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문학이란 없다

1. 순문학이라는 통치

 

텍스트릿 팀이 소위 0세대, 또는 1세대 선배 작가분들을 만나러 다닌다. 고전적인 작가의 생애사, 채록연구를 하는 것인데, 이때마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용어가 언제 나타났는지를 물어본다. 작가분들의 이야기는 그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순문학 진형이 먼저 자신들을 순수한 문학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장르를 다룰 뿐 문학의 자장 안에 있다고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란 용어를 썼다는 말도 있고, 장르문학 쪽이 문학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자의식을 내뿜던 문학을 비아냥 거리기 위해 순문학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 어원이든, 두 어원의 시작이 서로 타자를 대상화하여 호명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함임은 확실해 보인다. 아서고든핌님이 이야기한 '지워내기' 라는 행위도 결국은 정치 영역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 아서고든핌님과 나의 의견이 좀 차이가 난다. 아서고든핌님은 장르와 장르가 아닌 것을 나누는 것으로 장르의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말을 하며 

 

'장르의 테두리는 작가와 독자들이 오가며 만든 창작과 소비의 울타리 같다고 생각한다. 이 울타리가 보수적인 장벽이 될 필요는 없지만, 이 울타리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오간 그 흔적을 지워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울타리를 둘러싼 차별을 지워내는 것과 그 울타리 자체를 지워내는 건 다른 일이다.'

 

라고 했는데, 역으로 지금 울타리를 지우는 것이, 울타리를 오간 사람들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울타리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흔적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동시대성과는 맞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은 사실 모든 선언과 호명이 갖는 자연스러운 사멸의 수순이다. 현대의 어떤 선언도 영원불멸할 수는 없다.

 

한국 문학을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라는 어설픈 이분법으로 나눈다면, 그 이분법은 두 가지의 양극이 나눠진 자석이 아니라 지층의 형상이다. 이 그라데이션 화려한 지층은 마치 근대적 분화를 끝까지 밀어붙인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지층의 변화는 매체의 변화와 매체를 둘러싼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비주류 선언』을 비롯해 다양한 칼럼들을 통해 텍스트릿의 멤버들이 공유한 것은 장르로서의 계보와 함께 도시사회와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층은 서로를 넘나들며 영향을 끼쳤다. 굳이 지층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과거 표층의 작품이라고 여겼던 이영도를 비롯한 작가들의 작품이 지금은 더없이 심층적이 되었고, 이러한 시간적 흐름은 오로지 작품에 불과하며 독자들은 그 지층의 역사를 함께하며 독해법을 누적해 왔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달빛 조각사>와 <스크립터>의 독자에 대해서 차등을 두는 것에 반대한다. 김휘빈 작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장르의 독자를 기본적으로 '엘리트 독자'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지적 능력의 차등이 아니라, 장르를 오래 읽은 팬들은 대부분 장르의 계보와 역사를 따라오며 의식, 무의식의 영역에서 각각의 독서를 다 해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복합적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기존의 연재 플랫폼들이다. 

 

연재 플랫폼은 상업과 비상업의 구분이 있기 이전의 공간으로 오로지 텍스트가 모이는 시공간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서점용과 대여점용을 구분하는 것은 문학의 작품성 이전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해당 서사가 편집 과정에서 조금 더 공들여 다듬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연재소설과 대여점 소설에서도 똑같이 보여진다. 대여점의 시스템 속에서도 독자들은 인터넷 연재본과 다르게, 그리고 공들여서 인쇄매체에 맞춰 변화된 지점을 보기 위해서 대여점을 찾았다. 굳이 <룬의 아이들>의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묵향>을 비롯해 <비뢰도>, <달빛조각사>, 등 대여점에서 서점의 판매량까지 확장된 예시는 얼마든지 많다.

 

제도권 내에서 ISBN 발급 이전까지의 연재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의문을 표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였다. 90년대 중반부터 활발히 이루어진 PC통신 연구들에 대한 반성이었는데, 대다수의 상업시장, 또는 출판 시장의 장르에 관련된 글은 인쇄매체를 기준으로 둔 채, 그 글이 어디에서 생멸하는지 가상공간의 문법 자체를 모르는 상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다는 서점용 장르 문학도 웹진이나 플랫폼 형태에서 연재를 거친 작품을 찾아보긴 어렵지 않다. 그렇게 서점용으로 출간된 소설들, 또는 양장본들도 조금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총판을 통해 대여점에서 보급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 소설들이 과연 대여점과 유의미한 독자 차이를 갖고 이야기 될 수 있는가.

 

조금 더 정확히 하자. 장르라는 울타리가 없다는 선언과 무용하다는 선언은 다르다. 지금 무용하다는 것은 당시 그러한 인정투쟁이 유용했을지언정, 지금 사회에서 이것을 굳이 순문학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장르문학이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대학 강단이나 여러 자리에서 순문학이라는 말을 제도권 문학이라는 용어로 교정한다. 문단이라는 말도 나쁘진 않겠으나, 이런 호명은 호명된 동시에 반례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소위 "문단" 내부의 지형에서도 문단이 있긴 있냐고 반문하는 작가들이 많을 뿐더러, 문단에 소속된 곳에서 글을 발표했다고 서사적 내용과 상관 없이 문단 문학이라는 프레이밍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문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굉장히 다층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순문학의 정의를 살펴보기 위한 '문단'이라는 집단이 인적 구성원들의 집단인지, 또는 문예지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구조인지, 그리고 그 안에 시스템을 돌리는 룰메이커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적 구성원들의 집단과, 문예지 시스템이라는 집단 어느쪽을 주목해도 두 가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지워질 수밖에 없다. 바로 아마추어, 흔히 문청이라고 불리는 집단과 독자다. 문예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작가 관리의 구조는 작품의 자격 검정인 등단을 넘어서 비평가들의 재해석(가치검증), 그리고 원고료를 통한 생계의 유지와 출판사를 매개해 책을 낼 수 있게하는 거대한 프로모션의 장이다. 적어도 이 구조 속에서 독자는 그저 목격하는 자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끊임없이 글에 대해 발언하지만, 그 어떤 문예지도 독자들의 발언을 명문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올드미디이적 형상에서 독자는 그저 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후원자가 된다.

 

이런 비틀림 속에서 문청들은 제도 속으로 편입되기 위한 사람이다. 그들은 독자인 동시에 작가이고, 작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작가를 열망하는 자이다. 그들은 관리받지 못하는 자이며, 관리받기에 부족한 자이다. 통치성은 지향을 공유할 때 성립하는 말이다. 적어도 2019년에 와서 제도권 문학과 장르 문학이라는 용어의 구분이 무용한 까닭은, 제도권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 그러니까 미학적이고 제의적인 가능성이 모든 텍스트에 유용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소위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미학을 잠시 내려놓고서도 문단내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문학한남', 'K저씨 문학' 등으로 밈화된 한국 문단의 왜소한 자화상은 더이상 권위의 대상이 아니다. 장르문학을 호명하면서 굳이 순문학을 호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소위 '문단 작가'들이 장르문학을 썼는데 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대부분 장르 계열 팬덤의 평이다. 팬덤은 독자와 다르다. 팬덤은 관리주체로서의 시스템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자생적 집단이다. 창작자는 동시에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는 동시에 창작자가 된다. 비평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 된다. 나는 문단 계열에서 이루어지는 장르적 시도가 과연 '나쁜가?'하는 질문을 몇 차례 스스로 던졌다. 그리고 대답은 늘 같다. 일단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이 오로지 장르의 기준이라는 것이고, 이 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바뀐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는 통치에 대항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 밀어내기가 문학의 지독한 인정투쟁임을 뒤집어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

 

아서고든핌님이 올린 글을 바탕으로 보론, 그리고 전개되는 비평입니다.

텍스트릿에 올라오는 비평글들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피로를 호소하는 분이 많아, 글을 3~4부작으로 잘라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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