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글쓰기를 상상하며

이융희 텍스트릿 팀장

 

장르문학이라는 바다는 무척 넓고 깊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장르들을 하나씩 열거해 보면 판타지, 로맨스, 무협, SF, 스릴러, 호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BL, GL, 좀비 등등이 있네요. 이처럼 많은 장르들이 웹소설이라는 틀 안에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웹소설 강의를 할 때마다 이러한 ‘다른 장르’에 대한 니즈를 보여주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웹소설에서 추리나 호러, 또는 SF 같은 장르들은 인기가 없다면서요. 저는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데 이런 글들을 읽을 수는 없는 건가요?” 이런 질문이 꼭 들어오는 것이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질문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했었는데, 요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말이지요. 지금의 웹소설은 이제 다양한 장르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완숙해진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웹소설이 판타지와 무협, 로맨스와 결합한 것은 속도감 때문이었습니다. 앞 내용에 대한 대략적 개요만을 파악하는 것으로 서사를 이해하고, 다음 서사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가속도 있는 전개는 한 장의 종이라는 물리성을 가진 소설보다 가상의 비트bit를 기반으로 한 텍스트와 더 어울렸죠. 질량과 부피가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는 빠르게 다가오고, 빠르게 사라지기에 적합했습니다. 스릴러와 호러, 미스터리 등의 장르는 이러한 웹매체의 성격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습니다. 누적된 정보량을 통해 경이감을 느끼고 감정적인 동요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권 단위의 분량에서 기승전결의 구도가 확실하게 갖춰져야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 매체에서 자극적으로 제공하는 감각의 향연들과 달리 소설은 감각을 전달하는 데 있어 많은 부분을 독자의 독해에 의존해야 합니다. 작가는 이러한 감각의 전달을 위해 수많은 서술 트릭과 형식을 사용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놀라움을 느낀 독자가 ‘아!’라고 하는 순간에 과거의 텍스트를 뒤져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웹소설은 종이책과 달리 그 구절이 언제, 어디에서 연재되었는지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죠.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법과 절대량의 문제입니다. 기존의 장르가 인쇄매체에 최적화된 까닭은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오랜 시간 관습을 만들었기 때문이겠죠. 이러한 시도가 누적되기만 한다면 다른 장르 역시 웹매체에 최적화된 기법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고스트헌터 작가의 「공포흉가 BJ 진서준」(문피아, 연재 중)이나 가프 작가의 「만렙 신참 검시관」(문피아, 연재 중) 같은 시도들이 웹소설을 통해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러니 이런 장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오늘은 웹매체와 인쇄매체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해 온 장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SF입니다. 현재 SF의 독자들은 SF를 종이책으로 읽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만, SF의 시작점을 찾아보면 다른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PC 통신의 시작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PC 통신이 시작되고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터로 온라인 공간을 사용하였습니다. 복거일 작가는 『파란 달 아래』를 온라인 공간에서 연재하였고, 듀나라는 작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PC 통신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연재의 형식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환상문학웹진 ‘거울’ 등으로 옮겨가면서 꾸준히 이어졌고 지금은 ‘브릿G’ 플랫폼을 비롯한 여러 플랫폼에서 SF 단편들이 올라오는 중입니다.

인고의 세월 덕분에, 웹소설에서도 조금씩 SF 작품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웹소설에도 우주 세계와 과학, 포스트휴먼과 기계의 미래에 대한 경이감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오늘의 큐레이션은 SF 글쓰기 특집입니다.

 

「사상 최강의 보안관」 글쟁이S 지음, 문피아, 완결, 2018∼2019

 

웰메이드 사이버 펑크 소설인 『사상 최강의 보안관』은 인류가 계급과 자본으로 나뉘어 격벽으로 구획된 세상 속에서 ‘무조건 면책 특권’을 가진 연방보안관 알렌 스트라우스를 바탕으로 서사가 진행됩니다. 가벼운 조크로 시작되는 소설은 이내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계와 인간의 경계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등 다양한 SF의 논제들을 웹소설적으로 풀어 나갑니다.

이 작품은 다른 웹소설에 비해 한 편 한 편이 보여주는 호흡은 비교적 긴 편입니다. 하지만 내용의 깊이와 전개가 무척이나 흥미진진해 한번 보면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질 겁니다.

 

「리미트리스 준」 캔커피 지음, 문피아, 완결, 2016∼2017

 

캔커피 작가는 문피아가 현재의 유료 웹소설 플랫폼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SF 연재를 해왔던 작가입니다. 「리미트리스 준」은 감정 결핍 증후군 환자로 아이큐가 75인 준이 살기 위해 수학 공부를 하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같은 문제집을 최소 열 번씩 풀고, 기하학, 미적분, 조합, 확률 등의 다양한 수학 공부를 한 준에게서 신기한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틀며 그럴듯한 환상을 구현해내는 단계별 서사가 매력적입니다. 그야말로 캔커피 작가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환생자인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무임금노동 지음, 문피아, 연재 중, 2019∼, 불규칙 연재

 

지금부터 소개할 세 작품은 판타지 작품의 클리셰를 비틀어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함대전과 외계생명체 등의 상상력과 결합한 작품들입니다. 2019년 문피아 공모전에 참가했던 「환생자인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고?」는 트럭에 치인 주인공이 환생해서 SF 세계관의 사관생도가 됩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가문의 자녀 중 최강, 최상의 인물 레메사 쿠 드래건에게 도전했다는 죄목으로 지방 행성에 좌천당한 폴스쿠로. 그런 그에게 다시금 중앙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데요. 판타지적 세계관과 우주 공간의 결합을 통해 광활한 서사를 펼쳐 나가는 소설은 거칠지만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주게임의 사령관」 몽랑괴행 지음, 문피아, 연재 중, 2019∼, 불규칙 연재

 

사실 게임 판타지 소설만큼 근미래 한국에 대한 예상을 정확하게 펼쳐 나갔던 장르도 드뭅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VR을 뛰어넘어 포켓몬GO와 같은 AR 게임과 함께 살아가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점차 사라지고, 프로게이머들은 이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하나의 스포츠 종목을 이끄는 대표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공간과 가상 현실은 SF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였고, 이것이 한국의 판타지시장에서는 게임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소재이자 세계 그 자체가 되어서 소비되었지요.

우주게임의 사령관은 게임 판타지, 그리고 빙의를 소재로 한 소설들 중에서도 우주 함대를 조종하는 게임의 주인공을 소재로 삼습니다. 클리어하기가 극악하다는 우주 게임 ‘스페이스 워’의 사령관이 되어 버린 주인공! 절망적인 상황에서 괴수와 싸워 나가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오랜 향수를 자극하는 맛이 있습니다.

 

「좌천당한 하급 장교가 살아남는 법」 고양이앞발 지음, 문피아, 연재 중, 2019∼, 불규칙 연재

 

처절하게 싸워서 살아남는 것에 급급한 주인공들만 있는 건 아니지요. 어딘가 나사가 빠진 승무원들, 그 승무원들과 함께 펼쳐나가는 우주의 서사를 다루는 『좌천당한 하급 장교가 살아남는 법』입니다. 『좌천당한 하급 장교가 살아남는 법』은 『우주게임의 사령관』처럼 함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 속 주인공으로 빙의했다는 소재입니다만,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고 극복해 나가는 온도가 『우주게임의 사령관』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비리도 저지르고,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좌충우돌, 엉망진창인 사람들을 꾸역꾸역 이끌고 전설적인 업적들을 펼쳐 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 포인트를 느끼게 합니다.

물론 제가 소개시켜드린 작품의 대다수는 하드 SF 팬분들에게 외면받을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SF가 아니라거나, SF 스킨 패치만 되었을 뿐 결국은 판타지소설에 불과하다는 반론은 언제든지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이번 큐레이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와 무협, 로맨스를 위주로 하는 듯한 웹소설에 ‘이런 소설도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언급된 모든 글들은 문피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융희 님의 '이 주의 큐레이션' 연재가 수록된 <기획회의> 495호는 9월 5일(목) 발행되었습니다.

http://aladin.kr/p/mWuIp

 

 

 

 출처 : https://blog.naver.com/khhan21/221643747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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