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읽기 좋은 날-④

코로 걷는 생물이 있다고?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하랄트 슈튐프케, 박자양 옮김,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북스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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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과학잡지 『과학동아』 1988년 11월호에 ‘비행류(鼻行類)’가 소개되다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과학동아』 1988년 11월판에 「비행류(鼻行類)가 태평양의 섬에 살았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된다. 그 기사는 남태평양의 ‘하이아이에이(2011년 출간된 도서에서는 ’하이아이아이‘) 군도’에서 다리가 아닌 코(鼻)로 걷는 생물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서는 비행류를 ‘이상 발달한 코로 걷기도 하고 먹이를 잡기도 하는 특색있는 포유류’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비행류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의 상당 부분은 과학동아의 이 기사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 기사는 하랄트 슈팀프케(Harald Stümpke)의 책 『Bau und Leben der Rhinogradentia』(1957)를 참고로 하여 작성되었다. 이 책은 2011년에서야 국내 도서명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으로 출간되었다.

 

 

- “남태평양 군도에 코로 걸어다니는 ‘코걸음쟁이’가 산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스웨덴인 아이나 페터손-스캠트비스트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하이다다이피(Hiduddify)라는 섬에 다다른다. 이 섬은 남태평양의 하이아이아이 군도에 있는 가장 큰 섬이었다. 지질학적으로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하이아이아이 군도는 족장이 다스리는 원주민 집단과 독특한 생물계가 공존을 이루고 있었다.


 원주민의 아이들은 스캠트비스트와 접촉한 지 몇 달 만에 감기에 옮았고, 그 비극을 시작으로 원주민들은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 이후 하이아이아이 군도는 인간을 제외한 생물계만이 남았는데, 그 중에 외부 인간들을 놀라게 할 만한 생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코걸음쟁이(鼻行類, 리뷰하려는 도서에는 비행류를 코걸음쟁이로 번역하였으므로 이하 코걸음쟁이로 명칭을 통일하기로 한다)’이다.


 코걸음쟁이는 하이아이아이 군도에서 살아가는 포유류로, 14개 과에 총 189개의 종류가 있다. 대략적으로 코걸음쟁이는 발로 걷는 외코쟁이류(원시코쟁이종), 코로 걷는 외코쟁이류, 여러 코걸음쟁이류로 나뉘는데, 그 중에 코가 여러 개이거나, 날아다니거나 식물처럼 보이는 위장술로 사냥하는 코걸음쟁이도 있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이 코걸음쟁이의 공통적인 특성은 뒷다리는 퇴화되고, 앞다리는 먹이를 움켜쥐거나 털 고르기에 적합하도록 변형되었으며, 꼬리가 뜀박질을 하거나 물체를 움켜쥐는 용도로 사용한는 것이다. 원시코쟁이를 제외한 나머지 코쟁이류는 자맥질하는 오리처럼 물구나무를 서서 코로 걷는다.


 이외에도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에서는 다양한 코걸음쟁이의 계통 분류, 생김새, 행동, 임신과 출산, 사냥법, 서식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실제 사진은 없지만, 설명과 함께 제시되는 컬러 삽화는 코걸음쟁이의 생김새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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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코걸음쟁이의 서식지가 알려지기 전에도 코걸음쟁이의 존재를 예견한 자가 있다. 바로 독일 시인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1871~1914)이다. 그가 하이아이아이 군도에 실제로 가 봤거나 코걸음쟁이의 가죽을 입수한 적이 있을거라는 가설이 있지만 가설은 가설일 뿐, 알려진 바는 없다. 모르겐슈테른은 자신의 시 ‘Das Nasobēm’를 통해 이 동물이 생존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코로 걷는(Auf seinen Nasen schreitet)
나조벰이 있다네,(einher das Nasobēm,)
새끼를 데리고(von seinem Kind begleitet.)
브렘에도 없고.(Es steht noch nicht im Brehm
1))
마이어에도 없고.(Es steht noch nicht im Meyer
2))
브록하우스에도 역시 찾아볼 수 없지만.(Und auch im Brockhaus
3) nicht)
그는 나의 라이어 선율 안에서(Es trat aus meiner Leyer)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네.(zum ersten Mal ans Licht.)
코로 걸어가고 있네(Auf seinen Nasen schreitet)
줄곧(전에 이야기했듯이),(wie schon gesagt) seitdem,)
새끼를 데리고 가는,(von seinem Kind begleitet,)
나조벰이 있다네.(einher das Nasobēm.)

 

 

 

- 전 세계로 알려지는 코걸음쟁이와, 시작된 진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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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은 독일에서 1957년 출간되었고, 1962년도에는 프랑스에 출간되었으며(『Anatomie et biologie des Rhinogrades』), 그 외에도 미국(『The Snouters』), 일본(『鼻行類』), 이탈리아(『I Rhinogradi di Harald Stumpke e la zoologia fantastica』) 등에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출간이 늦어 2011년도에 북스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이 나올 때까지 전 세계 인간들에게 코로 걷는 생물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코걸음쟁이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코걸음쟁이의 존재에 대한 진위 여부는 영원히 알 길이 없어져버린다. 하이아이아이 군도에서 행해진 원자폭탄 실험으로 군도 전체가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결국 독자들이 궁금하게 여겼던 코걸음쟁이의 진실은 밝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들이 저지른 사고 때문에 코걸음쟁이는 연구 가치가 충분한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랄트 슈튐프케가 쓴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이외에 다른 참고서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정황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스웨덴 병사가 군도를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중립국인 스웨덴의 병사가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상황은 어색하게 보인다. 또한 원자폭탄 실험을 하려는데 민간인 연구자가 있음에도 섬에서 대피시키지 않고 실험을 진행한 것도 이상하다.


 제일 미심쩍은 구석은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 맨 뒤에 있는 참고문헌이다. 참고문헌에는 논문 리스트들이 있는데, 그 논문이나 저자명을 검색해보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 다 거짓말이다.


 사실 코걸음쟁이는 이 세상에 없는 생물이다. 이 책은 동물학자인 게롤프 슈타이너가 가상의 저자인 하랄트 슈튐프케를 앞세워서 만든 이야기이다. 게롤프 슈타이너는 모르겐슈타인의 시구에서 나타난 시어(詩語) ‘Nasobem’을 바탕으로 가상 동물인 코걸음쟁이를 만들어냈다.


 권위있는 국내 과학 잡지인 『과학동아』 또한 정교한 허구적 설정을 믿고 코걸음쟁이가 실제하는 생물이라고 생각하여 보도해버린 것이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가상의 보고서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은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진 책으로, 등장인물이나 플롯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진짜 저자인 게롤프 슈타이너는 동물학자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물을 창조해냈다.


 이 책은 코걸음쟁이에 대한 자세한 설정,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컬러 삽화가 눈길을 끌 뿐 아니라 분량도 120페이지 내외로 부담없는 편이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기-승-전-결 구조를 예상하고 읽었다가는 당황할 수 있다. 이 책의 백미는 플롯이 아니라 탄탄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서 형식임에도 이 책은 ‘작품 후기’에서 분명히 결말을 드러내고 있다. 독자들은 보고서 형식으로 쓰여진 가상 동물의 설정을 읽으며 그 동물이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설정의 끝인 작품후기에서 멸종이라는 결말과 마주하게 된다.

 

 

 

-코걸음쟁이의 멸종과 하이아이아이 군도 원주민의 최후

 하이아이아이 군도에서 멸종한 것은 코걸음쟁이 뿐이 아니다. 그곳에는 원주민도 살고 있었다. 인간이 하이아이아이 군도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코걸음쟁이와 원주민 모두 멸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섬도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적을 공격할 폭탄을 만들기 위한 실험은 결국 우리에게 낯선 두 종류의 생명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렸다.


 게롤프 슈타이너는 코걸음쟁이의 멸종 뿐 아니라 원주민의 멸종까지, 두 가지의 멸종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종의 사라짐은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메시지를 남긴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는 실험 때문에 무고한 두 개의 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 책은 가상의 생물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현실 세계에서도 같은 운명을 겪은 생물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의 만행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은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있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지구 어딘가에는 제2, 제3의 코걸음쟁이가 있다.


 주위에서 자주 보이던 생물의 수가 급감한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살고 있던 생물이라면 급감하는 현상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도, 멸종 위기의 동물도 지구 생태계 안에서 살아간다. 한 생물의 멸종은 언제, 어떻게든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의 코걸음쟁이는 허구의 생물이지만, 멸종위기의 생물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게롤프 슈타이너는 코걸음쟁이의 설정을 빌려 우리가 제2, 제3의 코걸음쟁이를 멸종시킨다면 다음 번 멸종되는 것은 우리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

 

텍스트릿 필진 박해울의 글입니다.

 

 

※ 각주

 

1) 브렘(Brehm’s Tierleben) : 독일의 고전적 동물학보고서
2) 마이어(Meyer’s Lexikon) : 독일의 대백과사전

3) 브록하우스(Brockaus-Lexikon) :  독일의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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