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은 좀비가 없는 이유.

홍유진 2018.06.29 21:26 조회 수 : 269

대도시특산공포물 좀비영화

 좀비에 대한 공포는 근본적으로 계급하락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가난해지는 것, 더 살기 힘들어지는 것은 본능 그 이상의 공포다. 찢어지고 피 묻어 지저분한 옷차림에 썩어문드러지기 시작한 살갗의 좀비들은 자체로도 섬뜩하지만 나 자신과 나의 가족들이 저 살아있는 시체들의 무리 한가운데에 섞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 전염성 때문에 더더욱 두려운 존재가 된다.

 좀비는 단순히 죽은 자가 돌아온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죽은 자의 귀환은 공포의 이유로 손색이 없으며 좀비물의 특성에서 제외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귀환은 유령이든 흡혈귀든 언데드라는 항목 전체에 부과되는 문제이지 왜 좀비인가, 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하다. 비록 좀비는 언데드의 하위에 속할지라도 죽은 자의 귀환으로 그치지 않는 그 무언가를 남겨놓기 때문이다.

 좀비영화는 다른 언데드 혹은 공포영화와 달리 도시공간이라는 확고한 무대를 갖고 있다. 한적한 교외나 고대유적 또는 저주받은 폐가라고 좀비영화의 배경이 될 수 없는 것이야 아니지만 그 으스스한 건물들에 주로 출연하는 괴인들, 살인귀나 악령 또는 귀신같은 존재들이 좀비영화의 주 배경인 한낮 무너진 건물 사이의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모습은 쉬이 상상할 수 없다. 빌딩 사이를 돌아다닐 괴물로는 좀비만한 괴물이 없다. 좀비영화의 현대적 공포, 도시적 공포는 다른 공포물과 차별된다.

 그리고 이 도시적 공포는 필연적으로 계급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시대에서 도시거주자에게 물리적 폭력이나 괴이한 질병 혹은 전쟁의 공포 따위는 실감할 수 없는 박물관의 전시품에 불과하다. 호환, 마마, 전쟁 따위는 노인의 추억담으로도 소비되지 않는다. 이제 두려운 것은 오직 가난이다.

 애초에 좀비설화의 연원부터가 악독한 농장주와 부두교 주술사가 약물로 노예를 조종하고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대의 좀비물이 빈자들을 비롯한 소외된 계층에 대한 직간접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는 일인 셈이다. 아니, 농장주가 부두주술을 빌었든 의학실험에서 바이러스를 살포했든 중요한 것은 연원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구조의 모습이다. 자아를 잃은 노예의 무리나 타인의 뇌를 갈구하며 돌아다니는 부랑자의 무리나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어떠한 악의가 아닌 최저한의 생존을 빼앗긴 피해자들 스스로에 의한 재생산 과정만이 존재한다.


가난뱅이 출입금지

 좀비물 클리셰 중의 클리셰인 백화점 고립 씬은 이 구조에 대한 적나라한 직유다. 백화점에 들어오고 싶은 이들이 있고, 이들이 백화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백화점 안에 들어온 이들이 저항하고 있다. 물론 이런 장면이 등장해야만 하는 개연성이야 분명 있다. 식료품이나 연료 등의 생활필수품을 일평생 써도 남아날 만큼 한곳에 모아놓고 요새와 같이 굳건하게 서있는 건물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 클리셰가 현실의 모방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는 시즌 11 에피소드 7에서 좀비물의 장르공식을 비틂으로써 도리어 그 본질을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의 내용은 이렇다. 도시에 걸인들이 모여들어 거리를 점령하기 이른다. 한 푼 줍쇼, 한 푼 줍쇼 구걸하며 마주친 사람들의 돈을 모두 뜯어낸다. 돈을 다 뜯긴 행인은 당연하게도 걸인이 되어 그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살아남은 이들은 백화점 옥상 위에 모여 주변을 메운 걸인들을 바라보며 생존자들 가운데 걸인이 숨어든 것이 아닌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된다. 좀비영화의 좀비를 걸인으로 바꾸었음에도 모든 장면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것이다. 단순한 패러디가 아닌 패러디의 패러디로 도리어 원본을 밝혀낸 셈이다.

 더 나아가 보자. 좀비에 대한 공포는 좀비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를 바라는 욕망. 그것은 나 자신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고 저렇게 더럽혀지지 않은 나 자신의 위치 역시 정당하다는 보증 말이다. 

 물론 누군가의 불행과 누군가의 행운은 정당함이나 당위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욕망은 존재한다. 여기서 하나의 전환을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이 좀비가 되었기 때문에 총을 쏘는 것이 아니다. 총을 쏘고 싶기 때문에 그들을 좀비로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좀비물의 핵심이다. 달리 말하자면 좀비가 되지 않았기에 쇼핑몰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쇼핑몰에 들어갔기에 좀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뭇 뱀파이어란 귀족적인 삶을 향한 욕망에 대한 상징적 포장이라는 전형적이지만 적확한 지적에 대비하여 좀비는 무지한 군중에의 공포를 담은 상징물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좀비영화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생존자'로 분류되는 주인공들이며, 좀비들의 존재가치는 주인공들이 휘두르는 어마어마한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혹은 면죄부를 배급하는 것에 있다.

 좀비들이 존재하기에 주인공들은 쇼핑센터 안에 즐비한 최신식 상품들을 무한히 소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더구나 그 소비에는 어떠한 대가도 치룰 필요가 없다. 어지간한 집에는 놓을 수도 없는 고급 TV에서 평소 급여로는 건드리지도 못할 양주까지, 좀비들로부터 살아남은 그들은 얼마든지 향락적인 소비를 즐기며 지옥과 같은 바깥세상과 동떨어져 지낸다. 

 뱀파이어의 종족번식이 '선택된', '자질을 가진' 특수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것과는 달리 좀비들의 증식은 '도태된(백화점에 들어가지 못한)', '무식한 괴물들에게 붙잡힌', '몸을 정갈히 하지 못한' 일반적인 이들에게 내려진 천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더욱이 작 중 등장인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삐뚤어진 성향의 인물이 좀비가 되었을 때 환호를 지르게 되는 구조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이 좀비영화의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한국식-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많은 지점에서 마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좀비영화는 중간계급의 욕망의 투사이다.


에이즈에서 암으로

 그리고 이 욕망의 투사에서 죄책감은 철저히 배제된다. 뱀파이어나 악마는 인간의 피 또는 영혼을, 외계인은 지구의 자원이나 인류의 지배를 목적으로 인간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좀비는 어떤 목적도 없다. 좀비가 된 이유는 방사능 오염일 수도 있고 주술일 수도 있고 바이러스 감염일 수도 있다. 좀비는 먹이사슬 구조에서 벗어난 존재이며 전답을 휩쓰는 메뚜기 떼나 영토를 휩쓰는 페스트처럼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자연재해에 맞서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일에 불과하다. 그것이 옛 이웃의 주검에 총칼을 박아 넣는 일일지더라도.

 20세기의 공포는 에이즈였다. 과도한 쾌락 뒷면에 숨겨진 두려움이 그 근본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흡혈귀가 인간을 자신의 종족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피를 나누는 장면을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에 반해 21세기의 공포는 암이다. 암의 무서움은 그것이 물질문명의 발달로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죽음의 가능성이 사라졌음에도 떨쳐낼 수 없는 인간 내부에서 등장하는 돌연변이에 의한 죽음이라는 점이다. 암은 무한히 복제되며 근처에 있는 조직들을 잡아먹어가며 전이한다. 우리 내부는 언제라도 몸 전체를 위협하는 돌연변이가 태어날 수 있으며 언제라도 그 위협을 적출해야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다.

 공포영화의 주역이 20세기 뱀파이어에서 21세기 좀비로 변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암에 대한 의학적 처방이 방사능치료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좀비영화의 결말은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현대 사회에서 언제나 일탈 혹은 왜곡된 존재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러한 돌연변이는 방사능을 통해 뿌리째, 원자의 영역에서부터 뽑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가난한 자의 등장은 예외적 상황이 아닌 필연적 귀결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고통을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뿐이라 변명하면서 시스템을 회복하려한다. 이렇게 고통의 재생산 구조가 고착된다.


교훈이냐 뽀르노냐

 그렇다고 좀비영화의 욕망, 좀비물의 관습을 도덕적 혹은 윤리적인 형태로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조지 로메로를 보라. 좀비를 다룬 작품의 계보에서 그의 피를 잇지 않은 자식은 단 하나도 찾기 힘들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날]의 영향에서 벗어난 좀비가 가능하기나 한가? 하지만 이 이후 조지 로메로의 좀비영화들을 보면 흔히 3부작만 언급되는 이유를 알만하다. [랜드 오브 데드]의 총을 들고 군대를 이룬 좀비들, 무장봉기한 민중에 대한 노골적 상징으로의 좀비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에서도 얼마간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 우후죽순 솟아났으나 큰 반향 없이 끝나고 만 것도 이 탓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좀비를 분석하고 기획한 그 많은 작품들이 교훈적 가치를 위해 좀비물 특유의 매력을 거세하고 말았으니. 자신의 손에 학살되는 좀비를 보며 안도하던 (자칭) 중산층이 기뻐할 수도 없고 억울한 인생처지를 좀비로 비유되는 소외계층이라고 좋을 일도 아니다. 건전한 포르노의 불가함과 마찬가지로 PC한 블록버스터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물론 포르노라고 다 같은 포르노도 아니기는 하다. [좀비랜드]처럼 철없는 사춘기 소년의 “세상이 다 망하고 예쁜 여자랑 나만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식의 촌빨나는 욕망을 지향하자고 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게임 콜 오브 듀티처럼 나치에다 좀비를 더해 나치좀비를 만들어서 나치들을 나치와 같은 방식으로 학살하고 싶다는 마스터베이션은 귀엽기는 하지만 시시하기도 하다. 좀비물의 욕망은 아무래도 이중적이고 왜곡되었으면서 위선으로 가득한 그 미묘한 묘미가 있기에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다만 만약 좀비물에 올바른 정치적 태도를 구현하고 싶다면, 하나의 실천 혹은 교훈을 담아내고 싶다면 그 구조 자체에 의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입으로는 소외된 계층과 연대하고 싶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다면서 기존 좀비물처럼 죽은 이들을 타자화하고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천재지변으로 바라본다면 그건 모욕에 불과하다.


‘좋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죽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뿐이다’에 대하여

 여기서 다시 한 번 [사우스파크]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사우스파크]의 시즌 12 두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다. 반복되는 이혼과 급작스러운 삭발, 데뷔 때보다 살이 찐 모습으로 인해 가쉽거리가 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숲에서 소변을 보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전국에 중계되고 몸매관리나 패션에 대한 지적을 끝없이 잔소리를 들으며 궁지에 몰린다. 그 와중 [사우스파크]의 주인공들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추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오자 자신의 인생을 비관, 입에 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하기에 이른다.

 결국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윗입술 위의 머리가 폭발해 눈이든 코든 뇌든 다 터져버린다. 하지만 언론이나 파파라치들은, 더 나아가 기획사나 매니저들 모두 머리가 통째로 날아간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더 이용해먹지 못해 안달이다. 자살기도 후 병원에 입원하는 모습을 찍으며 가슴수술의 의혹을 제기하며 비아냥거리고 아랫입술만 남아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녹음해 새 앨범을 만들어 립싱크조차 틀린다고 혹평하며 괴롭힘을 멈추지 않는다. 

 만약 좀비-혹은 living dead라는 소재를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담보물로 삼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나 싶다. 군중으로서의, 자연재해로서의 좀비를 다루는 작품들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써 아니라 사회와 구조가 한명의 개인을 어떻게 살아있는 시체로 몰아가는지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연대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연대를 하겠다면서 부족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서 시혜의 태도로 선의를 베푼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이런 베푼다는 식의 태도는 가상의 악 혹은 망상의 선이라는 타자화의 반복 이상이하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이들을 상처 입히고 착취해왔는가를 자진해서 폭로하고 문제화하지 않는 이상 살아있는 죽음이 아닌 죽어있는 삶으로서의 좀비만이 양산될 것이다.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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