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되기’의 매력

 


 로맨스판타지의 #빙의물

 

 로맨스판타지 장르는 그 이름에서도 예측할 수 있듯이, 로맨스와 판타지라는 두 개의 장르적 특징들이 혼합되며 생성되었다. 로맨스판타지에서는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남주인공과의 사랑 성취를 이야기 구성의 기본으로 두되, 판타지적 세계관에서의 활약상을 담는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를 단순히 판타지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연애 이야기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기존 판타지 장르가 사용하고 있는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기존 로맨스 서사에서 구현해내지 못했던 여성-남성 간의 관계를 보여주어 새로운 관습을 가진 이야기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다.


가령, 로맨스판타지의 독자들이 흔히 ‘회빙환’이라고 줄여 말하는 ‘회귀, 빙의, 환생’의 소재는 판타지 장르에서도 이미 널리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다시 마주하게 되거나(회귀), 이미 경험해 본 게임이나 소설의 캐릭터가 되거나(빙의), 혹은 아예 지금의 인생을 리셋하고 새로운 삶을 살거나(환생). 위의 소재들은 판타지 작품 속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은 물론, 인물들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와 스토리 전체 구조까지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한다. 장르 독자들은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판타지의 하위 장르로 인식하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로맨스는 독자와 창작자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구성과 여성 취향을 만족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1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로맨스판타지 장르 역시 여성 독자와 창작자의 취향을 반영한다. 로맨스판타지 안에서의 ‘회귀, 빙의, 환생’은 일차적으로 로맨스 서사의 기본 목표라 할 수 있는 낭만적 사랑의 성취와 관계되지만, 더 나아가 여성인물에게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제공하거나, 새로운 모험적 상황을 제시한다.


로맨스판타지의 #빙의물 역시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과 같이, 주인공이 이미 접했던 책이나 게임의 캐릭터로 빙의 되어 세계관 전체를 통찰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내용을 지닌다. ‘빙의자’인 주인공은 갈등을 원만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원본 작품의 엑스트라나 곧 죽음을 맞이할 조연으로 빙의를 한다거나, 다른 중요한 인물들이 원본 작품의 서사와 다르게 움직이는 등(가령 남자주인공이 원본의 여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에 빙의한 빙의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식이다.)의 장애물과 마주하게 된다. 로맨스판타지 #빙의물에서는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을 주인공이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확인하는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 악녀에 ‘빙의’되는가?

 

흥미롭게도, 최근 출간되는 로맨스판타지 #빙의물 중에는 주인공이 원본 작품 속 악녀로 빙의되는 내용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원본 작품에서 큰 활약이 없는 엑스트라나 조연 혹은 죽음을 앞둔 인물에 빙의하는 경우와 비슷하게, 악한 인물로 빙의하는 것 역시 주인공에게 적당한 ‘챌린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빙의하게 되는 이가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있는 악인이 아니라, ‘악녀’라는 점이다.


악에 해당하는 인물의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려면, 작품 텍스트 안에 확연한 선악의 구도가 자리 잡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주인공이 빙의하게 되는 원본 텍스트는 신화와 동화와 같은 고전 작품이거나 멜로드라마와 같이 선악이 뚜렷한 서사 구조를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녀는 실상 ‘가부장적 선악구도’ 아래에 의해 분류된 인물형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선’에 해당하는 여성은 현모양처, 가정의 보호자와 같은 가치를 지향하고 가부장제 시스템이 요구하는 여성스러움’, 즉 순결하고 사회와 가정·젠더 관계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에 순종적인 여성으로 나타난다. 반면 ‘악’의 위치에 놓인 여성은 ‘선’ 바깥에 놓여있는 자들이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 도전하는 ‘야망’을 가지며, 말대꾸하고 드세며 반항하는 여성들… 이들은 ‘순결한’ 여성들과 다르게 음탕하고 남자를 유혹하는 팜므파탈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악녀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받아들여진다. 대부분의 서사 텍스트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반영하고 재현한다. ‘악’은 작품 내의 세계관을 포함한, 독자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의 금기/도덕을 위반하기 마련이다. 일상에서 금지된 행동을 행하는 악인의 형상에서 독자는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낀다. ‘팜므파탈’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악녀는 가부장제를 뒤흔드는 위험한 존재임과 동시에,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 성적 일탈을 꿈꿀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선악이 뚜렷한 작품들이 권선징악의 결말을 그려내면서, 작품세계의 도덕질서에 흠집을 내던 악녀는 징계를 받는다. 악녀를 통한 일탈을 맛본 독자들은 금기가 무너지지 않고 도덕질서가 그대로인 것에 안심한다.


그러나 이제 독자들은 ‘착한 여자’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부장제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였음을 파악하고, 이 시스템에 따라 ‘선악구도’를 나누어 여성을 시시때때로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실제 삶에서 ‘여성상’에 대한 인식이 전환된 이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녀’와 ‘착한 여자’를 재해석할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한편 로맨스판타지는 장르가 형성되던 초창기부터 다양한 여성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여기사물, #걸크러시와 같은 키워드가 유행하는 등,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상정한 ‘여성성’과 반대되는 강한 주인공을 설정하기도 했다. 로맨스판타지 장르는 기존 텍스트에 등장하는 악녀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인물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빙의’ 소재를 통해 주인공을 직접 악녀로 만듦으로써 캐릭터의 매력을 극대화시키기 시작했다.

 


#악녀빙의물의 진화

 

 그런데 #악녀빙의물이 일종의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악녀라는 캐릭터에서 ‘악’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 된다. 악녀가 된 주인공이 캐릭터를 재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주인공이 빙의하게 된 원본 텍스트 내에서는 여전히 악녀로 받아들여지며 위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원본 텍스트의 악녀가 가부장제를 떠나 사회 전반의 질서를 붕괴시킬 정도의 위험한 존재로 그려진 상태라면, 캐릭터의 재해석은커녕 앞으로 내려질 징벌의 위험을 피해 다니는 것이 큰 관건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악의 해소 방식에 따라 #악녀빙의물의 유형을 나눠보고 악녀에 대한 재해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유형은 ‘악’을 철저하게 정화해 악녀를 ‘선’의 편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악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빙의자는 악녀의 위치를 이용하되,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악녀의 정의’는 이 유형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설 속 악녀 ‘샤르티아나’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빙의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샤티’의 삶은 너무나 행복하고 풍족한 것이어서 굳이 남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 진심으로 ‘샤티’를 사랑해주는 가족, 풍족한 재산과 막대한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빙의자는 착한 ‘샤티’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첫 번째 유형의 해소법은 사실상 악녀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반감시킨다. 악녀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닌 개과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이 유형에 속하는 #악녀빙의물 작품은 주인공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악행을 저지른 악녀로 빙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두 번째 유형과 세 번째 유형은 각각 ‘악’을 재해석하거나 해소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악녀 캐릭터를 재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신데렐라를 곱게 키웠습니다’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화 신데렐라의 계모 캐릭터에 주인공이 빙의하는 내용이다. 빙의자는 계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그의 삶이 절박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두 번째 결혼한 남편이 사업을 하겠다고 재산을 탕진해 빈털터리가 된 계모 ‘밀드레드’는 자신이 낳은 딸 둘과 남편의 딸까지, 총 세 명의 아이를 건사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유사 근세 유럽 사회는 귀족 여성의 공적 활동에 제약을 둔다. 때문에 재산을 지키고 불리기 위해 귀족 여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결혼뿐이다. 이 작품은 계급 상승을 위한 결혼이 속물적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전면적으로 반박함으로써, 가부장제 선악구도가 지정한 ‘악’을 재해석하고 실상 그것이 ‘악’이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세 번째 유형은 ‘악’을 해소해야겠다는 어떤 강박적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탐욕스럽고 표독스러운 캐릭터 그 자체로 악녀의 삶을 이어나가는 작품들이다. 빙의자는 악녀가 가진 지위를 즐기거나 악행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채, 적당히 제 잇속을 챙기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그 대공의 화려한 결혼은 사기’를 소개할 수 있겠다. 악녀인 상태 그대로 존재해주길 바라는 남주인공의 등장과 악녀 캐릭터의 매력을 밸런스있게 보여줌으로써, #악녀빙의물의 흥미를 새롭게 이끌어나가는 작품이다.

 

 

 

 이 칼럼은 텍스트릿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이 공동 기획하여 8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텍스트릿 필진 손진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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