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쓰인 글에서는 김연수, 김영하, 박민규의 판매량을 다룬 부분을 기억에 근거해서 한기호 소장이 한 말로 적었는데, 구체적이고 정확한 기사로 출처를 대체합니다. 한기호 소장이 아니라 경향신문의 기사가 정확한 출처입니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어로 번역되어서 꽤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고 하는데, 아마존 닷컴에서 이 작품에 대한 리뷰들을 찾아 보면 재밌는 점이 보인다. 이 작품에 혹평을 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흥미진진한 스파이 스릴러 소설을 기대했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 국가에서 쓰인 간첩 소설이라길래 끝내주는 스파이 소설을 기대했는데 몹시 지루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더라.' '테리 헤이스 같은 작가인 줄 기대했는데 너무 노잼이었어.' 대충 이런 반응들이다. 사실 김영하는 가독성이 뛰어난 작가다. 문단 문학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그렇다. 김영하가 뭔 심각하게 문장을 배배 꼬고 해서 지루하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스파이 소설 독자들의 '취향'에 김영하는 다소 엇나가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과거 노블레스 클럽을 비롯한 장르문학 브랜드 편집자들 역시 '투고 작품들 중에서 안정적인 문장력과 이야기 전개를 보이지만 장르소설의 색채가 약한 경우("굳이 말하자면 순문학에 더 가까운")는 반려된다'고 말한 바 있다(판타스틱 2008년 12월호의 <대체 내 원고는 거절당하는가> 특집). 그렇다면 질문을 한 번 바꿔보자. 등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장르 문학가들이 순문학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못하거나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은 흔히 차별이라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장르문학의 범주에 넣기엔 재미가 떨어지는 순문학 소설이 장르문학 출판사에 투고되었을 경우 반려되는 것 역시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양쪽 다 차별이 아니어야 한다. 스파이 소설 애독자들이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취향'에 의한 '판별'이다. 장르문학보다는 문단 문학에 근접한 성향의 작품을 쓴 누군가가 장르문학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가 반려당했다고 해도 그건 차별이 아니다. 장르문학이 아니라 자기와 성향에 맞는 출판사에 찾아가서 책을 내도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르문학으로 책을 내면 불이익을 받는다. 책을 내도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거나 적은 비중으로 다뤄준다.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은 국내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일본에서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룬의 아이들>이 나오던 시기에 10대를 보낸 나는 그 시기에 아이들 사이에서 <룬의 아이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로맨스 소설을 아예 읽지 않는 나 같은 이들도 이름을 들어볼 만큼 유명했고, 2009년에 나온 후속작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출간 3일 만에 초판 2만부가 소진되고 즉시 증쇄가 이뤄졌다고 한다. 드라마화되기 전 시점의 일이다. 흔히 2000년대에 많이 팔린 젊은 작가들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김영하, 박민규, 김연수다. 그런데 실제로 많이 팔리는 것은 전민희나 정은궐이었던 것이며, 김영하, 박민규, 김연수가 당대의 최고 인기 작가로 여겨진 것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었던 것이다. 2011년도에 나온 한 기사를 보면 이 세 작가는 평균적으로 3~5만부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다고 한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102103395&code=960100 ). 해당 기사에서는 저 세 작가가 신경숙의 판매량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걱정스럽게 얘기하고 있는데, 출간 3일 만에 초판 2만부가 다 나간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당연히 더 팔렸을 것이다. 문단 문학 안에서 팔리는 작가를 찾을 시간에 그냥 장르문학을 다뤘으면 됐을 것이다. 언론에선 전민희와 정은궐을 다뤘어야 했다. 내 생각에 문예지에서 비 등단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다루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건 좀 핀트가 엇나간 게 아닌가 싶다. 문예지는 결국에 '취향'의 공동체기 때문이다. 문예지에서 반드시 장르소설을 다뤄야 할 필요는 없다. <룬의 아이들>은 다뤄볼 만하다. <룬의 아이들>은 적어도 <완득이>보다는 진지한 성장 소설이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작가 본인이 '내 즐거움을 위해 쓴 글이며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는데 굳이 문예지에서 다룰 이유가 있나? 문단 비평가들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즐겁게 본 이들의 욕구와 심정을 대변할 수 있을까?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문단의 비평을 필요로 할까? 

 

 

 

흔히 문단 문학과 장르문학의 거리에 대해서 논할 때는 문단 문학의 폐쇄성, '문단 문학만이 유일한 문학이다'라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관습과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해서만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차별에만 논점이 맞춰지면서 '차별은 잘못됐다. 우리는 다 같은 문학이기 때문에 구분의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결론으로 흘러갈 때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한국 문학의 등단 제도는 분명 기형적이며 차별을 낳고 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차별이 아니라 취향에 의한 판별이라면 분명히 장르문학 쪽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문단 문학하고 장르문학이 같다고? 그렇다면 대체 왜 장르문학 출판사에서는 '문장과 이야기의 전개도 좋지만 장르소설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을 반려했단 말인가? 

 

 

 

 

 

……장르문학입네 본격문학입네 하는 틀로 접근하는 데는 대체로 실소를 금치 못하는 듯했다. “제가 「근처」니 이런 걸 쓰면 ‘이 사람 이런 것도 쓰네’라고 하잖아요? ‘이런 것 쓴’ 사람으로서 이야기할게요. 이거 별 거 아니에요. 나 이거 쓸 때 순수했냐? 이거 쓸 땐 순수 하고 저거 쓸 댄 장르 하나? 아니거든요. 이런 거는 말 그대로 코드의 배합일 뿐이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왜 아직도 자세… 자세 좀 그만 따지고. 전국의 문창과, 국문과에서 자세 좋은 투수만 길러내요. 전부 우완 정통으로 졸업해요. 우완 정통인데 공은 존나 느려요.(아, 죄송합니다.)그러니까 이런 건 하지 말자는 거죠. 21세기인데.”

 

 

 

 

 

 

 

창작과 비평 2011년도 봄 호에 실린 박민규 인터뷰의 일부분이다. 박민규는 '장르문학이나 본격문학이라는 틀'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데 박민규가 이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박민규가 장르문학의 애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민규의 작품 안에 드러나는 장르적인 코드는 장르 자체에 대한 열성적인 탐구와 애정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향수에서 비롯된다. 박민규 소설의 주된 테마는 원래 향수, 혹은 익숙함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응원한 야구 팀(<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든지 오락실 너구리 게임(<고마워, 너구리야>) 같은 것으로 글을 쓰는 것인데, 냉정히 말해서 박민규의 글을 받아줄 장르문학 출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논리를 중요시하는 장르 문학에서 박민규는 지나치게 느슨하고 감성적 직관에 의존하는 작가일 뿐이다. 그나마 문단 문학 출판사라도 있어서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박민규의 처지다.

 

 

 

장르문학이 받는 '차별'에 중점을 맞춰서 보는 관점에 따르면 부조리한 등단 제도의 해체 이후에 세상에는 통속과 본격, 장르와 순문학의 구분이 모두 없어지고 사람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는 한 가지 요소가 누락되어 있다. 장르문학 : 순문학이라는 구도는 문단에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문학 내부에서도 저런 구분을 필요로 한다. 장르문학은 매우 구체적이고 특정한 범주의 문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통속 문학 : 진지한 문학이라는 구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면, 박상준이 한국일보에 연재한 SF 소설 시리즈를 보면, SF 소설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통속 문학과 진지한 문학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상준 본인도 통속이라는 표현을 곧잘 썼다. ''통속 문학'이라는 표현은 문단 문학의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게 편리한 태도일 순 있어도 성실한 태도일 순 없다.) 

 

 

 

 

 

 

 

김상훈 : 듀나가 쓰는 소설 대부분은 엄밀하게 말해 장르 SF라기 보다는 이른바 '슬립스트림(경계소설)'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쓰고 - 자기가 아는 것을 쓰는 (이점이 중요하죠), 머리가 좋은 작가입니다. 시대가 좀더 지나면 모든 소설 형태는 SF 혹은 경계소설에 한없이 가까워지겠죠. 과학기술의 산물이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 있고, 이 경향이 심화되는 이상, 사람들의 마인드(정신)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과학기술과 융합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SF 번역가 김상훈이 2003년에 한 인터뷰의 일부분이다. (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interview.aspx?AuthorSearch=@65225 ) 그의 주장에 따르면 듀나는 SF 소설을 쓰지 않는다. 충분히 그럴 듯한 주장이다. 이건 비난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다. SF 팬덤 내부에서도 듀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 중에 듀나의 소설에서 SF 특유의 경이감을 느껴서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냥 듀나가 글을 잘 쓰니까 좋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충분하지만 'SF가 아닌 것은 읽기 싫다'는 제한적인 독서 취향을 지닌 이들에게 듀나는 불충분할 수도 있다. 그것도 상관 없다. 남들한테 어떤 취향을 지닐지 강요할 순 없지 않는가?

 

 

 

그밖에도 '쥬라기 공원은 SF가 아니다', '스타 워즈는 SF가 아니다' 같은 논쟁이 존재한다. 이런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SF 장르'는 매우 특정한 범주의 부분 집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SF가 아니라 판타지든, 로맨스든, 무협이든, 추리든 다 마찬가지다. 재밌는 건 이럴 때 종종 나오는 표현이 '순문학'이라는 것이다. 문단 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이 쓰일 때 이것은 보통 좁은 의미로 쓰인다. 그들이 말하는 '순문학'이라는 것은 '진지하고 엄격한 문학'이며 그 테두리 바깥에 있는 것들과 구분되는 협소한 집합을 지칭한다. 반대로 장르 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넓은 의미로 쓰인다. 그들이 말하는 '순문학'이라는 것은 '장르문학이라는 특정한 범주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 장르소설 팬덤에서 이영도의 <봄이 왔다>나 좌백의 <호랑이들의 밤>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 다른 의미가 아니다. 그냥 장르문학이 아니라는 뜻이다. 등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장르문학을 쓰는 작가들 중에서 자신이 쓴 비非 장르소설을 순문학이라고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저것도 뭔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쓰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가 쓴 작품 중에서 장르문학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가리킬 뿐이다. 장르문학계에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가진 막연함의 유용성 때문이다. 장르문학이라는 매니아 문학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두루뭉실한 것을 가리킬 단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등단 제도가 해체되어서 문학계가 조금 더 합리적인 형태로 안착된다고 해도 순문학이라는 표현은 저 기능을 위해서 계속 쓰일 것이다.

 

 

 

언론에서 '문단 문학의 지루함이 출판 시장에서 한국 문학의 하락을 불러왔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난 황당함을 느낀다. 문단 문학을 하는 게 어울리는 사람은 그런 걸 하는 게 맞다. 문예지에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나 <달빛 조각사>를 다룰 필요는 없지만 언론에서는 다뤘어야 했다. 만약에 그랬다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달빛 조각사>를 즐겁게 읽은 사람들이 읽을 만한 다른 작품들도 언론에 소개될 수 있었을 테고, 취향의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어서 출판사들이 독자들의 구매 취향에 대한 이해도가 늘어났을 테고, 장르문학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좋아졌다면 장르문학을 쓸 자질이 있는 작가들이 다른 직업을 찾아가는 대신에 작가의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테고, 책이 이렇게 안 팔리는 세상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언론에서 몇십 만 부 팔리는 장르문학을 외면해놓고 그 책임을 문단에 전가하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문단 문학이 재미 없으니까 책 안 팔리는 거 아니냐'는 문장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문단 문학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그 전제다. 불가능하다. 문단 문학은 문학의 모든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문단 문학이 현실적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분야는 굉장히 작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다른 영역은 더 잘할 줄 아는 사람들한테 맡기는 게 맞다. 문단 문학의 문제점은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달빛 조각사>나 더 문학적으로 정제된 형식의 <달빛 조각사>를 내지 못한 건 문단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문단 문학에서 김보영의 <스크립터>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같은 작품이 나왔어야 했다. 작품의 수준이 김보영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어도 적어도 비슷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는 소설을 썼어야 했지만 그런 작품을 내지 못한 게 문단 시스템의 실패다. 진지한 문학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요즘비평포럼에서 배명훈, 정소연, 이융희, 노태훈 등을 모아서 개최한 포럼에서는 단순히 '문단의 폐쇄성은 나쁘다'보다 더 나아간 논의를 하고 있다. 배명훈은 문단 문학과 장르문학의 코드의 차이를 인정하고, 문단 비평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할 장르문학 비평의 필요성을 말한다. 배명훈은 문단 문학 비평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24 )

 

 

 

1. 인물에 대한 강조. 배명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세계를 담아내면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세계를 인물 안에 환원시키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런 전략을 고민하는 순간 문단의 눈은 중립이 아니다.”

 

 

 

2. 소설은 본질적으로 서사 장르임에도 이야기보다 문장을 중요시하며, 이야기를 완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

 

 

 

3. 결말을 낼 때 내면을 중요시한다는 점. 배명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문단에서 폭발적 결말, 힘 있는 결말은 자아를 기준으로 내부로 폭발하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SF에서 폭발적 결말은 세계로 나아가는 결말이다.” “한쪽 독법을 채택한 독자가 다른 쪽 작법으로 쓴 작품을 읽었을 때 결말을 못 찾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4. 철학 우대. 다시 배명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철학을 제외한 다른 학문이 작품에 등장할 경우 ‘복잡한 OO학적 지식’으로 언급한 다음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SF 소설을 비평할 때 문단 비평가들은 '이 작품은 이러이러한 복잡한 과학 기술을 보여준다'는 한 마디를 하고 그 부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보이지 않으며(혹은 못하며) 넘어간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배명훈이 언급한 이 네 가지는 문단 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로 언급할 수도 있고, 문단 문학의 '결함'으로도 언급할 수 있다. 내 생각에 1번과 3번은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의 차이지만, 2번과 4번은 문단 문학의 결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2번은 확실히 결함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장르지만 문단에서는 그 이야기를 과하게 소홀히 하고, 비평가들도 그것을 비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산재하다. 몇 년 전 쯤에 나온 문학상 작품집 심사평을 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 '요즘 시대의 소설가들은 이야기 쓰는 법을 다 까먹은 것이냐'는 한탄인 것을 보면 자기들도 망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그나마 페미니즘의 대두 이후에 문단 문학에서도 서사가 복원되고 있는 편이다). 4번은 조금 애매하다. SF 작품에서 과학적 지식이나 원리를 논할 소양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학 비평가로서 결격 사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이나, SF 장르의 관습에 밝기 때문에, 특정한 SF 작품 안에서 나오는 과학 기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반드시 과학적인 해설이 아니라 SF 장르의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도) 더 자세히 깊게 얘기할 수 있는 장르 비평가들이 나온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단 문학의 결함이 아닌 차이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사실 난 오래 전부터 문단 문학이 배명훈과 코드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온 편이다. 문단에 배명훈이 소개된 것은 2009년에 <안녕, 인공존재!>라는 작품을 문예지에 발표하고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의 우수작을 타면서다. 그해 대상은 다른 작가한테 돌아갔지만 <안녕, 인공 존재!>는 최종 후보 세 작품 안에 들었다고 한다. 난 <안녕, 인공존재!>를 즐겁게 읽었다. 이 작품이 우수작에 든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에 이 작품이 대상을 탔다면 문학동네에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당신들은 문학이 뭐라고 생각하길래 이걸 대상으로 뽑았습니까?'

 

 

 

<안녕, 인공존재!>가 일반적인 문학(그것을 한국의 문단 문학이라는 작은 틀로 보든, 아니면 더 넓은 의미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 온 문학으로 보든)의 기준으로 봤을 때 상이한 점은 갈등이 등장 인물의 관계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여 등장 인물 간의 갈등이 발전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예를 들어서 신우정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서 그 남편과 주인공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을 통해 삶의 새로운 부분이 조명된다는지). 인물 사이에 어떤 갈등의 진전도 존재하지 않는 이 소설이 대상을 탔다면 난 오히려 의문을 떠올렸을 것 같다. '이 작품에 대상을 줌으로 말하려고 하는 문학관은 무엇입니까?' 그게 꼭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설명을 더 듣고 싶다는 얘기다.

 

 

 

<안녕, 인공존재!>에서 배명훈은 캐릭터를 개성 있게 표현하는 재능을 보여줬지만 그밖에 몇몇 작품에서는 캐릭터를 완전히 지워낸 글을 썼다. <예비군 로봇>에서 주인공의 캐릭터는 더 모호하고, <초록 연필>에서는 아예 없는 수준이다. 물론 단편 소설은 중편이나 장편에 비해 캐릭터의 묘사를 할 여분의 공간의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듀나가 짧은 단편을 쓰면서도 주인공의 '사적인 동기'를 항상 꼼꼼히 챙기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배명훈은 이 영역에서 조금 소홀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배명훈한테 캐릭터는 애초에 중요한 문학적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전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배명훈한테는 일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고 후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배명훈은 '차이'를 지닌 것이다. 어느 쪽으로 판단할지는 개인의 관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게 배명훈에 대한 문단의 반응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소설가가 자기가 쓸 수 있는 성향의 글을 쓰는 게 맞다면 비평가나 편집자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자신들이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향의 글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타고 났다. 소설가의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비평가의 표현의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면? (물론 가장 간단한 답은 배명훈이 원래 얘기했던 것처럼 장르문학의 비평 세력이 태어나서 역할을 분담하면 된다. 하지만 모든 걸 '차이'로 규정하고 넘어가는 해결책이 정답일지에 대해선 밑에서 더 할 얘기가 있다.) 문단의 원로 비평가 중에 한 명인 정과리는 배명훈과 듀나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렸다.

 

 

 

"대중문학이 지배적인 문학장에 진입하게 된 면에서는 긍정적이에요. 추리나 SF가 한국에서 빨리 정착해서 대중문학이 자기 세계를 만들고, 소위 본격문학과 경쟁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해요. 그런면에서 저는 정유정씨, 장강명씨, 배명훈씨가 그런 작업을 하는 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문학작품의 수준으로 봐서는 동의를 못하겠어요. 아쉽게도 아직 한국문학 평론가 중에 SF나 판타지, 추리 장르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한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하더라도 본격 문학의 틀 안에서 적당히 얘길 할 뿐, 대중적 장르의 문학작품이 어떤 식으로 생존하고, 나아가고, 이것이 본격문학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선 거의 이해 못해요. 그런데 작가들은 나오고 있으니 언젠가는 거기에 걸맞은 평론가들이 나오겠지요.

 

" http://h2.khan.co.kr/201611131458001

 

 

 

(태평양 횡단 특급에 대한 평가) “‘인간 이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고급한 에세이”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11470312

 

 

 

 

 

문학과 지성사에서 책을 냈다는 건 듀나나 배명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학과 지성사를 대표하는 비평가 중 한 명인 정과리가 듀나는 호평했지만 배명훈한테는 그러지 않은 이유는? '문단에서 책을 내지 않은 작가는 사짜에 불과하다'는 차별 의식에서 비롯된 발언이 아니라 그냥 문학적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거울 필진 한 명이 배명훈에 대한 정과리의 저 발언에 언짢아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정과리 기준에 따르면 배명훈은 문학적으로 결함이 있는 작가라면? 듀나한테 있는 것이 배명훈한테 없기 때문에 저 비평가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듀나는 장르문학의 계통 안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장르의 낯익은 관습 안에 등장 인물을 던져놓고, 그 등장 인물이 자신의 세계를 긍정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상훈을 비롯한 사람들은 듀나가 SF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듀나의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배명훈과는 다르게 내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듀나가 높게 평가받는 지점에서 배명훈이 비판을 받는다고 하면? 이것을 '방향성의 차이'라고 보든 '문학적 요소의 결함'이라고 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폐쇄적인 문단의 구조와는 별개로 이런 문학적 의견의 차이는 계속될 것이라는 거다. 등단 제도가 해체되면 장르와 순문학의 구분이 없어지고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질까? 그렇지 않다. 문단 비평가들이 '이 방향으로 가는 게 옳아!'라고 할 때 장르문학을 쓰는 소설가들은 '아니오. 난 지금 가는 방향이 좋소.' 라고 답하는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혹은 문단 문학 작가들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문학을 던져주면 장르 독자들은 '그거 참 재미 없네요'하면서 아마존 닷컴에서 별 한 개 짜리 서평을 쓰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난 배명훈의 글을 좋아한다. 내가 느끼기에 배명훈의 글에는 '인생을 밝게 살아온 지적인 인싸' 특유의 산뜻함이 있다(그냥 작품에서 받게 되는 느낌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배명훈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배명훈의 작품은 우울증에 시달리기에는 너무 똑똑한 분위기가 퍼져 있다. 우울증에 빠진 상태 따위는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합리적으로 분쇄시켜버리는 유쾌하고 지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의 문학관으로 봤을 때 문단과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그가 문단에 소개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배명훈 같이 상이한 성격을 지닌 작가가 소개된 것은 문단의 다양성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근데 저건 달리 말하면 문단 입장에서 젋고 똑똑한 작가 한 명 얻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밖에 없다. 그 작가는 반드시 문단의 문학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SF 출판사에 문단 문학을 투고하면 반려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단 문학은 꼭 문학관에 맞지 않는 SF 작가를 소개할 이유가 있나? 문단이 대체 왜 다양해질 필요가 있단 말인가. 문단 바깥이 다양해지면 되지. 지금은 한국 사회에서 중국집만을 유일한 음식점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집을 통해서 일식이나 양식도 소개되어야 하는 기괴한 상황인 것이다. 그건 다양성이 아니다. 중국집은 중국 요리에 충실하고 일식이나 양식은 중국집 바깥에 있는 다른 음식점에서 먹으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올바른 상황은 배명훈이나 김이환이 문단에 소개되지 않아도 어떤 불이익을 얻지 않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장강명이 등단 제도에 관해서 쓴 책 <당선, 합격, 계급>에서 김이환은 문학동네에 단편 소설을 게제한 것이 신춘문예 당선 같은 제도적인 인정을 받는 과정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달리 얘기하면 저런 제도적인 인정을 받는 절차를 통과했는지 여부에 따른 차별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문단의 폐쇄성을 말한다. 문단이 더 열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문단은 제도적으로는 폐쇄성을 버린다고 해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이켜보는 일에 관해서는 더 꼼꼼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문단 문학에 모든 것을 떠맡을 것을 요구하는 대신에 현실적으로 문단 문학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문단 문학 바깥에서 나온 작품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면 된다. 현 시점에서 문단 비평가들이 장르 문학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할 때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게 장르문학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되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차별이 없어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취향에 따른 공정한 판별만이 남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진짜로 자유롭게 문학에 대해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문학과 문단 문학이 서로를 바라볼 때 느끼는 문학관의 불일치를 '방향의 차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문학적 요소가 결핍된 상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차이'라고 얘기하면 모두 다 편하다. 그냥 서로 다르다고 전제하면 논쟁의 여지가 없어진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부분은 장르문학 내부에서도 얘기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장르문학의 일부에서는 '장르문학은 보편적인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봐달라'고 말한다. 어슐러 르 귄이 그런 예다. 르 귄은 'SF 소설이라면 어려운 줄 알고 멀리 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냥 의무 교육 수준의 과학 지식만 나오니까 부담 갖지 말고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봐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또 다른 장르문학의 구성원들은 '장르문학은 일반적인 문학의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보통 창작자들이 전자의 경향을 보인다면 팬덤에서는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너희는 어째서 우리를 비평하지 않냐?'와 '너희의 잣대로 우리를 비평하지 마라!'가 공존하는 상태이며, 때로는 한 사람의 입에서 저 두 가지 말이 모두 나올 때도 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다. 

 

 

 

사실 이 모든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작가가 한 명이 있다. 김보영. 배명훈이 정리한 '문단 비평의 네 가지 특징'을 보다가 재밌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저기에 상당 부분이 김보영한테 해당된다는 점이었다. 

 

 

 

 

 

1. 배명훈은 문단 문학에선 인물을 중요시한다고 말한다. 설령 세계에 대해 잘 얘기했다고 해도 인물에 대한 얘기가 빠져 있으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건 김보영의 소설 대부분이 다 마찬가지다. 김보영 소설에서는 매우 디테일하게 캐릭터들의 성격과 가치관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의 문제는 소설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다.

 

 

 

2. 배명훈은 문단 문학과 그 비평의 특징으로 이야기보다 문장을 중요시하며 이야기를 완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말한다. 김보영은 이 사안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김보영은 이야기를 공들여 쓴다. 하지만 김보영이 쓰는 문장이 높은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문장을 중요시하는 문단의 기준으로도 김보영은 위대한 작가다.

 

 

 

3. 배명훈은 문단 문학에서 결말을 낼 때 내면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말한다. 배명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문단에서 폭발적 결말, 힘 있는 결말은 자아를 기준으로 내부로 폭발하는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SF에서 폭발적 결말은 세계로 나아가는 결말이다.” “한쪽 독법을 채택한 독자가 다른 쪽 작법으로 쓴 작품을 읽었을 때 결말을 못 찾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게 김보영 소설 대부분에도 적용되는 얘기라는 것이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김보영의 글에서는 인물의 내면적인 세계가 굉장히 중요시된다. <종의 기원>, <스크립터>, <저 이승의 선지자>, <얼마나 닮았는가> 모두 다 주인공이 어떤 내면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혹은, 김보영은 거대한 우주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도 그 세계를 여행하는 인물 개인의 내면의 우주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땅 밑에> 같은 경우엔 사람들이 이해를 하기 어려워한 작품의 예로 많이 꼽힌다. <땅 밑에> 같은 작품이 진정한 평가를 받으려면 SF 비평가들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땅 밑에>조차도 개인의 내면과 심리가 마지막까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작품이니 '내면을 중요시하는 문단 문학과 다른 독법을 지녀서'라기 보다는 그냥 이해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땅 밑에>는 처음 발표했을 때 과학자들조차도 작품에서 묘사된 세계의 구조에 대해 긴가민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4번은 김보영한테 해당되지 않는다.

 

 

 

 

 

배명훈과 문단 비평가들이 문학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는 점을 '차이'라고 말하는 건 비교적 간단한 방법이다. 위에 있는 정과리도 '배명훈이나 정유정 같은 이들을 논하는 건 장르 비평가들의 몫이지 않겠냐'면서 살짝 물러난 태도를 보이듯이 말이다. 그런데 김보영은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작가다. 김보영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보영은 SF의 특징인 경이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을 쓰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듀나와는 다르다. 김보영이 가장 잦게 비교되는 대상이 테드 창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보영은 문장도 잘 쓴다. 캐릭터의 내면도 끝까지 끌고 간다. 캐릭터의 내면을 이야기의 주제에 연결시킬 줄 알기 때문에, 인물 바깥에 있는 물리적으로 거대한 우주에 대해서 얘기하는 동시에 인물 내면에 있는 감각적으로 방대한 우주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사실 문단 문학의 입장에서도 좀 난처해진다. 배명훈은 '이야기를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을 그냥 넘어가주면서 문장에 집중하는 것'을 문단 문학의 평가 기준으로 언급했다. 이걸 그냥 '문단 문학이라는 장르문학'의 장르적 관습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주면 편하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김보영이라는, 문단 작가들보다 문장도 더 잘 쓸 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확실히 마무리 지을 줄 아는 작가가 있다. '문장과 이야기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둘 다 잘하면 되는 것'이라는 걸 김보영은 그냥 보여준다. 김보영 앞에서 '차이'는 무의미해지고 무언가 하나를 빠트린 채 글을 쓰는 작가들은 모두 다 '결함'을 지닌 것이 돼 버린다.

 

 

 

 

 

위에서 나는 <안녕, 인공존재!>에 부재한 부분으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서 주인공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을 통해 삶의 새로운 부분이 조명되는' 문학적 요소를 든 바가 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김보영의 <스크립터>다. <스크립터>는 주인공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갈등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며, 갈등이 발전하고 여러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결국에 주인공들 개인한테 일어난 사건들은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번져나간다.이런 전통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문학을 김보영은 문단의 어느 작가들보다도 높은 경지에서 이루어냈다.

 

 

 

 

 

재밌는 점은 <스크립터>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문학인 동시에 김보영의 작품을 통틀어서 가장 장르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 중 하나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유레카> 같은 만화나 <달빛 조각사> 같은 소설을 읽는 게임 판타지 독자층이 <스크립터>를 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스크립터>는 결국에 판타지라는 장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스크립터>에서 사냥꾼이 재칼과 싸우는 장면이나 천사한테 마법을 쓰는 장면은 판타지 소설을 읽거나 직접 써본 이들이 한 번씩은 그려봤을 이상적인 묘사들로 이뤄져 있다. <스크립터>는 가상 현실로 구현된 판타지 세계를 향한 냉소로 시작한다. 세계의 종말을 알리러 온 '천사'가 여인을 만났을 때, 여인은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주문을 외울 것을 권하지만 천사는 바보 같다는 이유로 사양한다. 하지만 결말에 가서 천사는 그 판타지 세계를 온전한 것으로 인정하고, 여인 앞에서 그 세계의 종말을 고하러 온 사자의 역할을 다 한다. 장르 바깥에서 냉소하는 시선에서 시작해서 장르 안으로 들어와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장르에서 비롯된 스타일로 장르를 긍정하는 글이다.

 

 

 

 

 

배명훈은 문단 문학에선 인물을 강조하기 때문에 SF에서 큰 규모의 세계를 다룰 때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계'도 다루고 '개인'도 다루면 된다는 걸 보여주는 SF 작가의 반례가 우리한테 있다. 물론 모든 작가나 독자들이 '문학은 세계나 개인에 대해 모두 다뤄야 한다'는 테제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르와 문단은 서로 다르다'고 차이를 강조하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한테 김보영은 뭔가 시름을 던져주는 작가인 게 분명하다. 사실 김보영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등단 시스템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문단에서는 김보영 같은 작가를 직접 발굴해내는 데 실패했고, 김보영의 작품들을 문단 네트워크에 소개하는 일도 소홀히 했다. 배명훈이 문단 문학에 소개된 것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문단 문학이라는 장르문학'의 취향에 더 맞는 작가는 김보영이었다. 문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작가를 소개하는 일마저도 제대로 못 해내었다.

 

 

 

 

 

글을 끝내기 전에 첫 부분으로 돌아가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과 스파이 소설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섞여 들었기 때문에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진 북한 간첩의 실존적 고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화려한 총싸움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스파이 소설을 기대한 독자들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지한 문학의 독자층과 총싸움을 원하는 장르문학의 독자층은 갈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장르의 무대를 스파이 소설이 아닌 웨스턴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웨스턴 장르의 팬들은 스파이 소설의 팬들만큼이나 물리적인 액션과 모험담을 선호함이 분명하다. 만약에 문단 문학 식으로 웨스턴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고뇌하는 1인칭 남자 서술자를 내세워서 별 다른 극적인 사건 없이 내면의 서술 위주로 이뤄진 단편 소설을 쓴다면 무대가 웨스턴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 작품을 웨스턴 장르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웨스턴 장르의 팬덤에서는 그 소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버릴 것이다. 

 

 

 

<스크립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장르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뤄지는 듯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렇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윌리엄 머니는 한때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무법자지만 이제는 나이 든 채 숨어서 지내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는 현상금을 쫓아서 총잡이로 돌아오지만, 여정에 나선 그가 결국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폭력으로 물든 자신의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될 수도, 미화될 수도 없다는 진실뿐이다. 마지막에 그는 마을로 돌아와서 자신의 친구를 죽인 보안관과 그 패거리를 죽인다. 총을 꺼내지도 않은 적수들을 먼저 쏴죽이고, 그마저도 총을 먼저 쏘려고 했는데 탄이 불발되는 사고를 겪기도 한다. 어떤 정의의 실현이나 통쾌함도 없는 결말로 끝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정성일은 '장르적 리얼리즘'이라는 매우 재밌는 표현을 썼다.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오랫동안 쌓아 올린 관습과 역사의 무대에 수정주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기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말 그대로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없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 이 작품은 분명히 웨스턴 장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웨스턴 장르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의 계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1. 흔히 문단 문학과 장르문학의 간극을 논할 때는 등단 제도의 통과 여부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만 얘기가 나온다. 이는 분명히 문학계의 현실적인 문제점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것을 권력에 의한 차별로만 간주하고 끝내는 논의에서는 장르문학이 문단 문학과 상이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간과된다. 스파이 소설의 애독자들은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장르문학 출판사에서는 장르적인 색채가 떨어지면 투고작들을 반려했다. 그렇다면 문단 문예지에, 자신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장르문학을 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작가 본인이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즐거움을 위해 썼다'고 말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 문단식 비평을 하는 것이, 그 작품을 즐겁게 쓰고 읽은 집단을 대변할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문예지보다는 문예지 바깥에 있는 사회의 편견이다.

 

 

 

 

 

2.  배명훈은 더 나아가서 장르문학과 문단 문학의 독법의 차이를 말한다. 그리고 장르문학의 비평의 필요성을 말한다. 타당한 얘기지만 사실 저 얘기는 배명훈이 문단 문학과 코드가 그닥 맞지 않는 작가였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캐릭터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 배명훈의 스타일은 관점에 따라서 문단 문학과 방향성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고, 문학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는 쪽이 옳을까? 장르 내부에서도 '장르문학의 특수성을 인정해라'는 의견과 '장르문학은 보편적인 문학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혼재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차별이 아닌 순수한 비평으로서 장르문학에 비판이 떨어진다면 그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나? 장르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의견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그것도 장르문학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의견으로 봐야 하나?

 

 

 

 

 

3. 김보영은 장르적인 글을 쓰는 동시에 문단 문학의 기준에도 부합하는(차고 넘치는) 작품을 쓴다. 문단 문학은 장르문학에 문장이나 인물의 내면이 부족하다고 얘기할 수 있고, 장르문학은 문단 문학에 이야기가 부족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김보영은 둘 다 잘하면 된다는 것을 '그냥' 보여준다. 일단 김보영은 장르소설가니까 장르의 승리다. 하지만 골치 아픈 부분은, 배명훈이 '문단 문학의 독법으로는 장르문학을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언급한 문단 문학의 독법에 김보영의 작품은 모두 부합하면서도 여전히 훌륭한 장르문학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4. 총싸움 같은 직접적인 재미를 쫓는 스파이 소설의 애독자들이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낯설어 하는 모습은, 단면적으로만 보자면 장르소설의 팬들이 진지한 문학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은 그림이다. 하지만 장르 내부에서도 그 재미와 멋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진지한 문학(혹은 영화)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바로 그렇게 나온 작품이다. 김보영의 <스크립터>도 그렇게 나온 작품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단일 장르의 고유성에 대한 이해를 뿌리 삼아서 나온 작품이다. 차별이라는 가장 큰 문제를 제쳐두고 봤을 때 장르문학과 문단 문학의 관계는 꽤 복잡하다. 장르가 장르가 되기 위해서 문단이 되기를 거부하고, 문단이 문단이 되기를 위해서 장르가 되기를 거부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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