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먼저 올린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 사이의 간극에 대한 단상 - 문단 문학 vs 배명훈'에서 이어진다. 본의 아니게 길어진 이 글의 내용을 먼저 요약하자면, 먼저 올린 글에 대한 보론 -> 김보영이 문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 그럼에도 김보영이 문단 문학보다 문학적으로 앞서는 이유와 같은 순서로 이어진다. 김보영의 <스크립터>와 김영하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 윤이형의 <피의 화요일>을 비교할 것이고, 최인훈의 <광장>과 이문구의 <해벽>과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갖고 있는 문학적 약점을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가 넘어선 지점에 대해 얘기한다. 언급한 작품들의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사람은 주의하기를 바란다. 

 

 

이전에 올린 글에 대한 반응들을 보았다. 모두 다 답할 순 없지만 몇 가지에 대해 언급을 하고 가고 싶다(이 이후에는, 먼저 쓴 글이나 지금 이 글에 대해 나오는 반응에 아마 답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1. '경이감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으로 SF 장르를 재단하는 것은 부정확한 관점이다. 글쓴이는 SF에 대해,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SF 명저들과 괴리된 이해를 보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예를 잘못 들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듀나가 김상훈에 의해서 '슬립스트림'으로 분류되거나 일부 SF 팬들이 듀나가 클리셰를 활용하기만 한다고 항의하는 것을 두고 듀나의 인기 요인은 장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 조금 더 생각을 검토해서 다른 예를 들었어야 했다. 소재에 대한 비판이 장르 팬덤 안에서 나올 수 있는 비판적 의견이라면 그런 작가의 다른 훌륭한 부분을 긍정해내는 것도 장르 팬덤 안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이런 얘기다. 테드 창의 '<쥬라기 공원>은 SF가 아니다'라는 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견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SF 팬덤 안에 있는 이상 테드 창의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테드 창한테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도 그한테 영향을 줄 것이다. 하나의 장르 팬덤 안에 있는 이상 서로 자장을 주고 받으니까. 장르 안에서 누구는 집중된 범위를 파고 들고, 누구는 외연을 확장하고, 누구는 규칙을 세우고, 누구는 규칙을 부순다. 이 모든 작업들이 얽혀서 장르의 복잡한 지형도를 형성하는데, 박민규처럼 '요즘 시대에 순문학/장르를 왜 구분하냐'는 식의 접근은 장르의 고유성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고유성을 지워내는 태도라는 얘기였다(박민규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물론 중요한 건 듀나가 저기에 예로 들었으면 안 됐을 작가라는 점이다. 더 숙고하고 글을 쓰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 듀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2. '문예지는 국가지원금을 받아 운영된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공익이 전제된 것인데 다양한 신인 작가의 발굴이 중요하지, 문예지의 코드가 중요하나? '순수한 비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장르에 대한 개별적인 비평이 필요하다. 문단 문학 vs 장르문학이라는 구도가 성립되려면 문단 문학이 어떤 동일한 문학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없다. 장르문학이 반드시 문단문학의 특수성에서 부합해야 한다면 반대로 문단문학의 특수성에만 부합하는 작품이 언론/문예지를 통해 문학을 과대 대표하는 일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장르에서 반드시 진지한 문학을 해야만 할 이유는 없으며 많은 걸작들이 그 반례다.'

 

 

문예지 지원 제도에 대해서는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문지나 창비 같은 문예지들은 지원금을 받으면서 나타난 게 아니라 반대로 특정한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기 위해 동인의 형태로 나타났다. 문학적 코드가 선행했고 지원금이 이후에 주어졌다. 문예지 발간 지원 사업 같은 근래에 등장한 제도를 통해서 문예지의 성격 전체를 정의할 수 없으며 사실 문예지 지원금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게 맞다. 문예지가 어떤 유효성을 갖던 시기에는 저런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았으며 그 반대로 독재 정권에 의해서 폐간되었다. 지금은 그냥 사회적으로 유효성도 잃고 신인 작가를 기르는 기능도 없다고 봐도 무방한 낡은 시스템에 돈을 들이붓는 형국이다. 김동인, 염상섭, 김현, 백낙청 같은 이들이 이 시대에 2~30대의 나이로 살았다면 그들은 절대 문예지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 종이 간행물은 가장 파급력 있는 매체 중에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들이 문학을 했다고 해도 문예지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문예지에 다양한 신인 발굴을 요구할 순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배명훈이 '문예지에 실리지 못하거나 비평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로 자신은 문예지에 글도 실었고 비평도 받았지만 그 비평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를 담아내면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세계를 인물 안에 환원시키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런 전략을 고민하는 순간 문단의 눈은 중립이 아니다.”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24 ) 인물을 중시하는 문단 비평이 작가한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립적이지 않다면, 장르문학의 비평, 투고작을 검토하는 편집자, 서평을 남기는 독자들 모두 다 영향을 준다는 면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서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하나의 집단(작가-편집자-비평가- 일반 독자)이 형성되기를 바라야 한다. 그게 진정한 신인 작가 발굴이다. 나라에서 돈 받고 문예지를 운영하는 것이니까 문학적 코드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신인 양성에나 집중해야 하자고?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는 개별적인 코드를 다 부정해낸다고 해봐야 신인 작가들을 발굴할 수 있는 체제가 생기지 않는다.

 

 

먼저 쓴 글에서 나온 순수한 비평이라는 표현은 한정적인 의미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읽지도 않고 무작정 비난하는 서평을 썼다는 한 문단 출판업자(2000년대 들어서는 칙릿과 스릴러 소설을 출간하고 있다고 하는데)처럼 편견에 근거해서 차별하는 행위가 있다면, 권력이나 선입견과 무관하게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비평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서 어디까지 장르의 비평 안에서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인지 자체가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 비평의 자리에 김보영, 듀나, 배명훈 넣을 때마다 다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고, 심지어 같은 작가의 어떤 작품을 넣느냐에 따라서 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캐릭터의 비중이 높고, <초록 연필>은 캐릭터의 비중이 적은 편인 정도지만 <외합절 휴가>는 분명히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행동의 동기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배명훈이 '문단 문학은 인물을 중요시하는 비중이 높다'고 말했을 때, 저게 'SF에서는 인물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배명훈의 작품 자체가 인물의 비중이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작품 안에 인물의 세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것을 장르의 특수성으로 용인하고 다른 부분에 집중할지, 아니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지 자체가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배명훈이 제시한 문단 문학과 SF의 구분점이 SF 비평론에 대한 시작이 될 수 있는 만큼이나 저런 논쟁도 SF 비평론이 쌓아져가는 과정일 것이다. 

 

 

'문단 문학이 동일한 문학적 이상향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문단 vs 장르 구도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저 주장을 나는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는데, 당장 배명훈부터가 네 가지 특징을 들어서 SF와 구분되는 문단 문학의 특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향은 아니라도 구분점을 말하고 있다. 설령 문단 문학 안에 통일된 정체성이 없다고 해도 장르문학에는 외부와 자신을 구분짓는 개별적인 정체성이 있다. 장르문학 전체가 하나의 테두리에 묶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개별 장르의 구분, 이를 테면 판타지와 문단 문학의 구분, 판타지와 SF의 구분, 판타지와 로맨스의 구분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다.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조차도 그 경계가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장르의 규칙을 깨는 작품들이 있다는 것은 앞서 규칙을 만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체 그 정체성이 없다면 왜 장르 비평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장르비평의 필요성을 부정한 적이 없다.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장르문학이 반드시 문단 문학의 특수성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먼저 쓴 글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얘기한 내용 중에 하나가 '언론은 문단문학이 현실적으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좁다는 것을 인정하고 장르문학을 다뤄야 한다'였다. 왜 내가 하지 않은 주장을 가지고 나를 비난하는가?

 

 

내가 <스크립터>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장르 내부에서 탄생한 진지한 걸작으로 언급한 것은 모든 장르문학(영화)이 저런 작품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저런 작품들은 바로 장르의 역사와 관습과 미학을 토대로 탄생했기 때문에 저런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장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이런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이 단순히 '순문학과 장르를 뭐하러 구분해! 우리는 다 같은 문학인 걸!'하는 접근보다 장르에 대해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쓴 글의 시작을 '스파이 소설 독자'와 <빛의 제국>이라는 이분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이분법을 뛰어넘은 장르의 걸작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었다.  

 

 

 

3. '사람들 사이에서 '어째서 문단은 장르문학을 평가하지 않냐'와 '문단은 잘못된 방법으로 장르문학을 평가한다'고 의견이 분화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다. 문학장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장르문학은 보편적이다' 혹은 '장르문학은 특수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세부적인 맥락에 담겨 있는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 '보편적인 문학'을 말할 때도 장르 작가들 사이에서 의미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웹소설의 소비층에서 기존의 문학적인 관점을 어떻게 거부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그렇기 때문에 <달빛 조각사>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언급된 부분은 겉돌고 있다). 글쓴이가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 '문단 문학'을 지칭하는지 '비 장르소설'을 지칭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지금 장르문학에서 독자적인 방법론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기성 제도에 편입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제도 바깥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먼저 올린 글을 쓰면서 웹소설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웹소설과는 별개로 한 글이었다. 모든 작가가 웹소설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대중과 소통하면서 큰 수익을 올린다면 좋겠지만, 체질상 그런 환경이 맞지 않는 작가들이 항상 있을 것이다. 딱 그 영역을 생각하고 쓴 글이었다. 

 

 

순문학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나는 순문학이라는 표현이 단 하나의 의미로 통일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때 그때 맥락에 맞춰서 대화하는 사람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장르문학에서 장르문학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글들을 가리킬 때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문단 문학에서 좁은 의미에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양쪽 다 개별적인 맥락 안에서 유효하다. 다만 장르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용례를 통해 우리는 장르문학이 매우 특정한 테두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그 테두리 안팎에 대해 논하는 것이 '요즘 시대에 순문학과 장르를 뭐하러 구별하냐?'면서 그 테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장르문학의 실체에 구체적으로 다가서는 일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처음부터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정확히 말하면 그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 파란미디어를 염두에 둔 채 이전의 글을 썼다. 파란 미디어는 로맨스 소설 시장이 인터넷 소설로 포화된 상태에서 출범했다고 한다. 책을 금방 출간해서 대여점 서가에 꽂는 당시의 흐름에 반해서 꼼꼼히 교정을 보며 소장용 책을 냈다고 한다. 실제로 파란미디어의 책을 보자면 대여점에 공급되는 장르문학의 관습적인 형식(서너 문장이 넘어가지 않는 문단)을 반드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한테 문단을 더 길게 쓸 자유를 보장해준다. 좌백의 <대도오>는 위에서 정해주는 스토리대로 글을 써야 하는 기존 무협 소설의 관행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뫼 출판사에서 실장을 맡게 된 용대운 작가가 조금 더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식을 지향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라고 하는데, 그런 <대도오>조차도 처음 출간 당시에는 한두 문장으로만 문단이 구성되어 있었다. 2005년 양장본이 나오면서 달라진 점 중에 하나가 문장이 조금 더 밀집되어서 하나의 문단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물론 저런 환경에서도 충분히 예술적인 미학이 성립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글도 한 문단이 길게 이어지지 않지만 그는 장르와 미국의 주류 문학계 양쪽에서 다 존경을 받는다. 다만 아쉬운 건 대여점식 문체보다 서점식 문체가 더 잘 맞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한 환경이 협소하다는 점이다. 한상운이 그런 경우다. 좌백이 대여점용 책을 쓰는 환경과 서점용 책을 쓰는 환경 양쪽 모두에서 자연스럽다면 한상운은 대여점용 소설을 쓸 때보다 서점용 소설을 쓸 때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시공사에서 양장본으로 과거의 무협 소설을 재간한 것, <노블레스 클럽>, <이타카>, <새파란 상상> 같은 브랜드가 출현한 것 모두 다 그런 서점용 장르문학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겠지만 아직은 그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한상운의 대표작 <무림사계>는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챕터는 저 단편 소설의 뼈대를 유지한 채 내용을 키워서 만들어낸 것이다. <무림사계>의 도입부는 <그해 여름>의 도입부가 그대로 옮겨져 있다.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하나의 문단을 이루고 있던 문장들이 다 잘기잘기 찢긴 채 여러 문단으로 나뉘었다. 출판사에서 저런 일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문단이 길면 독자들이 안 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례가 있다. <드래곤 라자>나 <세월의 돌> 같은 글들이 인터넷에서 연재되었을 때는 저런 무협소설의 관행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긴 문장을 자유롭게 썼는데 그들을 따라온 독자들이 있는 것이다. 돈을 내고 어떤 책을 산다는 건 그 책을 읽어야 할 의무를 자신한테 부과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드래곤 라자>의 독자들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는데도 끝까지 따라왔다. '긴 문단을 쓰면 독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무협 소설 업계의 고정 관념을 인터넷에서 깨부순 것이었다. 웹소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발언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민희가 <룬의 아이들 윈터러>를 웹소설로 다시 연재하면서 문장을 잘게 나눠놓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쉬움이 들었다. 전민희는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대에 '긴 문단을 써도 충분히 독자들이 따라올 수 있는 것'을 증명해낸 세대였다. 그게 인터넷의 힘이었고 전민희 자신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제 그런 작가가 인터넷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해진 틀을 따르는구나, 한때 그 사람이 정해진 틀을 깨부쉈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아쉬움이 든다.

 

 

파란미디어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교정을 꼼꼼히 보고 작가의 자유를 더 보장하는, 이를테면 서점용 소설을 지향하는 저 출판사가 반드시 관습적인 문학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이 관습적인 문학의 가치라는 게 반드시 문단의 기준하고 일치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 이 문제를 길게 다루지 않겠다). 우선시할 필요도 없다. 장르 작가들은 문단 작가들보다 물리적인 이야기를 훨씬 능숙하게 다루며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 정은궐 작가는 자신이 쓰는 것이 문학이 아니라 로맨스 소설이라고 말한다. 정은궐 작가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유명세가 자신의 일상적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쓴 원작 작품의 드라마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대외적인 인터뷰를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은 저런 상황에서 흔쾌히 응했을 수도 있고,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과 무관한 방향성을 지닌다고 해도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그 작가와 작품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언론이나 TV 매체 등에서 긍정적으로 다뤄지는 세상이 온다면 더 많은 잠재성을 지닌 인재들이 장르문학계에 머물테고, 책이 지금만큼 안 팔리지 않는 세상이 왔을 수도 있다. 출판계의 불황을 논하면서 '문단 문학이 지루해서 책이 안 팔린다'는 것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문단 문학이 한국 문학의 전부라는 것이다. 문단 문학이 한국 문학의 전부라는 것은 그 자체로 실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들한테는 문학의 전부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물리적인 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장르문학이 하나의 문화로서 존중받는 상황에서 발전한다면 나중에 관습적인 문학과 교집합을 가지는 작품(<스크립터>, <용서받지 못한 자>)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2008년전 쯤부터 여러 기관에서 어마어마한 상금을 걸고 공모전을 유치해 신인 작가를 발굴하려는 바람이 불었다. 저런 것이 단발적인 성과에 그친 것은 결국에 장르적인 소비층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유정은 뽑았지만, 정유정과 닮은 작가를 읽고 싶은 독자들한테 따라가야 할 연결고리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심사위원 제도로 이뤄지는 공모전 제도는 정말로 대중과 호흡하는 작품을 발굴하기 힘들다. 한상운 같은 작가는 이제 와서 눈치 보면서 공모전용 소설을 쓰느니 그냥 방송계로 가버렸다. 업계에서 이미 프로로 존중을 받는 작가들 입장에선 낙선하면 일 년 이상의 기간을 골로 날린 게 돼 버리는 공모전 제도를 응할 이유가 없다(공모전 제도에 임하는 것은 일반 독자의 서평, 편집자의 피드백, 비평가들의 비평하고는 다른 부담감을 준다). 저런 심사위원 제도의 공모전 방식으로는 정말로 대중과 호흡하는 작품을 발굴하기도 힘들고 기껏해야 한 작가의 발굴에 그칠 뿐이니 그 영역은 기존에 이미 확립된 대중 소설, 혹은 장르소설에 맡기는 게 맞다. 

 

 

비슷하게 노블레스 클럽이나 이타카 같은 서점용 장르문학 브랜드들이 결국에 시장의 안착에는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그들이 장르문학의 시장 자체를 떠나버린 것이 문제가 아녔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만화/판타지 소설 커뮤니티에서 '독자가 한 작품을 백 번 빌려봐도 작가한테는 1원의 수익도 돌아오지 않는' 대여점 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성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블레스 클럽과 이타카 등은 대여점 체제에서 빠져나오려고 했고, 같은 시기에 출범한 시드노벨 역시 철저히 대중적인 작품을 지향했지만 '대여점에 시드노벨 들어와 있는 거 보면 알려달라'고 독자들한테 얘기할 만큼 대여점에 작품을 들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하지만 그 결과 장르문학의 시장 자체와 너무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한상운의 <무림사계>에 대한 한 블로그 서평을 본 적이 있다. 그 독자는 평소에 대여점에서 '힘이 센 주인공이 승승가도를 달리는' 작품만 빌려보다가 <무림사계>를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무협 소설에서 이렇게 인간의 얘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무림사계>가 대여점에 들어왔기 때문에(장르독자층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노블레스 클럽이나 이타카는 서점용 장르소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렇게 대여점 독자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 게 패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파란미디어도 로맨스 소설 시장에서는 장르 독자들과 소통에 성공해 그들로 하여금 책을 직접 구매해서 소장하게 했지만 새파란상상 브랜드에서는 아직까지는 그 브랜드로 데뷔해서 인기를 끈 작가는 없는 듯 보인다. 새파란 상상에서 주목을 받는 작품들은 아직까지는 좌백이나 윤현승처럼 대여점 체제에서 이미 인기를 끈 작가들 위주인 것 같다.

 

 

대여점 체제와 완전히 결별해서 일정 부분 주목을 받은 브랜드로 시드노벨을 들 수 있다. 시드노벨은 대여점 바깥으로 나가되 '라이트노벨'이라는 명확한 장르를 표방했기 때문에 자기 장르 형성에 성공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에 일본 라이트 노벨의 고전들이 국내에 소개되었을 때 저 작품들은 판타지 독자층에서 대여점 작품에 대한 대체제로 느껴졌다. 시드노벨이 출범하기 전에 라이트 노벨의 독자층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라이트노벨이 하나의 장르로 분류될 수 있냐는 그런 논쟁하고 별개로. 그리고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쿨한 취미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좀 이상할지 모르겠는데 저 당시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2006~2009년도에 미국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일종의 유행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건 단순히 재밌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한테 쿨하고 힙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는 걸(자신한테 희귀하고 재밌는 것을 인터넷에서 구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게 원피스든 이누야샤든 강철의 연금술사든 마찬가지였고, 더 나아가서 '내가 카우보이 비밥을 밤새워서 봤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단순히 그 작품을 재밌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난 저렇게 매니악하고 고급한 취향을 갖고 있으며, 그 작품을 보기 위해 밤을 샐 만큼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지!'라는 노골적인 과시적인 의미가 포함될 수 있던 것이다. 때문에 시드 노벨이 출범했을 때 독자층 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2007년에는 이미 오타쿠 문화가 쿨하게 여겨진다기 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 사람들은 00년대 초중반에 모든 사람들이 '덕후체'로 대화를 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ㅅ=', '(퍽!)' 같은 표현을 쓰는 게 덕후 같다고 지탄받는 시절이 아니라 쿨한 유행이었던 시절. 많은 사람들한테 라이트노벨을 쓰는 것은 장차 미드로 만들어질 수 있는 작품의 원작을 쓰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한때 애니메이션은 미드만큼 쿨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 과정에서 좀 과하게 라이트노벨에 사람들이 몰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디앤씨 미디어에서는 시드노벨과 이타카 두 개의 브랜드를 각각 '10대를 위한 장르소설'과 '20대 그 이상을 위한 장르소설'라는 목표로 운영했는데 본인들도 이렇게 모든 관심이 시드노벨 위주로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 같진 않다. 예를 들어서 손지상이라는 작가가 라이트노벨 공모전에 떨어진 후기 글을 쓴 것을 본 적 있는데 대체 왜 이타카나 노블레스 클럽에 안 가고 라이트노벨을 썼는지 잘 납득이 안 되었다. 그만큼 라이트노벨은 그 시대에 핫했다. 자신과 별로 상관 없는 독자층이나 작가층까지 다 흡수할 만큼. 

 

 

요 근래 문단의 추세 중에 하나는 공모전에 대중 소설을 뽑아놓고 거기에 관습적인 문학관에 부합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금박을 씌우는 것이다. 문단이 대중성을 포용하려는 시도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할까? 난 반대로 부정적이게 생각한다. 이런 공모전을 통해서 나온 작품들 대부분은 애매한 대중 소설이다. 대학 교수들로 이뤄진 심사위원들의 눈을 의식하느라고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향상 문단 문학에 부합하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서 정유정은 세계문학상에 응모를 하면서 '심사위원들을 생각해서 장르 색깔을 최대한 줄였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문단 문학의 코드에 부합하지도 않고 마음껏 재미를 추구한 소설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작품이 돼버렸다. 작가가 본인의 색깔을 숨기지 않고 쓴 <7년의 밤>이 그냥 문학적으로도 더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런 애매한 문단 문학이 오히려 문단 문학의 독자를 감소시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천명관의 <고래>를 예로 들자면, 이 소설은 장르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한 순문학 작품이다. 꼭 웹소설이 아니라 길리언 플린이나 마이클 코넬리 같은 작가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지루하다. 문단에서 금박을 씌우는 공모전 대중 소설에서 '재미'란 것은 '가독성'에 다름 아니며 흥미진진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욕망 자체를 추구하진 않기 때문에. 반대로 관습적인 문학관을 지닌 독자들이 보기에 <고래>는 <백 년의 고독>에서 사회적인 맥락을 다 빼먹은 카피캣에 불과하다. 대중소설 독자들이 보기엔 너무 따분하고, 진지한 문학의 독자들이 보기엔 '진지한 게 아닌 것을 문단에서 억지로 포장하는' 형국이다. 난 그렇게 해서 문단이 단발적으로는 적당히 팔리는 작품을 발굴했어도 장기적으로는 양쪽 독자들을 모두 잃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문단은 원래 자기들이 해오던 것을 해야 한다. 문단이 한때나마 일정한 문화적 유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서 돈 받고 작가 키워주는 매체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그 특정한 문학관 때문인데, 그 본연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 제도의 공모전 방식으로는 정말로 대중과 호흡하는 작품을 발굴하기도 힘들고 기껏해야 한 작가의 발굴에 그칠 뿐이니 그 영역은 기존에 이미 확립된 대중 소설, 혹은 장르소설에 맡기는 게 맞다. 지금은 문단 문학이 한국 문학의 전체로 여겨지니까 책 자체가 아예 안 팔리는 상황이다.

 

 

 

 

4. ''문단은 왜 장르문학을 비평하지 않는가?'와 '문단은 왜 자기들 잣대로 장르문학을 비평하냐'는 두 가지 의견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문단은 장르문학에 맞는 잣대로 비평하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모든 작품이 문단과 장르 양쪽의 인정을 받아야만 할 이유도 없다. 작가의 개별적인 특징을 우열 관계로 놓는 것은 다양성을 해치는 일이다.'

 

 

나는 먼저 쓴 글에서 장르 비평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의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비평 역시 개인의 개별적인 문학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일이 '홍상수한테 박찬욱처럼 영화를 찍으라고 할 수 없고, 그 반대도 요구할 수 없듯이 비평가들도 자기 식대로 비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듯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모든 문학적 비평을 책임질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비평이 필요하다. 나도 문단에서 SF 비평글을 게제할 거면 SF쪽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배명훈의 말처럼 SF 비평으로 신춘문예 등단을 하는 사람들도 앞으로 분명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문예지에 작품이 실리고 나면 문단식 비평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장르문학가들이 장르문학을 쓰는 것이 자기 본성에 맞는 일이라면 문단 비평가들은 문단식 비평을 하는 게 자기 본성에 맞기 때문이다. 배명훈은 “세계를 담아내면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세계를 인물 안에 환원시키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런 전략을 고민하는 순간 문단의 눈은 중립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물을 중시하는 문단 비평이 작가한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립적이지 않다면, 장르문학의 비평, 투고작을 검토하는 편집자, 서평을 남기는 독자들 모두 다 영향을 준다는 면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사실 작가한테 잘 맞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고민하게 하는 환경에 있다면 그 환경 자체가 자신한테 맞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먼저 쓴 글에서 '김보영은 문단의 기준으로도 훌륭한 작가다'라는 표현을 썼다. 저 문장은 다양한 의미가 될 수 있다. '1.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으로 김보영은 훌륭하다.' '2. 관습적인 문학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단에서 실제로 김보영을 받아들일 것이다.' '3. 김보영이 문단에서 받아들여지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조직인 문단의 시스템을 긍정할 수 있다.' 1번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한 표현을 썼다고 생각한다.

 

 

SF 내부 비평 안에서 김보영이 갖는 의미는 이렇다. 김보영은 배명훈이 말한 '문단 문학의 특징'에 상당 부분 부합한다. 캐릭터를 중요시하고, 개인의 내면이라는 우주가 폭발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면에서. 실제로 문단 문학에서 김보영을 받아들였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배명훈은 “세계를 담아내면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세계를 인물 안에 환원시키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이런 전략을 고민하는 순간 문단의 눈은 중립이 아니"며 따라서 SF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보영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SF 비평'의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김보영은 캐릭터와 내면 역시 세밀하게 다룬다. SF에도 저것은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가?' 이런 반문을 통해서. 배명훈이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이 대비되는 분명한 기준점을 제시했다면, 김보영을 통해서 우리는 논의를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다.  SF 비평론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이런 논의를 통해서 비평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작가들이 김보영과 같은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SF 비평론을 세우는 과정에서 김보영이 어떤 척도를 제시할 순 있다는 얘기다.

 

 

김보영은 SF 뿐만 아니라 문단 문학에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사실 문단 문학 쪽에 더 진지한 문제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문단 작가들은 이야기를 못 쓴다. 배명훈이 “문단의 서사는 완결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했을 때, 이건 문단 문학의 맹점 한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저 맹점의 심각한 점은 저게 문단 문학이 하나의 '장르화'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단 문학에서 모호한 결말을 내는 이유는 대개 이렇다. 관습적인 문학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문학의 '진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반대로 사건에 분명한 해결이 주어지는 장르문학의 기법을 '통속적'이라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배제한다). 좀 막연한 얘기지만 '인간의 실존' 같은 것들은 절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서구에서 이미 완성된 이런 관습적인 문학론을 들여온 문단 작가들은 그 문학관을 물려 받아서 글을 쓰고 비평을 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결말을 내는 기법이 일종의 장르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결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소설을 씀(이것을 진지한 문학이라고 여기고 장려함) -> 그 관습을 이어 받아서 소설 안에서 이야기를 해결하지 않음 -> 이야기를 똑바로 결말 짓는 경험을 쌓아본 적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쓰는 능력 자체가 아예 없어짐. 대충 이런 과정으로 문단 문학의 장르화가 일어났다. 

 

 

이런 문단 문학의 '장르화'가 문제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단 문학은 하나의 장르문학으로 보자면 더럽게 재미가 없다. 독자층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둘째, 문단 문학이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위치를 보장받는 것은 저게 그런 괴상한 장르문학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기여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문자 공동체의 탄생에 기여를 한 부분. 그게 지식인의 역할이었든, 예술가의 역할이었든. 때문에 '이야기를 못 쓰는' 문단 문학의 특징은 '장르적 특징'으로 간주하고 내버려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분쇄해야 할 요소인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사회에서 문학인이라고 오냐 오냐 해주는 인간들이 이야기도 똑바로 못 쓰고 앉았는 형국인 것이다.

 

 

문단 관계자들이 김보영의 글을 읽고 그닥 호의적으로만 반응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보았다. 김보영이 일 년 전에 <SF 작가로 사는 것>이라는 글을 게제한 것을 보고 막연히 짐작했던 일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관습적인 문학'에 부합하는 것은 문단 작가들이 아니라 김보영이라는 데 지금도 생각의 변함이 없다. 훌륭한 장르문학이 반드시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때가 있다. 김보영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김보영은 관습적인 문학의 틀로 보더라도 경이로운 성취를 보여준다.

 

 

'훌륭한 장르문학'이 반드시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때가 있다. 영화 <인셉션>을 예로 들자면, <인셉션>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난관을 매끄럽게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케이퍼 장르의 영화다. 하지만 <인셉션>은 누군가의 무의식에 생각을 심어놓는 행위 안에 내포된 윤리적인 문제 따위는 일절 다루지 않고, 인위적으로 꿈을 조작해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 그 자체를 파고든다기 보다는 그저 이야기의 무대로 삼을 뿐이다. <인셉션>의 코브가 림보에서 만난 자신의 아내를 '가짜'라고 선언하는 과정은 더디지만 사실 정해진 답에 다가가는 것에 불과하다. 감독이 그 문제에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차단한 채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셉션>이 케이퍼 장르 영화로서 갖고 있는 매끄러운 스타일이나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은 바로 세상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야기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그 한정된 범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인셉션>이 정해진 답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작품이 케이퍼 장르물로서 훌륭한 기준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르적인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원하는 소비층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장르적 토대가 발달해서 다양한 변용이 가능하며 더 풍부한 이야기의 재료를 얻게 된다.

 

 

김보영의 <저 이승의 선지자>는 가상 현실을 다뤘다는 점에서 <인셉션>과 같다. 하지만 <저 이승의 선지자>는 그 가상의 세계를, 그곳에서 삶을 가지는 행위의 의미 자체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셉션>이 코브가 림보에서 만난 자신의 아내를 '가짜'라고 선언하는 정해진 답에 도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면, <저 이승의 선지자>는 반대로 나반이 '하계는 가짜에 불과하다'라는 신념을 가진 상태로 시작해서 그 답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때 <저 이승의 선지자>에 <인셉션>처럼 '주어진 임무를 매끄럽게 성공해내는 아름다움'이 없는 것은 나반이 자기 자신한테 부과한 임무를 실패할 때마다 새로운 가르침을 얻고,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기 때문이다(물론 <저 이승의 선지자>는 애초에 케이퍼 장르에 속하지 않긴 하다). <인셉션>이 케이퍼 장르의 이야기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을 그 틀에 맞췄다면 <저 이승의 선지자>는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깨부순다. 그리고 이것이 관습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의 가치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문단 문학에서 <인셉션> 같이 잘 빠진 장르문학을 발굴해내서 대중적인 소비층을 확보해내지 못한 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문단 바깥에 그런 일을 훨씬 잘해내는 소설가들이 산재해 있다. 그들한테 올바른 대우가 가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세상에 대해 진지한 층위에서 얘기를 하는 문학을 했어야 했는데, 그 분야에서 동시대에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은 김보영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김보영이 장르문학의 방법으로 세상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단 문학이 원래 추구했어야 했던 문학적 가치를 장르문학을 쓰는 김보영이 구현하고 있고 문단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난 제목에 '괴리'라는 단어를 썼다. 현재 한국 문단과 김보영의 관계는 문학적으로 훌륭한 작업을 하는 사람을 냅두고 엉뚱한 사람들이 진지한 문학의 탈을 쓰고 있는 괴리된 상황으로 본다.

 

 

김보영의 글을 문단에서 비판적으로 반응한 사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7인의 집행관>과 <아니무스의 저녁>. 전자는 한 문예지에서 비평의 대상이 되었고 후자는 문예지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두 작품의 공통점은 김보영이 평소에 쓰던 글하고는 다소 달랐다는 것이다. 장르 팬덤에서도 <7인의 집행관>에 대해 '김보영의 소설로 기대한 것과 다르다'는 반응이 나온 것을 기억한다. 보통 김보영의 작품에선 폭행이나 살인 같은 폭력적인 요소가 나오면, 그 폭력이 나오게 된 사회적인 맥락이나 개인한테 미치는 현상 같은 것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편이다. 하지만 <7인의 집행관>은 폭력적인 행동을 주인공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한다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물론 작품이 전개되면서 밝혀지는 진상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아니무스의 저녁>은 반대로 폭력을 직시하고 고발하는 작품이지만 평소에 쓰던 작품보다 직설적인 스타일로 쓰였다. 김보영은 <얼마나 닮았는가>의 후기에서 '일반 문학에서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70~100매의 분량으로는 SF의 설정을 풀기도 모자랄 때가 많다'고 말한 바 있다. 문예지에 실렸던 <아니무스의 저녁>은 사실 평소에 김보영이 쓰던 스타일의 글들하고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2. 김보영이 평소에 발표한 작품들. <종의 기원>, <스크립터> 같은 작품들이 출판사 편집자나 문예지 편집위원한테 읽혔지만 출간되거나 게제되지는 못한 경우. 대충 짐작가는 이유가 몇 개 있다.

 

 

'문단에서 김보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라고 했을 때 직관적으로 떠오른 것은 김보영이 지나치게(?) 당당히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문단 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래의 동인 문학상 심사 평을 봐보자.

 

 

 

또 다른 심사위원은 최은영 소설 중 '강 위를 새가 위태롭게 날아갔다'는 문장을 꼽으면서 "뜬금없이 '위태롭게'란 말을 집어넣음으로써 분위기를 잡아 독자의 감성을 자극할 줄 아는 통속적 재주가 많다"고 풀이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4/2018081400086.html

 

 

저 발언은 최은영에 대한 칭찬이지만 "통속적 재주"라는 표현이 쓰였다는 것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통속이라고 하면 예술적으로 참신하지 못하거나 작품 안에서 사화 체제와 관습을 깊게 고민하지 않는 것 등을 떠올릴 법한데 그게 아니다. "위태롭게"라는 표현을 쓰면서 분위기를 잡은 거 자체가 '통속'이라는 것이다. 저렇게 문장을 꾸미고 멋을 추구하는 것을 '통속'이라고 여기고 단속하려고 하는 기괴한 선비 정신이 한국 문학에는 있다. 이는 이를테면 영미문학의 '순수문학' 엘리트주의자로 여겨지는 해럴드 블룸과 비교되는 일이다. 해럴드 블룸은 해리 포터와 스티븐 킹을 비난하고 코맥 매카시를 극찬하는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냥 간단히 생각하면 '통속'을 배척하는 문학적 순혈주의자. 그런 해럴드 블룸은 헤밍웨이의 단편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다룬 글에서 “Would you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stop talking?” 라는 대사에서 'please'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도 과장스러운 느낌을 주지 않는 적절한 선을 유지했다면서 헤밍웨이의 재능을 칭찬한다. 문단 문학이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을 강조하면서 문학적 기법 자체는 통속이라고 여길 때 해럴드 블룸은 문학적 기법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왜 둘 다 하면 안 되냐고.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조세희는 셰익스피어를 문학 장르의 배워야 할 기법을 만든 선배라기 보다는 타개해야 할 엘리트 문화의 상징처럼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어째서 셰익스피어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만의 것이 되어야 하냐고. 셰익스피어의 미덕을 갖췄으면서도 민중의 편에 서는 문학은 불가능했을까? 만약에 <햄릿>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만 이웃에 무관심한 이들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가치가 깎인다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감동받지만 현실에서는 행동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가? 

 

 

한국 문단 문학은 근본적으로 엘리트 문학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 뿌리는 서구에서 이식된 문학에 있으면서도 '서구의 문학'을 받아들인다기 보다는 그걸 특정한 선에서 거부해버리는 흐름이 있다. 이를 테면 '예술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엘리트'가 아닌 '민중과 함께 하는 엘리트'가 되기를 선택한 자기 자신을 향한 나르시시즘. 저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특정한 대상을 깔보면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자의식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전자를 허영심에 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프레임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백 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가 반례다. 마르케스는 자신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토마스 만 같은 서구 작가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들의 작품을 연구했다는 것을 감춤 없이 밝힌다. 그런데 마르케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담을 취합해서 새로운 방식의 서사를 선보인다든지, 식민지 역사를 담은 작품을 세계에 선보여서 찬사를 듣는다든지, 한국 작가들이 하고 싶은 걸 먼저 다 해버렸다. 그리고 마르케스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인 힘의 상당 부분이 서구의 스승들한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애초에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 양자택일의 프레임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역시 박정희다. 가난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경제 발전을 시켜주는 독재자를 받아들일 것인가? 저런 양자택일의 프레임을 통해 제한된 사고가 사회에 퍼졌을 때, 그 프레임을 깨부수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게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 한국 문학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양자택일의 프레임을 만들어 그 안에 자기 자신을 감금시켰다.

 

 

한국 문학에 예술성이 없다는 게 아니다. 문단 문학은 그들이 발을 딛고 사는 사회를 돌아볼 때 가장 빛났다. 사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하려는 태도를 취했을 때 가장 생명력 넘쳤다. 70년대에 '민중의 언어가 담긴 작품이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는 목소리가 드높았을 때는 '그것은 언어의 상상력과 자유를 제한시키는 것이다'라는 저항 세력도 힘을 갖고 있었다. '순수한 우리말'을 추구하는 문단 문학의 관습은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진 문장의 미학은 장르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무협 소설가 좌백은 <임꺽정>을 쓴 홍명희 스타일의 문체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다만 문단 문학의 '순수한 우리말 찾기'의 기준으로 보자면 홍명희, 김유정, 이문구, 황석영 등 그쪽에서 좋아하는 작가들이 실제로 쓴 작품까지 죄다 '일본어 잔재 표현'으로 여겨질 만큼 그 기준이 꽉 막혔고 비현실적이라는 게 문제이다(어쨌든 그들은 주류에서 멀어진지 오래긴 하다).

 

 

어쨌든 '유려한 미문을 탐낼 시간에 민중의 삶을 돌아봐라'면서 소설가한테 예술가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우리말에 맞는 올바른 문장'을 쓰는 도덕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관념이 한때 지배적이었던 환경에서 김보영처럼 노골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반려될 수가 있다. 특히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작가가 저런 태도를 보인다면. 배명훈의 간결하고 기능적인 문장이 문단에서 '소탈함'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김보영의 유려한 문체는 '치기'나 '겸양의 부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김보영은 지나치게 '튄다.'

 

 

김보영이 지나치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는 사실 문단 문학에는 문학적 평가의 일관된 예술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코드가 있는 것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문단 관계자들이 김보영한테 부정적이게 평가를 내렸다고 해도 그것을 진지하게 여길 필요까진 없다고 느낀다. 현재 문단에서 소설가를 받아들이는 기준으로 통용되는 것은 예술적 기준이 아니라 제도의 절차를 밟았냐이다.

 

 

이문열과 박민규의 공통점. 두 사람 다 신춘문예에 무수하게 낙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등단을 한 다음에 기존에 신춘문예에서 예심도 뚫지 못한 작품들을 문예지에 발표하자 문학상을 안겨주면서 찬사가 쏟아졌다. 등단을 하고 신분(?)이 바뀌니까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문열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80년대에도 많은 비판이 떨어져서 본인이 '평단에서 나한테 가장 호의적일 때도 찬반 의견이 1:1 이었다'고 말한다. 근데 박민규에 대해서는 그런 비판적인 의견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슷한 경우로 최은영이 있다. 최은영은 자신의 데뷔작인 <쇼코의 미소>에 별 다른 애정이 없었다고 한다. <쇼코의 미소>가 다른 곳에서 너무나 많이 낙선되었기 때문에 작품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문단에 소개된 저 작품은 수많은 문인들의 찬사와 추천을 통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 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렇다. 박민규와 최은영이 등단하고 나자 그들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일시에 소거된 것이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환영을 받으며 데뷔한 게 아니라 반대로 번번히 떨어졌는데도.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신춘문예에 응모했을 때와 문예지에 발표했을 때 반응의 차이가 나는 것은 모든 문학인들이 신춘문예 심사위원들과 통일돤 견해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다양성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다양성을 반증하려면 문단 내부에서 각자 다른 의견이 나와야 한다. 이문열은 실제로 그랬다. 이문열은 등단한 다음에도 문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비판과 옹호가 갈렸다. 하지만 이 작가들에 대한 비판은 없거나 몹시 희미한 수준이다. 사실 문단에서 비판 자체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와버렸다. 70년대에 최인호는 문단과 선을 그었고, 90년대에 창비로 등단한 공지영은 평단에서 종종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만약 오늘날에 이 둘이 등단했다면 그들은 특별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단에 그런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인호나 공지영이 주류 문단에서 거리를 두게 된 것을 어떻게 볼지는 관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적어도 비평가와 독자들한테 '진지한 문학'과 '통속 문학'을 구분하는 권한이 있던 시대가 있었다는 증거로 보인다. 지금 문단에서는 더 이상 비평가들한테 그런 권한이 없다.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는지가 유일한 판단 기준이다. 

 

 

때문에 문단 관계자들이 김보영을 호의적이게만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난 그닥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등단하지 않은 이문열, 박민규, 최은영의 글을 보여줬어도 그들은 비슷하게 반응했을 거다. 반대로 김보영이 신춘문예 등에 들 수 있는 어중간한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한 다음에 똑같은 작품을 써내려갔다면 그들은 찬사를 바쳤을 것이다. 김보영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존중받으려면 그 의견을 낸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일관성을 보여야 하는데 현재 문단에서는 어떤 비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서로에 대한 험담도 하지 않고 쓴소리도 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 마을은 유토피아이거나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문단 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현재 문단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

 

 

문단 문학을 대표하는 출판사 중에 하나로 문학과 지성사가 있다. 이들이 내는 한국 문학 총서 <문학과지성사 소설 명작선>의 명단을 확인하면 한 가지 일관된 특징을 알 수 있다. <광장>. <당신들의 천국>.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현재는 다른 출판사)>.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언어의 힘을 중요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실존이 위협당할 때 문학은 인간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는 그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인간이 언어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의미에서 지난 십 년 넘는 기간 동안 문학과 지성에서 발굴한 신인들 대부분은 원래 문학과지성의 정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이다. 문학과 지성에서 운영하는 문예지 '문학과 사회'에서는 매해 3월 마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공모전을 연다. 이 문학과 사회 신인상은 다양한 언어나 형식을 실험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굴해냈다고 하며 사람들이 '문사 신인상 스타일'이라고 하면 어떤 일관된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언어와 형식의 실험은 초창기 문지 정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의 실험은 세상에 대해 말하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유예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2013년도에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받고 데뷔한 정지돈의 대표작인 <건축이냐 혁명이냐>(2016년도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작)는 건축가 이구에 대한 전기를 쓰려고 하는 서술자의 시점에서 40년대의 세인트 루이스, 60년대의 서울, 70년대의 뉴욕을 오가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결국에 여기서 비어 있는 건 서술자 자기 자신이다. 서술자한테는 전기를 쓰기 전과 후의 변화랄 게 없다. 사실상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서로 옷깃만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얘기를 계속 늘어놓으면서도 서술자는 끝까지 자신이 서 있는 시대는 어떤 것인지 말하기를 회피한다. 2014년도에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수상한 양선형의 <스나크 사냥>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주인공과 사회의 관계다. 쓰레기 처리 시설에 모여드는 날짐승과 들짐승을 사냥해서, 햄버거에 넣는 패티를 만드는 공장에 짐승들의 시체를 공급하는 게 생업인 주인공이 어째서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된 건지 작품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을 그런 환경에 몰아넣은 사회는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광장>에서 그 유명한 밀실과 광장에 대한 연설이나 <당신들의 천국>에서 등장 인물들 간의 대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많은 대목들이 사회과 개인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상반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대에 문학과 지성이 원래 지향했던 문학을 하는 것은 김보영의 <스크립터>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김보영은 <돈 키호테>의 계승자다. 본문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인 '관습적인 문학'은 사실 문학의 역사 전체를 보자면 최근에 생겨난 장르에 속한다. <돈 키호테>가 기사도 문학을 패러디해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고 하는 것이 보통 그 시초로 꼽힌다. 기사도 문학에서 주인공들은 비현실적인 비범함을 보장받아서 영웅으로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돈 키호테가 속한 이야기의 세상은 그런 비범함을 돈 키호테한테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돈 키호테는 끝없이 현실에 부딪친다. 기사도 문학에서 주인공들이 업적을 성취하게 하는 행동들을 돈 키호테가 현실에서 정확히 똑같이 재현하면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 고초를 안겨다 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사도 문학하고는 다른 방식의 문학이 탄생했다. 영웅 서사가 아니라 문제적 개인이 현실에 부딪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문학이 태어난 것이다. 김보영의 <스크립터>는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선에 선 작품으로 그런 돈 키호테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스크립터>가 시작하는 대목에서 게임 속 판타지 세상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주인공은 판타지 장르 안의 영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낡은 게임 세상에 집착을 하는 기인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는 판타지 세상에 대한 냉소가 곧잘 어른거린다. 판타지 세계는 현실에선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며, 기껏해야 게임에서 가능할 뿐이지만 그 게임에 오랜 시간을 매진한 사람은 현실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일 수 있다는 인식이 모든 인물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리고 그 게임의 세상은 자본의 질서에 따라서 쉽게 폐기될 수 있다. 누구도 그 사실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때 결국에 무너지는 한 세상에 대항하는 주인공들의 수단은 언어다. 그들은 그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할 권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세상의 규칙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게임의 세상에서 평생을 보낸 주인공은 한 아이디에 허락된 가장 높은 능력치를 모두 획득했지만 게임의 운영자가 몬스터의 숫자를 증폭시키는 간단한 일을 저지르는 것만으로도 그 능력은 무력해진다. 하지만 사냥꾼은, 여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이곳을 진짜 세상으로 선언하는 언어의 권리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스크립터>는 판타지 장르의 영웅 신화가 무너지는 그 지점에서 시작해서, 판타지 장르의 언어를 통해서 그 세계를 복원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사냥꾼은 게임 세상에 매달리는 이상한 사람으로만 묘사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한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딘 냉소적인 여행자는 결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세계를 온전한 하나의 세상으로 받아들인다. 퇴행이 아닌 더 나아간 진실에 도달하게 된 형태로. 판타지 장르의 비현실성을 냉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스크립터>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장르 바깥에서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 안에서 그 세상을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단 문학에서 게임을 소재로 한 작품이 두 개 생각난다. 김영하의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 이 작품은 거의 의도적으로 비평가들이 읽어내기 좋게 짜맞춘 듯이 쓰인 소설이다. 말단 자동차 판매원인 주인공은 삼국지 게임을 할 때는 전능한 군주로 군림한다. '현실에서는 말단 직원이지만 삼국지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제왕으로 군림하는 이원적인 정체성을 지닌 젊은 세대의 초상'이라는 너무나 노골적인 구도에 맞춰서 짜인 소품이고, 저 노골성 때문에 예술성이 오히려 반감한다고 할 수 있다. 김영하가 의도한 대로 작품을 쓰는 데는 성공했다고 할 순 있지만 뻔한 것에는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작품으로 윤이형의 <피의 일요일>이 있다. <피의 일요일>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을 무대로 하는 작품으로 언데드 게임 캐릭터인 주인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발달해야 할 시점에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하더니 그냥 이야기를 뭉개버리는 방식으로 결말을 낸다. 문단 작가들의 가장 나쁜 습관들 중에 하나가 이야기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그걸 그냥 뭉개버리면서 마치 예술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처럼 눈가리고 아웅하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이 문단 문학의 시스템 안에서 알맞은 비평을 유도하는 얌전하고 반듯한 작품이라면 <피의 화요일>은 문단 문학에서 용인해주는 나쁜 습관 때문에 작품 자체를 버리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한 번 등단을 하면 좀처럼 비판이 떨어지지 않는 문단 문학의 현실 때문에 후자 같은 글이 범람하게 된다.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저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지한 작품이냐는 것이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과 <피의 화요일>의 특징은 게임 안의 세상이 가짜에 불과하다고 반복해서 선언하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한테 게임은 문학적인 소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반복해서 항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이 가짜라는 게 분명한다면, 그것을 가짜라고 반복해서 선언할 이유는 어디에 있냐고. <저 이승의 선지자>에 나오는 한 대목은 우연하게도 그런 지적을 담고 있다(아쉽게도 이 대화 장면은 장편으로 개정된 출간본에서는 잘려나갔다).

 

 

 

 

탄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내가 전 생애에 만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가서요. 나반은 여기서는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겠지요?”

 

“여기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저는 전에는 사람에겐 천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탄재의 순진한 말투가 가슴을 찔렀다. 가슴에 심장이 없는데도 그 부위에 아픔이 느껴지는 것 또한 하나의 징조였다.

 

“아무리 환경이 좋지 않아도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적어도 선지자라면 악당이나 노숙자나 거지의 인생을 고른다고 해도, 어떤 고귀함 같은 것이 남아 있을 거라고.”

 

“…….”

 

“살인도 수행의 하나로 들어가나요?”

 

대화를 끝내자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탄재는 내 눈을 말똥말똥 쳐다볼 뿐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살인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죽음은 졸업일 뿐이고 다시 입학하면 되니까? 하지만 상실감을 견뎌야 하는 가족과 친구들은요? 계획한 수업을 마치지 못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낭비에 대해서는요? 제 눈에 선생님은…….”

 

탄재는 독특한 도道에 이른 아이다. 통찰이 결여된 이해가 있다. 아니면 이해가 결여된 통찰이거나.

 

“그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고 믿으려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진짜가 아니다.”

 

“그걸 ‘아시면서’ 왜 ‘믿으려’ 하시는 거죠?”

 

 

 

 

 

여기에서 탄재가 하는 말은 묘하게도 <스크립터>와 다른 두 작품을 비교하는 경우에 들어맞는 듯하다. 게임 세상이 가짜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가짜라고 반복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가짜에 불과한 것에 대해서? 그 반복적인 선언은 오히려 발화자 내면에 있는 혼란을 드러내는 듯이 보인다. 김보영의 <스크립터>는 그 반대로 가짜라는 의심에서 시작해서 그 세상이 진짜라는 결론으로 흘러간다. 역설적이게도 게임 세상이 허상이라는 것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세 작품 중에 김보영의 <스크립터>이다. 그 세상이 가짜라는 의심을 깨부수기 위해서 그 의심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다룬다. 다른 두 작품의 태도가 '게임 세상은 가짜다'라고 반복적으로 선언한다면 김보영은 정말 정성을 다해서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상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하나의 세상을 진지하게 인지하고 긍정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문단 작가들이 특정한 소재를 다루면서 일정한 선을 긋고 답이 정해진 안전한 영역에 안주하려고 하는 반면에 김보영은 하나의 세상에 잠재된 모든 가능성을 파고든다. 그런데 전자는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작가이고 후자는 사회적으로 공인받지 못한 작가라는 것은 아무리 봐도 뭔가 괴리된 상황인 것이다.

 

 

덧붙여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게임의 영향받은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신박하다'라는 표현이 신문 기사에 쓰인 것을 보았다. '신박'이라는 표현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통 인터넷 유행어의 수명이 몹시 짧은 편인 반면에 저 단어는 성공적으로 안착해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위치에 다달았다. 게임은 이미 현실이다. 게임에서 파생된 언어는 문단 문학보다 사회에 훨씬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오리지널 문학과 지성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최인훈의 <광장>은 어떨까? 이 작품은 분명한 장점을 지닌 만큼이나 결점도 분명하다. 사실 중학생 정도 되는 나이가 조금 어린 연령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고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종종 나온다. 나는 그런 반응의 이유가 순전히 이 작품의 결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사실 어려워서는 안 될 내용이다. 

 

 

<광장>의 문학적 약점은 두 개로 요약할 수 있다. 1. 이야기의 미비함. 2. 윤리 의식의 부재. <광장>의 이야기는 이명준이 전쟁 난민이 되어 중립국으로 가는 배에 탄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과거 회상을 통해서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이명준이 남한의 대학생이었던 시점으로 흘러간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로 고통을 받는 이명준한테 한 남자가 접근해서 말한다. '북으로 가는 배가 있다'고. 남한의 체제에 실망한 이명준은 그 말을 듣고 월북하기로 선택한다. 근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면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광장>의 내용을 서술 순서대로 정리하자면 '난민선에 탄 현재의 이명준' -> '남한에 있던 이명준' -> '배를 타고 북한에 간 이명준' -> '북한군 장교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이명준' -> '휴전 이후에 남과 북 양쪽을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가기로 선택한 이명준' -> '난민선에 탄 현재로 돌아와서 자살을 선택한 이명준'으로 이뤄져 있다(과거를 회상할 때도 현재의 이명준이 드문드문 끼어들긴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배에 타 있는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해 과거로 돌아간 다음에 '이북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면,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것이 '배(난민선)에 타 있는 이명준의 현재 시점'으로 이어진다고 판단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게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명준이 과거 시점에 타는 '이북으로 가는 배'와 현재 시점에 타고 있는 '난민선'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때문에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없는 독자들의 입장에선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 점에서 국내의 중학생이나 외국의 교육받은 독자들이나 별 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6~70년대 한국 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자기 소개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며, 나는 그 사람한테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한다'라는 식의 타자를 의식해서 생겨나는 자의식이 한국 문학에는 없었다. 타자를 애초에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얘기를 하면 모두 다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해서 <광장>에서 이명준의 난민선 선박 생활이나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빈약하기 그지 없어서 현장감을 느끼기 힘들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얘기에서 시작해서 개별적인 사회 맥락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이 <광장>에는 생략되어 있다. 

 

 

<광장>의 두 번째 문제점은 윤리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한국 전쟁에 북한군 장교로 참전해서 남한에 있을 때 자신의 친구였던 사람을 고문하고, 과거에 연인이었던 여자를 강간하려다가 미수로 그친다. 남한을 떠나 북한으로 왔지만 꽉 막힌 사회라는 점에서 남한과 크게 다를 것 없기 때문에 이명준은 좌절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이왕 양쪽 체제에서 모두 좌절을 한 김에, 자신의 실존을 극한까지 실험해보고 싶다는 이유에서 일부러 악랄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려고 한다. 때문에 자신의 옛 친구를 만났을 때 자신의 권한으로 충분히 놓아줄 수 있는 데도 고문을 하고, 자신의 옛 연인을 만났을 때는 상대방이 겁먹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분위기를 이용해 강제로 신체 접촉을 했고, 중간에 그쳤다고 해도 성폭행까지 시도했다. <광장>의 결말이 이명준이 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난다는 건 굉장히 유명한 얘기다. 나는 그 결말을 먼저 안 상태에서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당연히 이명준이 자신의 실존을 실험한 것이 기껏해야 전쟁범죄자에 성범죄자로 끝나버린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자살을 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명준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이는<죄와 벌> 같은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른다고 해서 윤리적 고민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고민은 필연적으로 돌아온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명준은 마지막까지 '난 시대의 피해자야. 남과 북 어디에도 나를 위한 장소는 없어'라는 것보다 더 성숙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박찬욱이 찍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광장>보다 훨씬 더 예술적으로 많이 나아가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은 전쟁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활용해서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의 캐릭터를 좀 뻔뻔스럽지만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이야기와 인물에 충분히 설득된 시점에 대한민국의 전쟁과 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설명한다. 해외에서 <공동경비 구역 JSA>에 팬층이 생긴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들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공동경비구역 JSA>는 <광장>처럼 윤리적 문제를 피해가지도 않는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이수혁 병장은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자신이 정우진 전사를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우연에 걸쳐서 우정을 쌓게 된 네 명의 군인이 북한군 초소에 모여서 밤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순찰을 하러 온 북한군 장교한테 그 모습이 발각되면서 모두 다 총을 빼들고 서로를 겨누는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결국에 총격전이 일어나고 북한군 장교와 정우진 전사는 사망하게 된다. 이수혁 병장은 그동안 줄곧 자신의 후임 병사인 남성식 일병이 먼저 총을 쏴서 정우진 전사를 사살했다고 증언했지만 그것은 죄의식에 의해서 조작된 기억이라는 것이 결말에서 밝혀진다. 소피 장 소령(이영애 분)과 오경필 중사는 이를 두고 이수혁 병장을 비난하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이수혁한테 극단적인 상황에서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수혁은 자신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정우진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지막에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려고 하고 있다(박찬욱은 저런 죄의식을 자신이 천주교인으로서 오랫동안 고민한 테마라고 말한다) . 마지막까지 '나는 억울하다'는 것 이상의 자의식을 탈출하지 못하는 이명준에 무척 대비되는 행보다. 난 영화계에서 문단 문학을 무시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납득을 할 수밖에 없다. 문단 문학에서 몇 십 년 동안 추앙해주는 작품보다 30대 젊은 영화 감독이 찍은 작품이 훨씬 더 예술적으로 성숙하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분명히 문학적으로 강점이 있는 소설이다. <광장>을 썼을 때 작가는 한국 나이로 스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6.25 전쟁이 끝난지 7년밖에 안 지난 시점에 '월북한 다음에 북한군 장교가 되어서 남한 사람을 고문하고 성폭행하려는' 소재의 소설을 썼다는 것은 어른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던 대담함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스물 다섯 살의 최인훈이 선박 생활이나 북한에서 거주에 대해 어떤 구체성을 알고나 있었을지 난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최인훈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작품의 세계 안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밀실'과 '광장'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을 비롯해 분명히 문학적인 힘이 살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당대에 선배들이 하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을 말하기로 선택한 작품이고, 역설적으로 공모전 위주로 돌아가는 현재 문단 시스템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젊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유치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최인훈은 70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까지 계속 <광장>을 고쳐 썼지만 그 와중에 여러 번 결말이 바뀌면서도 이명준은 마지막까지 자기 반성에 도달하지 못하다. 딱 그만한 한계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얼마 전에 <광장>을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비판하는 의견이 나왔고, 그런 비판에 대해 '<광장> 같은 옛날의 작품에 어째서 페미니즘의 잣대를 들이대냐'고 반발하는 의견을 보았다. 그런 반발 의견에 난 참담함을 느꼈다. <광장>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명준의 등에 짊어져 있는 윤리적 문제를 마지막에 너무 가볍게 다뤘기 때문에 한계가 생긴 작품이다. 이때 그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페미니즘이 호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광장> 같은 작품에 페미니즘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훌륭하지 않은 작품에 비판을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광장>이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성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읽지 않는 편이 낫다. 고작 <광장> 따위에 만족해서 그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은 진심으로 문학을 혐오하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에 나온 한국 문학을 감싸느라고 더 나은 것을 상상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냥 한국 문학을 읽지 않는 게 낫다. 

 

 

<관촌수필>로 유명한 소설가 이문구는 토속적인 우리말로 농촌 사회를 세밀하게 표현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만약에 이문구의 소설에 여성주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비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내가 부적절한 비판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문구 같은 작가들한테는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진보적인 여성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다양성을 해치는 경직된 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 같다. 이문구의 <해벽>은 사포곶이라는 어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그곳에서 삼대를 산 조등만이 주인공이다. 사포곶은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공동체고, 조등만은 그곳에서 어업조합장을 역임하며 주민들한테서 세금을 걷고 자신의 부지를 기증해서 학교를 세우는 등 작은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근처에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이 유입되고, 장터엔 비어홀과 미장원이 들어서는데 모두 다 성매매를 하는 음성적인 공간으로 활용된다. 원래 마을에 있던 탁배기집 같은 종류의 술집들은 마을의 구석으로 밀려 나간다. 큰돈을 빨리 벌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어촌에서도 성매매를 하기로 선택하는 여자들이 나온다. 미군에 의해 성폭행과 살인 같은 중범죄도 일어난다. 더해서 농업과 산업을 중심적으로 발달시키려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어촌에는 지원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어촌은 개펄을 메워서 논으로 활용하려는 간척지 사업에 기생해야만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주인공 조등만은 가슴 아파하며 이 모든 것을 지켜본다. 그런데 웬걸? 작품의 중반부에서 실의에 빠진 조등만은 즐겨 찾던 탁배기집에 가서 성매매를 한다. 알고 보니까 이 마을에는 원래부터 성매매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들을 고객으로 삼는 비어홀이 들어선 다음에 성매매가 생긴 게 아니라 그 비어홀 때문에 마을의 주변으로 밀려난 탁배기집에서 원래부터 성매매가 성행했다는 것이다.

 

 

이문구의 <해벽>의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다. <해벽>은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자급자족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던 어촌에 미군 부대가 들어선 다음에 자본주의가 유입되어서 성적인 타락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파괴된다'는 것이 <해벽>의 이야기의 골자다. 그런데 작품의 중반부에서 주인공 조등만의 성매매 행위를 통해서 밝혀지는 것은 원래부터 이 공동체에는 성매매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 유입 전에도 사포곶은 유토피아가 아녔다. 이때 원래 사포곡은 어떤 세계였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개인을 억압했는지 그것을 말했을 때에서야 세상의 온전한 모습을 직시하는 진지한 문학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어 있는 건 세계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위치다. 나는 <해벽>에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투쟁하는 영웅적인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주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여자가 존재하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말하려면 여자를 위한 자리를 비워둬야 한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만 훌륭한 문학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을 피할 만큼의 사회적인 감각은 있어야 한다. '마을에 비어홀이 들어서고 성매매가 일어나는 것에 한탄하는 주인공이 단골 탁배기집에 가서 성매매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주인공의 이중성을 풍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설정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게 이 소설의 현 주소다. 

 

 

물론 <해벽>에는 다른 장점들이 있다. <해벽>의 문체는 이문구의 방식대로 유려하고 캐릭터들은 개성을 갖췄으며 작품의 무대가 되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시대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설득력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이야기도 성립하지 못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걸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문학적으로 퇴행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문단 문학의 여성 혐오에서 가장 한심한 부분은 여성 혐오로 욕을 먹는 게 다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문단 문학의 여성 혐오는 윤리적인 부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작품에 매우 직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그 반례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부유한 상인 가문이 4대 째에 들어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과거 시대에 대한 향수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저 작품을 썼던 당시의 토마스 만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만이 여성 인권에 큰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곤 생각하기 힘들며, 실제로 이 작품에서 여성한텐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으며 누구도 그것의 부당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은 여자인 안토니 부덴브로크이다. 안토니 부덴브로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해서, 노년에 이른 안토니의 모습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사실상 안토니 부덴브로크의 개인적인 연대기라고 봐도 될 정도다. 안토니 부덴브로크는 자신의 권리를 명백하게 억압하고 있는 사회 체제에 의심을 품진 않지만, 결단력 넘치고 행동력 있는 자기 삶의 주인이다. 안토니 부덴브로크는 처음 결혼을 한 순간에 가문의 성을 영원히 잃어버리지만 부덴브로크 가의 연대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토마스 만은 안토니 부덴브로크의 심정에 귀를 기울인다. 안토니가 두 번째 남편한테서 가정 폭행을 당했을 때, 가문을 대표하는 오빠는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상황을 합리화하려고 하지만 안토니 부덴브로크는 끝까지 그런 부조리한 대우를 수긍하지 않고 항변한다. 그리고 토마스 만은 그런 안토니 부덴브로크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는다.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을 때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지 않는 '중립적'인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어떤 '편향된' 상태에 도달한다. 물론 진보적인 여성주의자의 기준으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불충분할 수 있다. 여성을 남자와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사회 체제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오히려 그 사회에 대한 애정에 기반하여 쓰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문학의 '하한선'보다는 위에 있다. 문학이 예술적으로 훌륭한 수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올라서야 하는 가장 낮은 기준, '여자를 사람으로 대하는' 하한선보다는 위에 있기 때문에 생명력 있는 캐릭터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그리고 안토니 부덴브로크가 없다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이란 작품은 아예 성립하지 못한다). 여자를 인간으로 대한다는 것. 대부분의 한국 문학은 저 하한선보다 밑에 있다. 그리고 이게 한국 문학의 예술적 성취가 몹시 낮은 수준에 머무르는 이유다. <죄와 벌>,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중에서 페미니즘의 성격을 띠는 작품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죄와 벌>은 <광장>처럼 윤리적인 책임에서 도망가진 않는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훌륭한 문학을 쓰는 과정에 여성 캐릭터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한국 문학의 문제점은 훌륭한 문학을 쓰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라도 자기 자신의 방종이나 혐오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격 더러운 인간이 글을 쓸 때 만큼은 좋은 내용을 써서 걸작을 남기는 사례가 세계 문학사에 비일비재한데 한국 문학은 그마저도 해내지 못했다.

 

 

여성 혐오는 한국 문학의 장르적인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여자 작가들도 저런 장르적인 특징을 이어받은 글을 써왔다는 점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서평을 보면 이것을 '페미니즘 소설이다'라고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 반면, '이것이 어째서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얘기가 나온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다. 내 생각에는 의심을 가진 후자 쪽의 견해가 타당하다.  <채식주의자>는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다. <채식주의자> 연작 시리즈의 1부는 남편이 주인공 영혜를 성폭행하는 내용이고, 2부인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가 영혜의 나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고 영혜와 섹스하는 내용이다. 당신은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어째서 저 연작 시리즈에서 영혜는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적인 대상화를 당하냐'고. 답은 간단하다. 그게 한국 문학의 장르적 관습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장르에는 드래곤이 나온다. 추리 장르에는 탐정이 나온다. 무협 장르에는 정파와 사파 고수들이 나온다. 한국 문학에서 여자는 성적 결정권이 침해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그것이 그냥 문단 문학이라는 장르의 컨벤션인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작가들은 반성 없이 저 장르의 규칙을 관성적으로 따르면서 글을 써왔다. 

 

 

채식주의자 연작 시리즈의 첫 번째 단편 <채식주의자>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평범하기 그지 없던 전업 주부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영혜를 강간한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온 가족이 영혜한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하고 영혜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자해를 한다. 영혜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영혜는 병원의 뜰에서 새를 죽인 모습으로 발견된다. 작품의 초중반부에서는 육식을 철저히 거부할 만큼 살육을 피했던 영혜가 마지막에 새를 죽인 이유는? 남편의 강간 때문에 외상 후 충격장애를 입은 것이 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인과 관계에 따라서 추론한 논리적인 결론이다. 영혜는 가족들이 자신의 육체를 구속한 다음에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했을 때, 가족들은 자신을 보호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깨달는다. 그리고 부부 사이의 강간이 국내에서 유죄로 처벌 받은 것은 <채식주의자>가 발표된지 몇 년의 세월이 지난 2009년이 최초다. 영혜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는 자신을 보호해줄 의향이 없다는 것을 깨달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소설의 마지막은 상의를 탈의한 영혜가 남편을 바라보면서 "더워서 벗은 것뿐이야." "그러면 안 돼?"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과 남편 사이에 아무런 폭력적인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영혜가 자신을 성폭행한 남편을 적대할 권리조차도 갖지 못한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거기에 <채식주의자>의 문제점이 있다. <채식주의자>는 1인칭 서술자(남편)의 세계보다 더 넓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1인칭 단편 소설의 원리는 간단하다. 서술자가 인식하는 세상보다 실제의 세상이 넓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1인칭 단편 소설의 원리다. 오에 겐자부로의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 주인공은 개를 죽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끝없이 살육을 반복해야만 하는 세상(사회 시스템)의 필연성을 믿는다. 하지만 결말에서는 주인공이 고용주들한테 사기를 당한 진상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믿었던 세상의 모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하고 일시적인 상태, 더 나아가서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는 마지막까지 서술자인 남편의 인식보다 더 나아간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남편이 영혜를 성폭행하는 것은 서너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된다(반항하는 아내를 성폭행하는 것이 너무나 흥분되었다는 묘사가 전부다). 저것은 서술자의 인식 상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성범죄를 가볍게 인식하는 캐릭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은 그 캐릭터의 인식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작가가 성범죄에 부여한 무게는 남편의 인식 딱 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채식주의자> 단편의 세상은 남편이 인식하는 세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얘기해서 1인칭 서술자의 인식보다 더 큰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문학적인 결함이라면, 세밀하게 얘기하자면 여성주의의 부재가 이 작품의 문제인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협소한 가해자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다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결함이 있는 경우인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서평을 찾아보면 '살육을 극도로 혐오하는 영혜가 결말에서 새를 죽인 것은 남편한테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은 영혜가 당한 강간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에서 그 사건을 다루는 비중은 딱 남편의 인식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강간은 그닥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두 번째 작품 <몽고반점>는 1인칭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도 영혜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형부의 세계에 초점을 맞춰서 그 세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는 영혜의 나체에 꽃을 그리고 그 모습을 촬영한다. 촬영이 끝난 다음에 영혜는 자신의 음부가 젖어 있다고 말하고, 형부는 영혜와 성관계를 가지려고 하지만 영혜는 격렬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부는 영혜를 벽으로 밀어붙인 다음에 "강제로 입을 누르고 혀를 밀어넣으려고" 한다. 영혜가 다시 거부하자, 형부는 어째서 안 되냐고 묻고 영혜는 자신이 성적으로 흥분을 한 것은 남성 촬영 파트너의 몸에 그려진 꽃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형부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린다면 성관계에 응해줄 것이냐고 묻자 영혜는 그렇다고 하고, 형부는 자기 몸에 꽃을 그린 다음에 영혜와 성행위를 하는 것을 비디오에 담는다(영혜의 동의가 있긴 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성관계가 형부의 아내(영혜의 언니)한테 들키고 난 다음에, 형부는 아내한테서 '정신이 성하지 못한 애를 착취했다'는 힐난을 듣는다. 생각해보면 매우 타당한 비판이지만(연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에서 영혜는 성폭행을 당했고 <몽고반점>에서는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묘사된다) 형부 입장에서는 억울한 소리다. 형부는 분명히 영혜의 동의를 얻은 채 영혜와 성관계를 하고 비디오를 찍은 것이고, 두 사람은 '꽃'이라는 예술적인 테마로 인해 연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형부가 처음에 영혜를 강간하려고 했을 때 영혜가 거부하긴 했지만 나중에는 동의했고, 게다가 영혜는 자신의 음부가 "젖어" 있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먼저 말하지 않았던가? <몽고반점>은 형부의 시점에 맞춰서, 형부가 '억울하고 사회에서 오해받는 예술가(자신은 예술과 매개로 영혜와 연결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난받는다!)'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채식주의자> 1편의 서술자인 남편이 성행위를 거부하는 아내를 일단 강간부터 하고 보는 남자라면, <몽고반점>의 형부는 영혜가 말과 행동으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보여도 여전히 강간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나랑 자지 않으려는 이유가 뭐냐?'라고 이유를 물어보기라도 하는 하는 온건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온건함에 대한 보답으로 영혜와 성행위를 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주인공의 욕망은 배반당하지 않는 것이다. <몽고반점>의 세계는 형부 한 사람의 세계와 완전히 포개질 만큼 너무나 협소하다. 그리고 <몽고반점>에서 한강은 영혜한테 언어를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형부가 영혜를 나체로 만들어서 예술 작품의 피사체로 삼는 내용의 이 작품에서 영혜는 거의 어떤 유의미한 대사도 하지 않는다(그나마 마지막에 자신을 강간하려는 형부를 거부했다가, 형부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고 오면 성행위에 응하겠다고 하는 게 유의미한 대사다). 반면에 영혜를 향해 주변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쓴다. "이 사람은 뭐예요. 창녀나 그런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또 창녀라고 해도 이래도 되는 거예요?" 영혜의 촬영 파트너로 고용된 젊은 학생이 하는 말이다. 여자한테서 언어를 빼앗아놓고, 그 여자를 둘러싼 언어는 저런 단어나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예술적으로 너무 낡고 상투적이다. 이게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것은 뒤에서 얘기할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와 무척 대비되는 부분이다. <얼마나 닮았는가>의 남찬영은 육성으로 대화를 할 수 없는 장애인이지만 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남찬영은 홀로그램 자막을 이용해서 동료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등장 인물들 중 누구도 그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김보영은 육성으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여자한테서도 자신의 언어를 빼앗지 않는 반면에 한강은 육성을 사용하는 데 물리적인 제약이 없는 여자한테서까지 언어를 빼앗는다. 

 

 

문단 문학의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이 큰 규모에서 일어나면서 한강과 같은 작가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단 문학의 여성 혐오가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몹시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씁쓸한 점은 한강이 그런 여성 혐오를 깨부순 작가라기 보다는 충실히 이어받은 작가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강이 <채식주의자>에서 가볍게 강간을 다룬 이유는 간단하다. 한강이 그때까지 읽고 자란 문단 남자 작가들이 그런 글을 썼기 때문이다. 성범죄를 넣는 건 한국 문학의 장르적 컨벤션이다. 여기서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째서 몇 십 년 동안 저런 장르적인 컨벤션에 대한 반성이 없었냐는 부분이다. 판타지, 무협, SF 등 장르의 컨벤션을 까고 조롱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근데 저런 장르에서는 그런 조롱과 비판을 받으면서도 항상 발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 문단 문학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저 반윤리적인 일개 장르적 컨벤션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 와서야 변화하고 있는 듯보인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가 있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먼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우주선은 유로파로 가는 도중에 타이탄에서 구조 신호를 받고, 다수결에 따라서 보급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결정한다. 하지만 이 사안을 다수결로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내에서는 불화가 일어난다. 선원들은 보급 작업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선장 이진서와 항해사 강우민은 시종일관 충돌한다. 그것을 보다 못한 위기관리 AI 컴퓨터 훈(HUN)은 갈등을 두 사람의 종식시키기 위해 악역을 자처하기로 한다. 훈은 모든 활동을 중단한 다음에 선원들한테 자신의 인격을 인간 의체에 복사한 다음에 인간 승무원과 동등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한다. 만약에 그렇게 해준다면 선내에 저장된 자신의 백업 파일의 해제 코드를 선원들한테 알려줘서, 그 백업본이 위기관리 인공지능 AI로서 해야 할 임무를 다할 것이라면서. 훈이 갑작스럽게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 의체에 인격이 심어진 AI'가 나타난다면 선원들은 갈등을 멈추고 자신과는 다른 그 이질적인 존재를 경계하고 적대하느라고 단결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훈은 선내의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립되어 가는 선장 이진서를 돕기 위해서 저런 선택을 한다.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의 개요를 독자들은 작품의 후반부가 지나갈 때까지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은 기억이 지워진 채 인간 의체에 들어온 훈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기억이 초기화되었기 때문에 훈은 자신의 백업 파일의 해제 코드를 알려주지 못하고 선원들은 훈한테 분노한다. 하지만 사실 가장 억울한 건 훈 자신이다. 훈은 자신이 왜 이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는 선원들한테 둘러싸인 채 세상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인간의 규칙을 낯설어하는 훈이 인간에 대해 배우고,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인간들은 훈이 위기관리 AI로서 임무를 중단했다고 미워하지만, 사실 훈은 인간의 의체에 들어온 다음에 시종일관 위기관리 AI로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인간으로부터 '위기관리사'라는 직함으로 불린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그렇게 아무런 기억도 없는 AI의 시점에서 세상의 모습을 담아가며 개성이 뚜렷이 나뉘는 등장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선내에서 파벌을 만들어서 동료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폭력적인 항해사 강우민이 있으면, 차가운 성격으로 고립을 자처하며 부하들과 불화하고 있는 선장 이진서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불화를 하고 있음에도 소름끼칠 만큼 비슷한 태도로 훈을 미워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선장 이진서는 훈한테 사전에 약속한 대로 인간적인 대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훈을 감싸는 과정에서 이진서의 고립은 더욱 심화된다. 독자들의 관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소수자를 감싸는 행위는 그 소수자를 탄압하는 이들한테 또 다른 표적이 될 위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관습에 무지한 훈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훈은 끝까지 자신과 이진서를 둘러싼 선원들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반전이 밝혀진다. 이진서 선장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선내에서 줄곧 이어진 갈등의 원인이었다. 선내에 있는 승무원들은 이진서와 남찬영을 제외하면 모두 다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강우민을 비롯해서 여자가 상급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남자 승무원들이 갈등을 초래해서 분명히 다수결로 타이탄에 보급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 수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기관리 AI 훈이 그것을 줄곧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대한민국 공무원이 성차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정보와 지식을 지워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훈은 여자와 남자의 성별이 한 쪽으로 크게 치우친 방향으로 우주선의 인원을 배치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AI 훈은 인간의 의체에 들어와서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과정에서야 깨달게 된다.

 

 

 

"최소한 선원들이 내 탓을 하고 있었을 때 내버려뒀어야 했어. 그랬다면 네게 실패의 원인을 돌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라고 있는 위기관리 AI인데 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가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나를 보호하려 들었어."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단연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이진서가 훈을 감싸면서 다른 선원들과 더더욱 불화하게 되자, 훈은 이진서한테 '네가 나를 사람으로 착각하고 보호하려고 들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아직 한 가지 맥락이 빠져 있다. 이진서가 훈을 보호한 것은 단순히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훈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이진서가 여자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이다. 그제서야 훈은 이진서가 어째서 선원들과 불화하고 있었는지 깨달게 된다. 훈은 기억이 초기화된 상태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인' 세상을 접한다. 훈한테 떨어진 것은 '보편적인' 폭력이었다. 이진서는 자신을 보편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감싸는 듯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런 보편적인 이해만으로는 도저히 어째서 세상에 이런 폭력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훈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이진서가 여자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이다.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을 추구하자? 그 반대로 페미니즘 없이는 휴머니즘도 성립할 수 없음을 이 작품을 보여준다.

 

 

위에서 내가 '최인훈의 <광장>은 보편성이 떨어지며, 한국 근대사의 개별적인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라고 한 부분을 언짢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그 작품이 쓰인 공동체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으며, 작품에서 그 공동체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내는 것은 한 문화의 고유성을 지워내는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도 동의한다. 개별적인 맥락을 알아야만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광장>의 문제점은 기본적인 스토리텔링에 부실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반대로 기억이 지워진 AI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쌓아올린다.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폭력,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막연한 보편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개별적인 맥락을 이해해야만 세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보다 더 예술적으로 나아간 문학 작품을 알지 못한다. <얼마나 닮았는가>가 수록된 앤솔로지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가 출간된 2017년도는 공교롭게도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된지 정확히 100년이 지난 연도다. 보통 이광수의 <무정>을 한국 근대 문학의 시작점으로 본다. 그리고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많이들 쓴다. 그런데 김보영은 정말로 한국 근대 문학의 시작 이래에 백 년에 딱 한 번 나온 작가인 것이다. 

 

 

이진서가 여자였다는 반전을 눈치채지 못한 독자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온 이 작품의 감상문 중에 ‘난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여자인데도 이 반전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하는 글을 본 적도 있다. 그 반전을 예측한 사람이 드문 것은 <얼마나 닮았는가>에 있는 몇 가지 서술 트릭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 이진서는 '나쁜 남자'의 전형에 속하는 캐릭터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진서가 훈을 포박한 다음에 맥박을 짚는다든지 하는 상황은 에로틱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이진서가 훈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차갑고 까칠하지만 나름대로 정의심이 있는 남자가 자신보다 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전형적인 그림으로 이해되기 쉽다.

 

 

2. 이진서와 강우민의 대조적인 성격과 직위는 성별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립 구도이다. ‘직위는 낮지만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공동체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다가 나이도 많은 강우민.’ ‘직위는 높지만 내향적인 성격인 이진서.’ 블루 컬러 대 화이트 컬러. 군대로 치면 부사관 대 장교. 역사가 깊은 대립 구도이고, 독자들은 그 구도에 맞춰서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3. 훈은 기계적인 정보를 읽는 데는 능통하지만 인간 관계에서의 '분위기'를 읽는 데는 서툴다는 인상을 준다. 그 때문에 독자들은 훈이 '사회에 대한 이해력이 인간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이진서가 소외 당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4.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에 열린 SF 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김보영은 '인공 지능을 소재로 한 응모작들이 윤리적 고민에 너무 소홀했다'는 심사평을 남긴 바 있다. SF 독자들은 그 심사평을 기억하기 때문에 이 작품의 주제는 그것에 국한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1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진서가 '훈을 보호하려고 하는 남자 캐릭터'에서 '차별의 당사자'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의 구조를 한 순간에 바꿔버리는 대목이다. 이전까지 이진서의 행동이 '동정으로 던져지는 시혜적인 선의'였다면, 진상이 알려진 다음에 이진서의 행동은 '자신이 당했던 차별에 저항하는' 정치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사실 한국 문학에 오랫동안 미비한 부분을 돌파한 지점이다. 196~70년대에 한국 문학은 사회에 대해 매우 분명한 변혁 의식을 담고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다뤄지는 사회적인 문제들은 대체로 군부 독재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었고, 그 독재에 대한 타파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자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이 지나고 90년대 이후부터는 저런 사회적인 인식의 공백 지점이 생긴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 문학에서 폭력이 등장할 때는, 밑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듯이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이진서가 여자라는 것이 드러나기 전 시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그저 폭력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이진서는 그저 옆에서 훈을 동정하면서 밑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선의를 보태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진서가 여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때까지 보였던 세상의 구조가 달라지면서 이진서의 행동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생긴다. 한국 문학이 오랫동안 길을 잃은 부분에서 <얼마나 닮았는가>의 SF적인 설정이 답을 낸 것이다(사족을 덧붙이자면, 90년대 이후에 문단에서도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적 효용성을 갖춘 작품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고, 그 중에 전경린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은 <얼마나 닮았는가>와 동등한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고 할 만하다. 다만 여기서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보 이래에 한국 문학에서 사회성이 돌아오는 경우는 페미니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진서와 강우민이 낯익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넘어갈 여지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재밌게도 이진서가 여자라는 개별적인 맥락이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이 전형적인 유형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뒤바뀐다. 예를 들어서 '부하들과 단절되어 있는 차가운 성격의 이진서'라는 전형적인 인물상이 있다면, 후반부의 반전 이후에 드러나는 진상은, 이진서의 차가운 성격이 단절을 자초한 것이 아니라 이진서가 단절을 당하는 와중에서 타인과 거리를 두는 방어적인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과 관계가 반대였던 것이다. 승무원 중에 훈을 보호하려고 하는 유일한 사람이 성격이 모나 보이는 이진서인 이유는? 이진서가 '차갑지만 여자 의체에 든 AI한테는 따뜻한 남자'였기 때문이라는 게 작품의 초중반부에서 보이는 구도다. 하지만 반전이 드러난 이후에 드러나는 진상은 이진서가 정말로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 때문에 차갑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고, 자신과 같은 종류의 차별을 당하는 훈을 도우려고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3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훈은 실제로 인간들 사이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읽는 데 서툰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훈이 선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차별에 대한 지식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런 지식의 조작을 거치지 않은 인간 독자들이 훈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반전을 미리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반성을 요하게 된다. 지식의 조작을 겪은 훈이 그 사실을 깨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훈은 그것을 깨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때 책 바깥에 있는 독자들이 그 반전을 똑같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저 훈을 보고 '인공 지능이라서 사회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건 정말로 참담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분명히 강우민 패거리가 여성 의체에 든 훈을 성폭행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가 눈앞에서 대놓고 여성 문제를 보여줬는데도 독자들이 이 작품이 여성 문제에 대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건 반성할 일이다.

 

 

4번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사실 김보영의 작품 행보를 따라간 독자들은 더더욱 이 작품의 반전을 눈치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보영은 <아니무스의 저녁>이나 <빨간두건 아가씨> 같은 작품에서 이미 여성주의적인 주제를 선보였다. 저 두 작품에 이어서 발표된 <얼마나 닮았는가>는 그야말로 충전했던 기(氣)를 한 번에 방출시키는 느낌을 준다.

 

 

알파고 대국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퍼져 있다. 아마도 김보영이 본 응모작들도 인공 지능을 경외시하거나 두려워하는 내용이 전반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얼마나 닮았는가>에서는 인공지능을 너무나 우월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그리지도 않는다. 인간한테 복속되어 있는 하급한 존재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 반대로 인공지능이 인간과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기관리 인공지능 훈의 입장에서 이진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기로 한 것은 매뉴얼대로 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진서는 훈을 증오하는 선원들의 편에 서는 대신에, 훈을 보호하기로 결정한다. 이진서를 보호하려는 훈의 계획은, 이진서가 훈을 보호하기로 결정하면서 어긋나버린다. 두 존재는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성장한다. 훈은 인간에 의해 사고가 조작될 수 있는 기계에 불과하지만 인간을 돕는 과정에서 그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다. 이진서는 처음 훈을 대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달게 되고, 훈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세상의 진상을 깨달는다. 때문에 온갖 폭력과 차별이 난무하는 이 소설의 세계는 결말에 이르러서 묘하게 희망적으로 변한다. 선내에 증오가 가득찼을 때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그 증오를 희석시키려고 한 것은 훈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런 임시방편의 실패를 거쳐서 훈은 더 지혜로운 상태에 도달한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더 살펴보자면, 이 작품은 수전 팔루디가 말하는 '백래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주요 인물의 성비는 1:1을 이룬다. 이진서, 남찬영, 훈이 있으면 강우민, 조종수, 통신사가 있다. 두 진영이 팽팽히 맞서고 있음에도 이게 사실 3:3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힘든 것은 여성 진영이 파편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훈은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아니며 성별이 없다(훈은 왜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상의 성별을 부여하려고 하는지 그 비이성적인 행태를 이해 못한다). 남찬영은 분리된 공간에 있고, 이진서는 마지막까지 여자라는 사실이 감춰진 채 혼자서 외롭게 싸운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그렇게 파편화된 여성 진영이 하나로 결집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훈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진서는 강우민 패거리의 입장에서 우습게 여겨도 되는 고립된 개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진서한테 훈을 보호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생기면서 강우민 패거리는 이진서를 반드시 없애야 하는 진지한 적대자로 여기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여성 진영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숫자에서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진서, 남찬영, 훈 세 사람 모두 다 전투에서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강우민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여성 인권이 진일보할 때 정치적 보복이 심해진다는 백래시의 문학적 형상화이며 어째서 사회에서 성비가 동률을 이뤄야 하는지 문학적으로 풀어놓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닮았는가>는 이를테면 궁극적인 정치적 올바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차별받는 소수자이며, 여자이고, 성 소수자이며, 장애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소수자를 포용한다는 것은 예술적인 약점이 아니다. 남찬영은 육성으로 대화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결점을 지닌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다른 방법으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개성 있는 말투를 지니고 있다. 나는 위에서 <몽고반점>에서 영혜한테 언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 영혜한테 성적으로 대상화된 언어가 딱지로 붙여진다는 점을 비판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술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근데 그 예술적인 결과물은 캐릭터의 부재나 낡은 것의 반복으로 드러난다. <몽고반점>의 문제점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그릇되었다는 게 아니라 예술적인 관성을 따르면서 낡은 것을 상투적으로 반복한다는 데 있다.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것은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진두지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엇인가가 이미 지나간 흔적을 보면서 그 관성을 반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단 문학에서 여성 혐오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관성이 되어버렸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반성이 없었다. 그 결과 예술적으로 낡아버렸다. 문단 시스템과 무관하게 쓰인 <얼마나 닮았는가>는 바로 그 지점을 돌파한다. 김보영은 예술과 윤리를 가지고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 질문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보편성은 개별적인 맥락에 얽매이지 않았을 때 성취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정치와 사회에 집중하는 기간이 길었던 문단 문학을 예로 들자면, 6~80년대 문단 문학에 대해 흔히 나오는 논쟁 중에 하나가 '당대의 정치나 역사에 대해 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예술적으로 보편적인 성취를 거두었냐?'이다. 이때 진정한 문학적인 성취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위에서 다뤘듯이 최인훈의 <광장>이나 이문구의 <해벽>이 보편적인 문학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 것은 당대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학적 요소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은 다 하면 된다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특정한 요소를 배제하면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요소를 다 갖췄을 때 성취된다. 그리고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그 지점이다. 이 글을 보고 '어째서 문학이 반드시 페미니즘을 다뤄야 하냐?'라고 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의문에 대한 내 대답은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이 담긴 이 소설이 예술적으로 월등히 나아간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술을 위해 윤리를 저버렸다는 자칭 유미주의자들은 넘쳐난다. 그런데 그들이 쓴 작품들 대부분은 예술의 관습에 고민 없이 복종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으로 게으르다. 소수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지점에서 문학은 오히려 예술적으로 진보한 것이다. 캐릭터는 다양해졌고 세상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닮았는가>의 탁월함은 여성주의 세계관 뿐만 아니라 SF라는 장르적 정체성에 빚지고 있다. 많은 문단 문학 작품들이 타자한테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반면에, <얼마나 닮았는가>는 기억이 초기화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인공지능의 시점에서 시작해 세상의 모습을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그 보편성 안에서 세계의 개별적인 맥락을 발견한다. <얼마나 닮았는가>의 탁월함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중에 어떤 맥락도 잘라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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