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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한국의 로맨스 소설] 로맨스는 보상의 문학이다

 

 

 

 

 

서브컬쳐 텍스트를 구획하여 의미화할 때 흔히들 ‘여성향’, ‘남성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특히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흥미 본위의 텍스트들이라면 더더욱 성별로 인한 가름이 꽤나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다른 만큼, 각 지정 성별이 표현하는 욕망의 모습도 다르다는 인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여성향’과 ‘남성향’의 구분이 과연 정당하냐는 논박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서브컬쳐 안에서 ‘로맨스’는 ‘여성향’을 대표하는 장르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언급하기 위함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봤을 때 간단히 정의를 내리자면, 로맨스는 사랑이야기다. ‘남성향’, ‘여성향’ 구분 없이 사랑이야기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장르문학 ‘로맨스’는 다르다. ‘로맨스’는 철저하게 여성 취향의 사랑이야기다. 여성들이 가지고 있다는 취향은 “여성 스스로가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와 같은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라는 논점으로 나뉠 수 있을 텐데, ‘로맨스’는 양자 모두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과 여성 본인의 욕구가 어긋나는 지점이 많기 때문에 ‘로맨스’와 관련한 논제들은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결국은 여성 본인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런 이유로 인해 현재 한국의 ‘로맨스소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현재 한국의 여성(독자)들의 생각과 욕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로맨스’는 이성애를 중심으로 다루는 문학이다.(필자가 생각하는 로맨스는 BL[Boy’s Love]과 GL[Girl’s Love]을 제외한 HL[Hetero Love]만을 범위에 둔다. 그러므로 똑같은 ‘여성향’일지라도 BL과 GL에 대해 다루지 않음을 미리 밝혀두려 한다.) 즉 여성의 이야기이되, 남성과의 관계 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담아낸 것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남녀 간 사랑의 문제만이 아닌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관계 자체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맨스’는 여성-남성 간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여성의 편에서 여성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성에게 보상을 선사해준다. 이는 연애라는 가장 사적인 연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남녀 간의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지정 성별 간 사회적 역할-대우의 차이가 존재함과 동시에 이 둘이 섹스를 한다는 사실 때문이지 않은가. 논쟁적인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로맨스’는 여성의 편에 서 있다.

 

 

‘로맨스’가 연애 이상의 이야기라는 것은 장르적 특성과도 연관이 깊다. 특히 ‘로맨스판타지(이하 로판)’라는 장르가 그렇다.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판타지’ 혹은 여성 작가가 쓴 ‘판타지’는 플랫폼에 의해 ‘로판’이라는 이름으로 카테고리화 되었다. 조어에 로맨스라는 말이 들어간 결과, 현재 ‘로판’은 대략 세 종류의 서사(‘여주인공 판타지’, 여성작가의 ‘판타지’, 판타지적 배경에서 사랑하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뿌리는 다를지언정, 플랫폼과 독자들은 ‘로판’을 ‘로맨스’의 일부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로맨스’의 외연을 넓게 설정해 ‘로판’ 역시 포괄하여, 지금 현재 한국의 ‘로맨스’를 설명하고자 한다.

 

 

여성 보상의 문제가 ‘로맨스’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가? 대표적으로 ‘후회남’ 키워드와 ‘육아물’ 키워드를 소개하겠다.

 

 

 

 

#후회남 – 회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다

 

 

대부분 로맨스 소설은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주인공은 평범하다 못해 보잘것없는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소설 속의 세계에서 최강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남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가치에 대해 알지 못한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에게 사랑을 배워 ‘길들여진다.’ 고난과 갈등을 이겨낸 뒤 두 사람의 사랑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클래식한 ‘로맨스’의 기본 구조란 이렇다.

 

 

‘후회남’이 등장하는 소설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단, 남성 주인공의 내면 심리묘사에 조금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돈도 많고 명성도 높은 남자주인공은 사랑의 감정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질적으로는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여러 여자나 전전하며 빈껍데기처럼 살고 있다. 소위 ‘나쁜 남자’다. 그런 그의 앞에 여주인공이 눈에 들어온다.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그녀와 ‘엔조이’하면서,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를 장난감 취급한다. 그의 행동에 깊이 상처받은 여자는 이별을 고하지만, 남자는 어느새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느낀다. 몇 년 뒤, ‘나쁜 남자’는 갱생하여 여자 앞에 다시 나타나 회개하고 사랑을 구걸한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이 당했던 만큼 충분히 고생을 하고 난 뒤에야 여주인공은 그의 사랑을 받아준다.

 

 

클래식한 ‘로맨스’와 ‘후회남’이 등장하는 ‘로맨스’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역사적으로 사랑은 여성의 것으로 분류되었고, 남성은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따라서 대부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길들이는 형태로 ‘로맨스’가 전개되곤 했다. 그러나 ‘후회남 로맨스’에서 여주인공은 사랑의 가치를 더이상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주인공의 수고를 덜어주는 대신, 남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고 갱생한 남주인공은 이미 돌아서버린 여주인공의 마음을 녹일 정도로 낭만적 사랑의 화신이 되어 구애한다.

 

 

독자들은 구애의 과정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남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여태껏 사랑에 전전긍긍하던 이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런데 ‘후회남 로맨스’에서는 남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후회남’의 정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 중 박수정 작가의 <미로>를 살펴보자. 이 작품에는 기존의 ‘돈 봉투’ 클리셰가 재전유되어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돈 봉투’ 클리셰는, 보통 남주인공의 가족이(주로 어머니) 보잘것없는 여주인공에게 돈 봉투를 내밀며 여주인공의 사랑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이 부유한 게임 회사의 사장인 줄도 모르며 오히려 돈을 뜯어내는 제비쯤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회개하며 매달리는 남자에게, 여자는 ‘더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돈 봉투를 내민다.

 

 

여주인공이 어느 선까지 남주인공을 용서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강간이나 폭력을 사용했을 때에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잘못이 용서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놓고 독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후회남 로맨스’ 중 최근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에는 김빠 작가의 <연정을 품다, 감히>라는 작품도 있다.

 

 

 

 

#육아물 –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되기

 

 

‘육아물’은 ‘로판’ 장르 중 하나다. 모종의 사고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현대 여성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이세계로 환생한다. 그리고 서양 중세 배경의 판타지 세계 속, 냉혈한이지만 능력 있는 아버지 밑에 여자아이로 태어난다. 아버지와 주요 남성 인물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내용이 ‘육아물’ 이야기의 기본 구조다. 로맨스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골수 ‘로맨스’ 독자들에게까지 크게 사랑받은 ‘로판’ 장르다. 윤슬 작가의 <황제의 외동딸>은 ‘육아물’의 대표작이자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이다.

 

 

왜 여주인공은 어린 아이가 되어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 인물들에게 사랑받는가? 우리 사회에서 나이 어리고 체구가 작고 마른 체형을 가진 여성은 남녀 모두에게 매력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주지하다시피, 외양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 같은 행동과 어투도 이성적인 매력에 포함된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여주인공이 사랑받을 수 있는 근거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작품 속 여주인공은 성장한 뒤에도 ‘소녀’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여아 혹은 소녀 되기’는 ‘아버지(가부장)로부터 인정받는 딸’이 되기 위한 일종의 둔갑이다. ‘육아물’은 둔갑의 판타지를 최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르다. ‘육아물’의 여주인공들은 태어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고난을 겪는다. <황제의 외동딸>의 여주인공은 맨 처음, 자식을 남기지 않는 폭군-아버지로부터 죽을 위기를 겪는다. 시야 작가의 <나는 이 집 아이>의 여주인공은 창녀인 어머니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어린 나이부터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여주인공이 택할 수 있는 행동방식은, 그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아버지의 눈에 드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아버지, ‘황제’ 혹은 ‘공작’은 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무한정의 사랑을 베푼다. 독자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형같이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아버지가 베푸는 권력을 마음껏 만끽한다. ‘육아물’은 아버지와 여주인공과의 관계가 유사 연애의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것은 남성(아버지)이 가진 권력을 사랑의 힘으로 쟁취하는 기존 로맨스의 방식의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중간에 어머니와 같은 존재는 둘 사이의 관계를 깨트릴 수 없는 형태로 등장한다. 대신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포함해, 소설 속 세계관을 쥐락펴락하는 남성인물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서사가 전개된다. 독자들은 사랑을 쏟아 붓는 아버지(남성) 캐릭터의 행동에 흡족해하고 대리만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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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텍스트릿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이 공동 기획하여 연재됩니다.

텍스트릿 필진 손진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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