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간』에 대한 소고

텍스트릿 2018.04.20 15:48 조회 수 : 630

『회색인간』에 대한 소고

 

 

 

0.

근자에 진중하고 묵직한, 그러면서도 참 좋은 웹소설이 많이 나왔다. 이제 200편이 넘어가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부터 『칼든 자들의 도시』나 『유물 읽는 감정사』까지. 이는 『재벌집 막내아들』부터 30~40대 독자층이 보기 좋은 작품군들이 꾸준히 나오는 경향과 관련 있는 듯하다. 특히, 『칼든 자들의 도시』의 경우는 2014~5년도에 많이 나왔던 ‘전문가물’ 형태의 웹소설에서 ‘무림인’이라는 직업군을 설정하고 그것을 그려낸 변용이다. 그렇기에 전문가물을 다루는 소설 특유의 현실 친화적 서사에 무림이라는 시스템 특유의 무게감 등을 보여준다. 기존의 웹소설 안에서도 이런 무게감이나 진중함을 드러낸 작품은 적었던 만큼 많은 새로운 시도에 작가와 독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근자에 문제적 소설 하나가 있다. 바로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 이다. 언론이나 많은 소설이 이 소설을 ‘새로운 것’으로 프레이밍하면서 장르문학에서 신선한, 볼 수 없었던 소설이라며, 또는 웹소설이라며 프레이밍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필자에게 『회색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온다. 해당 질문들은 『회색인간』 의 작품적 퀄리티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회색인간』이 놓여있는 위치가 도대체 어디인지. 진짜로 『회색인간』은 새로운, 그리고 웹소설의 범위 안에서 다뤄질 글인지 그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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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고 가자. 『회색인간』은 그닥 새롭지 않다. 여러모로 살펴본 결과 나온 결론이다. 서사의 형태는 짧은 소재로 소설을 창작해가는 엽편 소설의 형태였고, 웹 브라우저 공간에서 창작되던 초기 인터넷 연재소설의 형태와 흡사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주어진 클리셰 코드를 이용해 조합형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웹소설에서 ‘새로움’과 『회색인간』과 같은 도서의 ‘새로움’은 과연 똑같은 새로움인가. 도대체 장르문학에서 새로운 것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회색인간』이라는 개별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회색인간』의 작품이 장르문학의 지형도 속에서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위치 놓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회색인간』을 ‘새로운’ 글이라고 말하고 ‘웹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장 어리둥절한 사람은 김동식 작가가 아닐까. 작가 본인이 앞으로도 꾸준히 창작을 이어나가겠다고 천명한 만큼, 본인의 글이 어떤 글인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창작하는 것이 더욱 김동식 작가의 창작에 유용하리라.

 

사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회색인간』에 대한 비평을 제대로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지금의 책이 나올 때까지 제대로 된 『회색인간』의 평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하나는 김동식 작가가 제도권의 문학 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 출신의 작가라는 그의 출신 성분 탓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서사 그 자체가 빛나기 때문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말을 덧댄다는 것은 마치 권위를 갖는 대학 담론장에서 제도권 바깥의 작품에 대해 엘리트의식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일 염려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이 복잡한 장르문학의 계보 속에서 존재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기획회의 461호에 김보영 작가가 기고한 「SF작가로 산다는 것」에서도 꾸준히 지적하는 것처럼 장르를 문단과 문학에서 지워내던 역사 속에서는 김동식의 『회색인간』은 새로운 무언가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기엔 힘든 글일 테니까.

 

그럼 도대체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웹소설은 무엇이고 장르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많은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나가며 다시금 『회색인간』의 논의까지 여정을 이어가도록 하자.

 

 

1.

필자는 장르문학은 아직 비평할 방법론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단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런 상항에서 『회색인간』처럼 혼란스러운 지형의 작품을 비평하기는 더욱 난해하다. 가장 손쉬우면서도 어려운 방법은 해당 장르가 밟아왔던 역사적 맥락을 짚고, 그 장르의 문법 안에서 작품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해설하고, 그 의미를 밝혀내며 그것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새롭다’라는 말은 아주 손쉬우면서도 함정이 가득한 말이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 과연 이러한 서사와 형식을 가진 작품이 있을까, 없을까 같은 OX 이지선다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럼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살펴서 있다. 없다를 정의해야 할지, 그 범주가 애매한 것이다. 그렇다면 『회색인간』에 대한 비평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우선 『회색인간』에게 씌워졌던 프레임부터 하나둘씩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첫 번째. 『회색인간』은 웹소설인가? 단순히 인터넷 웹 공간에서 연재되는 모든 소설을 웹소설이라고 부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소설의 맥락에서 본다면 『회색인간』의 형식과 내용은 별달리 독특하지 않다. 이러한 엽편 형태의 콩트 소설은 인터넷 역사에서 무척이나 많이 시도되어왔다.

 

과거 한 장르창작 사이트에서는 사전의 ㄱ부터 ㅎ까지 모든 단어를 이용해 콩트를 쓰는 작가가 있었다.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 당시 다양한 방식의 사랑 이야기를 콩트 형식으로 연재하던 작가가 있는가 하면 네이버의 거대 커뮤니티에서는 짧은 단어를 받아서 24시간 이내에 창작하는 엽편 공모전을 1년 넘도록 꾸준히 진행해왔던 곳도 있었으며, 작은 카페 등의 커뮤니티에서 개인적인 창작을 이어가는 사람도 많다. 인터넷 블로그에선 산다이바나시(三題噺, さんだいばなし) 100제, 300제, 500제 등의 이름으로 단어를 나열한 뒤, 해당 소재로 공포, 잔혹 동화, SF 등의 장르적 틀에 맞춰서 창작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특히 『회색인간』은 인간의 힘으로는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놓고, 그러한 상황에 놓인 인간 집단군을 특정한 주인공 캐릭터 없이 사회 자체를 사고실험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마지막에 반전을 주는 원 패턴을 유지한다. 이렇듯 정해진 서사의 틀 안에서 외피를 바꾸는 형태는 인터넷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유료화’되지 않은 수많은 실험적 형태의 소설이 연재 중이고, 수많은 독특한 소설이 있다.

 

결국 『회색인간』이 이러한 맥락 안에서 차별성을 갖기 위해선 과거의 맥락과 단절된 지점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 연재되던 소설이 책으로 나오던 것이야 PC 통신 시절 왕왕 있었던 일이고, 익명의 커뮤니티에서 쓴 글이 출판된 경우는 디씨 인사이드 판타지갤러리에서도 단편선집이긴 하나 출간된 적이 있다. 작은 소규모 카페 등에서 자기가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 발표하는 사람은 꽤 많다. 굳이 차별점을 짚자면 그것은 『회색인간』이 ‘오늘의 유머’라는 커뮤니티 공간 속에서 연재되어 퍼졌다는 점이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인터넷 커뮤니티-플랫폼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창작되는 웹소설이 많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웹소설이 많을까? 답은 당연히 전자다. 플랫폼 소비자들의 특성과 기존의 연재작과의 상호관계성은 웹소설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 중에 하나니까. 『회색인간』에 오늘의 유머 커뮤니티의 성격이 반영된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반영 자체가 독특한 현상이 되진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진 콘텐츠 몇 개를 잘 알고 있다. 일본의 2ch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묶어 낸 전차남을 비롯해, 다음 뉴스에 댓글로 시를 써서 묶었던 댓글 시인 제패토까지. 특정 커뮤니티 공간에서 가상의 서사, 또는 문학을 창작하고 그것을 묶어내는 일은 이미 우리에게 더없이 익숙하다.

 

 

2.

두 번째. 지금부터 우리는 더 협의적인 웹소설의 개념으로 들어갈 것이다. 1에서는 인터넷에서 연재되는 모든 소설을 웹소설로 통칭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순히 오프라인 서적을 인터넷에 옮겨놓는 형태의 소설은 많았다. 박범신이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이 인터넷으로 연재된 전례도 있지만, 그것을 웹소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거 전자출판 시장에 맞춰서 인터넷 연재를 했을 뿐이다. 편의상 2번에서 이야기할 협의의 웹소설을 웹소설로,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 연재되는 소설은 인터넷 소설로 통칭하고자 한다.

 

웹소설의 소비집단은 ‘웹소설’이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을 짓는다. 웹소설을 정의,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소설 플랫폼에서 편 단위로 끊어 연재되어 판매되는 장르소설.’

 

 

첫 번째로 소설의 연재를 위해 플랫폼이 존재해야 하고, 두 번째로 5,500자 내외의 글자수에 맞춰서 편 단위로 끊어 연재되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연재본이 플랫폼에서 편당 가치가 매겨져 거래되어야만 협의의 웹소설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문피아, 조아라, 북팔, 톡소다, 카카오페이지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는 이러한 조건에 맞는 수많은 웹소설이 연재 중이다.

 

『회색인간』은 위의 조건 중에서 첫 번째, 장르 소설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것과 마지막, 인터넷 공간에서 판매된다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하다. 웹소설의 이야기를 할 때 도서로 물화되지 않는 글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거래되는 시장에서 출판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이다. 『회색인간』은 그러한 화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글로, 실제 연재본에서 출간본까지의 문장이나 교정/교열 과정 등은 기존의 도서출판 형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회색인간』의 형태나 맥락은 이미 20년 전부터 국내에서 종종 출간되던 형태의 인터넷 소설이라고 보아야 하며, 그 내용과 형식은 인터넷 소설의 맥락 속에서 전혀 새롭거나 독특하지 않다.

 

 

3.

김동식 작가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함께 언급되는 문인이 있다. 노동자 시인 박노해이다. 물론, 김동식 작가를 박노해와 동일선에서 놓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시가 위대하고 장르소설은 하찮다는 어설픈 구조 때문이 아니다. 박노해는 노동자의 목소리로 노동자의 시를 썼다. 김동식 작가의 서사는 오히려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의 작품과 분리된다. 『회색인간』의 챕터 중에서 몇몇 작품은 분명 ‘노동’하는 자들의 권리와 자각, 연대에 대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보다 서사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건 비인간화 된 상황 속에서 인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의식은 장르 속에서 가장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굳이 공들여 작품을 찾을 필요는 없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은 잊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소년 소녀의 서사는 너무나 많으니까.

 

장르문학이 소위 말하는 제도권 문학, 순수문학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오해받기 쉬운 것이 이 지점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쌓아 올려온 클리셰 안에는 당대의 시대와 은유, 문화와 주제의식이 조금씩 녹아있다. 이를테면 좀비의 은유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 미지와 공포가 들어있듯이. 장르문학의 비평이 어려운 건 과연 이러한 주제 의식이 수많은 장르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편집권을 가지고 코드를 조합하여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만들어냈는지 찾아내기가 힘들단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4.에서 조금 더 논하기로 하고 다시 김동식 작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실 나는 김동식 작가가 ‘제도권의 교육을 받지 않은/노동자 작가’라는 것에 너무 환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프레임은 단순히 김동식 작가의 뛰어난 능력을 찬사하는 것 이면에 음습한 양면성을 갖는다. 바로 제대로 된 제도권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관습구조의 재확인, 그리고 재설정이다. 근대 이후 등단이라는 제도는 문학을 하기 위해선 문학 제도에 대한 교육과 학습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창작자들을 강제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다. 장르소설 창작자 중에서 제대로 등단 코스를 밟아서 창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수없이 많고, 웹소설 시대인 지금에 와선 굳이 등단이라는 틀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에 플랫폼의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아니, 굳이 장르문학과 문학의 이분법을 나누지 말자. 문학은 그것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열려있고 굳이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창작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교육을 받아서 만들어진 문학은 말 그대로 ‘제도권 문학’인데, 애초에 제도권 문학이 아닌 작품을 보고 ‘헐, 제도권 바깥에도 문학이 있다니!’ 라는 이야기는 무지에 의해서 일어난 신대륙 원주민 보는 듯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작가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마케팅의 문법이다. 폴포츠에서 허각으로 이어지던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김동식으로 이어진 것에 불과하다. 아주 낡은, 그러면서도 게으른 마케팅의 수사가 말이다.

 

김동식은 아직도 등단 절차를 밟은 작가가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1년에 300편이라는 수치도 그렇게 독특하지 않다. 하루에 1편 내지 2편을 꾸준히 연재하면서 2년 또는 3년을 연재하는 사람이 있다. 유료 연재본이 아니더라도 무료 연재를 할 때 독자와의 약속이라며 그런 시간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과도한 환상이 위치를 엉망으로 만드는 건 『회색인간』 뿐만 아니라 김동식이라는 작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지금 인세 수입을 많이 벌었을 김동식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소위 말하는 ‘제도권’ 교육을 받아야 하나? 글쎄. 김동식 작가가 원하는 것이 문단 데뷔를 통해서 등단한 소설작가가 되는 방향이라면 그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건 김동식 작가만이 알 일이다.

 

 

4.

여기까지 『회색인간』의 프레임을 제거했을 때 의문이 생긴다. 그럼 『회색인간』은 새롭지 않아서 가치가 없는 글인가.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가. 그래서 지금의 판매량이나 위상은 단순히 효과적인 마케팅으로 이루어낸 반짝 신화, 모래성에 불과한가? 앞서 말했듯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새로움’의 프레임은 소재중심주의로 빠지며 『회색인간』이라는 작품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제한한다. 여기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자. 나는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이 나쁜 글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이 오늘의 유머에서 투데이 베스트 게시글을 꾸준히 차지하고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던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이야기를 새롭게 여긴 독자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럼 그 부분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문학이나 새로운 장르문학이 아니라, 그냥 오늘의 유머에서 새롭게 선보였던 꽁트 형식의 미스테리 소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기가 있었다. 이런 캐치프레이즈는 과거에도 많이 있었다. 장르문학 띠지나 표사에서 ‘PC 통신 ~~에서 ~~~만 조회수를 기록한 그 작품!’, ‘~~~ 투데이 베스트 1위!’ 등을 자랑스럽게 내걸 시기가 있었으니까. 그게 왜 나쁜가.

 

새롭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는 얼마든지 나온다. 아니,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과연 존재하나. 우리가 한 작품을 새롭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제한된 구조 내에서 코드를 다르게 변환하여 조합했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김동식 작가는 조합을 맛깔나게 하는 작가다. 꽁트 구조 속에서 반전을 통해 매력을 줘야 한다는 건 창작자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상상력 속에서 구현하기란 무척 어렵다.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은 그 반전의 묘미를 극한까지 끌어낸다. 그리고 그 반전의 중심에는 인간다움과 예술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회색인간」의 지저세계나, 노래를 부르는 돌기에 의해서 ‘숭고한 희생’으로 바뀌는 작전명은 김동식 작가가 보여주는 상상력, 그리고 그 근간의 메시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스타일의 시도가 김동식 작가 나름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클리셰를 탈맥락해서 자신의 세계 속에 넣고 꽁트의 형식으로 가공한다. 그리고 반전 안에서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고민하며 서사를 끝맺는다. 좀비의 불사성을 가져오고 인간을 바이러스화 하는 상상력처럼, 그의 상상력은 장르적 맥락 다음의 시도를 끊임없이 보여준다. 필자가 김동식 작가의 글을 보고 잘 썼다 생각하는 건 이런 ‘그다음’의 상상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새로움’에 밀려 잘 화자되지 않는다.

 

 

5.

이 글은 『회색인간』에 대한 짧은 소고라는 제목에서 밝혔듯, 작품집 내부의 작품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비평이 아니다. 그런 비평이 이루어지기 전, 지형도를 확고히 하자는 사전준비에 가깝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방식을 새롭다고 하는 것은 이쪽도, 저쪽에도 외면받는 프레이밍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쯤은 제대로 『회색인간』을 바라볼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 텍스트릿 필진 이융희 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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