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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한국의 무협] 로맨스 무협의 어색하고도 중대한 오늘

 

 

 

무협의 여성상이 대개 여성에게 그러했듯, 로맨스 장르의 남성상 또한 자주 남성에게 일종의 폭력적 타자화로 다가온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협이 말하는 남성의 환상도, 로맨스가 말하는 여성의 환상도 서로에게는 대개 매스꺼운 무언가다. 그렇기에 장르로서의 로맨스와 무협은 몇몇 예외적인 작품을 제외하면 상당히 오랜 기간 분리된 공간으로 존재해왔다.

 

물론 그 분리에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한다. 적지 않은 수의 독자들이 로맨스를 읽음에도 무협의 일부를 향유하였고, 그 반대 또한 충분히 성립한다. 그러나 작가 면에서는 그 분리가 상당히 완고했음도 사실이다. 90년대 이후 유행한 한국신무협의 시대는 기존 무협 서사에 대해 다양한 안티테제를 시도한 때이지만, 이때도 진산이나 한수영을 제외하면 딱히 중요한 여성 작가는 없다.

 

그런데 그 벽이 2010년대 초중반 들어 깨지기 시작했다. ‘로맨스 무협이라는, 무협의 오랜 팬들에게는 듣기만 해도 이상한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성향을 위주로 하는 네이버 웹소설에서, 남성 작가들이 여성향 지향 편집진의 지도를 받아 여성 독자를 위한 무협을 써냈다. 그리고 로맨스 시장에서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내었다.

 

좋든 싫든 페미니즘이 한국의 화제가 되었던 2010년대에 로맨스 무협의 등장은 어떤 식으로 젠더를 반영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2010년대 무협의 사회적 의미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네이버의 로맨스 무협은 젠더적인 해방을 완벽히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다수의 네이버 로맨스 무협은 기본적으로 로맨스의 기본적 구도를 충실히 따른다. 예쁘고 어느 정도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은 잘 생기고 강한 남성 협객과 사랑에 빠진다. 남성 협객은 여성 주인공을 구해주고 보살피는 입장에 있으며, 무엇보다 여성 주인공 한 명만 바라본다. 신데렐라의 구조는 2010년대 무협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기존 남성 무협 독자가 로맨스 무협을 외면한 것도 당연하다. <패왕연가>나 <마왕> , 네이버 로맨스 무협의 대표작에서 볼 수 있듯 남성 주인공은 로맨스식으로 이상화 되어 묘사된다. 또한 남성 주인공은 여성 독자층의 소망에 따라 행동한다. 이 과정에서 남성 협객은 본래 가지고 있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자로써 위치하게 된다. 그 결과 로맨스의 남성은 일반 남성 독자가 보기에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낭만적인 무언가로 보이게 된다. 요컨대 로맨스 무협은 기존의 무협이 여성을 대해 온 방식을 뒤바꾸었을 뿐이다.

 

거기에 더해, 로맨스 무협은 스키마(schema)의 사용도가 낮다. 무협은 데이터베이스라 할 만큼 수많은 장르 규약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장르 규약들을 얼마나 심도 있게 풀어내느냐가 주된 재미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무협 로맨스는 무협의 장르 규약에 익숙지 않은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많은 내용이 단순화된다. 장강(長江)과 하남(河南)의 지리를 모르고, ()과 도()의 차이를 모르는 독자를 상대로 하는데, 내용이 어찌 깊겠는가. 그 결과 무협의 예술성을 만들어내는 반무협적 안티테제 사용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결국 남성 무협 독자가 보기에 로맨스 무협은 단조롭고 유치하며 공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맨스 무협은 분명 하나의 전진이다. 본래 무림은 여성을 명시적으로 차별했다. 여성의 근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무림은 내공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무협 소설가들은 여성이 내공을 쌓는 데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다고 설정하였다. 여성 독자들이 읽기 힘들만치 낭만화되고 타자화된 여성 묘사가 많았고, 설봉과 같은 작가들은 자주 여성에 대한 강간을 조심성 없이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비록 로맨스 무협이 젠더적 평등 내지 탈젠더적 서사를 구축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분명한 전진일 수밖에 없다. 동양풍 세계관에서 여성은 드디어 후궁이라는 아가씨의 지위에서 탈출했다. 퍽 많은 로맨스 무협에서 여성 주인공은 드디어 칼을 들어 무림의 일원이 되었고, 여성의 입장에서 혹은 여성으로서 어느 정도 몰입이 가능한 입장에서- 무협을 보게 되었다.

 

사실, 2010년대의 무협 시장에서 여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협은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지속적으로 작품을 내놓게 할 담론 자체를 상실했다. 결국 고만고만한 수준의 작품이 무협 판을 가득 채웠고, 이는 매너리즘으로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남성 독자들은 무협을 하나둘 외면하였고, 이에 무협 작가들은 새로운 독자군여성-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작가들은 자기가 가진 능력과 시장의 수요에 맞춰 글을 썼고 이 상황은 두 가지의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첫째, 네이버 웹소설의 경쟁사인 카카오 페이지는 무협을 재발굴하는 작업을 했다. 한자만 쓰인 무뚝뚝한 표지는 잘 생긴 남성이 나오는 로맨틱한 표지로 바뀌었고, 작품 소개글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객전서>와 같이 여성에게 덜 모욕적인 무협들이 선정되어 여성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 비중이 결코 높지는 않았지만, 25년간 막대한 수의 작품을 쌓아 온 무협은 대략 3~5년 사이 여성 독자들에게 읽힐 만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되는 무협은 대부분 여성 독자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단순히 표지에서 무협과 로맨스가 절충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 내용적으로 여성에게 불편할 만한 요소들이 상당수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카카오 페이지에서는 남성 독자와 여성 독자가 공존하며, 작가들 또한 기존의 남성 작가이기에 서사의 전체적인 맥락은 여전히 남성적이다. 여성 협객만 하더라도 딱히 주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독자층이 큰 갈등 없이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서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심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둘째, 무협의 창작 기술과 장르적 규약이 여성에게 이전되었다. 무협을 쓴다는 것은 구파일방에서부터 마교에 이르는 무림의 방대한 무공 체계를 이해하고, 온갖 기물과 영약 목록, 그리고 상당한 분량의 클리셰에 숙달되는 일이다. 무협의 장르적 규약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실제로 무협의 담론이 상실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근래 젊은 작가들은 더 이상 무협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2010년대에는 무협을 창작하는 기술이 어느 정도나마 여성 작가들에게 이전되고 있다. 카카오 페이지의 선별된 무협 텍스트와 네이버의 로맨스 무협은 여성 독자와 작가들로 하여금 무협이라는 체계를 인지하게끔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전투이다.

 

근래에 여성 기사물이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유행하기는 했지만, ‘여기사물의 여기사가 검을 든 주체적 기사의 형상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다. 여기사의 모험담이 결국 연애와 결혼으로 끝난다는 점도 그렇지만, 한 명의 기사로써 구체적인 전투를 해내지 못한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레이피어와 롱소드로 적을 물리침에 있어서 어떻게구체적으로 해나가야 하는가. 이는 전투가 왜 소년만화의 영역에 국한되었는지와 비슷한 질문이다.

 

그런데 2010년대의 무협지는 여성에게 전투의 기술까지 이전시키고 있다. 무협에서 어떤 무공을 어떻게 묘사하여 어떤 전략으로 어떤 적을 물리치는가. 그리고 그 전투는 서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전투에서 배제된 여성을 끌어오는 것이며, 진정으로 주체적인 여성 협객의 자리를 약속하는 일이다.

 

물론, 아직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장르가 수입-토착화되려면 최소한 10년의 세월은 필요할 것이다. 무협 또한 여성 작가진에 의해 수입-토착화 되려면 그에 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로맨스 무협도, 카카오 페이지의 무협도 아직 10년을 채 채우지 못했다. 다만, 지망생들이 많은 <조아라>에 무협 로맨스가 다수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동양풍 로맨스에서 무협의 정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면, 그 약속은 언젠가 이뤄지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눈여겨볼 작품은 네이버의 <장씨세가 호위무사>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스마트폰 게임이 된 것도 모자라, 중국에서 드라마화 되기로 결정되는 등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장씨세가 호위무사>는 무협으로서 스키마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운영하며 그 질을 높여 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이는 현재의 남성 작가에게든 미래의 여성 작가에게든 로맨스 무협이 혹은 젠더적으로 더 자유로운 무협이- 상업적으로든 작품성 면에서든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을 볼 때, 로맨스 무협은 단순한 무협의 타락이 아니며, 무협 소설사에서 아주 중요한 저변 확대의 한 단계이다. 이는 어찌 보면 한국구무협에서부터 내려져 온 특정 서사구조가 해체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의 한국신무협이 한국구무협의 서사구조를 안티테제로써 해석했다면, 2010년대의 무협은 다양한 방식으로 무협의 구조를 해체하고 있다. 현대무협은 동양을 현대로까지 이끌어내었고, 무협 라이트노벨은 무협을 만화적 리얼리즘에 연결했다. 그리고 무협 로맨스는 무협의 젠더를 해체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무협은 막다른 길에서 쇠락하고 있으나, 그 쇠락은 새로운 가능성들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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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텍스트릿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신문이 공동 기획하여 연재됩니다.

텍스트릿 필진 서원득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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