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검을 든 여성들

손진원 텍스트릿·고려대학교

로맨스의 여주인공은 어떤 인물이어야 할까요? 할리퀸 로맨스에 익숙한 독자라면 순수하고 청순가련한 외모에 우윳빛 피부, 군살 없이 빼빼 말랐으면서도 ‘굴곡’은 있는 인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화신이 되어 남주인공을 감화시키는 여주인공의 매력은, 사회가 바라는 ‘여성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국 로맨스 장르의 여주인공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로 그려졌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대중문화의 영향도 한몫을 했지요. 이를테면 19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떠올려 봅시다. 직장에서 제 할 일을 야무지게 해내고 연애사업도 성공적으로 마치는, 발랄하고 강단이 제법 센, 세련된 외모를 지닌 여성들 말입니다. 소설에서도 로맨틱코미디 영화나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발랄하고 진취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시대에 따라, 혹은 독자의 요구에 따라 여주인공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하는 여성’의 모습은 조금 편견에 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 결국은 다 비슷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겠지만, 로맨스 장르의 여주인공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미의 기준과 ‘여성성’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결말, 해피엔딩을 맞이할 때에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처녀의 히스테리나 ‘선머슴’ 같은 자질을 잠잠케 만들고 그들을 ‘여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이런 여주인공에 대한 편견을 깨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

의 웹소설 큐레이션에서는 로맨스판타지(이하 로판) 장르의 #여기사물 #걸크러시 작품들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많은 작품들이 중세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로판은, 여주인공의 모험과 연애를 두루 담아냅니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인물에게 전혀 다른 욕망과 행동을 추동할 수 있는 장르로, 현대 배경을 그려내는 로맨스가 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이룩하기도 합니다. 로판에서는 최근에 강한 여주인공, 이를테면 남자도 잘 해내기 어려운 기사 생활과 군 생활에서 뛰어난 실력을 내보이며 소설 속의 사회는 물론 현재의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성’에 대해 반기를 드는 캐릭터가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할 네 편의 소설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는 다양한 젠더 문제에 진지한 질문과 답변을 내리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도니스』(10권 발간) 남혜인 지음, 동아, 2015∼2019

『아도니스』의 주인공 이아나는 #걸크러시와 여주인공 #기사물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현재 웹소설 연재분은 완결이 났으며, 종이책은 총 11권 중 10권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호흡이 무척 긴 소설이지만 그만큼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며 읽힌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아나는 전생에서 ‘로안느’ 왕국의 여공작으로, 대륙 최강의 검술사 자리를 놓고 ‘바하무트’ 제국의 황제이자 정복왕으로 불리는 아르하드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는 아르하드의 요청을 거절하고, 일생의 유일한 호적수인 그와 경쟁을 하다가 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유언으로 이아나는, 다음 생에서는 적이 아니라 그의 기사가 되겠다는 말을 남겨 놓습니다. 아르하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이아나는 다시 그 삶을 되풀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로 ‘회귀’하게 된 것입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갖고 있는 이아나는 이전 생보다 더욱더 비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출생의 비밀과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깨닫고, 든든한 동료들을 얻게 됩니다. 또한 아르하드와 재회하며 그의 숨겨진 속사정까지 알게 되지요. 무엇보다 여검사인 자신을 얕보는 이들을 화려한 검술로 혼을 내주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위기들을 강한 무력으로 밀고 나가는 이아나의 모습에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곤 합니다. ‘사이다’를 부르는 강력한 응징에 이아나는 #걸크러시의 대표 주자가 되었습니다.

『황제와 여기사』(전4권) 안경원숭이 지음, 디앤씨북스, 2016

한편 『황제와 여기사』의 폴리아나는 앞서 언급한 『아도니스』의 이아나처럼 검의 귀재도, 고귀한 혈통도 아닙니다. 폴리아나가 태어난 ‘에하스’ 왕국에는 이웃 나라와 국지전을 아주 오랜 기간 지속해 왔고, 귀족 가문이라면 어디든지 가족을 전장에 내보내야 작위를 지속할 수 있다는 법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이복동생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폴리아나는 혈혈단신으로 전장에 서게 됩니다. 기사가 되기 위해, 사회가 귀족 여성에게 요구해 왔던 ‘여성성’을 포기합니다. 자신을 향한 욕설과 추문을 딛고 6년의 시간 동안 전장에서 살아남습니다.

폴리아나는 에하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 대륙 통일을 꿈꾸는 ‘아크레아’의 왕, 룩소스 1세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여성 기사가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아크레아의 기사들과 왕의 측근들은 폴리아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왕은 결국 그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만 폴리아나는 알몸으로 세 시간 동안 자신을 위협하는 기사들로부터 저항합니다. 룩소스 1세는 그의 절박함과 노력, 이전의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판단력과 상황 파악 능력을 종합해 폴리아나를 자신의 기사로 둡니다. 여성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기사로 살아남으려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고 독려해 준 이는 룩소스 1세뿐입니다. 그를 보좌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폴리아나와, 왕국 유일의 여기사를 자꾸만 격려해 주고 싶은 룩소스 1세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혼수는 검 한 자루』(외전 포함 전6권) 물풀 지음, 레브, 2019

『혼수는 검 한 자루』의 주인공 이에샤의 집안 사정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홀로 자식을 키워 온 이에샤의 어머니는 병을 얻어 죽고 맙니다. 이에샤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외가의 작위를 이어받아 ‘앨저’ 백작이 되지만,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어 친부인 ‘알디온’ 후작가에 들어가게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아도니스』와 『황제와 여기사』의 주인공들도 집안 사정이 만만찮습니다. 딸을 반목하는 집안 분위기는, 홀로 생존하기 위해 강해져야 하는 여주인공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동기와 재능, 그리고 그 재능을 갈고닦을 적당한 상황만 주어지면 천재적인 실력을 가진 여주인공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검술에 두각을 보인 이에샤는 대륙의 최연소 ‘브링어’가 됩니다. ‘브링’이라는 능력을 통해 초인적인 힘을 바탕으로 검술 능력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데,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그 능력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과 무관하게, 이에샤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불리한 상황들을 힘겹게 돌파해 냅니다. 여성 최초로 기사가 되기 위해 서슴지 않고 도전하는 이에샤의 열정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남주인공은 무척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멘델린’ 공작의 외아들이자 황제의 조카인 ‘엘레르트’는 기사들을 혐오하고, 무력 대신 대화의 힘을 믿는 ‘평화주의자’입니다. 몸부터 바로 나가는 이에샤와는 딱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지요. 이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를 보는 것도 이 작품을 읽는 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준장 로사 카니발』(전5권) 지미신 지음, 오드아이, 2019

『준장 로사 카니발』은 앞서 다룬 작품들과 다르게, 주인공이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속해 있거나 마법과 같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시속 20km의 자동차가 발명되어 괴짜들이 타고 다니고 총기류로 전쟁을 벌이는, 근대 유럽의 모습과 유사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직업이 군인입니다.

로사의 진로는 확실했습니다. 재산이 부유하지 않은 젠트리 집안의 차녀인 그는 남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적당한 혼처를 잡아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지요. 로사는 무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학교, 국군간호학교에 입학해 간호병이 됩니다. 전쟁에 투입되고 얼마 되지 않아 로사가 투입된 부대는 고립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로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구식 라이플을 들고 한 달을 버팁니다. 이들을 구원하러 온 아군이 로사의 대활약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마초적인 군대의 분위기상, 일개 간호병의 활약은 이대로 묻혔을 가능성이 크지만 ‘브란트’ 대장은 로사를 군인으로 발탁합니다.

로사가 저격수로서 대활약을 벌이고 준장이 되기까지의 일련의 성장 과정과 연애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중세 판타지 세계관과 조금 다른 배경의 전쟁 물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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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494호에 올라갔었던 큐레이션입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hhan21&logNo=221622386045&parentCategoryNo=&categoryNo=44&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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