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가로 산다는 것

 

 

김보영 SF작가 01demian@hanmail.net
  
  
당신들만의 창피함
2004년 <동아일보>와 <동아사이언스>에서 주최한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은 3회 만에 끝났다. ‘SF’라는 말은 차마 창피스러워서 신춘문예 공모전에 붙일 수가 없어서, ‘신춘문예라는 말은 마찬가지로 창피스러워서 SF 따위에게 붙일 수가 없어서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고 이후로는 다시는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은 과학기술 창작문예라는 괴이쩍은 이름의 그 상은 채 3회 만에 별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와 함께 사라졌다. SF소설을 내주는 출판사도다른 공모전도실을 지면도 없었던 2004년에 말이다.
  
그 3회 사이에(정확히는 2회 사이에박성환배명훈김창규정소연 작가가 배출되었다. 10여 년이 지나 배명훈 작가는 자기 색이 확고한 중견작가로 성장했고정소연 작가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직을 맡고 있고 김창규 작가는 SF어워드에서 4회 연속 수상을 했다하지만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았다정소연 작가가 자기 단행본을 낸 것은 11년 뒤였고 김창규 작가는 12년 후였다당시에 내가 갖고 있던 원고가 정식 출간된 것은 6년 뒤였다.
  
내가 첫 단편집을 내려 했을 때 나는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국내’ 작가의 단독’ SF단편집을 출간한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몇 단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례가 없다고 했다첫 장편을 쓰고 나자 우리는 한 번도 국내 작가의 SF장편을 낸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외국 작가의 SF장편은 많이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건 외국 작가고라고 답했다. SF를 쓰는 어떤 작가들은 내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사람들은 순문학 작가로도 보이고라고 한다
  
그런 식의 저항은 내가 무명이거나 내 글이 형편없어서 못 내주겠다는 말보다 더 큰 좌절을 불러일으켰다글이 형편없다면 더 열심히 하면 된다하지만 내 글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것은 네가 성소수자라여자라흑인이라 책을 못 내겠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게 들린다진심으로 묻고 싶은데당신들은 그렇게 글을 쓰나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뭐 어디 누구에게 맞춰서 숙제 내듯이 쓰고 있는 건가순문학 작가들은 순문학을 당장 그만두고 SF를 쓰라고 하면 턱턱 써낼 수 있는가?
  
정말 문제는나는 내 글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나는 세계시장에서 흔하디 흔한 종류의 글을 쓰고 있다그런데 뻔히 그 책들을 내고 있는 출판사가 내게 한 번도 너와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한다커트 보니것은주제 사라마구는코맥 매카시는메리 셸리는마이클 클라이튼은멀리 가지 않아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는아마 나와 장르는 다르지 않은데 서양인이라서 책을 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SF가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존재하는가
그래도 10년쯤 눌어붙어 있으니 돌아보는 사람이 생긴다그들은 간혹 깜짝 놀랐다는 듯이 새로운 종족을 발견한 사람처럼 툭 건드려보며 놀랍군요거기 있다니한국은 SF의 불모지인데어째서일까요” 따위의 질문이나 한다.
  
다른 답이 있나지면이 없으니까전국 300개가 넘는 문예지 중 SF를 실어주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까동화와 청소년소설의 자리는 있어도 장르소설의 자리는 없으니까전국 25개 일간지 신춘문예 중 SF신춘문예는 없으니까심사위원들이 심사평마다 한숨을 폭폭 쉬며 요새 젊은 작가들이 경망스럽게 SF 따위를 내고 있다고 한탄하니까그러면 내지 않게 해주시든가일반소설 신춘문예 숫자만큼 장르소설 신춘문예를 만들어주시든가전국 150개가 넘는 문학상 중에 단 한 곳이라도, SF와 판타지소설이나 무협이나 로맨스소설에 수상은 둘째 치고본선은 둘째 치고후보 검토라도 해주시든가.
  
이쯤 되면 저항이 나온다. “우리는 순문학 출판사예요장르소설은 장르지면이나 공모전에 내야죠.” 맞는 말이다장르지면이 존재하기만 하면지면 없이는 작가도 없다프로야구 리그가 없으면 야구선수가 생겨날 수가 없다꿈조차 꿀 수가 없다아이들이 직업으로 꿈꾸며 성장할 수도 없다내가 2004년에 쓰던 글은 출간조차 기대하지 않았다그해에 갑자기 공모전이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인터넷에 올려버리고 직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직장에서 일하며 어디서 누군가 왜 한국에는 SF 작가가 없을까요” 하고 의문하는 것을 보며 그러게왜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SF지면과 상은 문학계가 아니라 <과학동아>,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과학창의재단과천과학관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서 만들어왔다지난 10여 년간 내 밥벌이와 내 작품을 지켜준 곳은 문학계가 아니라 과학계였다문학계는 이걸 좀 부끄러워해야 한다장르소설은 그만 부끄러워하고 이걸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쯤 되면 또 나오는 저항이 있다. “여기 뭐 권력이라도 있는 줄 아세요우리도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어요.” 나도 안다문학은 가난하다그리고 그 가난하기 짝이 없는 생태계에서 한 종류의 문학이 없는 자원을 독식해왔다독식은 둘째 치고 한 뼘도 내놓지 않았다문학이라는 생태계 전체가 바싹바싹 말라가도록따지고 들어보자정말 한국인이 SF를 싫어해서 쓰지
않을까?
  
한국에서 매번 영화관에서 1위를 찍는 영화는 언제나 SF. <인터스텔라>, <어벤져스>, <스타워즈>와 <스타트렉>이며 <인셉션>이었다여기에서는 저항이 빠르게 나온다. “그건 영화죠한국 사람들이 영화는 좋아하는데 SF소설은 안 보는 것 같아요.” 아직 안 끝났다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는 SF작가였다베르나르 베르베르였다다른 통계에서는 조앤 롤링이었다판타지소설 작가다내가 이런 말을 하면 또 정색한다. “그들은 여타의 SF/판타지와 달라요.” 다르겠지한강도 정유정도 박완서도 공지영도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다그러니 베스트셀러를 쓴다그들은 남다른 작가들이다그렇다고 장르가 바뀌지는 않는다.
  
장르소설을 향한 왜곡되고 무시된 기록
여기까지 오면 이제 마지막 저항에 도달한다. “우리가 몰라서 언급하지 않는 거죠장르문학도 순문학을 모르지 않습니까.” 사실이다나도 순문학을 모른다마찬가지로 웹소설과 라이트노벨과 무협과 공포와 추리와 로맨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아는 게 없으니 그들을 대변할 수도 없다하지만 내가 와타리 와타루 작가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디앤씨미디어)가 온라인서점 베스트셀러에 오르내리는 것을 알기 위해 그 책을 읽어볼 필요는 없다라이트노벨의 역사를 공부할 이유도 없다그건 현상이고 현상은 그냥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전에 <기획회의>에 매호 500위까지 베스트셀러 소설 순위가 실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하지만 아동도서까지 기록하는 이 순위에서 라이트노벨을 본 적이 없다. ‘몰라서’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1000만 부 이상 책을 판 작가에게 주는 상이 제정되려고 했을 때차마 창피하게도 이우혁 작가에게 상을 줄 수 없는 나머지 공지영과 이문열다른 두 작가도 상을 탈 수 없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실상 이문열 작가의 판매고의 대부분은 삼국지 평역본이었지 자기 소설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이우혁 작가는 가장 책을 많이 판 한국 작가를 언급하는 기사에서 신기루처럼 이름이 사라지곤 한다그저 건조하게 통계를 발표하는 기사인데도 그렇다판매고만 따지자면 이우혁 작가는 공지영 작가과 박완서 작가와 비슷한 순위에 있어야 한다그걸 몰라서’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예전에 잘 몰라서’ 여자는 뽑지 않는다는 작은 게임회사 직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만약 내가 그들에게 그건 차별이라고 말한다면화들짝 놀라서 우린 순수한 사람들이며 정말로 잘 몰라서 그렇다고 답했을 것이다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우리가 장르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심사후보에도 올리지 않고영화관이 관객 수 집계도 하지 않고예매 화면에 노출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하지만 한국 문학계는 언제나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2007년 대한민국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부정할 수없이 로맨스소설이었다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파란)은 누적 100만 부 이상 팔렸다하지만 이 작품은 어떤 종류의 수상후보에도 오르지 않았다온라인서점들은 그해의 작가후보에도 정은궐 작가를 올리지 않았다만약 그 책이 로맨스소설 대신 팩션이라는 이름만 붙었어도 대우가 그러했을까정은궐 작가는 이후로 계속 히트작을 낸 것만 생각해도 정유정 작가와 비슷한 대우를 받아야 정상이다전민희 작가의 판타지소설 룬의 아이들(제우미디어)은 국내에서만 70만 부를 팔았다더해서 일본에 출간된 한국소설 중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다. 2위도 아니고 1위다이 사실이 평단에서 언급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창비)가 아마존 베스트셀러 56위를 찍었을 땐 온 언론이 난리였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번에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태도를 뒤집는다. “장르소설은 상업주의에 빠져서는 말이죠.” 하나만 하자장르소설은 불모지인가아니면 상업주의에 빠져 독자들을 독식하고 있는가상업주의에 빠져 독자를 얻을 수 있다면그 상업주의 나도 좀 해봤으면 좋겠다.
  
어제 올라온 기사를 보니홍익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 2위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이었다. 1위는 남희성 작가의 달빛조각사(로크미디어)였다82년생 김지영은 70만 부달빛조각사는 100만 부를 판매했다자연스러운 순위다두 종류의 책이 다른 이유에서 나란히 가고 자기만의 독자를 만든다다른 한쪽이 없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다현상을 지우고 왜곡하는 문제다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했던 말마따나세계의 절반을 없는 셈 친다기록을 지우지말라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있는 기록은 하라현상이 왜곡되면 독서시장을 파악할 수 없다독자를 새로 만들고 독서 인구를 늘리는 정책도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만 부끄러워하라
순문학은 고상한가모든 문학은 고상하다동시에 고상하지 않다어떤 장르든 위대한 작품과 폐기물이 공존한다순문학이 자신만이 고상함을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평단학계정부의 지원이라는 몇 종류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의 독점은 종종 가치의 독점처럼 착각된다사실주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마다 부끄러움을 무마시키고자 얼마나 많은 서두를 늘어놓는지 눈물겨울 정도다. 21세기도 필요하고 4차산업혁명도 필요하고 융복합도 필요하고 인공지능과 특이점과 자라나는 새싹들의 과학교육도 필요하고 관계자가 와서 연설도 해야 한다집어치워라문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다.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순수하다그런 의미에서 모든 문학은 순문학이다과학소설이 있는 것은 과학이 세상의 일부라서 그렇다근현대사가 세상의 일부며 로맨스와 신화가 세상의 일부이듯이공교롭게도 이미 우주 진출도 로봇도 인공지능도 현실이 되고 말았다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그래비티>는 SF의 모든 요소를 갖고 있지만 사실주의 영화다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TV 가족드라마와 똑같이전부 지금 현재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솔직히나는 이제 문학에서 과학을 배제하고 어떻게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과학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은가그게 판타지다성공했다장르소설을 쓰고 있다.
  
그만 부끄러워하라부끄러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초라한 일이다밭에서 순혈종자만 남기려 애쓰다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잡초를 뽑아내겠다고 제초제를 뿌리고 소독하고 방역하다가모두 관심을 거두고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사막처럼 바싹바싹 말라갈 것이다.
  
  
기획회의’ 461(2018.04.05) 이슈 오늘의 SF” 차례
지난 1월 23일 세계적인 SF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SF의 문학성과 다양성을 크게 끌어올린 그 당시 어슐러 르 귄은 SF작가로는 이례적으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어왔습니다이처럼 SF가 과거와 달리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고국내에서도 온라인 플랫폼을 비롯한 작품 발표 지면의 다양화로 작가 층도 두터워지고 있습니다이에 <기획회의>에서는 국내 SF 창작 환경을 들여다보고 지금 SF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 살펴봅니다
         
지금 여기 SF를 주목하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기획회의편집위원)
SF적 상상력은 왜 중요한가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SF는 이미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 dcdc (SF작가)
SF란 무엇인가과학과 소설 사이 혹은 그 너머 문지혁 (소설가·번역가)
SF 작가로 산다는 것 김보영 (SF작가)
한국어로 쓴 SF 출판하기 이규승 (온우주 출판사 대표)
SF 전문 편집자란 무엇일까 최지혜 (프리랜서 편집자·작가)
SF 세계를 여행하는 독자들을 위한 가이드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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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원문을 게재합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khhan21/221250857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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