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해 불가능성

 

최근 참석했던 한 학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발제자는 문학에서 재현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형상들, 세계 종말의 형상들을 장르적 문법이 아니라 문학의 문법으로 읽자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나는 발표가 끝나고 질의를 던졌다. 굳이 장르적 문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왜 현대문학의 관점으로 다시 읽으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문학에서는 이런 문법을 읽어낼 계보가 없다. 80년대 이전에는 리얼리즘의 계보 속에서 이야기 되지 않는 소설은 부르주아의 나태한 문학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자는 시도는 의도적 오독을 선언적으로, 그리고 운동적으로 하자는 말인데, 이러한 안티-독법은 고전적 독해 방법이 있을 때나 선언할 수 있다. 장르의 독법을 배우는 것과, 문학의 독법 속에서 다시 읽는 것은 다르다. 앞선 것은 이를테면 알파벳으로 적힌 단어 밑에 한글로 발음기호를 하나둘 적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몇 개의 단어만을 겨우 떠듬떠듬 가져와서 재조합하겠다는 소리다. 어떤 독해가 될 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결과는 알 수 있을 법하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며칠 전 SNS에서 "이제 순문학 문예지에서 발표를 많이 하니까 이 작가는 순문학 작가" 라는 낡아빠진 진형논리를 맹신하며 몇몇 작가를 적대시하는 글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람은 도대체 장르라는 걸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순문학 진형에서 발표했다고 장르가 아니고, 문학적 틀 안에서 글을 썼다고 장르가 아니면, 사람은 한 번 태어났을 때 지문처럼 똑같은 글밖에 못 쓴다는 소리인가. 평생 자신의 취향과 취미나 스타일은 고정된다는 말인가. 이것도 앞서 말했듯이 역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에 불과하다. 그것도 지독하게 자기 취향에 불과한 얄팍한 정치.

 

나는 2017년 12월, 웹소설 집담회를 처음 개최했을 때부터 꾸준히 문제처럼 제기하는 문구가 있다. "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 우리를 읽을 수 있는가". 그들은 읽으려 한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다. 단지 어설프게 자신의 범주 속에서 슬그머니 내용을 뭉뚱그려 어설프게 '문학'이라고 치장하거나, 또는 '진짜'가 아니라던가 '상업성이 짙다'라던가 또는 '저질'이라는,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공포심의 발로에 불과한 발언들을 하며 없는셈 친다. 문학이라는 지층 속에서 어느 쯤인가 지형적으로 위치해서, 평생 그곳에 고정된 화석처럼 얄팍한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은 가능하다. 

 

장르는 도대체 뭔가? 장르를 쓴다는 것은 무엇이고, 장르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장르를 '읽을 수 없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순문학을 물어보기 이전, 장르라는 말조차 제대로 대답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순문학이라는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고 호명함으로써 우리를 조명하고자 한 것이겠으나, 이렇게 두 모호한 추상끼리 대결해봐야 징검다리가 될만한 개념이 없으니 그저 무한히 동어반복만 될 뿐이다.

 

장르라는 것은 결국 소비의 문제다. 장르라는 분류는 그야말로 장르의 장르, 그러니까 2차 분류에 불과하다. 아서고든핌님은 소설을 읽을 때 어떤 장르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고 했는데 재미있는 건 나는,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보러 가." 라는 말을 할 때 "무슨 장르?"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고 "어떤 영화?" 라고 물어보고 "어떤 내용인데?" 라고 물어본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 강단이나 대중 강연에 나가 사람을 만날 때 더욱 확연하게 느껴진다.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장르나 좋아하는 문화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일반 4년제 대학의 학과들에서는 어물쩍 어물쩍 제대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장르를 좋아한다고 하는 애들도 읽은 거라곤 20~30년 전의 영미문학권 작품 몇 개가 고작이고, 요새 나오는 영화나 소설들을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르라는 총체를 통해서 사회에 접속하는 사람들은 소수다. 대화를 해보면 그들 중에서 마블 영화를 보거나 웹툰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작품이 '장르'라는 특정한 기표 속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질 않는다. 아서고든핌 님에게는 미안한 얘기가 되겠으나 나에겐 "무슨 장르?"라고 물어보는 질문 자체가 장르라는 담론 속에서 속해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투리라고 여겨진다.

 

아서고든핌님의 본문에서는 논리를 위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레슬리 피들러의 기준에 맞지 않으며, 비평가들이 발굴해야 하는 작품에 맞지 않는다고 전제를 했다. 이런 전제 자체를 거부하며 그 원인을 파악해서 들어가 재맥락화, 그리고 의미화하고 규명화하는 사람들이 현대의 장르 팬덤이고 장르의 연구자이자 비평가들이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것, 그리고 소비를 하는 것 안에는 그들이 소비를 통해 욕망하는 기호와 가치가 들어있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전제다. 50만이라는 수치는 수치인 동시에 기표다. 대중적 성공이 문학적 가능성과는 별개에 놓여있다는 그 전제를 거부한 예시가 귀여니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학계와 비평계의 시선이다.

 

귀여니라는 현상은 소위 '청소년 문학 담론'과 이어진다. 2000년대 초, 그림책과 판타지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이 중학교때부터 갑작스러운 입시 독서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것이 청소년 소설이었다.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소설은 성적지상주의에 매몰된 사회 풍토, 두발 단속과 같은 청소년 인권 문제, 학생들의 일탈과 폭력 등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형상화되는 것은 사회 구조와 소위 '어른'이라고 불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문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강화한다.

 

10대들은 계몽성 강한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거부했다. 자신들의 언어인 채팅언어를 가지고 오고, 자신들이 소비하던 만화나 연애의 서사를 그대로 발현해냈다. 그것은 귀여니라는 작가의 작품 하나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작품들이 비슷하게 창작되었고, 이것은 로맨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판타지 소설이나 아마추어 인디 소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던 현상이었다. 예를들면 동시대쯤에 나왔던 황금드래곤 문학상 수상작인 에티우에서도 이모티콘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어땠는가.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 그리고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마치 시대의 밈처럼 문학의 편에 서서 거창한 문학의, 문법의, 한글과 윤리규범의 수호자가 되어서 귀여니를 욕하는 '운동'에 너도나도 동참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 만들어진 '장르'는 그들에게 아직 '미숙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의 문화이자 시대의 조각이었다. 서브컬처라는 말이 그런 거 아닌가. 메인스트림의 바깥에서 수없이 분포해 있는 세계. 이제 그런 메인이나 서브의 구분조차 없을 정도로 복잡다변한 세계에서 세상의 조각, 그것도 아주 자그마한 조각에만 골몰한 제도권 문학이 과연 세계를 제대로 읽고 있는게 맞는가.

 

나는 이 장르 문학과 제도권 문학이라는 이분법에 고착되면 고착될수록, 장르 역시 세상을 읽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장르적 구조로 세계를 읽는다는 건 거창한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 구조 바깥의 세계는 읽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모든 문학은 세계를 읽는다. 그 명제만 있으면 된다. 왜 장르가 아집스러운 근대적 진형논리에 따라서 순문학 제도권에서 장르를 시도하면 어설프다거나 제도권 안에서 발표하는 사람은 이제 장르 작가가 아니라는 말들을 하고 있을까. 문학의 진형에서 시장의 지표나 똑같은 선에서 이루어져야 할 제도적 혜택을 독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그러나 그것에 저항해서 그들에게 우리의 예술성이나 미학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인정투쟁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와 교류하는 연구자들은 이러한 일방적인 '교육'에 슬슬 환멸을 느낀다. 교류를 하는 곳에서 교육을 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우리는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영상 콘텐츠가 21세기의 주요한 문법이 되고 있고, 이제는 시각과 청각을 넘어서 감각 그 자체를 현현시키는 테크놀로지 시대에, 텍스트로만 재현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구술문화로 넘어가는 시대의 중심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물론 아서고든핌님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납작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님을 '미성년의 성장을 다룬 서사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이야기'하려 한 리뷰의 측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요한 내용은 이런 부분이 아니니 사소한 부분의 오류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

 

아서고든핌님 텍스트릿 자유비평란에 올린 글을 바탕으로 보론, 그리고 전개되는 비평입니다.

텍스트릿에 올라오는 비평글들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피로를 호소하는 분이 많아, 글을 3부작으로 잘라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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