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로맨스 창작,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텍스트릿 김휘빈

 

*해당 전문의 복제를 불허합니다.

*다섯 단락 이하의 일부 발췌를 허가하며, 발췌 시 원문 링크를 반드시 붙여주십시오.

http://textreet.net/board_GybH00/2100

 

 

 

안녕하세요, 여러분. 텍스트릿 김휘빈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현직 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팀장님께서는 로맨스 집담회 포스터에 이런저런 말을 적어두셨는데, 제 의지가 반영된 건 아닙니다. 다른 분 주제와 겹치는 것도 있고요. 그러나, 이것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로맨스는 문학적인가?

 

바꿔말하면 장르는 문학인가.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새끼들아 문학은 원래부터 장르였다!!!!!!!!! 순문학의 취지에 제일 맞는 것을 말하자면 아마추어 장르소설이 제일 순문학에 가까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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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이미 문학입니다. 동시에, 문학은 본디 장르입니다. 웹진 거울에서 필진 아밀님이 아주 예전에 “대중소설이 독자에게 맞춘 장르라면, 문단은 심사위원에게 맞춘 장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르 바깥의 사람들만 장르를 폄하한다”고 억울해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르 내부에서도 장르를 문학성, 예술성이 없는 것으로 낮춰 보는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죠. 대표적으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르가 아니라 문학이다.” 저는 덕질이 부끄러우면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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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은 “펄프픽션 장르”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부건 외부건 이 펄프픽션 장르를 평가할 때 기준은 ‘남성향(편의상 남성향으로 지칭)’입니다. 그것도 카카오 기준입니다. 왜일까요? 카카오는 무료라서 대충 훑어보고 말할 수 있으니까?

 

여성향인 로맨스나 로판의 경우 여전히, ‘꼰대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시도를 하고 있고, 문장의 지향점도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언급되지 않습니다. ‘웹소설은 단문’입니다. 웹소설엔 내용이 없다고 합니다. 연애소설에는 특히나 가혹한 잣대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생각 없이 쓰고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던가, 그 기술이 미진한 것과는 별개로 작가들은 각자 자기 생각을 담아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전달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장르의 독자조차도, 장르는 장르 따위라고 생각합니다. 장르는 재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장르에서 메시지를 비롯한 교훈이나 철학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이 “펄프픽션 장르”는 쾌락만을 위해 쓰여지고 있을까요?

논점을 바꿔, 쾌락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요?

 

 

 

여성 독자는 로맨스를 선호하는가?

 

흔히, 여자들은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관념은 거의 진실처럼 다뤄집니다. 때문에 여성 타깃 작품에는 로맨스에 대한 요구가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자는 정말 로맨스를 좋아할까요?

 

여자가 당연히 로맨스를 좋아한다면 여주판타지와 로맨스판타지 파가 싸우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금 로맨스 안에서도, 로맨스 분량이 적다 많다로 불평하는 걸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자는 다 로맨스를 좋아한다, 이 말로 모든 여성 취향 장르가 로맨스로 욱여넣어지는 경향이 있고, 사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로맨스 장르가 분명히, 여성향 장르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로맨스란 무엇일까요?  저는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다룬 장르”.

 

저는 로맨스를 “광의의 로맨스”와 “협의의 로맨스”로 구분합니다.  “협의의 로맨스”는 쉽게 말하자면 ‘할리퀸’입니다. 이건 단순히 남녀가 연애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협의의 로맨스는 “여성이 사회적 한계 안에서, 사회가 부여한 여성의 역할을 달성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장르”입니다. 성공이 장르의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해피엔딩은 필수요소로 취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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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로맨스는 여성향 장르 중 제일 큰 지분을 가진 장르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성은 사랑이 전부인 세계를 주로 그릴까요? 사랑으로 모든 것이 긍정되며, 사랑으로 자신이 승인되는 장르를 왜 소비할까요? 왜 그런 장르가 로맨스라는 여성의 거대하며 유일인 장르로 형상화되었을까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성에게 “남자에게 선택받고 사랑받아, 그 남자의 보호를 받으며, 자식들을 잘 길러 입신양명시키는 것이, 여자가 인정받고 자랑할 수 있는 행복”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을 얻는 것은 여성의 ‘업무’입니다.

 

이것은 여성의 현실입니다. 제 어머니 세대만 해도 여성이 직업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신체 위협도 있고요. 사실 지금도 임신하면 책상 빠집니다. 여전히, 사회는 여자들에게 ‘그 길밖에 없고, 그 길을 걸어야 하며, 그것이 너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뇌던 아니던, 이런 사회 환경에서 여성이 그것을 ‘행복의 방법’으로 인지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이드에서 “여성에게 평등한 사회 진출과 권력이 용인되었다면 여성들 역시 지금의 남성향 판타지 같은 장르를 선호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남성향 판타지도 “남성성이라고 규정된 요소”에 천착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요소가 인기를 끌고요. 사회적 틀에 영향을 받고 있는거죠.

 

현재 협의의 로맨스에서 다루는 대다수의 이야기는 사회적 틀에 의해, 명예와 부, 안정이라는 삶의 성공을 위해, 여자가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도구인 사랑을 이용해, ‘완벽한 남자’라는 실용적인 트로피를 쟁취하고, 사회적인 규범에 걸맞은 완전한 여자가 되는, 사회적 성공 이야기입니다.

 

 

캐릭터의 빌딩

사회적 규범은 사실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의 조형에서 찾기가 쉽습니다.

 

사실 광의의 로맨스에서조차 캐릭터는 젠더롤에 충실합니다. 물론 이에는, 많은 선행자들이 지적했듯 로맨스가 이성애 규범을 재생산하는 면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심지어 BL이나 GL도 이성애 규범을 재생산하는 면이 강하죠(물론 이것은 해당 장르가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에 의해 생산, 소비되는 문제와 관련 있을 것).

 

그리고 협의의 로맨스에서는 젠더롤이 더욱 강화됩니다.

 

 

 

남자주인공의 대표적 속성

  1. 권력, 재력, 무력.

    따로 적었지만, 이것은 분할되지 않고 합쳐져 나옵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필요한 남자이기 때문에 알파메일임을 증명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짐을 말하는 권력은 필수적이고, 재력이나 무력은 부차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이 조건들은 남자주인공이 성숙한 성인 남성으로 완전히 기능하는 ‘완성된 남자’라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여성에게는 단 한 명의 파트너만이 용인되기 때문에, 이 남자는 ‘작중 최고의 남자’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로판에서는 황제라는 계급이 제시된 이후로 왕이라는 계급이 남주 레이블에서 사라졌습니다. 기사계급은 여전히 인기 있습니다만, 그것은 이 계급으로 추종하려는 가치가 앞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최고 권력자가 아닌 경우 최고 권력자가 아끼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언급이 반드시 나옵니다.

     
  2. 남자주인공은 발견자입니다.

    소외된 존재인 여자주인공의 특별함, 꺾이지 않았던 여성적 미덕, ‘다른 여자와는 다른’ 여주를 발견하고 유일한 이해자가 되어주며, 그녀의 숨겨진 미덕을 밝혀주는 기반이 됩니다.

    역으로 남자주인공이 심리적 문제가 있거나 아웃사이더고 여주가 그것을 보듬어주는 ‘이해자’인 경우도 꽤 많죠. 이쪽도 결국 남주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여주를 발견하고 받아들여 ‘나를 이해해주는 너’라는 미덕을 칭송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사실 발견은 ‘특별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떄문에 발견자는 많은 경우 ‘너만은 다른 여자와 다르다’, ‘너와 같은 여자는 없다’ 또는 ‘아무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둘만은 서로를 이해한다’와 같은 말을 하는데요, 이 말은 시작부터 ‘폐쇄된 둘만의 세계’를 목적합니다. 상대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구속으로서 발견됨=특별함이 활용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운명적 종속, 대체재 없는 유일함, 폐쇄된 관계”를 담보합니다.

    발견자인 남자는 여주를 진흙탕의 보석인 여주를 건져 진흙을 씻어내고 세상에 드러냅니다. 즉, 발견자는 승인자이기도 합니다. 남성이 그녀의 진가, 내면에 숨겨진 가치를 인정=승인했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을 통해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고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3. 남자주인공은 가이드-구원자의 역할을 갖고 있습니다.

    남주는 여주를 진흙탕 같은 세계에서 꺼내서 보석상자로 안전하게 이동시켜주는 가이드입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온실속의 화초’일수록 가치 있는 여성임을 상징하고, 때문에 이동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 그럴 수밖에 없는 강제성을 전제합니다. 옛날 로판은 여주가 여행을 떠난다는 게 꽤 있었는데 로판도 협의의 로맨스화 되면서 이 구도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행은 대표적인 성장의 코드)

    남주는 여주가 본 적 없는 세계로 안전하게 이동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이며, 그 세계를 알려주며 편입시켜주는 구원자입니다.

    문제는, 남주가 여주를 인도한 최종적인 세계는 폐쇄된 세계라는 데에 있습니다. 더 넓고 광활한 세계로 나가자고 하지 않고 집에 가둡니다. 이는 흔히 집착 감금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너무 사랑해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식의 대사와 함께 출력되며 해피엔딩으로 처리됩니다.

    이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완벽한 보호의 상징. 강력한 남성에게 완벽하게 보호받는, 귀한 여성이 되었다는 상징.
    2. 가정만 주어졌던 여성이 상상할 수 있었던 한계.
    3. 타인의 피로함에서의 도피. 여성은 끊임없이 평가받으므로 외적 평가가 절정에 달했을 때 사라지기를 원하는 욕망.

     
  4. 남자주인공은 대리자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 독자가 실제로 되기 원하는 것은 여주가 아니라 남주에 가깝습니다. 남주는 여성 독자가 실제로 갖길 원하지만, 여성으로서 욕망하면 안 되는, 여성성을 손상하는 것들인 ‘권력, 재력, 폭력, 성욕, 무례함, 솔직함’의 집합입니다. 여성독자는 여주를 통해 그런 자질을 가진 남주를 소유함으로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이죠.

    이건 현실적인 (성)선택에서도 꽤 적용됩니다. 창작물에서 ‘남에게 까칠하고 싸가지 없는 남자’가 인기 있는 것은 ‘바람 피지 않을 것’이라는 판타지도 있지만 ‘그런 남자가 나에게만은 다정하게 구는 특별함’, ‘그런 남자를 길들였다는 정복감’ 또한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남자를 길들여, 자신이 할 수 없는 폭력을 대행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로맨스에서 대체로 남주는 여주 대신 ‘복수’를 해 줍니다. 그로 인해 여주는 자신의 여성성을 손상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합니다.

     
  5. 남자주인공은 ‘여성 독자의 복수의 대상’입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지금 여주와 여성 독자를 분리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여주와 여성 독자는 다른 존재입니다. 여성 독자는 가상의 남성을 사랑을 통해 지배해 무릎 꿇리고 반성시켜서 나의 도구로 삼는 이야기로 현실에서 받아왔던 부당함과 분노, 모멸을 해소합니다.

    많은 로맨스는 ‘부당함에서 시작하는 복수의 이야기’입니다. 부정당해왔던 지배욕의 출구이자 존중되지 않았던 성욕의 인정 투쟁, 억눌려왔던 분노의 해방구입니다. 로맨스 독자들의 반응에서 남자주인공에 대한 정복욕과 복수심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경우 독자들은 이를 스토리의 탓으로 돌리며 부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스토리가 인기 있는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여성 캐릭터의 대표적 속성

 

  1. 실존불가한 여성적 미덕의 구현체.

    결론부터 설명하자면, 여자주인공은 여성 독자, 인간이 절대 실현할 수 없으나 여성에게는 강요되는 ‘여성적 미덕’의 구현체입니다. 흔히 로맨스의 독자가 여주에 이입한다고 보지만 여주를 보는 독자의 시선은 이입이 아닙니다. ‘평가자’죠.

    독자는 저 주인공이 내가 편들어줄 만한 올바른 여성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평가합니다. 여주는 ‘여성의 미덕’에 부합하면서, 동시에 독자가 곁에 둘 때 득이 있을 것 같은 인물이어야 합니다. 이 득은 물질적 이득이기도 하고 정신적 이득이기도 합니다.

    길리언 플린은 독자들이 여성 캐릭터를 ‘친구로 두기 좋은 인물’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지적했죠. 여성 독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아마 여성이 함부로 규범에 맞지 않는 위험한 인물 또는 작품에게 이입했을 시 사회적 평가가 훼손된다는 위기감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여주의 ‘시어머니’, 어머니도 아니고 시어머니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여자주인공은 사회적 규범에 맞춰져야 합니다. 부정적인 면모도 사회적 규범이 허락하는 안에서만 통용됩니다. ‘거슬리면’ 안 됩니다.

     
  2. 여자주인공은 수동성을 가집니다.

    여기서 수동성은 흔히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남에게 휘둘리는 것, 남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작품에서 이것은 ‘여주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고 보는게 옳습니다.

    예전에 제가 한참 키배꾼일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자가 수동적이라고 하는 놈들 중 육첩반상을 받아먹는 게 수동적이라고 말하는 놈들을 본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수동성은 이와 같습니다.

    이런 수동성은 여성 독자의 이중적인 욕망을 해소해 줍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강간이 있습니다. 여성향의 강간 판타지는 일반적으로 여성으로서 드러내면 치명적인 성욕을 남성 캐릭터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 활용됩니다.

    수동성은 특히,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여성에게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지고한 여성성’이며 ‘고귀함, 높은 신분의 상징’입니다. 로판에서 귀부인들이 싸우는 장면에서 잘 보이는데, 귀부인들은 대부분 이중삼중으로 둘러치는 말로 공격을 하죠. 그게 ‘고귀하고 우아한 여성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주는 사랑받고, 미덕을 찬양받는 위치입니다. 남주와 조연들은 여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육첩반상을 갖다주고 희생합니다. 심지어 순결한 여주는 육첩반상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 육첩반상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구조적으로 여주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대신 말하고 행해서 채워주는 캐릭터, 대리자인 남주 외에도 시다바리가 되는 캐릭터를 주변에 둡니다. 이런 우회적인 부분을 지적하면 독자들이 말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조연이 이래서 잘못한 거고 조연2가 이래서 여주 대신 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대체 왜 그 캐릭터를 거기 뒀을까요? 왜 그런 설정을 깔고 세팅을 했을까요? 캐릭터의 말과 설정이 아니라 그 구조에서 욕망이 더 잘 드러납니다. 저는 그런 말이야 말로 ‘주인공이 책임을 회피하고 순결한 피해자인 걸 독자들이 좋아하고, 그를 옹호하고 싶어한다’ 라는 증거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주가 ‘여주 대신 욕해줄 캐릭터’의 역할을 갖고 있다는 건 많이 지적된 바입니다. 남주를 비롯해 그런 시다바리들, 대신 무엇을 해 줄 캐릭터를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여주는 자신의 행동이나 발언에 책임을 질 필요 없이 여주의 필요와 독자의 욕구를 채워주고 ‘선량함과 순수함’을 보존하며 남을 다루는 ‘고귀한 여성’이 됩니다. 이것이 ‘수동성’입니다.

     
  3. 여자주인공은 선량하고 순수하다는 특성을 가집니다.

    악녀로 나오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는 방향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고 핍박과 오해, 피해로 점철된 과거가 변명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과 연관되는데요.


     
  4. 여자주인공은 피해자(약자)의 속성을 가집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여성은 잘난 척 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걸 알고 그것을 이용해 사랑받는 여자’는 ‘여성의 규범’에 어긋닙니다. 독자들도 거부합니다.

    여자주인공은 장점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최소한 자기 입으로는 말하기 힘듭니다. 장점이 개성일 때, 장점을 부각시키기 어려운 캐릭터는 이야기를 갖기 어렵습니다. 사실 현실의 여자도 이런 문제를 갖고 있고, 여성은 자기 자신을 불행 외의 방법으로 부각하는 방법을 얻기 힘듭니다. 대표적으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같은 말이 있습니다.

    정희진 씨 말을 인용하자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자원 두 개가 외모와 피해’입니다. 그 중 외모는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여성의 규범에서 어긋납니다.

    여주는 많은 경우 불행이나 취약한 지위로 인해 이용당함, 불행해짐으로서 자신보다 급이 높은 남주 앞에 나타날 수 있는 포지션이 됩니다. 이 때 많은 경우 피해가 곧 로맨틱 관계 성립의 중요 포인트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폭력배나 치한에게서 남주가 구해줌).

    피해받은 여주는 피해로 인해 남주를 비롯해 주변인의 관심과 보호를 받는데, 이게 귀한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와 같습니다. 피해로 인해 그녀는 ‘약함’이라는 여성성=매력을 얻고, 보호=수동성이라는 지고의 여성성을 획득합니다. (동시에, 메리수의 패턴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음)

    독자 또한 주인공의 피해를 동정하고 회복을 응원함으로서 주인공이 사랑받거나 최후의 보상(해피엔딩)을 받아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잘난 여자가 연애해서 행복해지는 건 거부감을 삽니다. 어떤 의미에서 피해-불행은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여자’를 만드는데 최적의 요소인거죠.

    이 부분에서 약간 한일 차이가 있는데 한국은 ‘순결한 피해자’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반면 일본은 ‘백치 여자’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차이를 보입니다.

     
  5. 여주인공은 욕망하지 않습니다.

    수동성과 연결됩니다만, 여자주인공은 직접 욕망하지 않습니다. 욕망한다는 것은 악녀, ‘부도덕하며 비난받아야 마땅한 여자’의 조건이며, 여성이 욕망하는 것은 ‘주제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사랑-가정-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회의 기준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여자주인공은 ‘지위, 권력, 폭력, 성욕’을 욕망하지 않고, 특히 권력을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높게 평가받는 여성성인 ‘순수성’을 인정받아 권력을 얻습니다. 여주인공은 쟁취하는 위치가 아니라 받는 위치에 있으며, 욕망하고 쟁취하는 듯 보였던 여주인공도 대부분 남주의 지위에 의하여 ‘받는 위치’ ‘신분 상승’ ‘안락함’을 얻게 됩니다.

    말했듯 욕망은 일반적으로 악녀의 조건이며, 즉 욕망하지 않음은 ‘선함’의 증거가 됩니다. 보통 여주의 적으로 나오는 악녀들은 대부분 사랑을 거침없이 쟁취하려고 하고, 성욕을 드러내며 권력-성취욕도 강합니다. 이 악녀들이 대부분 뒤집으면 남주의 상에 부합한다는 점은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요즘 페미니즘 붐도 있고 해서 안 그런데 뭔 소리냐”라고 합니다. 요즘도 이렇습니다. 다른 시도를 한다는 작품도 소수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상의 예시를 <소녀들의 심리학> 발췌로 설명해 볼까요.

 

이상적인 소녀는 신체적으로 완벽하다. 완벽함이란 결점없는 신체만은 아니며, 간접적인 면과 중재적인 면도 포함한다. 이상적인 소녀의 진정한 완벽함은 억제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을 조종함으로서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에 있다.

이상적인 소녀의 특징을 정리했을 때, “이상적인 소녀는 멍청하지만 조종적이다. 의존적이고 나약하지만 권력을 얻기 위해 성적 매력과 낭만적인 관계를 이용할 줄 안다. 인기가 있지만 피상적이다. 건강하지만 운동을 썩 잘하거나 강인하지는 않다. 행복하지만 지나치게 명랑하지는 않다. 그리고 가식적이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여주의 조건은 여자 독자의 사회적 한계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욕망의 기점은 “이입”에 있지 않습니다. 로맨스의 욕망은 ‘여성이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고 배워왔던 사회의 규칙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로맨스는 여성의 ‘욕망함’을 숨기기 위해 많은 장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협의의 로맨스에서 특히 많이 팔리는 집착, 소유욕, 강간 소재는 그것이 열광적으로 사랑하며, 집착하고, 성적 욕망을 폭발시키고 싶은, 드러낼 수 없는 여성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은폐함과 동시에 강렬하게 충족해주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백합이 마이너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주무시던 백합러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이제 독자는 집착과 굴복을 로맨스의 필수요소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로맨스의 독자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들은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온화한 감정만으로는 남편에게 의존적인 ‘아내’라는 자리와 아내로서 보장되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상 정신 상태의 집착광’을 호명하며, 그런 집착광, 의존증자가 아니면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게 너무 넘쳐나서 ‘진짜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형태로 사회로 재환원되고 있다는 거죠. “가상이 현실을 침범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덕적 강박.

(이 파트는 후의 질답에서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추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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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향 컨텐츠에서 자기가 보는 작품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독자의 태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로망띠끄에는 오래전부터 보면 강간, 불륜, 근친 소재를 금지한다는 공지가 있습니다.

 

저는 대략 6년 전쯤에 로망띠끄에서 ‘너희가 강간물을 쓰니까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범죄자들이 생기지 않느냐. 너희들 때문에 피해자가 생긴다. 너희들이 여성인권을 하락시킨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분들은 되게 혹해서, 들고 여자들을 공격하기 좋은 논리입니다. 딱히 지금이 아니라 정말로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도덕과 윤리를 이유로 여성들의 컨텐츠를 공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내실이 없고 피상적입니다. 로맨스에 한정하여, 도덕을 이유로 컨텐츠를 공격해야 한다면 왜 사적보복은 비판하지 않습니까? 온정적 가부장은 여성인권을 하락시키지 않으며 도덕적입니까?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사랑을 이유로 목숨도 재산도 권력도 여주에게 바치라고 하는 남주의 빌딩은 윤리적입니까?

 

아무도 이런 구도를 비도덕적이라고 소리내어 비판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를 따지고 특정 소재를 금지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 소재가 정말로 사용되지 않았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강간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메이저한 소재입니다. 여성들이 드러내기 힘든 성욕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성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성향 장르는 표면적으로 강간을 배척합니다. 그래서 강간이 사라졌는가? 아뇨. 지금도 강간은 여전히 잘 팔립니다. 집적 비난받는 것은 ‘알기 쉬운, 통념적인 강간’뿐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로맨스는 여주의 불행한 사정을 이유로 성적 거래에 응하게 하거나, 속임수 또는 계략을 써서 관계하거나, 다정하게 거절 할 수 없는 관계를 ‘남주가 리드하는 섹스’ ‘여주가 거절하다가 쾌락으로 인해 응하게 되는 섹스’로 소비합니다.

 

어떤 작품이 강간이 나오니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앞의 시츄에이션을 포함해서 여주의 의사를 확실히 확인 할 수 없을 때 남주가 성적 접촉을 하는 것에 환호하는 것, 강압적인 관계를 사랑해서라고 독자가 변명해주고 당의정을 씌우는 걸 발견하는 건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의 의사가 확실치 않은 상태로 관계를 맺는다는 스토리도 사실 위험한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저 겉보기에 문제가 없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작가들도 처음엔 거부했으나 좋아해서 응하게 된다는 구도를 많이 쓰죠. 최종적으로 사랑으로 합리화시키면 모두가 좋아합니다.

 

저는 정말 스트레이트하게,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강간물을 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것이 사랑이다 아니다, 이것이 로맨스다 아니다를 논하고 있습니다. 왜 그게 중요하죠? 사랑하면 강간해도 됩니까? 사랑하면 강간을 안 하던가요? 설마 그것이 강간이 아닌 걸로 보입니까? 대체 그게 논의의 필요가 있을까요?

 

이게 제 작품에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여성작가와 독자들은 도덕적인 징벌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현실의 범죄를 가상에서 재현했을 때 더욱더 세밀하게 우회하거나, 아닌 척 하거나, 합리화시킬 단서를 찾아 동분서주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까는 너희들도 다 빻았다고 말하기 위해 이 파트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현실과 가상을 그대로 등치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작품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정말로 표면적인 것만 갖고 논합니다. 기준도, 관점도 없습니다. 뜨거운 도덕의 수호자들이 정말로 신경쓰는 것은 ‘외부, 사회의 시선’입니다.

 

그저 외부가 나를 타격하지 않을지, 내가 최신의 도덕을 추종하여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지, 내가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전전긍긍합니다. 그 상황에서 장르와 장르 독자의 저질화를 탓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직시하지 않고, 합리화하고 꼬아가며 ‘도덕’의 개념을 오염시킵니다. 제일 심각한 문제가 바로 이 ‘오염’에 있습니다.

 

현재 페미니즘까지 포함하여, 이것이 여성향 판이 오랜기간동안 가지고 있던 문제입니다. 이 무지와 결합한 도덕적 합리화가 판 내부의 담론을 방해하고 가시성을 떨어뜨리는 문제를, 저는 여러 번 발견했습니다.

 

사회가 순종적인 여성을 원할 때 독자는 순종적인 여성을 추종했습니다. 내면이 강하고 현명해 현모양처가 될 수 있는 여자를 원하면 그것을 추종했습니다. 밥벌레가 아니라 1인분 할 수 있는, 남자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여자를 원하면 그 상을 추종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드시 전 세대의 여자는 후려쳐집니다. 성녀다, 주체성이 없다. 1인분 못한다. 그러나 주체성이 뭔지도 합의된 적,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와 좋아하는 여캐를 그 주체적 상 안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 다들 안달했습니다. 욕을 먹을까 겁나서 동시에 사회의 신여성을 추종하며 과거의 미덕이던 여캐를 후려치는 거죠. 그게 도덕이고 윤리일까요? 과거 시대의 여자들은 다 멍청이일까요?

 

자주 지적되는 로맨스의 폭력성에 관해서도, 저는 그것이 여자들이 겪었던 현실을 버티기 위해서 소비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나를 홀대하고 폭행하지만, 결국은 나를 사랑할 것이고 잘못을 빌 것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아편인거죠.

 

비판은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도를 현재까지도 다들 생각 없이 써먹고 있는 부분이 있고, 너무 과하며,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것이 폭력임을 직시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나와는 다른 빻은 사람이라고 욕하며 자신을 높이면 대체 무슨 상황이 나아집니까?

 

많은 사람이 도덕과 윤리를 관점이 아닌 고정된 형상으로 이해합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많은 경우 도덕이 구습의 잔재이며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 구습의 도덕으로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후려칩니다.

 

도덕적 강박은 도덕적인 작품을 낳지 않습니다. 도덕적 강박으로, 나는 도덕적이라고 강변하기 위해 벌어진 수많은 배척과 눈가리고 아웅 속에서 우리는 왜 그것이 문제인지, 왜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지 이야기 나눌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현실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우리가 그것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해할지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판옵티콘의 죄수처럼 어떤 남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시선이 로맨스 판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올바르다고 믿으며 외부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장르에서 너무나 많은 기회를 망쳐버렸습니다.

 

 

#

어떤 분들은 작품이 도덕,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후가 다릅니다. 도덕적인 작품이 우세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컨텐츠가 아니라 세상의 규칙을 먼저 바꿔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도덕, 윤리적인 작품을 보면 받아들이질 못합니다. 일단 장르에서 말하는 도덕, 윤리의 기준이 공허하고 왜곡된 탓이 클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여태까지 알아왔던 ‘형태로서의’ 도덕과 윤리와는 일단 다릅니다.

 

이 시장은 그런 분들이 말하는 ‘좋은 작품’이 나와도 그걸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줄 기반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은 ‘여태까지 접하지 못했던 것’이고 ‘재미의 방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노잼’이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장르가 현실에 기반해 있다고 계속 말해왔습니다. 로또 1등의 꿈이 현실적인 욕망입니까, 세계평화가 현실적인 욕망입니까? 세계평화가 개인에게 재미있을까요? 대중매체는 보수적이고, 로맨스는 보수적입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매체의 책임일까요?

 

우리는 살인이 창작물에서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지만, 살인이 왜 문제인지 충분히 교육받으며 어느정도의 징벌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창작물의 살인은, 살인 그 자체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대체 문제는 무엇에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또는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후대의 교육에 실패한 책임을 전적으로 창작물, 심지어 가시성이 떨어지는 텍스트에 일방적으로 전가하며 자신은 거기에서 책임이 없다는 듯이 굽니까? (현재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되는 창작물은 대부분 영상, 실사 영상이며 배급에 있어서도 공중파나 스크린 등 거대 자본을 가진 미디어임)

 

편안하게 남 탓하기 이전에, 본인의 미디어 리터시티는 어떠합니까? 자신의 피보호자에게는 보호자로서 어떤 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은 어떻게 교육시키고 계십니까?

 

대중이 선택하기 때문에 그 매체가 팔리고, 재생산됩니다. 그런 걸 싫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작품, 텍스트들.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지 못해 순위권에서 밀려나고 있지요. 세상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품이 소비되는 세상을 원한다면, 그런 가치가 추구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비틀린 ‘도덕’들이, 잘못 이해되는 ‘윤리’들이 그나마 소비되고 있는 것처럼요.

 

 

#.

제가 여태까지 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은 “우리 순수한 로맨스를 공격한다”라고 합니다. 순수한 사랑의 이야긴데 그걸 부정한 지배와 욕망의 이야기, 남성에게 의존하는 이야기로 본다 이거죠. 그 관점 자체가 이미 도덕적 강박의 증명입니다. 대체 왜 우리가 ‘도덕적’이여야 합니까?

 

우리는 윤리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은 비윤리, 비도덕성의 탈출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로맨스를 통해 충족되지 않는 공격성과 지배욕과 성욕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며 ‘우리는 도덕적이다’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현실과 창작물의 사이에서 창작물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지, 현실에서 그것을 적용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어떤 관점으로 해독할지 등,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들의 진행을 위해서는 자신이 왜 이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직시가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윤리이고, 도덕이고, 진보입니다.

 

저는 소설을 쓰면서 그런 직시가 이루어지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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