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과 웹소설

원철 2020.10.08 17:01 조회 수 : 158

서양철학사를 살펴보면 유럽의 철학사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유liberty'라는 개념입니다. liberty의 어원은 '뿌리'인데, 자유란 자기 뿌리를 갖는 개념입니다. 이 말이 왜 자유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냐면, 고대 사회의 '노예'란 존재 때문입니다. 노예들은 전쟁에서 패배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타인에게 예속되어 타향 생활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자유민이란 노예와 달리 자기가 태어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유'란 개념은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방식으로 철학사에서 수천 년 동안 진화합니다. 중세 시대에 대학에서는 자유학예란 과목을 가르쳤는데, 라틴어로 artes liberales입니다. 현대 영어로는 liberal arts고, 인문학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학문의 목적이 실용에 있는 게 아니라, 학문 그 자체에 있는 방식. 이게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자유'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유럽인들은 '자기원인'에서 비롯된 '자유'라는 개념에 높은 가치를 평가했습니다. 

 

'예술의 자기원인'에 대한 탐닉이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건 모더니즘 시대입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유럽의 근대까지 지배해온 '모방mimesis'이란 목적에 반기를 들며, 각 예술 장르의 표현 가능성 자체에 주목하기 시작 하기 시작 한 게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문학도 이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예술은 각종 실험적인 시도를 하며, 대중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이 구분되기 시작한 한 시점이구요. 그리고 순수예술은 예술을 사회참여의 도구로 활용하려 하는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과도 대립합니다. 예술의 자기 원인을 찾기 위한 각종 시도가 순수예술이란 이름으로 펼쳐지기 시작 한 겁니다. 한국의 경우 소설가나 시인들이 일제시대 때 부터 전쟁과 독재까지 이어져온 각종 비참한 현실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 할 때 사용하는 변명이 순수문학에 가까웠습니다. 김동인 순수문학 논란은 이렇게 생겨났고, 이효석도 이 같은 비판에 휩쓸렸을 때 순수문학 이론으로 변명합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민중문학이 대세가 되기 때문에 '순수문학'은 문학 담론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되구요. 

 

텍스트릿에서 '순수문학'을 자주 호출하는 모습을 보는데, 대부분 개념의 오용입니다. 현재 웹소설과 대비되는 모든 문학을 '순수문학'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강단 문학, 문단 문학 등을 순수문학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고 제각각인데. 대부분 오용이에요. 한국에서 평론이 주목하는 문학은 저도 뭐라 규정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쨋든 현실참여를 전제로 하는 루카치 리얼리즘 이론을 근거로 한 민중 문학이 대부분입니다. 국문학자 천정환의 한국문학사 비판이 바로 이 민중문학 주도의 문학평론 분위기를 비판하는 거구요. 이건 순수문학이 아닙니다. 

 

기존의 문학 분류에서 웹소설과 가장 흡사한 대우를 받은 건 '통속소설'일 겁니다. 상업적인 목적에만 집중해서 말초적인 재미만을 추구한다는 '멸시'의 가치평가가 담긴 개념이 통속소설인데요. 통속소설에 대한 멸시가 웹소설에까지 이어진 '문단' 평론가나 작가들의 태도가 웹소설계를 자극해서, 그런 평가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멸시의 가치평가는 어떤 경우에도 학술적이지가 않구요.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문단이 웹소설을 폄하하는 것이 문제인 것 처럼, 웹소설 연구자들이 한국의 평론 대상이 되는 기존 문학을 대중성이 없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 또한 그냥 또 다른 멸시일 뿐입니다. 웹소설은 실제 '스낵 컬처'로 구분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누구도 '스낵' 회사를 멸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식품 시장의 한 분야일 뿐이죠. 미슐랭 셰프나 평론가들에게 스낵의 가치를 평가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둘 다 음식이지만, 목적과 대상이 아예 다른 제품이라는 겁니다. 웹소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기존 기성 문학 전체의 가치를 폄하하는 건, 스낵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미슐랭 요리를 포함해 각종 외식 산업 전체를 폄하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냥 논리 자체가 다른 겁니다. 

 

웹소설에서 순수문학에 대한 논의를 너무 산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몇 글자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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