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올린 글을 쓸 때 난 이융희 팀장의 글을 보면서 굉장히 감정적으로 불쾌해진 상태였다.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담겨서 글을 썼는데 피차 감정이 상하게 된 경우가 되어서 유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쓴다.

 

 

일단 이융희 팀장이 불쾌해했다는 부분부터 보자. 이융희님은 자신이 경향신문 칼럼에서 문학의 매체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서 대중한테 다가가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내용이 대중 친화적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어제 텍스트릿에 쓴 글에서는 저 말이 일간 이슬아, 차도하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 웹드라마와 같은 문화 매체 일반에 적용되는 얘기이며, 내가 저 얘기를 웹소설 <-> 단편 소설 플랫폼이라는 작은 프레임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이융희 팀장이 웹소설 연구자라는 점에서 비롯된 대인 논증의 오류라고 했다. 웹 형식에 맞춰서 콘텐츠 내용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매체 일반의 경향성이기 때문이다(이융희 팀장은 이 과정에서 내가 인터넷이라는 매체에 맞춰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웹소설 밖에 없다라는 전제를 달았다고 한다).

 

 

난 여기에서 반례를 들고 싶다. 인터넷에서 중단편 소설을 써서 성공하게 된 작가들의 입장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는 김보영, 듀나, 김초엽의 인터뷰다.

 

 

 

어떻게 퍼블리싱되느냐에 따라 글 쓰는 게 달라지나요.

 

 

듀나 제 경우, 의도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연재물일 경우 그 리듬에 따르게 되더라고요. 이건 대부분 연재물이 그럴 거예요. 웹소설만의 특징 같은 건 아니죠.

 

 

김초엽 저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고, 약간은 조절해요. 웹으로 공개되는 글은 좀더 재밌게, 가볍게 읽을 수 있게 써야겠다 생각하고, 문예지나 책으로 묶여 나오는 글은 독자가 천천히 읽지 않을까 기대하며 쓰긴 해요.

 

김보영 저는 인터넷 지면과 출판책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게임시나리오/웹소설은 완전히 달라요. 그냥 완전히 다릅니다. 이건 인지공학적인 문제인데 화면이 작아요. 게임시나리오도 텍스트창이 작죠. 플레이 화면을 가리면 안 되니까. 더해서 짧게 끊어서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봐요. 그러면 독자의 기억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생겨나는 특징들이 있지요.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48203.html

 

 

 

정리하자면 듀나와 김보영은 종이책과 인터넷 지면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김초엽은 차이를 둔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터넷에 더 친화적인 작가는 듀나와 김보영이다. 듀나는 원래 인터넷에 글을 올리다가 출간 작가로 데뷔하게 된 경우고 김보영은 SF 공모전으로 데뷔했지만 그 대표작 대부분이 인터넷에 발표되었다. <다섯 번째 감각>, <종의 기원>, <스크립터>, <01 사이>, <저 이승의 선지자> 열거한 작품들은 모두 인터넷에 발표된 작품으로 200~400매 사이의 분량을 지니고 있다. 저것은 잡지 같은 데서 작가한테 일반적으로 할당되는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종이 지면이 아닌 인터넷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보영은 <얼마나 닮았는가>의 작품 후기를 쓰면서 일반 문학에서는 80~100매 정도의 짧은 분량만을 한 사람한테 할당하는데 SF 작가한테는 세계관을 설명하기도 버거운 짧은 양이라고 말했다. 저것은 문학동네 잡지에 김보영이 <아니무스의 저녁>을 실었던 경험에 대한 얘기이고, 김보영 자신의 작품 세계는 그렇게 한정된 분량만을 제공하는 문예지 지면보다 더 방대한 분량을 제공하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졌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물론 김보영도 자신이 웹소설을 쓸 때는 매체에 맞춰서 글쓰기의 변화를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종이책 -> 인터넷의 변화가 아니라 일반 소설 -> 웹소설의 변화다. 인터넷에 올리는 중단편 소설에는 종이 지면과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굳이 저 인터뷰를 참고하지 않아도 중단편의 장르문학이 일반적인 종이책과 다르지 않게 쓰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사실 중단편만 놓고 보면 인터넷에 올라온 장르 문학과 문단 문학 사이에서마저 형식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융희 팀장은 자신이 말한 웹 형식에 맞는 콘텐츠의 변화를 내가 웹소설로 국한 짓는 것이 웹 소설 연구자인 자신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일 년 넘게 이융희 팀장의 글을 읽고 때로는 논쟁도 벌이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편견을 가질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는 이융희 팀장이 인터넷에서 쓰이고 읽히는 중단편 소설이나 그 플랫폼에 대해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이융희 팀장이 칼럼에서 한 말이 국내 중단편 웹 플랫폼의 현실하고 너무나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이융희 팀장이 쓴 경향신문 칼럼의 일부 발췌다.

 

 

이렇듯 조금이라도 출구를 넓혀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행위는 분명 긍정할 만하나, 거기서 문학이라는 대상이 대중친화적인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문학에서 멀어지는 까닭이 접촉면이 적기 때문일까. 오히려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3252048005&code=990100#csidx02bb6ca0d4d9473a7ce49ab1fd68ada

 

 

 

이게 기가 막힌 주장인 이유는 한국의 웹 중단편 소설 플랫폼의 발달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위에서 말했듯이 듀나나 김보영 같은 작가들은 인쇄 지면과 웹 지면 사이의 차등을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울 웹진에서는 정기적으로 회지를 발행했었다. 중단편의 영역에서 인터넷에 발표되는 작품들과 종이책에 발표되는 작품들은 항상 상호 연결된 관계였다. 반대로 물어보자. 배명훈 작가는 문예지에 실리는 비평이 인물 중심의 독해를 넘어서서 확대될 필요에 대해 말했고, 김보영 작가는 문예지에서 SF 작가들한테 청탁을 하지 않는 행습에 대해 비판했고, 정소연 작가는 <오늘의 SF>를 창간하면서 해외의 SF 전문지보다 오히려 국내 문예지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들이 왜 그랬겠는가? 그들은 어째서 이융희 팀장의 관점에 따라서는 대중과 떨어진 채 안전하게 격리될 수 있는인쇄 지면에 자신들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했을까? 다시 말하지만 중단편의 영역에 있어서는 웹 지면과 인쇄 지면이 서로 연결된 관계였기 때문이다.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영역이 있기 때문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가려면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충해주는 두 개의 지면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던전 같은 중단편 플랫폼의 비교 대상은 당연히 거울이나 브릿지 같은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게 바로 내가 이융희 팀장이 국내 중단편 플랫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고민해본 적 없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거울이나 브릿지가 안착하게 된 것은 이융희 팀장이 말하는 “‘문학이라는 대상이 대중친화적인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을 통한 변화를 모색해서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좋은 의미가 있으면 인터넷 창구에서 읽어줄 거란” “나이브한 인식을 통해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터넷이라는 상이한 매체에 적합한 변화된 글쓰기를 고민했다기보다는 인쇄 지면에 직접적으로 호환될 수 있는, 자신들이 쓰고 싶은 글을 썼다는 사실은 이미 그 인터뷰에 나와 있다.

 

 

내가 저 칼럼을 보면서 황당함을 느꼈던 게 이 지점이다. 이융희 팀장은 던전이라는 중단편 플랫폼을 평가하면서 기존에 성공적이게 안착한 브릿지나 거울을 언급하는 대신에 차도하의 메일링 서비스를 언급하고 있다. 시를 직접 읽어주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차도하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는 분명히 색다르고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 성공적이게 안착한 중단편 소설 플랫폼을 내버려두고 런칭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메일링 서비스를 언급하는 건 얄팍한 접근이 아닌가? 이융희 팀장의 입장을 감안하자면 자신은 차도하 시인의 메일링 서비스와 던전을 반드시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 배치할 의도는 없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데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중단편 소설 플랫폼인 던전을 비판하면서 기존에 나온 중단편 플랫폼에 대한 언급은 비어 있다. 만약에 기존에 나온 중단편 플랫폼에 대한 인지가 있었다면 저 칼럼에서 사람들이 문학에서 멀어지는 까닭이 접촉면이 적기 때문일까. 오히려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와 칼럼의 일부분은 나왔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이어서 트위터에서 한 솔직히 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좋은 의미가 있으면 인터넷 창구에서 읽어줄 거란 인식은 나이브 하지 않나요?”와 같은 발언도 마찬가지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융희 팀장은 내가 웹 매체에 맞는 대중친화적인 문학웹 소설로 한정짓고 있으며 이는 이융희 팀장이 웹 소설 작가이자 연구자라는 데서 기인한 대인 논증의 오류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한테 도대체 '웹소설적인 글'이 뭔가라고 묻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웹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르 불문하고 읽어본 작품의 숫자가 손으로 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웹소설적인 글이 무엇인지를 논할 입장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굳이 답하자면 웹소설적인 글5500자 가량 되는 분량 아래에서 독자들한테 낯익은 여러 가지 코드를 배합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의 글이다.

 

<내가 키운 S급들>1화를 예로 들자.

 

 

<내가 키운 S급들>1화는 몬스터한테 공격을 당해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동생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동생을 잃은 형의 좌절감이나 ‘’양육자칭호의 부여로 인해서 능력치의 수직적인 상승같이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 주어진다. <내가 키운 S급들>은 형과 동생의 관계를 소개하기 위해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다루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독자들이 직관적이게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던져줄 뿐이다.

 

 

이 녀석은 끝까지 날 물먹였다. 네가 뭔데 날 보호해. 형은 나다. 부모를 일찍 잃어 학교를 중퇴해가며 어린 동생을 돌보고 키운 건 형인 나란 말이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개별적인 사건으로서 오블론스키와 카레니나 가정에 일어난 파열을 파고든다면 <내가 키운 S급들>은 일단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찌 보면 클리셰적인) 관계를 제시한다. 독자들은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형으로서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결국에 나보다 잘나가게 된 동생에 대한 열등감같은 감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예측한다. <내가 키운 S급들> 1화는 능력치가 수직 상승한 주인공이 동생을 죽인 몬스터 라우치타스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난다. 주인공한테 복수의 도구가 모두 주어졌기 때문에 그가 복수에 나서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독자들한테 낯익은 코드를 제시해서 이야기를 형성했다. 그 낯익은 코드에 개별적인 개성이 부여되는 것은 작품이 계속 전개되어가면서 일어날 일이다.

 

 

<내가 키운 S급들> 1화에 대한 내 분석은 웹소설에 대한 이융희 팀장의 관점과 그리 멀지 않을 거라고 짐작한다. 나는 웹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이융희 팀장의 웹소설에 대한 글을 읽었고 웹소설을 이해하는 내 방식은 그한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웹소설이 핸드폰 화면 규격에 맞춰진 매우 특수한 형태의 소설이라는 것은 이융희 팀장이 평소에 하던 주장으로 알고 있다. 웹 페이지에 올리는 중단편 소설에는 인쇄 지면과 형식의 차이를 두지 않지만 웹 소설을 쓸 때만 형식의 차이를 둔다는 것은 김보영 작가가 한 말이다. 이융희 팀장이 웹 지면의 형식에 맞춰서 콘텐츠를 고민하는 것은 매체 전반에 적용되는 말이며 이를 웹 소설에 한정지은 얘기로 프레임을 짜는 것은 내가 웹소설 작가이자 연구자라는 사실에서 착안한 억지다라고 한다면 난 반대로 중단편 플랫폼인 던전을 논하면서 어째서 인쇄 지면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던 문학의 취약한 대중성이 밝혀졌다와 같은 논지의 얘기를 했는지 되묻고 싶다. 기존에 나온 성공한 중단편 플랫폼은 인쇄 지면과 상호 보완하는 관계를 지녔는데 말이다. 당장 작가들 본인이 인쇄 지면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존 중단편 장르 플랫폼에 대한 인지가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이다  ,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분위기 난감해. 앞이랑 비교되고 앞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웃음)

저는 글을 쓸 때 독자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글을 누구에게 읽히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나 혼자만 볼 것이다 생각을 하고 써야 한다고, 글은 온전히 작가 자신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요즘 자꾸 의뢰를 받고 쓰게 되니까, 독자를 생각하게 되고, SF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서, 그걸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여전히 아무에게도 안 읽힌다는 생각으로 쓰는 게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친구들도 제 글 전혀 안 봤는데 이번에 책이 나와서야 봤어요. 제가 공짜로 주고 볼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웃음)

 

진아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거 아니에요?

 

이다  읽어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건 글이 나온 다음의 이야기고, 쓸 때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자를 생각하다보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달까요. 그럴 가능성이 큰 거 같아요.

 

 

http://mirrorzine.kr/features/38674

 

 

 

위는 김보영(이다) 작가의 인터뷰다.

 

 

이융희 팀장은 먼저 쓴 글에서 독자를 가정한 채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없다. 내가 경향신문 칼럼에서 말한 대중성의 고려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며 아서고든핌이 이것을 웹소설이라는 작은 틀에 넣어서 대중문학(웹소설) vs 예술문학(거울, 브릿지)의 이분법 구도를 짜는 것은 무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작 인터넷에서 오래 중단편을 올린 작가의 입장은 다른 거 같다. 그는 오히려 반대로 글을 쓸 때는 독자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난 반대로 이융희한테 묻고 싶다. 이융희 팀장 본인이 평소에 말해왔던 웹소설의 특징이 독자를 생각하다보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달까요라고 말하는 작가의 방향성과 일치한가? 인쇄 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왔고 자발적으로 회지도 발행한 집단의 방향성하고는 어떤가? 내가 단순한 이분법을 짜는 게 아니라 당신이 현실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웹 지면은 때로는 대여점 소설보다 더 종이책 친화적인 플랫폼을 제시하기도 한다. 다음은 한상운이 인터넷에 발표한 단편 소설과 대여점 소설로 낸 장편 소설의 비교다.

 

 

그해 여름 난 항주(抗州)에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 반쯤 휴양 차 간 것이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돈벌이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보수도 적당하고 일도 어렵지 않아 항주에 눌러앉게 되었다.

항주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경치도 아름답고 여자들은 교태가 철철 넘쳐흐른다. 광대한 미작지대인 북부 절강과 강소로부터 쌀을 운반하는 배가 끊임없이 운하로 밀려들고 육시(肉市)라 불린 돼지고기 시장에선 매일 아침 갓 잡은 신선한 고기를 팔았다. 바다에서 매일 수십 척의 생선배가 신선한 어패류를 가져오고 서호(西湖)에서도 계절마다 다양한 물고기가 잡혔다. 동쪽 교외 신문(新門) 앞에는 야채 시장이 있고 시의 동쪽 후조교(後潮橋)에는 선어 시장, 하안에는 게시장, 남쪽 성벽 밖에는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한약 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중심가에는 커다란 주루며 다방, 귀금속집, 공예품점, 그리고 고급연회장이며 도박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중원 어디보다도 복잡한 대도시지만 시내 전체에 바둑판처럼 운하가 깔려 있어 도시 반대편까지 움직이는 일도 간편하다.

 

2006년에 한상운이 인터넷에 발표한 단편 <그해 여름>

(https://teen.munjang.or.kr/archives/2323 )

 

 

 

그해 여름 난 항주抗州에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피곤해 반쯤 휴양 차 간 것이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 일을 하나 맡았다. 처음에는 용돈벌이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보수도 적당하고 일도 어렵지 않아 항주에 눌러앉게 되었다.

항주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경치도 아름답고 여자들은 교태가 철철 넘쳐흐른다.

광대한 미작지대인 북부 절강과 강소로부터 쌀을 운반하는 배가 끊임없이 운하로 밀려들고 육시肉市라 불리는 돼지고기 시장에선 아침마다 갓 잡은 신선한 고기를 팔았다.

바다에서 매일 수십 척의 생선배가 신선한 어패류를 가져오고 서호西湖에서도 계절마다 다양한 물고기가 잡혔다.

동쪽 교외 신문新門 앞에는 야채 시장이 있고 시의 동쪽 후조교後潮橋에는 선어 시장, 하안에는 게 시장, 남쪽 성벽 밖에는 중원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한약 시장이 있었다.

중심가에는 커다란 주루며 다루, 귀금속상, 공예품점 그리고 고급연회장이며 도박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흘에 한 번씩 장시가 열려, 코뿔소 가죽이며 물개 불알 같은 진귀한 물건을 취급하는 장사치부터 곡예단부터 야바위꾼, 점쟁이, 돌팔이 의원 등이 빡빡하게 거리를 채웠다.

그뿐인가.

도시 전체에 바둑판처럼 운하가 깔려 있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움직이는 일도 간편하다.

 

2008년에 출간된 한상운의 장편 소설 <무림사계>.

 

 

한상운은 단편 소설 <그해 여름>을 바탕으로 장편 소설 <무림사계>를 썼다. 여기에서 <무림사계>의 도입부는 <그해 여름>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차이가 있다면 문단이 갈가리 찢겼다는 것이다. 90~2000년대의 판타지 무협 업계는 대단히 보수적인 장소였고 길게 문단을 쓰는 일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좌백은 1995년도에 <대도오>를 쓰기 이전에는 직접 스토리를 짜지도 못했다고 한다. 남이 써준 스토리를 쓰면서 오랫동안 습작생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무협 소설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그만두려던 찰나에 뫼 출판사의 새로운 실장이 된 용대운이 좌백한테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쓸 권한을 주면서 <대도오>가 나오게 되었다. <대도오>마저도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건 너무 순문학스럽다라는 우려를 들었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저런 황당한 우려와 별개로 <대도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무협 업계의 관행을 모두 어긴 작품이 사실은 소비자들이 찾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1995년도에 나온 <대도오>의 초판과 2005년에 시공사 드래곤 북스에서 양장본으로 나온 <대도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한상운의 단편 <그해 여름><무림사계>로 개작되는 과정에서 문단이 갈가리 찢겼다면, <대도오>는 그 반대로 나뉘어 있던 문단이 이어붙여졌다. 생각해보면 길게 이어지지 않는 문단으로 글을 써야만 독자들이 읽어준다는 무협 소설 업계의 믿음은 위에서 짜주는 대로 스토리를 써야만 한다는 관행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미국, 일본, 유럽 어느 나라의 대중 소설을 봐도 국내 대여점 소설만큼 극단적으로 짧은 문단으로 이뤄진 소설들은 없었다. 심지어 <그해 여름>처럼 이미 긴 문단(사실 그닥 길지도 않지만)으로 완성된 글 같은 경우에도 대여점으로 가는 과정에서 문단을 한두 문장 단위에서 갈가리 찢어야만 했다. 핸드폰으로 소설을 읽던 시절도 아니고 종이책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해 여름>이 발표된 글틴 소설 마당은 다양한 장르의 문학이 공존하던 장소였고 적잖은 작품들은 문단 문학이었다. 저 당시에 한상운은 인터넷에 최초로 단편을 발표하는 경우였을 테고 상당수가 문단 문학으로 채워진 글틴 지면에서 웹 친화적인 형식의 소설을 고민했을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해 여름>에서 한상운이 모색한 글쓰기의 변화는 차라리 대여점 소설->일반 소설로의 변화다. 한상운이 <양각양>, <독비객> 같은 작품들을 쓸 때는 허용되지 않았던 방식의 글쓰기를 실험할 기회였던 것이다. 한상운이 발표한 <그해 여름>은 이후에 단편집 <보라의 트렁크>에 수록되어 출간된다. 웹 지면의 작품이 인쇄 지면으로 그대로 호환된 것이다.

 

 

같은 지면에 발표된 김보영의 <스크립터> 역시 마찬가지다. 김보영 작가는 자기 입으로 웹소설을 제외하면 인쇄 지면과 웹 지면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했고 <스크립터>는 거울 자체 회지로 발행된 바 있다고 알고 있다. <그해 여름><스크립터>는 많은 사람들한테 읽힌 단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해 여름>으로 한상운을 알게 되어서 그의 대여점 대표작들까지 찾아 읽게 되었다. 저 두 소설은 웹페이지라는 특정한 플랫폼을 고려해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대의 대여점 소설에 비하면 서점 소설에 가깝게 집필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작품들을 제자리에서 끝까지 읽고, 더 나아가서 나처럼 한상운의 대여점 소설들까지 따로 읽는 경우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문학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사람한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좋은 글을 읽고 싶다는 욕구도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욕구는 당연히 기성 문단이라는 제도와 별개로 성립한다. (내가 여기서 한상운의 대표작들에 대해 굳이 대여점 소설이라는 호칭을 고집하는 것은 저 소설들이 모두 다 문단이 길게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대여점 소설의 관행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며 한상운은 길게 문단을 이어쓸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빛을 발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이 글에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대여점 소설 vs 서점 소설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장르문학을 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웹에 올라온 중단편 소설들은 웹페이지에 맞는 형식을 고민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인쇄 지면과 상호보완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대여점 문학의 기준보다 더 딱딱했지만 그것을 소비해준 독자층이 지금까지 쭉 존재해 왔다는 얘기다.)

 

 

 

문단 문학 인사가 섣부른 편견으로 장르문학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이중의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첫째로 타자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공격적으로 표출해도 된다고 믿는 그 무분별한 오만함이 불쾌하고, 둘째는 그들이 늘어놓는 말을 듣고 있으면 들을수록 그들이 관습적인 문학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들의 무지함이 불쾌감을 준다. 나는 장르문학을 함부로 폄훼하는 사람들이 관습적인 문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고 있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타자에 대해 서슴없이 편견을 분출하는 이들이 무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져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융희 팀장의 칼럼을 읽으며 똑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이융희 팀장은 내가 먼저 쓴 글이 무식할 정도의 폭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데 난 그 반대로 이융희 팀장의 칼럼에서 장르소설에 대한 무지함을 느낀다. 던전 플랫폼이 비판 받을 부분이 많다는 사실 자체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매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콘텐츠의 변화도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에서 안전하게 격리, 보호 받고 있던 게 아니냐라고 하는 이융희 팀장의 접근은 잘못되었다. 창작물을 올릴 때 인터넷 지면과 웹 지면 사이에서 형식의 차이를 두지 않고, 스스로 회지를 발행하면서, 결국에는 여러 작가를 키워낸 플랫폼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한테 웹 지면은 인쇄 지면과 상호 보완하는 관계였으며 그들이 웹소설만큼 폭발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적은 없었어도 그들은 결국에 이어져 왔다. 난 이융희 팀장이 장르문학의 한 부분에 대해 무지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런 소리를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융희 팀장은 앞서 올린 글에서 내가 논쟁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억지스럽게 논쟁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기껏해야 트위터에서 몇 사람끼리 말을 주고받은 것에 불과한데 무슨 논쟁이 있었냐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본인이 기성 언론의 공개 지면에서 특정한 플랫폼을 상대로 비판하고 이에 대해 그 플랫폼 필진이 우리는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배타적인 의도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장르문학과 다르게 순문학에는 이런 플랫폼이 만들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저희를 가리키기 위해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해명까지 했다. 이게 어떻게 작은 일이란 말인가?

 

 

나는 반대로 어째서 제도권 문학을 지향하던 아마추어 작가들이 던전이라는 명칭을 정하고 순문학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가리킨 게 공개 지면에서 공격당할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제도권 문학에서도 서브컬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지금까지 익히 창작되고 소비되어 왔다. 박민규는 2000년대에 이미 일본 만화의 대사를 자기 소설에 집어넣었고 황정은은 <디디의 우산>에서 에반게리온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언급을 했다. 황정은의 작품 세계가 일본 세카이계 서브컬쳐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단 문학을 읽고 쓰는 이들 중에서 서브컬쳐의 향유자가 있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게 어째서 문제인가?

 

 

이융희 팀장이 여기에서 문제 삼는 것은 순문학이라는 표현이다. 순문학이라는 표현은 특정한 권력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상징권력을 재생산하는 성격이 있으며, 만약에 권력 체계 바깥에 있는 이들이 순문학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권력의 이름으로 그 권력의 수혜를 입지 못한 자신들의 스타일을 정의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습다는 것이다.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지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나는 지금까지 텍스트릿에 올린 글에서 의도적으로 순문학이나 본격문학대신에 문단문학이나 관습적인 문학과 같이 가치중립적인 표현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상징권력을 재생산하지 않고 그저 스타일을 지칭하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에 하나하나 태클을 거는 것은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한다. ‘순문학 쓰지 마세요밈을 만들려는 게 아닌 이상에야. 단순히 스타일을 가리키는 맥락으로서의 순문학이라는 단어는 제도 권력의 바깥에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상징권력을 재생산하지 않는 맥락에서 사용된 다음과 같은 예시를 보자.

 

 

 

1. “‘장르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소설이 과연 어떤 장르에 확실히 부합하는지부터 결정하자. ‘장르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도저히 힘든 소설들(굳이 말하자면 순문학에 더 가까운)을 보내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판타스틱 200812월호에 수록된 특집 코너 <대체 왜 내 원고는 거절당하는가>. 판타스틱, 노블레스 클럽, 노블마인 편집자들이 참여함.)

 

 

2. 듀나=“전통적인 한국 순문학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극도로 장르적이다. 순문학적 캐릭터와 사건들이 있다. 우리가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건 세계가 쉽게 바뀌지 않은 시대의 산물인데, 지금은 세계의 변화와 변화 가능성이 문학적 소재인 시대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2021592046748 )

 

 

3. “타임라인에서 던전 관련한 기사 이야기가 조금 나와서 한 마디 얹어볼까 합니다... 던전은 순문학플랫폼인가? 공식적으로 던전에서 순문학 작품이 연재된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던전지기들이 모두 등단을 목표로 하는-하던 순문학 작가들이기도 하고, 기존에 소설이 유료로 연재되는 플랫폼들은 있어도 순문학 작품들이 유료로 연재되는 온라인 플랫폼은 없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순문학플랫폼이라는 정의는 던전이라는 공간의 의의를 구상할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순문학 작품을 기존 플랫폼에 연재하려는 시도를 해본 작가들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플랫폼에 투고하는 것과 플랫폼을 직접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고...) 이미 기라성같은 기성 플랫폼등이 포진한 웹 콘텐츠 플랫폼 시장 던전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새로움은 순문학작가들이 참여중인 문학플랫폼이라는 사실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웹소설 플랫폼은 사이트 소개에 문학이 아닌 소설또는 웹소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략) *던전이 순문학이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할 때는 다른 장르들을 기타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해서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던전 필진의 박서련 작가의 타래에서 발췌. https://twitter.com/fancyshortcake/status/1243110877810667520 )

 

 

이융희 팀장은 자신이 인터뷰한 1세대 통신 작가들의 증언을 근거로 장르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호칭으로 제도권 문학을 가리키게 된 것은 장르문학도 형태가 다를 뿐 문학의 일부분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정체화하거나, 제도권 문학의 순문학이라는 호칭을 적극적으로 비웃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삭제된 트위터 계정에서 처음 저 얘기를 꺼냈을 때는 장르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호칭을 쓰는 게 일종의 미러링이라는 표현도 썼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제도권에서조차 순문학의 정의가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융희 팀장이 인터뷰했던 몇 명의 작가들이 우리가 90년대에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성 체제에 대한 반항의 의미였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오늘날의 장르작가들이나 독자들이 모두 다 통일된 의미로 미러링의 뉘앙스를 담아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발상이다.

 

 

내가 보기에는 1, 2, 3번 모두 다 특정한 스타일을 지칭하는 의미밖에 없다. 순문학은 그 자체로 장르화된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순문학이라는 명칭으로 그 스타일을 지칭할 수 있는 공감대가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한 맥락 아래에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권력질서의 재생산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고, 마찬가지로 순문학의 권위의식을 조롱하는 미러링의 맥락도 없다. (물론 순문학이라는 장르 자체의 스타일이 범위가 넓고 모호할 수 있지만 그건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장강명의 <노라>와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를 함께 품고 있는 SF는 대체 얼마나 폭넓은 장르인가?)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애매모호한 것은 그게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지, 제도적인 승인 절차를 말하는 것인지, 스타일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교하게 구분하고 가치중립성을 더하기 위해 문단문학이나 제도권 문학과 같은 명칭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 분명한 맥락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잡고 트집을 잡는 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것도 권력의 재생산이라는 맥락이 없다는 게 분명한 상황에서?

 

 

이융희 팀장은 앞서 쓴 글에서 내가 자신의 트윗과 트위치 방송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앞뒤 맥락을 삭제한 것에 분노를 표했다. 트윗에 대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일단 인용된 제 3자의 트윗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 글이 던전을 비판하는 칼럼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이해를 하고 인용을 했다. 정과리, 하응백, 이영도, 이상균, 이경영 일련의 작가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융희 팀장이 이영도를 순수문학이라고 가리킨 것은 맥락을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나는 매우 감정적인 기분 속에서 이전 글을 썼는데 그 때문에 더욱 감정적으로 논쟁이 흘러가게 된 것이 유감스럽다. 나는 내가 이융희 팀장의 트윗과 트위치 발언을 인용한 방식이 부적절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그것은 잘못된 방식이었다.

 

 

다시 그 얘기로 돌아가보자. 이융희 팀장은 트위치 방송에서 정과리와 하응백의 논의를 먼저 다뤘다. 두 사람은 한국 판타지 소설은 문학이 아니라 게임의 사생아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영도는 이에 대해서 문학이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융희 팀장 본인이 이상균, 이경영 같은 작가들을 만나서 인터뷰해온 결과 두 사람 다 나한테 판타지 소설은 게임을 텍스트화시키는 것이었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기 때문에, 이융희 팀장은 현실적으로 판타지 소설이 제도적인 문학보다는 게임의 텍스트였다라는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융희 팀장은 이영도와 이경영, 이상균을 비교하면서 이영도에 대해 순수문학으로서의 판타지를 추구하는 분도 계시죠.”라고 말했다.

 

 

이때 이융희 팀장이 이영도를 순수문학이라고 부른 것은, 일단 하응백과 정과리의 문학적 논의의 연장선에서 나오기도 한 말이지만, 이영도가 관습적인 문학의 이데올로기가 담긴 작품을 추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위에서 열거한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문학 권력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사용된 사례’ 4번에 추가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게 이 지점이다. 1번과 2번과 4번은 괜찮은데 왜 3번인 던전만은 이융희 팀장 본인의 표현을 빌려서 기존의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지형도를 오프라인 공간에서 온라인으로 이식한일이 되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1~3번 다 같이 스타일을 지칭하는 맥락이다(4번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다).

 

 

박서련 작가는 던전이 순문학이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할 때는 다른 장르들을 기타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해서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라는 해명글을 남겼다. 자신들은 순문학 <-> 주변부 문학과 같은 이분법을 재생산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이융희의 반응은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순문학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자신을 표방하는 것은 스타일로 기존의 문단 권력을 추상적이게 지향하는 것이 아니냐이다. 그는 이어서 그들(던전)은 자신들의 스타일이 '순문학'이라는, 본인(아서고든핌)의 말처럼 정의가 불분명하고 가치편향적인 스타일을 지향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위에서 말했듯이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모호한 것은 그것이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 제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던전의 경우에서는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호하지 않다. 순문학이 가치편향적인 것은 거기에 순문학 <-> 주변부 문학의 이분법적인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서련은 던전에서 순문학 플랫폼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런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던전의 경우에서는 가치편향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융희 팀장은 그 글을 뻔히 보고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순문학의 장르적인 스타일이 이미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특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판타스틱 인터뷰나 듀나 작가의 말에서 드러난다. 무협 팬덤에서는 좌백의 단편 소설 <호랑이들의 밤>을 읽고 순문학 같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호랑이들의 밤>은 정세랑도 걸어다니는 소설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좌백 본인은 <호랑이들의 밤>도 무협 소설이라고 얘기했지만 그한테 저 작품의 이야기 방식이 문단문학과 흡사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도 동의할 것이다. (인터넷에 있는 글이니까 간편히 볼 수 있다.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17401 )

 

 

무협 소설의 팬덤에서 <호랑이들의 밤>을 순문학 같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했듯이 문단 문학의 특정한 장르적인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융희 팀장은 작년에 나와 논쟁할 때부터 순문학이라는 명칭이 장르판에 나타난 것은 스스로를 문학으로 정체화하거나 기성 문단을 조롱하는 의미였다라고 했는데, 설마 자신이 인터뷰한 몇몇 작가들이 그런 말을 해서, 현재의 무협 팬덤이 순문학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좌백의 <호랑이들의 밤>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진 못할 것이다. 심지어 텍스트릿과 인터뷰한 20명도 되지 않을 작가들 사이에서도 순문학이라는 명칭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한 증언이 엇갈린다는 게 이융희 팀장 본인의 증언이다.

 

 

순문학이라는 명칭이 권력의 재생산 없이 특정한 스타일만을 가리키는 맥락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무관한 맥락에서 권력에서 파생된 언어로 특정한 스타일을 가리키는 게 스타일로 권력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상징권력과 상관없이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혐의에 적용되어야 한다. 근데 어째서 한쪽이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기성 질서에 대한 조롱과 미러링이고 다른 한쪽은 권력지형도의 이식이 되는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보통 문단 문학이나 관습적인 문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더 가치중립적이고 분명한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단 문학이나 관습적인 문학이라는 단어로 환원되기 애매하고, 상징권력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맥락에서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던전의 경우에서처럼 스타일을 지칭하는 맥락이 분명하고 권력의 재생산과 무관한 경우에는 상관이 없다.

 

 

이에 대해서 나는 제도권 문학’, ‘문단 문학어느 호칭으로라도 불릴 수 없는 던전이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면 대체어로 무엇이 있겠냐고 이융희 팀장한테 물었다.

 

 

이융희 팀장의 답은 이렇다. ‘그것을 왜 나한테 묻는가? 자기들 정체성은 자기가 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굳이 나한테 묻는다면 문학이라고 하겠다.’

 

 

내가 저 반응에 의아스러운 것은 이융희 팀장 본인이 스스로 말하길, 자신은 의식적으로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주변 사람들한테 제도권 문학으로 고칠 것을 권유하고 다닌다고 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더 분명한 의미가 담긴 표현으로 고치려고 한다면, 자신이 지지하는 대체어로 담기지 않는 맥락은 어떤 표현으로 담아야 하는지에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로 의아스러운 점은 이융희 본인은 현재 장르문학판에서는 장르의 코드가 훨씬 더 세분화되어가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늘 강조해오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문학이라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장르는 어째서 지우기를 바라나? 문단 문학이 유일한 방식의 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분명 문제지만 이미 실재하고 있는 장르적 스타일을 가리킬 이름을 지워내라고 하는 것은 장르적이지 않는가? 그것이 상징권력의 재생산과 연결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지워내라고?

 

 

한 가지 더 얘기하고 싶다. 내가 먼저 쓴 글에 대해서 위래 작가는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https://twitter.com/N91211/status/1243400354949038081

 

https://twitter.com/N91211/status/1243408208963596290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아서고든핌은 장르문학 단편 소설 플랫폼이 시스템을 갖췄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주장이다. 등단해서 청탁으로 돈 받고 글 싣는 문단 문학하고 브릿지나 거울을 어떻게 비교한다는 말인가?’

 

아서고든핌은 던전 작가들이 브릿지 플랫폼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 아닌가? 장르 작가들도 제도권 공모전에 응모할 때 자기 스타일을 바꿔가면서 쓰는데 특정한 플랫폼에서 자신들한테 맞는 스타일의 작품을 발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단 밑에 얘기부터 봐보자. 나는 위래의 주장에 동의한다. 브릿지 플랫폼에서 뽑히려면 그 플랫폼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 난 그게 잘못 됐다는 얘기를 한 것이 아니다. 플랫폼하고 맞지 않으면 그 플랫폼을 탓하는 대신에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게 옳지 않은가? 던젼처럼 말이다. 내 요지는 던전이 브릿지나 거울과는 다른 작품을 지향하는 플랫폼을 만들면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지칭한 것일 뿐이며 이융희 팀장의 표현을 빌려서 권력지형도를 이식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들한테는 자신의 플랫폼을 만들 필요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순문학이라고 부른 것은 권력 재생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가리킨 것일 뿐이라는 거다.

 

 

그리고 위의 얘기에 대해서 하자면, 나는 장르문학 웹 플랫폼이 시스템이 갖춰졌다고 말할 수준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발달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단 문학의 시스템이 재정적 인프라는 있지만 뿌리까지 썩어 들어갔다면 장르문학의 시스템은 재정적 인프라는 조금 부족해도 건강하게 발달하는 중이다. SF 어워드와 이상문학상을 비교해보자. SF 어워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보작 선정 과정에서 논란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현재는 특정한 기간 사이에 나오는 모든 작품을 심사한다. 브릿지나 거울 우수작까지도. 이상문학상을 타려면 문예지라는 좁은 지면 아래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작가들이 갑질을 감수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윤이형 작가는 자신이 단지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체제부역자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절필했다. 그렇게 총체적 난국 상태가 문단이다.

 

 

위래는 등단해서 청탁 받고 글 쓰는 게 더 좋지 않냐라고 했는데 문단문학에서 꾸준히 청탁을 받을 만한 작가는 SF에서 김초엽만큼이나 희소하다. 반대로 생각해서 박서련 작가나 한경신춘문예로 데뷔한 은모든 작가는 왜 던전에 글을 올리겠나? 대체 수익이 얼마나 나올 거라는 보장이 있는데? 발표 지면이 없기 때문이다. 박서련 작가는 2015년도에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데뷔를 한 이후에 몇 년 동안 청탁을 단 한번도 못 받았다고 한다. 전삼혜 작가는 2010년에 대산대학문학상을 타면서 문단 문학으로 데뷔했다. 그 이후로 청탁을 딱 한 번 받아봤다고 말한 걸로 기억한다. 전삼혜 작가도 브릿지에 계정을 팠다. 물론 전삼혜 작가는 브릿지에 별 다른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고 현재 자기 책으로 낼 작품을 쓰는 데 바쁘다고 하지만, 그 책들도 청소년 SF 작가로서 내는 작품들이지 문예지 문학은 아니다.

 

 

위래 작가 자신도 브릿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인지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는데, 브릿지에는 이미 문단문학 지망생들이 적잖게 활동하고 있다. 도저히 글을 올릴 데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조금씩 글을 올리고 있다. 장르문학에는 현재로선 불충분할지언정 거울하고 브릿지라도 있는데, 문단 문학 쪽에는 그마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문단 작가하고 장르 작가들을 저울 양쪽 위에 올려놓고 누가 더 불행한지 무게를 재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다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그런데 브릿지와 거울이 없는 문단 문학 쪽에서 작가들끼리 플랫폼을 만들면서 자신을 순문학이라고 가리킨 것은 권력지형도의 이동이라기보다는 그냥 자기 스타일을 지칭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융희 팀장은 자신의 글에서 내가 저열한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논란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이 몇 차례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이야기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리고 나한테 앞으로 이 논란 제기에는 더 이상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현실은 반대다. 나는 지난 일 년 사이에 이융희 팀장과 논쟁을 하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텍스트릿의 팀장으로서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이융희 팀장과 익명에 불과한 나는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을 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간에 사라져버려도 되지만 이융희 팀장한테는 지켜보는 눈이 있고 체면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부담감이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융희 팀장한테서 불충분한 답을 받아도 괘념치 않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융희 팀장이 나한테서 악의를 가정하고 내 말에 답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오히려 그동안 묻고 싶었던 세 가지를 묻고 싶다. 이것을 답할지 않을지는 물론 이융희 팀장 본인의 의사에 달린 일이다.

 

 

1. 당신은 <순문학은 없다>라는 칼럼에서 귀여니를 제도권에서 서브컬쳐를 배제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귀여니처럼 채팅 언어자신들이 소비하던 만화나 연애의 서사를 발현해내는 현상은 당대에 로맨스, 판타지 소설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지만 제도권의 어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미성숙한문화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저 글을 처음 읽을 때 대체 뭔 소리를 하나 싶었다. 00년대 초반에 귀여니가 한참 인기를 끌던 당시에 판타지 소설 팬덤에서는 귀여니를 극도로 적대적이게 여겼다. 귀여니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은 제도권 문인이 아니라 90년대 통신 문학의 대표자인 이우혁이었다. 굳이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성균관대라는 제도권에서 귀여니를 받아들이려고 했을 때 이우혁이 반발한 상황이었다. 이융희 팀장은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작인 에티우에서 이모티콘이 나온 것을 귀여니와 한 물결인 사건처럼 엮는데 굳이 말하자면 판타지 문학이라는 서브컬쳐에선 귀여니에 대해 잘못된 문학이라고 여기고 반발했다고 하는 것이 당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닌가? 이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투명드래곤>이나 <존나세>와 같은 풍자물마저 서브컬쳐를 이해하지 못한 제도권의 풍자물이라고 주장할 것만 같다.

 

 

이융희 팀장 당신의 연령대를 생각하면, 당신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는 10대 세대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통해서 당신은 오히려 그 당대에 대한 다층적인 진술을 거부하고 획일적인 이분법의 구도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는 마치 정과리가 90년대 판타지를 논하면서 미성숙한 아이들의 놀이 문화그들을 계몽해야 하는 어른이라는 두 가지 이분법을 제시한 것을 연상시킨다. 단지 상이 뒤집혀진 거울일 뿐이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서로 뒤집은 채 들고 있는 거울의 상 자체가 허상이다. 귀여니에 반대한 것도 엄연히 판타지 소설 팬덤의 역사가 아닌가? 당신은 그것을 왜 지워내려고 하는가?

 

 

만약에 당신이 학회에서 당대의 귀여니 현상을 제도권에 무시받은 서브컬쳐의 수난으로 단순하게 규정했을 때 제도권 문인들이 당신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들이 사실 서브컬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서브컬쳐 소비자들일 것이다. 물론 당신의 지인들은 당신이 쓴 글을 링크 걸고, 리트윗하고, 마음을 찍을 테지만 그들 중에서도 당신이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2. 나는 전삼혜 작가가 사실주의 소설과 SF 소설을 오가면서 보인 변화를 다룬 <전삼혜 - '분명함''불분명함'을 통해 들여다본 작품 세계>라는 글을 텍스트릿 자유 비평란에 올렸다. 전삼혜 작가 본인은 저 글의 논지를 유효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나한테 감사의 말을 남겼었다. 그리고 그 뒤에 당신은 <순문학은 없다>라는 칼럼을 쓰면서 장르소설은 순문학이라는 대척적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대비 구도는 무의미하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처음에 저게 웹 소설에 대한 얘기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근데 이제 와서 보니 당신은 웹 소설 <-> 종이책 장르 소설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당신이 웹소설에만 전문화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을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묻고 싶다. <순문학은 없다>는 웹소설에 대한 얘기인가, 아니면 장르문학 전체에 대한 얘기인가? 만약에 후자라면 전삼혜 작가와 그에 대한 내 비평은 당신이 바라보는 장르문학의 세상에서 어떤 곳에 위치해 있는가?

 

 

배타적인 제도 권력을 비판하고 없애려는 것하고 그 배타적인 제도 권력 안에서 발달된 문학적 관습을 모두 다 무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난 전자에 찬성하지만 후자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물론 제도권 문학의 관습이 모든 장르문학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르문학 안에서도 그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고 전삼혜의 경우가 그랬다. 전삼혜는 양쪽을 오간 흔적을 비교했을 때 더 흥미로운 작가다. 이융희 팀장이 쓴 <순문학은 없다>는 분명히 내가 올린 전삼혜 비평론 이후에 올라왔다. 만약에 <순문학은 없다>가 장르문학 전체를 포함하는 내용이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내가 쓴 전삼혜 비평을 부정하는 논지를 지니고 있다. 작가 본인은 내 비평을 유효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융희 팀장은 전삼혜의 작품을 불분명한 문단 문학분명한 장르문학으로 나눠서 본 내 접근이 부적절하다고 여긴 것이다. 난 대체 그게 어떤 연유인지 궁금하다.

 

 

3. 나는 텍스트릿에 먼저 올린 글(

http://textreet.net/index.php?mid=board_GybH00&page=2&document_srl=20411 )에서 파란미디어나 노블레스 클럽, 이타카, 시드노벨을 두고 대여점 체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장르소설 브랜드로 지목했다. 이들은 대여점 소설과는 다르게 긴 호흡의 문단을 쓸 자유를 허락하려고 했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려는 시도를 했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융희 팀장은 이에 대해서 대여점 소설과 서점 소설을 구분 짓는 것에 반대한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판타지 무협 업계에서 성실하게 교정을 보지 않고 무분별하게 질 낮은 책들을 뽑아내면서 독자들의 신뢰도를 낮췄다는 것은 사실 업계 내부인인 파란미디어 박대일 대표나 이문영 소설가의 입장이다. 박대일 대표는 귀여니가 인기를 끈 이후에 로맨스 소설 출판사들이 대여점이라는 고정된 소비층을 상대로 책을 마구 내는 관습이 생겨났고, 그래서 그런 흐름에 반대하던 자신은 근무하던 출판사 편집자 일을 그만두고 직접 출판사를 차렸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정을 꼼꼼하게 보고 소장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을 지향했더니 고정적인 독자층이 생겼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파란미디어는 대여점 체제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당대의 흐름에 거스른 것은 맞았다.

 

 

마찬가지로 서점용 소설을 지향했던 노블레스 클럽 역시 기존의 대여점 소설과는 다른 활로를 모색한 경우였다. 편집이나 교정을 꼼꼼하게 보고 1권 안에서 완결되는 내용을 추구한 것 역시 판매량에 따라서 조기 종결될 수 있는 대여점 체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 것이었다.

 

 

당신이 쓴 <마왕성 앞 무기점>을 읽는데 비문이 참 많더라. 작가가 속도감 있게 글을 쓰면서 비문이 발생하는 건 자연적인 일이지만 편집자가 그것을 교정하는 일을 방기했다는 것은 당시에 판타지 소설 출판사에서 편집에 소홀했다는 증거다. 이것은 이융희 팀장 개인의 작품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판타지 소설 업계가 문제였다는 얘기다. 이융희라는 사람이 어린 나이에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을 때 그가 도착한 업계는 그 젊은 청년한테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가이드라인도 제시하지도 못할 환경이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융희 팀장은 좋은 글이라는 것 자체가 제도권에서 분배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법에 맞는 글이 좋다라는 인식마저 물신주의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나 참혹하다.

 

 

나는 앞서 쓴 글에서 좋은 문학에 믿음은 문단 제도와 별개로 성립할 수 있으며 그 증거로 이영도 팬덤을 든 적이 있다. 이영도의 팬덤은 좋은 문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그 믿음은 제도권에 적극적으로 영합하기보다는 오히려 반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드래곤 라자>의 문학성을 놓고 국어 교사와 말다툼을 하는 학생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문학에 대한 믿음은 제도권과 별개로 성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드래곤 라자>를 읽게 된 학생들이 대여점에 가서 <마왕성 앞 무기점>을 집어온다고 해보자. 그 독자는 1 페이지에 하나씩 있는 비문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지불한 600원이 아깝다고 여기고 대여점에서 발을 끊게 되지 않을까? 이게 바로 교정 교열을 보지 않던 당대 판타지 무협 업계의 흐름이 오히려 독자들을 떠나게 하고 산업을 축소시킨 과정이 아닌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genrenovel&no=4062

 

http://orumi.egloos.com/4284536

 

 

이러한 일들은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다. 위는 한상운 소설가의 인터뷰고 아래는 이문영 소설가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이다.

 

 

한상운은 <양각양>, <무림사계> 등의 작품을 쓴 대표적인 신무협 작가다. 이문영은 특이하게 <구도>, <혈도>, <독랑> 같은 무협 중단편을 판타스틱에 발표한 작가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자면 저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한국 무협을 기피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김용이나 고룡 같은 작가들에 비해서 우연찮게 찾아본 한국 무협은 너무나 구렸기 때문에 도저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실망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물론 저 당시에도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긴 했겠지만 일반적인 독자들한테 어떤 작품이 좋은지 선별해주는 시스템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공통적으로 좌백의 <대도오>를 계기로 한국 무협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뒷날에 무협 소설을 쓰게 될 작가들마저도 한국 무협은 구리다 라고 하면서 글 읽는 것을 기피하게 한 것이 저 당시의 한국 무협이었다. 00년대의 대여점도 비슷하게 교정도 보지 않고 무분별하게 작품들을 찍어내었고, ‘좋은 작품이 무엇인가선별하는 주체가 부재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축소되고 시장이 게토화되는 추세를 낳았다.

 

 

때문에 노블레스 클럽, 이타카, 새파란상상, 시드노벨 같은 브랜드에서 서점 소설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고, 작가들한테 창작의 권한(이를테면 두 문장이 넘어가는 문단을 쓸 권한이라든지)을 강화하려고 한 것은 대여점 체제에서 한계를 발견하고 극복하려고 한 시도였다.

 

 

<마왕성 앞 무기점>은 판매량 부진으로 조기 종결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보니까 더 이어져야 할 시점에 황급히 끝나는 게 티가 나더라. 시드노벨에서 하나의 작품이 1권 분량 안에서 자기 완결적인 구조를 갖게 한 것은 작가한테 자율권을 준 것이다. 설령 판매고 부진으로 후속작이 안 나오더라도 하나의 이야기 구조 안에서 자기 세계를 완결할 권한을 준 것이다. 이는 당연히 대여점 소설 관행을 극복하려는 시도 중에 하나였다. 물론 시드노벨은 항상 대중과 소통하는 글을 지향해왔다. 하지만 <대도오>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대중성의 지향과 기존 체제에 대한 혁신은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것이었다. 00년대 서점용 장르소설의 지향점이 바로 그랬다(그들이 모두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내가 앞서 쓴 글들에서 저러한 주장을 했을 때 이융희 팀장은 출판 독자와 대여점 독자의 구분에 반대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비뢰도>, <달빛 조각사>처럼 대여점에서 서점으로 구매가 확대된 사례는 많기 때문이다.’ 라고 답했다.

 

 

저 답은 내 주장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나는 시드노벨, 노블레스 클럽처럼 처음부터 대여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전제로 출간된 작품에 대해 말하는데 이융희 팀장은 대여점 소설을 재밌게 읽은 독자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기를 선택한 사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것도 유효한 판매군이었겠지만 대여점 소설이 무분별하게 출간되면서 독자들이 떠나게 되었다는 것(80년대에 이문영과 한상운이 그랬듯이)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 작가들한테 더 창작의 권한을 주기 위해서 서점용 소설을 개척하려고 한 것에 대한 논의하고는 완전히 무관하다.

 

 

파란미디어 역시 대여점에 책을 비치하는 것하고 별개로 대여점 소설의 관행을 거스르던 출판사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파란미디어>에서 <마왕성 앞 무기점>이 나왔다면 일단 정식 출간 이전에 비문이 싹 다 고쳐졌을 거라는 말이다.

 

 

내가 대여점 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처음 남겼을 때 이융희 팀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여점 문화는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신인 작가가 신작을 냈을 때 그것이 전국에 총판을 통해 뿌려진다는, 지금의 문예지가 신인관리를 하면서 유지하는 구조를 보여줬다. 양판소가 쏟아져나온다는 비판도 받지만, 또 그때부터 10, 20년 이상 작품을 써오며 꾸준히 실력을 쌓아온 좋은 작가들의 데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는 사실 문단과 다를 바 없다. 2017년 신춘문예로 데뷔한 작가의 숫자는 108명이다. 우리는 그 중에 몇 명이나 기억하고 있는가?”

 

 

이융희 팀장은 대여점 제도가 문제는 있을지언정 문단과 다를 바 없다라면서 반대로 신춘문예 데뷔한 작가들 중에서 경력을 이어간 작가들은 얼마나 많냐고 반문한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게 이 지점인데, 문단 문학 <-> 장르문학의 이분법을 거부한다는 사람이 어째서 본인도 폐해가 있다고 인정한 시스템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단 제도를 가져오는가? 꼭 이런 적대적 공생 관계를 필요로 하는가? 그냥 둘 다 잘못되었다는 답을 내면 안 되나? 같은 시기에 문단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우리가 그래도 대여점 소설보다는 낫지 않나요?’라고 하면서 자기 위안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마왕성 앞 무기점>의 사례는 대여점 소설이 신인 작가한테 더 나은 글을 쓸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린 나이의 작가가 쓴 글은 비문이 남겨진 채 그대로 출간되었다. 심지어 이융희 팀장 당신은 전자책으로 재간하면서도 그 비문들을 손보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비문이 들어간 소설을 출간해서 돈을 벌어도 된다는 인식을 학습당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나는 이 글에 대해서 제대로 된 답글을 받을 거라는 기대가 없다. 이융희 팀장이 나한테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동안 제대로 된 답변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10쪽 짜리 글을 쓰면 당신이 2쪽 짜리 글로 답을 하는 일이 반복되는 동안에 당신이 제대로 답한 게 하나라도 있긴 하나.

 

 

가령 예를 들어서,

 

 

김보영의 <스크립터>는 반드시 게임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달빛조각사><유레카>의 소비층이 <스크립터>를 읽을 거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http://textreet.net/index.php?mid=board_GybH00&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8A%A4%ED%81%AC%EB%A6%BD%ED%84%B0&document_srl=15224

 

 

이융희 - <스크립터><달빛 조각사>의 독자층이 겹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스크립터><달빛 조각사>의 독자층이 겹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은 다른 미학을 가지고 있고 독자층도 다르다. 2008년에 시작이라는 출판사에서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을 내었을 때 홍정훈이나 카인 같은 장편 소설가들이 잠깐 포함되었지만 2009년에 나온 시작 단편선에서는 거울 작가들로 모두 채워졌다. 똑같이 인터넷에서 글을 쓴 작가들(커그<->거울) 사이에서도 방향성의 차이가 있듯이 독자층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노블레스 클럽과 이타카가 시장에 안착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대여점 시장을 떠나는 와중에 판타지 소설 소비층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스크립터>는 게임 판타지가 소비되는 시장에서 더욱 멀리에 있다. (http://textreet.net/index.php?mid=board_GybH00&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8A%A4%ED%81%AC%EB%A6%BD%ED%84%B0&document_srl=50443 )

 

 

이융희 <스크립터><달빛조각사>의 독자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에 여전히 반대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대여점 소설이 서점에서 판매량이 확대된 경우는 많다. 서점용 소설과 대여점용 소설이 유의미한 독자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http://textreet.net/index.php?mid=board_GybH00&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8A%A4%ED%81%AC%EB%A6%BD%ED%84%B0&document_srl=86681 )

 

 

나는 <스크립터>의 독자층과 <달빛조각사>의 독자층이 다르다는 근거로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의 작가층과 독자층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융희 팀장의 답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대여점 소설들이 서점으로, 그리고 서점용 양장본 소설들이 대여점으로 들어왔으니 서점용 소설과 대여점용 소설 사이에 소비자의 차이는 없고 자신은 <스크립터><달빛조각사>의 독자층이 나뉜다는 것에 반대한다는 거다. 중단편과 장편의 플랫폼이 서로 다르고 독자층도 다르다는 것에 대한 얘기는 대체 어디 가 있나?

 

 

<스크립터>가 올라온 지면은 글틴 소설마당이다. 저곳을 채운 작가들 대부분은 문단 문학 작가들이다. 확률적으로 <스크립터>를 읽을 독자는 누구겠는가? 평소에 대여점에서 게임 판타지를 즐겨 찾던 독자가 문단 문학 단편으로 채워진 글틴 소설마당으로 들어와서 <스크립터>를 읽을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되나? (설령 겜판 독자들 중에서 <스크립터>를 읽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게임 판타지 소비의 연장선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융희 팀장한테 근거를 대서 얘기하는데 이융희 팀장은 자신의 믿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창조론자하고 진화론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기분이다. 이융희 팀장은 답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설령 대화가 이어진다고 해도 큰 기대는 없다.

 

 

이융희 모든 매체는 웹 형식에 맞춰서 변화를 고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고든핌이 예술성을 추구하는 중단편 소설과 대중성을 추구하는 웹 소설이라는 이분법 구도 안에서 내 주장을 뒤트는 것은 폭력적이고 무지한 일이다. 상업성하고 별개로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채 글을 쓰는 작가는 없고 내가 말하는 고민은 그 지점에 있다.

 

 

중단편 문학 플랫폼은 항상 웹 형식에 맞춘다기보다는 인쇄 지면과의 호환을 고민했다. 듀나와 김보영은 중단편을 발표할 때 웹 형식과 인쇄 지면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김보영 작가는 더 나아가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독자를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당신이 던전이라는 플랫폼을 비판하면서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이융희 아니다. 나는 듀나, 김보영 모두 다 웹 형식에 맞춘 작가라고 믿는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융희 팀장은 던전 플랫폼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던전이 순문학이라는 명칭으로 자신을 가리킨 것은 권력지형도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인쇄 지면에서 웹 지면으로 옮겨오면서 매체에 변화를 준 것에 그치지 말고 콘텐츠의 변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란 것은 오히려 인쇄 지면 안에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던 게 아닐까.‘

 

 

두 가지 이유에서 저 비판은 부적절하다.

 

1. 순문학이라는 표현이 애매하고 추상적인 것은 그것이 권력을 말하는지, 이데올로기를 말하는지, 스타일을 말하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문학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스타일을 지칭하는 가치중립적인 맥락에서 쓰일 수 있으며 이는 이미 장르문학 공동체 안에서마저도 종종 쓰인다. ‘순문학이라는 장르의 스타일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던전 필진 박서련 작가가 던전이 순문학이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할 때는 다른 장르들을 기타로 취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장르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해서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듯이 던전에서는 상징권력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맥락으로 순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의향이 없었으며 때문에 이융희 팀장이 이것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기존 권력지형도를 이식한 것으로 지칭한 것은 부적절하다.

 

 

2. 기존에 나온 성공적인 중단편 플랫폼은 인쇄 지면으로부터 차별화된 웹 형식을 고민했다기보다는 인쇄 지면과의 호완을 꾀했다. 거울 플랫폼에서 주기적으로 회지를 낸 것이 그 예다. 듀나 작가는 자신이 웹과 종이 지면 사이에 형식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고 하고 김보영도 마찬가지다. 김보영은 더 나아가서 자신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독자에 대해 아예 고민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수요층이 인터넷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공했다. 따라서 이융희 팀장이 중단편 플랫폼으로 던전을 논하면서 매체에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문학이란 것은 오히려 인쇄 지면 안에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던 게 아닌가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이융희 팀장이 이 글을 읽는다면 자신의 두 가지 오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라도 인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융희 팀장한테 특별한 기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이 글을 쓰는 데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다.

 

 

ps 이융희 팀장은 내가 먼저 쓴 글에서 언급한 정과리의 발제문이 2001년도에 발표되었지만 내가 그것을 2000년도로 잘못 표기했다면서 내가 그 글에 대해 똑바로 알지도 못한다는 뉘앙스의 글을 썼는데, 정과리의 발제문이 최초 발표된 것은 20001216일 한국문화교육학회의 제21차 학술대회에서였다. 내가 본문에서 언급한 부분은 다 그 최초 발제문 안에 들어가 있다. 당신 연구자 맞긴 하나? 대체 제대로 아는 게 뭔가? 불만이 있으면 연도 갖고 꼬투리를 잡지 말고 이 글에나 답해주기를 바란다. 90년대에 판타지 소설이 출판 제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정과리는 아이들의 놀이 문화계몽해줘야 하는 어른이라는 거친 이분법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신이 귀여니에 대한 논쟁을 두고 자기들만의 문화를 창조하는 아이들그들을 어설프게 계몽하려고 한 어른이라는 프레임을 짰을 때 이것은 사실상 정과리의 프레임을 모방하는 게 아닌가? 당신은 그 프레임 안에서 제도권의 계몽을 잘못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프레임 자체가 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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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단신/번역) 중국, 시대극을 금지하다 -〈연희공략〉관련 〈베이징일보〉 사설 번역- 서원득 2019.08.20 420
47 문단과 언론의 장르 문학 지워내기에 대하여 아서고든핌 2019.05.18 606
46 전삼혜 - '분명함'과 '불분명함'을 통해 들여다본 작품 세계 아서고든핌 2019.05.18 341
45 17세기(조선 중기)의 여성 원귀들 전혜진 2019.04.21 378
44 16세기(조선 중기)의 여성 원귀들 전혜진 2019.04.21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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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조선왕조실록과 귀신 관련 키워드 file 전혜진 2019.04.01 762
41 고소설 속 여성 원귀 전혜진 2019.03.31 4561
40 구비설화 속 여성 원귀 전혜진 2019.03.31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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