 사회적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969년 문학평론가 김현은 무협소설을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초년생들의 두려움과 성공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읽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지금쯤이면 소년협객들이 퇴직할 시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웹소설 시장에서 귀환물은 딱히 독자의 연령대를 타지 않는 플롯입니다. 그 점에서 귀환물의 매력은 기연과 수련 부분을 생략하는 플롯 구조 그 자체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통설적으로 기연과 수련은 어지간히 잘 쓰지 않는 이상 재미있기 어렵습니다. 기연을 얻고 수련하는 부분은 대부분 어느 정도 뻔한 전개인데다가, 본질적으로 악당을 시원시원하게 물리치는 사이다 전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웹소설에서 주류 독자들이 빠른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귀환물은 이미 강한주인공을 귀환시킴으로써 빠른 사이다 전개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채지의 칼끝에 천하를 묻다는 귀환물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미를 극도로 끌어올린 작품입니다. 시작부터 독특한 작품이죠. 평소 악행을 일삼던 사파 무리들이 어느 여객선에서 한꺼번에 몰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들 시체에는 주먹부터 칼까지 다양한 무기로 인한 상처가 나 있었죠. 이에 실력 있는 포두가 나서서 수사를 진행해 보지만, 범인을 잡기는커녕 어떤 무공으로 악당을 때려죽인 건지도 알아내지 못합니다. 단지 어느 협객이 배에 탄 여자가 사파에 의해 겁박당하는것을 참지 못하고 무공을 썼다는 사실만 알아낼 뿐이죠. 헌데 포두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와중, 배에 탄 승객들 전부가 사파 무리를 죽이는 데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시체에 온갖 상처가 나 있었던 것이죠. 이에 포두는 승객들의 죄를 지우기 위해 사건을 미결 상태로 내버려 둡니다.

 

이후, 그 여객선의 협객인 주인공 적산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적산은 몰락한 문파의 후예로서 천하제일의 문파를 세우고자 중원에 다시 돌아옵니다. 헌데 여객선에서 자신이 구해준 여자는 알고 보니 남해 해적왕의 손녀였고, 그 해적왕은 최근에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으며, 곧 엄청난 숫자의 해적들이 그 여자의 목숨을 노리고 들이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여자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선택에서부터 글이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끊임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특히 귀환물답게 귀환 이전의 과거 이야기가 현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다양한 사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죠. 게다가 문파를 세우기 위해 강남의 화려한 도시와 열사의 사막을 종횡하는 모험 플롯 그 자체도 흥미진진합니다.

 

물론 작가는 옛날부터 용두사미의 결말을 내기로 악명이 높았고,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품도 엔딩에 다소 아쉬운 점을 많이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엔딩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추천합니다. 10권 이상은 즐겁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첨언으로 동일 작가의 전검왕(파피루스)은 비교적 엔딩이 낫습니다.

 

 

 

 

 

 

 

 

 

「화산전생」 정준 지음, 카카오페이지, 완결, 2017∼2018

 

 

 

 

3세대 무협 작가들은 고등학생이 무림으로 차원 이동되는 도입부를 자주 썼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무림 내의 어느 인물이 환생을 통해 다시 인생을 살게 된다는 클리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환생이라는 소재가 예로부터 여성향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무협에서 환생물은 전생轉生이라는 명칭으로 2010년대 초중반에서부터야 유행합니다.

 

어쩌면 전생이라는 다소 이단적인 소재가 무협에 배어들기 시작한 건, 근래 들어 무협의 정통주의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생은 이미 어찌 손쓸 도리 없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버린 인생을 되돌려서 다시 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전생은 무협의 영웅 서사를 구축함에 있어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소재입니다.

 

대개 환생물에서 주인공은 환생 후 처음부터 인생을 다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전 생의 지식과 기억을 발판 삼아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 하죠. 이 경우 과거의 지식과 기억은 영약의 위치를 알려주거나 신공을 기억하게 하여 기연과 수련의 과정을 빠르게 진전시키도록 합니다. 또한 미래에 있을 환난을 예지해 주기도 하죠.

 

여기서 화산전생은 무협 환생물의 기본적인 플롯을 잘 보여줍니다.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 그는 소위 전란의 시대라는 무림 대위기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앞에 서 있었던 많은 무림의 영웅들을 동경하기만 할 뿐이었죠. 그러다 문득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번에는 새 삶을 살아 보리라 다짐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영웅이 되어 보기로. 그리고 이전 생의 지식과 기억을 토대로 미래의 적을 상대할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갑니다.

 

조금은 뻔한 사이다 구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작가는 개그 무협의 틀을 활용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제게는 사부가 제자인 주인공을 훈련시키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서 사부는 주인공의 체력을 길러주기 위해 힘든 암벽 등반을 시킵니다. 아무리 체력 훈련이라지만 힘들기가 너무 힘듭니다. 거기다가 안전장치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떨어지면 그대로 인생까지 끝나는 상황이죠. 이에 제자는 스승님이 부디 이 무식한 훈련을 멈춰주길 바랍니다. 허나 스승님은 말하죠. “괜찮다! 밤이 될 때까지, 새벽이 될 때까지도 함께 있어 주마! 배가 고프면 함께 벽곡단을 먹자꾸나!” 그리고 그 따스한 격려에 힘을 너무 줘서 일까요, 사부님의 우렁찬 목소리에는 기가 가득 실려 있었고, 그 파동에 암벽의 돌들이 자꾸만 쏟아져 내리기까지 합니다. 절벽의 중간에서 떨어져 내리는 돌맹이들을 맞으며, 주인공은 스승님에 대한 잔혹한 진실을 깨닫게 되죠. ‘사부님, 이제 보니 더럽게 못 가르치시는구나!’

 

 

 

 

 

 

 

『무한전생 : 무림의 사부』 광악 지음, KW북스, eBOOK, 2016

 

무협의 서사 구조가 귀환에서 전생으로 나아가는 동안, 한 작가가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여러 세계들을 무한히 떠돌며 전생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세계의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무림을 살아가겠죠. 심지어는 그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무림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웅의 삶이라도 수천 번도 넘게 삶을 살면 인생 그 자체가 너무나도 귀찮지않을까요?

 

무한전생 : 무림의 사부에서 주인공은 무한한 삶에 지쳐 게으른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심산유곡에서 제자(라는 이름의 하인)를 받아 유유자적 살죠. 처음에는 무림을 포함한 여러 세계의 지식을 활용하여 게으름뱅이 라이프를 충실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뿔싸, 제자도 머리가 커지면 강호로 나가는 법. 게다가 강호에서 다시 스승에게 돌아올 땐 강호의 문제들을 주렁주렁 매달아 옵니다. 그렇게 주인공의 게으름뱅이 라이프는 점점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개그 무협입니다만,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주인공이 무협 세계를 남다른 시선으로 보는 면이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조금은 성적으로 고수위인 면도 있습니다만, 그 부분이 불편하지 않다면 계속 볼만합니다. 참고로 해당 작품은무림 세계인 무한전생 : 무림의 사부로 시작해 히어로물 무한전생 : 나는 히어론데 우리 형은 무한전생자?, SF 무한전생 : 스페이스 니트, 가상조선 무한전생 :망나니, 판타지 무한전생 : 사냥꾼 아크(이상 KW북스) 순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khhan21/22172210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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