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를 사유하기 시작한 무협들의 시대

서원득 텍스트릿·연세대학교

 

199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신무협新武俠이라는 명명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무협을 지향했습니다. 그들은 1980년대 구무협舊武俠의 수많은 클리셰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새로운 세대에 맞는 무림을 구상해나갔죠.

일례로 마교魔敎를 들 수 있겠습니다. 옛날부터 무협에는 마교라고 하여 삿된 것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무인 집단이 자주 나왔습니다. 하지만 신무협은 이를 재해석하여 마교를 민초들의 염원을 담은 민중 종교로 상상해내기도 했습니다.

헌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다시’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젠더만큼은 재고되지 않았습니다. 무협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기본적으로는 남성의 영역이었고, 그렇기에 신무협의 협객은 흔히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린 남성이곤 했습니다. 주체적인 여성 협객조차 찾기 어려웠던 게 당시 현실이었죠.

그러나 젠더 이슈가 뜨거웠던 2010년대, 무협에서도 조금씩 주체적인 여성 협객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남성 협객이 일부다처를 실행하는 일 또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기에 무협은 2010년대에 들어 젠더를 생각하기 시작했을까요? 그리고, 이제 무협은 어떻게 젠더를 사유하고 있을까요.

 

「장씨세가 호위무사」 조형근 지음, 네이버웹소설, 완결, 2014∼2017

본래 무협 장르에서는 여성 작가와 독자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랬습니다. 무협을 쓴다는 것은 중원의 지리에서부터 무림의 각종 무공까지, 수많은 지식을 익혀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무협을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무협을 읽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강간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게 이전의 무협이었습니다. 그런지라 여성이 무협을 즐겁게 읽어 나가는 일 자체가 결코 자주 일어나기 어려웠죠.

헌데 2010년대에 무협 장르가 급격히 몰락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무협은 매너리즘에 부딪쳤고, 현대 판타지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죠. 그 과정에서 기존의 무협 작가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장영훈과 같이 비교적 젊은 무협 작가 중 일부가 네이버 플랫폼에 들어가 소위 ‘로맨스 무협’이란 것을 썼습니다. 여성이 주류인 플랫폼에서 여성을 위한 무협지를 남성 작가들이 써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당시 장영훈이 쓴 「천하제일」이나 「패왕연가」(이상 네이버웹소설)는 상당한 히트를 쳤습니다. 여성 독자들은 새로이 열린 놀이 공간에 흥분했죠. 다만 장영훈의 작품이 젠더적으로 어떤 엄청난 진보를 보였다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로맨스 무협’은 기본적으로 잘생기고 강한 남성 협객과의 신데렐라 스토리입니다.

허나 ‘로맨스 무협’은 기존의 동양 로맨스가 여성을 규중에 가두거나 무력을 주지 않은 것과 달리, 여성에게도 무공을 주어 나름의 주체적인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그점에서는 로맨스 판타지의 여기사물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진보라고 평할 수는 있겠습니다. 여기사물의 여자 주인공 또한 남성인 황제와 애정 관계를 맺지만, 이제는 왕궁 속 공주님이 아닌 전장의 기사로서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니까요.

이 가운데 「장씨세가 호위무사」는 단연 탁월한 작품입니다. 전장 속에서 모든 걸 잃은 호위무사와 몰락해가는 가문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여자 주인공의 로맨스가 혁신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는 무림의 수많은 요소들을 단순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준수한 문장으로 둘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끌어냅니다. 그 결과, 비정하면서도 복잡한 무림에서 인정人情이 피어나게 되었죠. 무협과 로맨스 모두에게 충실한, 아주 드문 글입니다.

 

『자객전서』 수담·옥 지음, 청어람, 2014

2010년대에 네이버에서 ‘로맨스 무협’이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매년 나오는 작품의 수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기존 무협 작가들은 ‘로맨스’ 쓰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사실 ‘로맨스’를 잘 쓸 수 있는 작가도 드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이버의 경쟁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는 옛날 무협을 재연재하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여성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을 골라, 예쁜 표지를 입히는 식이었죠.

201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이 ‘재발굴’의 과정에서, 2000년대 중후반에 나온 가벼운 무협 작품들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촌부의 『천애협로』(청어람)같이 정감 있는 작품에서부터 초우의 『권왕무적』같이 다소 여성혐오적인 작품까지, 그 스펙트럼은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이 중에서 두드러지는 작품 하나를 꼽자면, 역시 수담·옥 작가의 『자객전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존 무협 팬들에게는 『사라전종횡기』(드래곤북스)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준수한 문장력과 뛰어난 구성력을 갖추고 있는 분이죠. 『자객전서』 또한 마찬가지로, 시공을 초월한 남성 자객과 여성 수사관의 사랑 이야기가 주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강한 남성과 그에 비해 다소 약한 여성의 연애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이면서도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맺는 멜로가 여성들에게 어떻게 탁월한 로맨스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수라전설 독룡」 시니어 지음, 카카오페이지, 연재 중, 2017∼, 불규칙 연재

‘로맨스 무협’의 등장과 무협의 ‘재발굴’은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무협 읽는 여성 독자층을 폭발적으로 늘렸습니다. 허나 남성 또한 여전히 카카오페이지 무협란의 주된 독자층이었기 때문에, 카카오페이지는 본의 아니게 양쪽 젠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무협을 새로 연재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카카오페이지는 대리 만족 성향을 극도로 강조하면서 연애의 비중을 줄이는 전략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당시에 나온 작품들 중에서 젠더에 대한 어떤 혁명적 선취를 이뤄낸 작품은 별달리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많았지요. 비교적 젊은 작가인 시니어의 「수라전설 독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하게 집안이 몰락한 한 소년이 독공의 절대고수가 되어가는 이야기로, 글 자체가 수준이 준수하고 전개 또한 현대 웹소설에 맞게 속도감이 있습니다. 특히 유난히 끈기 있는 악역과 그 악역을 집착남으로 바라보는 여성 독자들의 덧글이 흥미롭습니다.

 

 

「무협지 악녀인데 내가 제일 쎄!」 윌브라이트 지음, 카카오페이지, 연재 중, 2019∼, 불규칙 연재

2010년대 후반이 되자, 드디어 ‘로맨스 무협’에 영향을 받은 여성 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무협을 써내기 시작합니다. 다만 대다수의 초기작들은 소설 연재 사이트인 조아라에서 비공식적으로 연재되고 있었죠. 이 중 「무협지 악녀인데 내가 제일 쎄!」는 카카오페이지까지 올라온 ‘첫 사례’입니다. 여자 주인공이 무협지 속에서 ‘환생’하게 되었다는 전형적인 도입부, 로맨스 판타지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문장, 그리고 대리 만족으로 가득 찬 통쾌한 ‘사이다 전개’ 등. 해당 작품은 ‘로맨스 무협’이 겪게 될 첫 번째 미래가 로맨스 판타지와의 결합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여성이 무림의 최강자로 등장하는, 젠더적으로 인상 깊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성은 남성 협객에 의지하지 않고 유쾌하게 무림을 종횡하게 된 것이죠. 보통 한 장르를 새로이 수용하는 데 10년이 걸리고,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또다시 1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점에서 「무협지 악녀인데 내가 제일 쎄!」는 여성이 주체인 무협의 어느 흥미로운 미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사형』 진산 지음, 시공사, 1997

지금까지 소개한 네 소설은 먼치킨과 사이다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주인공이 적을 처치함을 통해 대리 만족을 추구하고 있죠. 단지 협객이 남성이냐 여성이냐, 그리고 그 조연이 얼마나 주체적인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점에서 ‘로맨스 무협’ 또한 어찌 보면 남성 영웅의 전통적인 역할이 여성에게 적용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여성주의가 젠더에 대한 사유를 통해 남성 영웅의 굴레를 벗어나는 기획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작품을 써낼까요? 한국 신무협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진산의 1997년작 『대사형』은 그 ‘오래된 미래’를 슬쩍 보여줍니다.

『대사형』은 사부와 대사형을 잃은 한 문파의 여섯 아이들이 강호를 겪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진산은 ‘영웅이 될 수 없는’, 무력한 남성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서사를 사이다의 굴레에서 벗겨냅니다. 그리고는 주인공의 감정을 섬세한 필치로 폭발력 있게 그려내며, 오히려 비정한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의 인정이란 무엇인지 답해냅니다. 강호에 있는 것은 역시, 오직 사람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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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493호에 연재되었던 큐레이션입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hhan21&logNo=221622351576&parentCategoryNo=&categoryNo=44&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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