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혜는 2013년 8월에 문학 광장 사이트에 <소년소녀 진화론>을 발표하고 약 2년 뒤에 그 작품을 표제작으로 한 단편집을 엮어냈다. 다섯 편의 SF, 두 편의 일반 소설, 그리고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이 모여 있는 이 단편집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전삼혜가 먼저 발표했지만 수록하지 않은 작품이 두 개 있다는 것이다. 2011년도에 발표한 <여름날>과 2013년 3월에 발표한 <판도라의 서랍>. 두 작품 모두 다 청소년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고, <소년소녀 진화론>과 발표된 시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단편집에서 빠져 있다. 그리고 저 두 단편은 <소년소녀 진화론>에 실린 작품들과 색깔이 완연히 다르다. 

 

간단히 얘기해서 <여름날>과 <판도라의 서랍>이 '불분명함'에 대한 이야기라면 <소년소녀 진화론> 이후에 전삼혜는 '분명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름날>과 <판도라의 서랍>의 내용을 각각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름날>의 주인공은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려던 길에 교통 사고로 사망하고 주인공은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친구가 자신한테 이름과 생일을 거짓으로 알려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유품 중에서 자신한테 알려준 가짜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발견하게 된다. <판도라의 서랍>에서 주인공은 한 고등학교의 기숙사에 살고 있다. 그런데 다른 방에 살고 있는 친구 한 명이 자살을 한다. 주인공은 그 친구의 책상에서 자신의 필기구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의 물건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자살한 친구가 자신의 일상을 녹화한 캠코더를 발견한다. 어른들은 그 친구가 왜 자살을 한 것인지 따져보는 가운데, 주인공은 그 친구의 캠코더를 비밀로 지켜주기로 결심하고 폐기 처분한다. 이 두 편의 단편 소설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성장 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주인공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불분명한 세계로 나아가길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날>의 주인공은 이미 죽어버린 친구가 자신을 속이려고 했는지, 혹은 새로운 정체성을 원했던 것인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판도라의 서랍>에서 주인공은 어째서 자살한 친구가 자신의 물건을 훔친 건지, 그 캠코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답이 돌아오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길 선택하고 있다. 혹은 정답을 영영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된다. 이때 그들은 충돌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모호한 결말로 이뤄진 이 두 편의 단편 소설에서 성장 소설의 가치가 발견된다.

 

반면에 <소년소녀 진화론>의 작품들은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한 세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편선에서 주인공들한테 세상은 명확한 형태로 주어진다. <소년소녀 진화론> 단편선을 읽으면서 제일 기이하게 느껴진 것은, <너랑>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인식한다는 점이다. 설령 첫 눈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내면의 확신을 외부로 표현하는 데는 분명히 지체하는 단계가 있기 마련이다. 혹은 관계의 진전에는 지체가 있다. 그리고 관계 자체가 파탄으로 끝나는 결말도 충분히 있음직하다. 하지만 이들의 세상에서는 그 지체하는 단계가 없거나, 그 지체하는 단계를 거쳐서 도달한 결말이 조금 뻔한 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랑의 감정은 보답을 받는다. 한 사람이 바다 깊은 곳으로 떠나면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 결말의 <소년소녀 진화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죽어 있는 시점에서 진행되는 <창세기>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배신당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오직 마지막에  수록된 <와인드업 보이>에서만 허락될 뿐이다. <와인드업 보이>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일하는 저택의 하녀 멜리사한테 사랑이라는 감정을 명료하게 느낀다. 그는 주인집 아들로부터 멜리사를 지키려고 하지만 그 행동에는 멜리사의 배신이라는 대가가 돌아온다. 자신이 배신을 당한 전말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주인공이 통곡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는 <여름날>이나 <판도라의 서랍>과 가장 대비되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여름날>과 <판도라의 서랍>에서는 모호한 세상에 맞닥뜨린 주인공들이 그 정답이 없는 불투명한 세상을 향해 계속 나아가기를 선택한다면(그렇게 그들은 성장을 한다), <와인드업 보이>는 모든 전말이 분명하게 드러난 결말에서 주인공이 오열하는 것으로 끝난다. <여름날>이나 <판도라의 서랍>에 비하자면 주인공이 성장을 거치는 단계 바로 이전에서 작품이 끝나고 있다. 세상의 형태가 불분명했을 때는 성장에 다달았지만 세상의 형태가 분명해졌을 때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데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소년소녀 진화론>과 <하늘의 파랑, 바다의 파랑> 두 편은 하나의 이야기를 각각 여자와 남자의 입장에서 전개한 연작 소설이다. 지각 변동 이후에 만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종으로 분화했다. 나루는 바다 밑에 살면서 육성 언어가 아닌 텔레파시로 소통을 하는 해저 인간이다. 나루는 어머니의 좌절된 꿈을 이어받아 심해연구원이 되려고 한다. 가하는 지상에 산다. 가하가 소속된 사회에서는 얼마나 하늘에 근접한 위치에 거주하냐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며, 가하는 성공을 위해 더 높은 곳으로 가기를 바란다. 각자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된 다음에 우정을 쌓게 되고 사랑을 시작한다. 이때 이 둘은 사랑과 꿈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갈림길을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두 사람은 유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으로 분화했기 때문에 같은 종으로서 사랑을 할 수가 없다. 나루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심해연구원이 되기로 선택한다. 나한테 그보다 신기한 것은 서로 다른 종에 속한 두 사람이 상대방한테 성애에 근거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둘은 자신이 서로한테 느끼는 것이 애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들의 내면에는 혼란이나 분열이 없다. 그들이 결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이라는, 이견이 파고들 수 없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성질을 띠는 만큼이나 사랑을 받아들인 그들의 내면도 이견이 개입할 여지 없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다. 그들의 갈등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그게 세상이 반대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간단하고 분명해져 있을 때 이들의 감정과 욕망은 극대화된다. 그들한테 주어진 선택지에서 정답이 무엇인지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다른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반항은 감정적인 선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들의 감정의 표현은 격렬해진다. 그 가운데서도 소통이라는 테마가 있지만 나는 이 소설에 있어서 등장 인물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싶지 않다. 나루는 심해연구원이 되기 위해 아가미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 수술을 받으면 바다 깊은 곳에 가서도 호흡하는 데 지장이 없지만 육성을 잃게 된다. 육성을 잃어도 텔레파시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 동족들과 소통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지상에 있는 가하와는 대화를 할 수 없게 된다. 나루는 아가미 수술의 날짜가 잡힌 상황에서 가하한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가하는 말없이 나루의 손을 잡는다. 이때 나루는 텔레파시를 통해 대화하듯이 가하의 체념을 자신이 전해 들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통을 하는 두 종족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끝에 종족의 차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루가 아가미 수술을 해서 육성을 잃는 것은 두 사람의 소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다. 이 소설의 세계에는 인터넷이 있고, 두 사람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채팅도 하는 사이다. 나루가 육성을 잃어도, 심지어 얼굴을 맞대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둘은 소통하는 데 아무 문제 없다. 문제는 나루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면 두 사람의 육체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대화는 할 수 있어도 더 이상 가하가 나루의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나루가 느끼는 가하의 '체념'은 두 사람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소통했다기 보다는 차라리 나루가 자기 자신의 좌절된 애욕을 가하한테 투영해서 느낀 것이라는 해석 쪽에 나는 끌린다. 핵심은 욕망이다.

 

<라면 전쟁>에 나오는 열다섯 살짜리 주인공한테 세상은 난해하거나 모호하지 않다. 그 반대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갈등이 극대화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 게 아니다. 주인공은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장래 희망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 때문에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주인공은 좋아하는 여자애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기 때문에 갈등을 겪지 않는다. 혹은 좋아하는 감정을 마음속으로 인정했지만 바깥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갈등을 겪지도 않는다. 주인공은 여자 친구 정한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인식하며, 심지어 "사랑"이라고 부르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정한이와 학원에서 같은 반에 들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좌절하고, 같은 반에 들기 위해서 행동을 취한다. 이때 주인공과 세상은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 구도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차라리 상응하는 구도에 가깝다. 때때로 문학 안에서 주인공의 삶이 명확한 형태로 괴로워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주인공한테 명확한 형태로 맞춰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경우에서 세상은 개인한테 비정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친절한 것이다.

 

말했듯이 <판도라의 서랍>과 <소년 소녀 진화론>은 발표된 시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런데 전자는 모호한 세상에 주인공들이 다가서는 성장 서사를 보여주고(하지만 세상의 모호함은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다), 후자는 명확하고 분명한 세상을 보여준 다음에 그 세상에서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다. <소년 소녀 진화론>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이 후자에 속하는데, 여기서 예외적인 것은 <너랑>이다. <너랑>은 최근에 임신 중절을 한 친구를 둔 십대 여자가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혼란을 느끼는 내용의 소설이다. 자신의 감정에 혼란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다른 작품과 구별되지만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이 조금 뻔하다는 면에서 <와인드업 보이>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감정은 배반을 당하지 않고,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에 전삼혜가 발표한 소설들 <Run, Run Away>(2015.12.11), <궤도의 끝에서>(2018.03.27), <모르는 이야기>(2018.09.21) 등도 모호함의 세계를 지향하냐, 분명함의 세계를 지항하냐에 따라서 나눠볼 수 있다. <Run, Run, Away>는 전자에 속한다. 장난 삼아서 도둑질을 시작한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그는 공동체에서 좀도둑으로 여겨지게 된다. 주인공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한다. 이 단편은 주인공이 자아 바깥의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발견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대한 내용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분명한 이야기와 분명한 감정을 다뤘다는 점에서 <소년 소녀 진화론>의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다. 이 작품에서 미스 캐토닉과 에이프릴은 충돌하는 듯하지만, 밝혀진 진상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단지 서로를 위하고 있었을 뿐이다. 질투라는 매우 분명한 감정. 그런 질투라는 감정을 감싸안을 매우 명쾌한 설명. 결국 아무도 다치거나 무언가를 잃지 않고 모두 함께하는 결말로 끝난다.

 

<궤도의 끝에서>는 전삼혜의 SF를 기준으로 거의 유일하게 세상의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 사고로 다리를 잃은 리우는 고아원에서 시력이 없는 슈와 하나의 짝을 이뤄서 생활한다. 리우는 슈한테 수학을 배워서 제네시스에서 입사하고 슈는 고아원에 남겨진다. 원래 계획과 무관하게 제네시스로 온 리우의 세상은 불분명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다. 리우의 세상에서 가장 불명확한 건 사랑이다. 리우는 주변 아이들이 연애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우의 룸메이트가 자신은 빨리 성인이 되어서 사랑하는 사랑과 함께 살고, 매일 같이 자고 일어나면서 스킨쉽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을 때 리우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우한테 누군가와 함께 자고, 일어나고, 몸을 맞댄 채 생활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우한테 그 상대방이 슈였던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리우는 자신이 고아원에서 슈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썼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스스로 의문한다. 리우가 사고를 당해서 양쪽 다리를 잃게 된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잘려나가고 남아 있는 다리의 길이가 서로 대칭을 이루지 못해서 의족을 사용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부축을 필요로 한 것도 우연에 불과하다. 그 누군가가 슈가 된 것도 마찬가지로 우연이며, 슈 대신에 리우가 제네시스에 들어가게 된 것 역시 모두 다 우연에 불과하다. 어떤 필연성도  없이 우연히 던져진 세상의 퍼즐조각을 짜맞춰가면서 리우가 깨달는 것은 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슈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슈가 세상에 없는데도 슈를 계속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낯선 세상에 갑작스럽게 던져진 리우가 세상의 모호함을 마주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깨달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게 깨달은 시점에 슈는 이미 죽어 있고 리우 자신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리우는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이 먼저 죽은 슈와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궤도의 끝에서>는 전삼혜의 <소년 소녀 진화론>에 수록된 작품들과 같은 테마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군가와 결론적으로 '함께 하는' 내용이다.

 

전삼혜가 일반 문학에서 SF나 판타지로 오게 되면서 일어나게 된 변화는 세상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분명해졌을 때 욕망과 감정도 분명해진다. <창세기>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절절하게 상대방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배신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름날>에서 주인공은 죽은 친구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리움의 감정을 대면하기에 앞서서 '그래서 너는 대체 누구였니?'라는 돌아오지 않을 질문부터 던져야 하는 상황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과 실제의 대상이 일치하는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인지하는 세상에 균열이 나면서 성장이 시작된다. 그런 태도를 지닌 채 쓰인 <여름날>, <판도라의 서랍>, <Run, Run, Away>, <궤도의 끝에서>가 다른 작품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불분명함의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작품이 종종 그 불분명함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끝난다는 점, 그리고 죽음이 항상 깊게 개입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궤도의 끝에서>는 장르문학의 이야기 구조 안에서 불분명함을 해결하는 내용이지만 결국에 주인공 모두 다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주인공 리우한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죽음을 통해서 먼저 죽은 친구 슈와 함께하게 되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만 했을지 조금 의심스럽다. 그 이전에 나는 애초에 왜 작가가 불분명함의 세계에서 분명함의 세계로 건너왔는지가 궁금하다. 어째서 세상이 분명해져야만 했는지, 그 분명한 세상에서 욕망과 감정이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게 중요해졌는지. 전삼혜가 2011년도에 발표한 장편 소설 <날짜변경선>은 일정 부분 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는 듯하다. '분명함과 불분명함', '욕망', '함께 하는 것', '죽음' 같은 몇 가지 키워드에 집중한 채 이 작품을 읽어볼 수 있다. 

 

 

전삼혜가 2011년도에 쓴 <날짜변경선>은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정현수는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외로움을 못 이기고 함께 밥 먹을 사람을 찾아서 날짜변경선이라는 백일장 정보 카페에 글을 올린다. 그 글을 보고 연락해 온 것은 김윤희다. 김윤희는 나가는 백일장마다 입상을 하여 또래 문학 청소년들의 질시와 음해의 대상이 되어서 고립된 인물이고, 그 외로움을 못 이기고 정현수한테 연락을 해서 함께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정현수한테는 날짜변경선 카페에서 만나서 잘 따르게 된 형이 하나 있다. 우진. 우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습 시간에 시를 읽다가 주변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고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진은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기 전에 김윤희와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김윤희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고, 우진은 그 학교 폭력에 가담을 하진 않았지만 김윤희가 자신보다 훨씬 더 백일장에서 입상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김윤희를 음해하기 위해 김윤희가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얘기하고 다녔다. 김윤희는 우진이 그런 짓을 한 걸 알기 때문에 우진을 혐오한다. 정현수는 그것을 알고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보려고 한다. 호감 가는 여자애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까 제일 친한 형한테 사이버 불링을 당한 피해자인 상황. 

 

다시 말하지만 이 세 명의 인물을 움직이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것은 그 외로움에 애욕은 조금도 끼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정현수의 경우에서 그렇다. 정현수는 김윤희를 처음 봤을 때 귀엽다고 생각하며 호감을 느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피붙이인 것처럼 애욕은 일절 배제된 상태로 대한다. 하지만 정현수가 성욕을 지니지 않은 인물이라면, 그건 아니다. 정현수는 소녀시대 사진을 잔뜩 모아놓고 다니는 인물이며(본인은 이것을 이성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윤희를 처음 봤을 때 호감을 느끼고, 함께 있는 와중에 다소 흥분된 심리 상태를 보인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욕망하기를 멈춘 것이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교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네 시가 넘었으니 슬슬 수업이 끝날 때가 되었다. 위아래 베이지색인 예고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교문을 나섰다. 우리 반도 문과라 여자가 더 많은데, 여기에 비하면 남고 수준이구나. 언뜻 봐도 연예인처럼 예쁜 애들이 많아서 이 학교 다니는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지 궁금해졌다. 우리 학교는 여자들이라고 해 봐야 점점 남성화되어 가는 애들, male도 female도 아닌 not male인 애들밖에 없는데.

 

 

 

 

정현수가 우진이 다니는 예술 고등학교에 찾아간 대목이다. 저 대목에서 정현수가 외모를 기준으로 여자를 '여자'인 것과 '남자가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정현수는 저렇게 여자를 둘로 나눠놓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진짜 여자'인 쪽을 욕망하진 않는다. '세상엔 진짜 여자와 가짜 여자가 있으니 난 진짜 여자인 쪽을 욕망하겠다.' 혹은 '세상엔 진짜 여자와 가짜 여자가 있으나, 진짜 여자인 쪽도 다른 결함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니 난 그들도 거부하겠다.' 이렇게 욕망을 추구하거나, 욕망의 좌절을 더 나아간 혐오로 대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 'not male'이라는 부분은 여성 혐오라기 보다는 차라리 여성 혐오의 흉내를 통해서 정현수가 '아니오. 나는 남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 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라고 은밀히 고백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남성성의 위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남성성의 부재. 이성에 관심은 많지만, 이성에 대한 그 욕망을 직접 추구하기를 주저하는 자기 자신을 정현수는 'not male'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정현수의 사고관은 자신이 잘 따르는 형 우진을 닮아 있다. 우진이 김윤희한테 사이버 불링을 가한 것은 '남자인 자신이 김윤희처럼 백일장에서 상을 많이 타지 못한다는 것에 패배감을 느껴서'이다. 우진한테 세상은 '남자'인 것과 '남자가 아닌 것'으로 나뉘어 있다. 김윤희한테 패배했을 때 우진은 '남자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박탈된 남성성을 복수하기 위해서 김윤희를 공격한다. 물론 그 박탈은 우진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이다. 두 사람은 심지어 같은 분야에서 경쟁을 한 것도 아니다. 백일장에서 김윤희는 산문을 쓰지만 우진은 시를 쓴다. 하지만 어쨌든 우진은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다고 느낀다. 이때 우진이 정현수와 다른 점은 자기 자신한테 남성성이 부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분명함'과 '불분명함'의 기준으로 보자면 <날짜변경선>에서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의 세상에 대해선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의 세계를 어떻게 연결할지 그 방법이 그들한테 불분명하다. 정현수는 김윤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마음에 드는 여자애"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김윤희를 향해 느끼는 감정을 명확히 안다. 다만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를 뿐이다. 김윤희는 문학 청소년들 사이에서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된 자신의 상태를 잘 안다. 정현수가 함께 밥을 먹기로 했는데도 자신의 옆에 앉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둔 위치에 앉는 것을 보고 김윤희는 "괜찮아"라는 문자를 보낸다. 그 문자는 사실상 '알아'라는 뜻에 다름 없다. '나는 네가 왜 내 옆에 앉지 않는지 알아.' 김윤희는 정현수가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자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런다는 것을 안다. 다만 김윤희는 고립된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우진은 정현수한테 자신이 어째서 김윤희를 공격했는지, 책에서 본 내용을 읊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구구절절 설명한다. 하지만 김윤희한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는 끝까지 모른다. 이 가운데서 모든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정현수다. 김윤희와 우진 양쪽 다 하소연하듯이 자신의 사정을 정현수한테 털어놓는다. 정현수는 사실상 전지적인 입장에서 둘을 지켜본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세상은 그한테 분명한 형태로 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의 문제 뿐이다.

 

그렇게 모든 정보를 명확하게 알게 된 정현수의 세상을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정현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우리는 <날짜변경선>을 읽으면서 대체 정현수가 왜 백일장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현수는 백일장에서 단 한 번의 입선도 한 적이 없으며 때때로는 백지를 내기도 한다. 심지어 백일장을 가는 게 싫어서 우진을 설득해서 예정을 어기고 바다에 간 적도 있다. 정현수는 단 한 번도 문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반대로 "가방 안에는 읽을 소설책이 한 권도 없"으며 "당장 서울에 문예창작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가서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문학에 관심이 없지만 아이들하고 섞여들지 못하는 학기 초에 무심코 백일장에 나가게 된 게 계속 백일장에 나가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이 작품의 초중반부에서 정현수가 대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가 독자들한테는 미스터리처럼 다뤄지는데, 결국 밝혀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애초에 좋아하는 작가가 없었다. 그는 문학의 제도(백일장과 입시) 안에서 무력하며, 문학 그 자체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어머니한테 (백일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 백일장을 빼먹고 바다를 보러 가는 등 입시 제도 안에서의 문학을 거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지막엔 다시 백일장에 나가면서 그 제도를 긍정한다. 그런데 마지막까지도 정현수가 무슨 작가를 좋아하는지 독자들은 알지 못한다. 진로가 아닌 욕망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현수는 처음 김윤희를 만나러 갈 때 자신이 여자애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여자인 정의정이다. 그는 정의정한테도 어떤 연애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정현수가 이성애자 남자라는 단서는 종종 주어진다. 그는 우진을 만나러 예술고등학교에 갔을 때 그곳에서 본 여자애들의 외모를 품평해대고, 처음에 김윤희를 만났을 때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묘사가 있다. 다만 어떤 시점부터 그 욕망이 억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을 읽다가 보면 먼저 문자를 보내는 김윤희나 먼저 말을 거는 정의정이 정현수한테 이성적인 관심이 있다는 인상이 들 때가 있다. 정현수는 그들이 보이는 관심에 답을 돌려주지 않는다. 김윤희에 대해서는 자신이 먼저 "묘하게 마음에 드는 이 조그만 여자애"라고 마음 속에서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그렇게 정현수의 세상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가 왜 백일장에 목을 매는지, 어째서 그가 욕망의 틀을 이용해서 여자를 혐오하지만 막상 여자를 욕망하진 않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백일장에 나가는 문청들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우진과 김윤희를 만나면서 그의 세상에는 분명한 게 두 가지 생겨난다. 정현수는 김윤희와 우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양쪽 모두의 입장을 들어서 알게 된다. 두 사람의 세상이 그한테는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처음 김윤희를 봤을 때 이성적인 호감을 느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현수는 두 가지 분명한 것, 자신의 욕망과 세상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는 욕망하는 자리에 가기를 극도로 꺼린다. 때문에 정현수한테 초점을 맞춰보았을 때, 이 작품은 불분명함에서 분명함으로 나아가는 데(성장하는 데) 실패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정현수 입장에서의 성장 서사는, 정현수가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받아들여서 김윤희와 대등한 위치에서 이성적인 감정을 주고 받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성 혐오를 통해서 남자를 흉내내는 단계를 넘어서서 진짜 남자의 위치에 서는 것. 그 과정에서 여성 혐오를 벗어던지기까지 하면 더 좋고. 하지만 그 시점에 우진이 끼어든다. 우진은 정현수한테 자신이 사실은 김윤희를 좋아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우진의 이런 심경 변화는 사실 매우 일관성 있다. '여자한테 패배해서 더 이상 남자가 아니게 된' 상황에서 우진이 남성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을 패배시킨 그 여자와 섹스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는 다시 남자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우진은 처절하게 김윤희한테 매달리는데, 이때 정현수는 전지적 입장에서 우진의 심경의 변화를 알자마자 김윤희를 사랑하는 남자의 위치를 우진한테 기꺼이 양보해버린다. 정현수가 가진 전지적 정보에 따르면 우진은 김윤희한테 일방적인 가해자이며 김윤희 입장에서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 명백함에도, 우진을 부정해버리는 대신에 우진한테 김윤희를 사랑하는 역할을 양보해버린다.

 

정현수는 원래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백일장에 가는 대신에 우진을 데리고 바다를 보러 간다. 두 사람이 바다를 떠돌다가 찜질방에서 묵고 있을 때, 김윤희는 정현수한테 문자를 보낸다. 유혹하듯이, 혹은 도움을 청하듯이. 이때 정현수는 우진을 버리고 김윤희한테 가는 대신에 우진을 데리고 김윤희한테 가기로 선택한다. 김윤희가 우진한테 일방적인 가해를 당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현수는 마음 안에 있는 우진을 죽이지 못하고, 우진의 그 자리에 가서 김윤희를 직접 사랑하지도 못한다. 자신한테 관심을 보이는 여자를 위해 우상을 깨부수기는커녕, 그 우상한테 그 여자를 좋아하는 역할까지 양보해버리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 가면 정현수, 우진, 김윤희 세 사람이 함께 서로의 손바닥에 펜으로 글씨를 써주는 것이 아름다운 장면처럼 묘사되는데, 저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1인칭 서술자인 정현수의 의식 속에서 세상은 여전히 '세 사람이 모두 함께 해야 온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거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우상인 우진과 그 우진한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김윤희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지 못했다.

 

 

 

나는 우진 형을 좋아한다. 잘 쓴 시와 못 쓴 시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형이 쓰는 시는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줄 아는 활발함도, 집을 나와서 하숙집에 들어가면서까지 예고를 다닐 정도의 강단도 좋아한다. 그건 우진 형이 내게 숨기는 게 있었을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진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대목은 작품이 거의 끝나갈 때 나온다. 정현수는 우진한테 '활발함'이나 '강단' 같은 품성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우진은 정현수한테 남성으로서의 역할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현수는 우진한테 남성성이 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만한 점은 정현수가 우진을 좋아하는 이유와 우진이 김윤희를 공격한 이유가 사실 똑같다는 것이다. 우진은 자신이 김윤희한테 패배한 순간 자신의 남성성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윤희를 공격한다. 그 이후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김윤희를 이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김윤희 옆에 남자 친구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김윤희를 좋아하기 시작한다. 우진은 자신의 남성성을 보존하는 데 급급한 인물이고 정현수는 그 남성성 때문에 우진을 좋아한다.

 

물론 위의 인용한 부분에서 정현수가 직접적으로 우진을 남자답다고 가리키거나,  '활발함'이나 '강단' 같은 품성을  반드시 남성성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작품의 전반부에서 우진은 자신이 '남자인데 여자인 김윤희한테 진 게 쪽팔려서' 김윤희를 공격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작품의 후반부인 저 대목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정현수한테 우진은 그저 닮고 싶은 멋진 상대인 것이다. 정현수는 우진의 사고관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우진은 세상을 '남자인 것'과 '남자가 아닌 것'으로 나눠서 생각하면서 자신이 '남자가 아닌 것'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김윤희를 공격한다. 정현수 본인은 세상을 '여자인 것'과 '여자가 아닌 것'으로 나눠서 생각하면서 여자를 혐오하고 있는데, 이때 의아스러운 것은 정현수 본인은 저 구분에서 어디에 속하냐는 것이다. 정현수는 자기 자신을 '여자애들과 잘 섞이지 않는 남자애'로 여기지만 정작 이 책에서 나오는 그의 유일한 동년배 친구는 여자인 정의정이다. 정현수는 과연 정의정을 '여자인 것'과 '여자가 아닌 것' 중에 어디로 볼까?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정의정을 그런 잣대로 분류하는 것에 정현수는 찬성할 수 있을까? 우진의 관점대로라면 허구한 날 백일장에서 낙선이나 하고 다니는 정현수는 '남자도 아닌 놈'에 속하지 않을까? 정현수는 성냥갑으로 불장난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성차별적인 잣대를 함부로 사용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한테 중요한 사람이 그 잣대에 의해서 평가될 수 있다는 자각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 잣대에 맞춰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도 않고, 그 잣대 자체를 부정하는 성숙함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정현수는 거의 전지적인 입장에서 어떤 이유 때문에 김윤희가 고통받는지를 모두 보았는데도, 그 고통의 원인(우진의 남성성에 대한 강박) 자체에는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정현수가 욕망을 하는 자리에 가기를 거부한다면, 우진은 열렬히 욕망을 하지만 그 욕망이 좌절되는 인물이다. 정현수가 백일장에 홀로 다니는 외로움을 못 견디고 함께할 사람을 찾다가 김윤희를 만나게 되었듯이, 우진이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간 것 역시 외로움을 못 견디고 한 일이다. 그런데 작품의 초중반부까지만 해도 우진 역시 외로움은 있는데 애욕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정현수는 우진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처음 갔을 때 예쁜 여자애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본문을 인용하자면 정현수는 "언뜻 봐도 연예인처럼 예쁜 애들이 많아서 이 학교 다니는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지 궁금해졌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정현수는 우진을 만났을 때, 여자애들에 대한 얘기는 전혀 꺼내지 않는다. 여자 친구가 있는지, 좋아하는 여자애는 있는지. 우진 역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전학을 간 학교에 자신과 같은 취향을 지닌 여자애들이 잔뜩 있는데도 그 여자애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의 당연한 관심사가 이 둘의 관계에서는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우진이 서서히 욕망을 드러내는 대상은 김윤희다. 우진은 정현수한테 자신이 김윤희의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이 김윤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진은 김윤희한테 패배하면서 자신이 더 이상 남자가 아니게 되었다고 느꼈는데, 김윤희와 사귀면 다시 남자가 될 수 있다. 차마 이길 순 없으니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우진은 잘못을 저지른 자신의 사고관에서 조금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당연히 실패로 돌아간다. 김윤희는 자신한테 가해 행위를 한 우진의 구애를 받아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우진을 용서한 적도 없다는 것을 밝힌다. 당연한 일이다. 우진은 정현수의 도움을 받아 김윤희를 만나서 사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똑바로 말하지 않고 그저 미안해 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우진이 문학 자체에 대해서 진심 어린 애정(본인의 주장에 따르면)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 대목은 우진이라는 인물이 크나큰 실패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시점엔 뭘 사과해야 하는지도 똑바로 말하지 못할 만큼 언어의 올바른 운용에 실패한 것이다. 우진 역시 성장에 실패했고, 그의 문학 역시 실패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성장을 겪는 인물은 김윤희라고 할 수 있다. 정현수가 사랑을 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본인이 그 욕망의 자리에 가기를 거부하고, 우진이 열렬히 욕망을 추구하지만 실패한다면, 김윤희한테는 사랑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가깝다. 김윤희가 정현수한테 먼저 문자를 보내는 것을 이성적인 관심으로 해석한다면, 김윤희는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한 것이다. 김윤희 입장에서는 자기 쪽에서 정현수한테 먼저 관심을 표시하니까 과거의 가해자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화답을 받은 셈이다. 김윤희가 겪는 성장은 사실 작품의 서술자인 정현수와 크게 관련이 없다. 김윤희가 문학을 떠나게 되는 것은 정현수를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정현수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정현수는 김윤희가 문학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김윤희는 백일장에 나가서 꽤 많이 입상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한 가지 불행한 사실은 같은 학교에 우진이라는 남자애가 있다는 것이다. 우진은 자신과는 다르게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상을 타는 김윤희한테 질투를 느끼고, 백일장 예선에 냈다가 떨어진 김윤희의 산문 하나를 훔쳐서 읽고는, 그 산문의 이미지를 차용한 시를 써서 상을 받는다. 얼마 뒤에 김윤희는 똑같은 소재로 다른 글을 써서 백일장에서 또 다시 상을 받는다. 자신이 표절한 글의 소재를 원작자가 재활용해서 상을 받은 것에 분노한 우진은(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진짜로 저런 인물이다) 인터넷에서 '김윤희는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였으며, 그 과거를 이용해서 상을 타려고 글을 썼다'고 음해 공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우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김윤희한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이 다니던 고등학교는 남녀 분반으로 이뤄져 있었고, 우진은 김윤희에 대한 학교 폭력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적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친구한테서 김윤희가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우진이 퍼뜨린 소문은 김윤희의 팔뚝에 난 상처가 자살을 기도한 흔적이라는 식으로까지 확장되었고, 그 이후에 김윤희는 더운 여름날에도 긴 외투로 팔뚝으로 가리고 다니게 된다. 

 

 

우진의 2차 가해 때문에 김윤희는 끝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김윤희는 정현수한테 자신이 집단 따돌림을 당한 과거가 있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잘 지낸다고 해명한다. 그런데 이때 자신이 공동체에서 배척당한 존재였다는 것을 시인하는 건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행위다. 그리고 팔에 난 상처는 정말로 자살을 시도한 흔적인지 의문이 남는다. 그 의문에 대해 해명한다고 해도 '상을 타기 위해 과거의 아픔을 이용했다'는 의문이 이어진다. 우진이 소문을 퍼뜨리고 도망간 자리에 김윤희는 계속 남아서 자기 자신을 해명해야 한다.

 

 

백일장에서 여러 차례 입상을 한 뒤로 김윤희는 줄곧 '진정성의 시험'에 든다. 사람들이 '상을 받기 위해 학교 폭력의 피해자임을 이용했다'고 비난할 때, 김윤희가 자신의 문학이 순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자신이 받은 상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김윤희는 결국에 대학교 문예창작과에는 진학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자신은 문학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정현수가 '그렇다면 어떤 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할 것이냐'고 묻자 김윤희는 '정시로 사범대에 가서 교사가 될 것'이라고 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김윤희가 정시를 보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문예창작과에 지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백일상 입상 경력은 다른 학과에 수시 지원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김윤희는 그 상의 도움을 받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문학으로 얻어낸 입시에서의 모든 특혜를 포기하는 것이다. 경쟁자들은 그 특혜 때문에 김윤희를 증오하는데 김윤희 본인은 그 상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우진은 김윤희와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는에서는 매일 오후 열한 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하며, 김윤희가 그런 환경에서 힘들게 글을 쓰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김윤희한테 문학은 처음부터 입시에 편승하는 행위가 아니라 반하는 행위였다는 의미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김윤희는 자기 표현의 수단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글을 쓴다. 하지만 입시 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문학은 김윤희한테 상처를 돌려줄 뿐이다. 모든 것이 '상'과 '입시'에 맞춰져 있는 제도화된 문학 안에서 김윤희의 문학은 의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더해서 짧은 분량의 제한이 걸려 있는 환경에서 김윤희가 따돌림에 관해 쓴 산문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 서서히 나무가 되어가는'(따돌림의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못하는) 제한적인 내용일 뿐이다. 김윤희가 자신이 받은 상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블로그에서 자신한테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제도화된 문학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김윤희는 자신이 사범대에 가는 이유가 '교사가 되어서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학생을 도와주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김윤희와 물리적인 접점은 없지만, 정현수의 친구 정의정은 입시 상담을 마친 다음에 정현수한테 눈물을 보인다. 담임선생님이 '미술 입시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간단히 상담을 마쳤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입시 제도에 던져진 정의정이 선생님의 저 태도에서 실감하는 것은 제도 안에서 자신을 보살펴줄 어른의 부재다. 때문에 김윤희가 자신의 문학이 입시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교사가 되기로 하는 것은 '난 이 제도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다음엔 이 제도 안에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돌아오겠습니다'라는 결연한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문학에 대한 냉소다. 흔히들 '문학은 공동체 안에서 교사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많이 한다. 하지만 김윤희가 교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제도화된 문학에서 어떤 희망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문학은 그저 입시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일 뿐이다.

 

 

우진은 김윤희한테 같은 대학교 문창과를 가자고 권하지만 김윤희는 자신이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거부한다. 김윤희는 문학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문학을 사랑할 어떤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김윤희와는 반대로 문학을 사랑한다는 저 우진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우진은 백일장에서 시상이 떠오르지 않자 김윤희가 쓴 산문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시를 쓰고(표절의 혐의를 둘 수 있다), 김윤희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상을 타기 위해 학교 폭력 당한 과거를 이용했다'면서 없는 사실을 지어내고, 정작 김윤희한테 사과할 때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똑바로 말하지도 못했으며, 자신이 퍼뜨린 김윤희의 소문을 수습하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위에서 나열한 행동의 공통점은 그게 다 언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학을 사랑한다면서 정작 언어의 운용에는 저토록 구역질나는 행보를 보이는 것이 우진이며, 김윤희가 문창과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아마 우진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김윤희가 문학을 탈출하는 걸 도와주는(?) 또다른 인물은 정현수다. 정현수는 우진을 버리지 못한다. 우진이 저지른 그 모든 행동을 보고도 정현수한테 우진은 그냥 멋진 사람일 뿐이다.

 

 

 

나는 우진 형을 좋아한다. 잘 쓴 시와 못 쓴 시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형이 쓰는 시는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줄 아는 활발함도, 집을 나와서 하숙집에 들어가면서까지 예고를 다닐 정도의 강단도 좋아한다. 그건 우진 형이 내게 숨기는 게 있었을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진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나오는 저 대목을 다시 봐보자. 저기서 알 수 있는 건 1. 정현수는 여전히 스스로 "잘 쓴 시와 못 쓴 시를 구분할 수는 없"다고 말할 만큼 문학의 영역에서 성장을 거치지 못한 채 불확실함의 영역에 있다. 2. 정현수는 우진의 행동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여전히 그와 함께하기를 바란다는 것인데, 정현수가 계속 머무르기를 바라는 저 남성들의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김윤희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 이때 김윤희의 행보는 전삼혜 소설의 일관적인 테마 '등장 인물들이 함께하는 것'에서 어긋나는 길로 가게 된다. 모두가 함께하기를 바라는 정현수의 욕망은 그의 성장을 가로막고, 궁극적으로 김윤희가 그를 떠나게 한다. 정현수와 우진이 함께하기를 바라면서 성장해도 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려고 할 때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것은 그들을 떠나는 김윤희인 것이다.

 

 

<날짜변경선>은 문학 그 자체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입시 제도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그 입시 제도 안에서 문학이란 게 얼마나 추한 형태로 망가지는지를 보여주고, 입시 제도 안에서의 보상을 거부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때 김윤희는 문학을 떠나야만 한다. 문학을 정말로 필요로 했던 사람은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해서 떠나며, 문학을 사랑한다고 자청하는 남자는 언어의 운용에 매번 실패하며, 그 제도 안에 계속 남으려고 하는 서술자는 어떤 성장도 거치지 못한다. 텍스트릿에 먼저 쓴 글에서 나는 한국 주류 문학의 장르적 관습이 여성 혐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작품 중에 하나가 심윤경의 <달의 제단>이었다. 박완서 작가는 이 작품을 가부장제도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평했는데, 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어렸을 때 함께 자란 여자애를 강간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읽기를 그만두었다. 한국 문학에서는 페미니즘 작품이라는 소리를 듣는 책도 남자 주인공의 시점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 작품은 아마도 주인공이 차차 가부장제도의 우두머리인 할아버지한테 도전하는 내용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주인공은 남자 대 남자로 할아버지한테 도전하기에 앞서서, 남자가 되기 위해 강간 문화 안에서 상징적인 의식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문단 문학은 이렇게 여자 작가들한테 부정적인 의미에서 남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때문에 소년의 성장 서사를 쓰려는 여자 작가들은 남자를 모방해서 이야기를 쓰는 법부터 배운다. 여성 혐오에 대해 관대해지는 법부터 배운다. 그래서 주인공이 가부장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강간 문화가 보존되어 온 공동체 안에서 남자로서 성인식을 치러야 하며, 문학을 하는 소년은 여자애들의 외모를 품평하면서 여성 혐오의 흉내를 내지만 실제로 여자를 욕망하진 않고 소년들의 공동체에 안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전삼혜가 도달한 소년들의 공동체는 아무런 성장도 없기 때문에 공허하다.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not male' 정현수, 여자한테 패배하고 'not male'이 되었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우진 양쪽 다 그 공동체 안에서 멈추어 있기를 선택하며, 그 공동체를 떠나는 김윤희가 유일하게 성장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나는 '세상의 분명함과 불분명함', '욕망', '함께 하기', '죽음' 같은 몇 가지 테마를 통해서 전삼혜의 소설을 분류해볼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의 불분명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여름날>, <판도라의 서랍>, <Run, Run Away>, <궤도의 끝에서>와 세상의 분명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소년 소녀 진화론>의 수록작들. 세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욕망을 추구하기가 간단해지기 때문에 사랑 이야기가 된다.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 중에서 <궤도의 끝에서>는 예외적으로 불분명한 세상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리우가 슈에 대한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 불분명한 세상에 분명한 것이 생긴다. 그리고 <궤도의 끝에서>는 '함께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소년 소녀 진화론>의 작품들과 같다. 표제작 <소년 소녀 진화론>에서 주인공은 남자 친구와 이별을 하지만 감정의 배반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어머니와 남자 친구 어느 쪽도 배반하지 않고 모두 함께 하는 결말을 얻어냈듯이. 그리고 작품 안에선 죽음의 그림자가 종종 도사린다(<여름날>, <판도라의 서랍>, <궤도의 끝에서>). 

 

<날짜변경선>의 주인공들의 세계에는 '분명함'과 '불분명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들한테 각자의 개인적인 세계는 분명하지만 그 세계를 외부와 연결시키는 방법은 불분명하다. 정현수는 김윤희를 처음 봤을 때 "묘하게 마음에 드는 이 조그만 여자애"라고 소설 본문에 명시된 대로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분명하게 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외부의 세상과 연결시킬 방법이 불분명할 뿐이다. 우진은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김윤희를 어떻게 공격했는지 명확하게 안다. 하지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방법이 불분명할 뿐이다. 김윤희는 아이들 사이에서 고립된 자신의 위치를 안다. 정현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리자, 핸드폰으로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보내었듯이, 김윤희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알지만, 그 상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모를 뿐이다. 이렇게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세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성장에 도달하는 것은 김윤희다. 김윤희는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서 세상과 대면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장을 겪는 김윤희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빠져 있는 것이 사랑 이야기다. 김윤희가 속한 세상에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 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모두 그렇다. 때문에 <날짜변경선>은 분명함과 불분명함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주인공들이 욕망하기에는 실패한 이야기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욕망하기를 주저하는 정현수, 잘못된 욕망을 품은 우진, 욕망할 대상을 찾지 못한 김윤희. 그래서 <날짜변경선> 이후 4년 뒤에 장르문학으로 돌아온 전삼혜의 작품이 분명한 세상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욕망의 추구가 좌절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는 인상을 준다. 사랑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자격을 위해서 주인공들은 어느 정도 고결한 인물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날짜변경선>에서 쓰레기들에 둘러싸인 김윤희와 달리 <창세기>에서 유리아는 남자들에 맞서서 세은을 지키려고 하는 당당한 인물이다. 때문에 욕망의 추구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 전삼혜의 작품에서는 <여름날>과 <판도라의 서랍>에 있던 복잡한 갈등이 모두 다 지워지게 된다. 이후에 <궤도의 끝에서>는 분명함과 불분명함의 균형을 되찾은 듯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불분명한 세상을 통과하며 자신의 감정을 분명히 알게 되는 성장 서사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죽음이다. 주인공은 자신한테 다가오는 죽음을,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결말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것은 '함께 하는 것'과 '죽음'이 전삼혜의 소설에서는 곧잘 충돌한다기 보다는 화합하는 관계를 갖고는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세은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유리아를 배신하지 못한다. 죽음이 가지는 모호한 속성 때문에 <여름날>과 <판도라의 서랍>에서는 주인공이 세상의 균열을 목도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완전히 다치지는 않는 어떤 막연하고 안전한 지대에 머무를 수 있다. 저 두 작품에서 죽음은 서술자의 세상 바깥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날짜변경선>에서는? <날짜변경선>의 김윤희는 자신을 따돌림시키는 아이들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책가방을 갖고 내려오다가 팔뚝을 철근에 베여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상처를 두고 자살을 시도한 흔적이라고 이야기를 퍼뜨린다. 팔뚝의 상처는 학교 폭력으로 인해 나타난 부차적인 요소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김윤희가 죽어야 하는 불행 서사의 복선으로 삼는다. 사람들이 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김윤희의 불행은 죽음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필연성을 믿는다. 이때 김윤희가 블로그에서 자신이 당했던 학교 폭력을 설명하고, 팔뚝을 다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그 서사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다시 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죽음의 서사에 단초를 제공한 것은 우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그 죽음의 서사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김윤희가 우진과 정현수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김윤희는 블로그에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할 때, 함께 밥 먹는 백일장 친구들을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말한다. 김윤희 본인이 세 사람으로 이뤄진 그 공동체에 애착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현수와 우진을 만나 함께 어울리게 된 다음부터 외로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윤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애착을 가진 그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 남성성의 증명을 위해 언제든지 여자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진, 그리고 그런 우진을 마지막까지 긍정적이게 바라보는 정현수. 죽음의 서사를 피하기 위해 김윤희는 그들을 떠나야만 하고, 이 경우에서 김윤희는 '함께 하기'를 거부하면서 '죽음'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함께 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성장의 대가다. 자기 자신을 적대하는 환경과 결별하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해내는 것. 설령 자기 자신이 그 환경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성장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이런 과정이 빠져 있는 작품은 <생텍쥐페리 가 27 번지>다. 201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어머니에 적대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결국에 어머니를 부정하는 데는 다다르지 않는 이야기다. 어머니의 세상을 떠났던 아이들이 다시 한번 어머니의 곁으로 모여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때 다시 한번 '함께 하기'의 테마가 작품에 퍼진다. 어머니를 증오하기로 결심한 채 웨일 재단을 떠난 안나와 어머니 곁에 계속 남기로 한 비아가 함께 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두 아이가 함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 그런데 이때 아이들의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 다 아이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장은 끝없이 유예된다.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이 지불하지 않는 성장의 대가. <소년 소녀 진화론>은 형식적으로는 결별을 통해서 등장 인물들이 성장해내가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미심쩍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들한테 세상이 너무나 분명한 형태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나루와 가하가 연인으로 함께할 수 없는 이유는 불가항력적인 영역에서 설정으로 주어졌다. 이 둘한테 '사랑', '체념' 같은 감정은 너무 분명하다. 이 둘의 세상에는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불분명함이 없다. 불분명함에 대해서 다룬 중단편 소설에서 다시 어른거리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다. <여름날>, <판도라의 서랍>, <궤도의 끝에서>에서 세상이 모호한 안개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질 때 사실 죽은 아이들한테는 어른으로 살 기회가 없어져 있다. 이때 생각해볼 것은 김윤희가 죽음의 서사에서 빠져나와 삶을 얻는다는 것이다. 삶의 가장 마지막에 와야 할 죽음이 김윤희의 존재를 정의하는 상황을 피해버렸기 때문에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김윤희는 훗날 아이들의 공동체에 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모호한 세상에서 분명한 것을 발견해가면서 죽음을 피하는 데는 성공한 이야기. 그것이 김윤희의 성장 서사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자유비평 게시판입니다. 발췌를 해 갈 경우 출처를 꼭 밝혀주세요. Textreet 2018.04.18 96
47 문단과 언론의 장르 문학 지워내기에 대하여 아서고든핌 2019.05.18 238
» 전삼혜 - '분명함'과 '불분명함'을 통해 들여다본 작품 세계 아서고든핌 2019.05.18 144
45 17세기(조선 중기)의 여성 원귀들 전혜진 2019.04.21 188
44 16세기(조선 중기)의 여성 원귀들 전혜진 2019.04.21 102
43 15세기(조선 전기)의 여성 원귀들 전혜진 2019.04.21 345
42 조선왕조실록과 귀신 관련 키워드 file 전혜진 2019.04.01 605
41 고소설 속 여성 원귀 전혜진 2019.03.31 614
40 구비설화 속 여성 원귀 전혜진 2019.03.31 81
39 문헌설화 속 여성 원귀 전혜진 2019.03.30 111
38 여성 원귀에 대한 기록과 연구들 전혜진 2019.03.30 175
37 한국에서의 귀신 연구에 대한 간단한 정리 전혜진 2019.03.30 344
36 로맨스소설 시장에서의 '여공남수' 밀밭 2019.03.27 1671
35 1900~1920년대 한국 과학소설의 문제들 유로스 2019.03.18 180
34 장르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이융희 2019.03.10 277
33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 사이의 괴리 - 문단 문학 vs 김보영 arthurgordonpym 2019.03.10 2781
32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 사이의 간극에 대한 단상 - 문단 문학 vs 배명훈 arthurgordonpym 2019.02.10 7919
31 고수위 로맨스와 포르노그래피 정다연 2019.01.18 1315
30 히든피스와 게임 시스템의 중심에서 - 한국 게임판타지 소설의 역사 이융희 2018.11.20 581
29 [게임비평] 진-게임 (Zine-games)이란 무엇인가 박성국 2018.10.19 45284
28 “장르”라는 젠더, “젠더”라는 장르 하윤 2018.10.12 448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