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세대의 신화

홍유진 2019.01.22 18:19 조회 수 : 2435

 

 

 

 

1.

 요즘 누구나 마음 편하게 욕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제목에 이미 적었으니 다들 짐작했을 그 욕받이는 바로 맛서인 황교익이다. 정말이지 성별과 진영 그리고 계급에서 연령대를 나눌 것 없이 이렇게 모두가 싫어하고 또 경멸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황교익이 욕을 먹는 이유야 많다. 모순적인 발언을 계속한다는 점이나 팩트 체크를 게을리 한다는 점 그리고 자신을 기준으로 삼은 진영 구분에 매몰된 채 곳곳에 싸움을 걸고 다니는 점 정도가 자주 꼽히는 이유일 듯하다.

 

  하지만 앞서 적은 이유들을 떠나 그의 낙후된 비평관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그의 비평관 중 문제가 되는 지점은 크게 짚어서 1. 그 정체가 불분명하며 존재할 수도, 복원될 수도 없는 원형에 대한 집착. 2. 질박한 맛과 희귀한 소재에 대한 모순적인 숭배. 3. 일본에 대한 과도한 의식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비평관은 논리의 발전이 아닌 개인의 체험에 기반한 인상비평에 머무를 뿐이며 더욱 발전된 다음 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닌 추상적인 관념 속의 이상향으로 현상을 되돌리려는 것 이상의 작업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이 과연 황교익이라는 한 개인만의 가치관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굳이 미식만이 아닌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러한 황교익적 이상론과 공통된 정서가 발견되니 말이다.

 

 

 

 

2.

 90년대 창작론은 지엽적인 문제들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시했다. 만화의 경우에는 작화에서 인체를 얼마나 완성도 높게 그렸느냐를 따지는 경향이 있었고 소설에서는 완성도 높은 문장을 쓰느냐를 따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2010년하고도 후반이 된 아직까지도 적잖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쩌면 90년대보다 더 오래 전부터 이어진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이 경향은 앞서 짚은 바 있는 황교익적 이상론과 무척 닮아있다. 황교익은 반복적으로 옛 시절 시골에서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이 들어간 따뜻한 집밥과 같은 그런 밥상으로 회귀하기를 주장했다. 결국 그에게는 어린 시절의 체험에 얼마나 다가갔느냐가 모든 요리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된다. 보라. 90년대 창작론에서 중요시했던 완벽한 인체나 완벽한 한국어에 대한 집착 역시 이렇게 가상의 이상향을 상정하고 그에 부합하지 못한 것들은 아예 논외의 대상으로 몰아버리지 않던가?

 

  그러나 이러한 이상론이 실제로도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기 어렵다. 만화에서 완벽한 인체를 담아내는 것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극화 외에 대부분의 만화들을 평가 기준에서 제외시키면 만화사는 시작조차 않는다. 만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부터 평가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더욱이 극화풍의 만화에서도 당연히 연출을 위해 동작을 과장하거나 화면을 왜곡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 2010년대에 와서도 이런 고리타분한 만화비평론을 주워 담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많은 문학도들이 웹소설을 비롯한 상업예술의 문장을 얕잡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순문학에서 쓰일 법한 문장은 쓰기에도 읽기에도 너무 무거워서 단시간에 많은 양이 읽혀야 할 웹소설에는 애초에 맞지 않는다. 웹소설은 웹소설 나름의 생태계가 있고 그에 맞게 문법이 발전한 것이다. 이제는 순문학 시장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생겨났지만, 정작 웹소설 독자층에서 작가의 문체에 시비를 따지는 경우도 종종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런 출처불명의 도그마를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을까?

 

 

 

 

3.

  이러한 도그마에는 유용한-유의미하지는 않은-점이 있다. 작품을 창작하거나 분석할 때는 종합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기법 면에서든 사회문화적 배경 면에서든 시장 전략 면에서든 고려할 요소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준을 잡아놓으면 작품을 편리하게 평가할 수 있다. 완벽한 인체나 완벽한 한국어처럼 지엽적인 기준을 신성한 위치에 올려놓으면 종합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서도 간단히 평을 할 수 있게 되지 않는가?

 

  달리 말하자면 완벽한 인체나 완벽한 한국어를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을 경우 리듬게임 점수처럼 작품의 우열을 가릴 수 있게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리듬게임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좋은 음악가라고는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러한 등수 매기기에 큰 의미는 둘 수 없다. 존재했는지 의심스러운 틀에 전통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고 이 원형에 다가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니 페티시즘 이상의 의미를 낳지 못하더라도 새삼스러운 결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그마를 지키는 것 자체로 행복한 사람이나 우열을 매기기에 열성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이만큼이나 끌리는 작업이 또 없을 것이다. 요리에 대한 비유로 돌아가 보자. 요식업과 관련된 글을 쓰는 사람이 새로운 음식 문화를 접할 때마다 왜 이런 문화가 탄생했는지 분석하고 앞으로 어떤 문화가 필요할지를 가늠하지 않고 엄마의 손맛이다/아니다만 구분해서 지면을 채운다면 이 얼마나 편한 작업이 되겠는가? 더욱이 이후의 세대는 경험조차 못했으니 발언권을 빼앗길 일도 없을 테고 숭고한 위업을 진행한다는 종교적 사명감도 채우기 쉬울 테니 말이다. 그러니 실용성과는 별개로 이 틀에 계속해서 권위를 부여해 패러다임을 유지하고픈 사람이 나와도 놀랄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필요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90년대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무언가를 정립하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이것은 맞고 저것은 아니다라고 분류하는 작업은 그 기준의 합리성을 떠나 진행되어야만 했을 것이다그 기준이 정통인 것도 놀랄 일이 아니고 말이다하지만 이제 2010년대에 들어서도 어떤 특정한 시기에 요구되었던 태도를 고집할 때 이득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 특정한 시기의 기준이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틀은 오래도록 쓰여 왔고 시간이 쌓인 만큼이나 권위가 생겼다. 그리고 이 권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존중해야할 필요성 이상으로 경계하고 염려해야할 물건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에 함몰된 이들은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서 권위를 부정하기 어려운 개념인 전통을 끌고 오기 마련이다. 실생활에 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을 많이 담을수록 더 좋은 문장이라고 한다거나 일본의 망가체가 아닌 한국만의 그림체를 정립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전통이다""원래 이렇다"라는 대답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반론을 얼버무리는데 사용된 변명이지 않았던가?

 

 

 

 

4.

  얼마 전 실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순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 과연 그렇게나 의미 있는 일인가에 대한 의문과 피동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한국어와 동떨어진 일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을 트윗으로 올렸다.

 

  나는 소설 창작에 있어 순우리말의 사용이 재미난 악센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피동을 쓰지 않는 정갈한 문장의 맛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섬세한 극화가 갖는 설득력을 무시할 생각도 없다. 다만 수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한 기법 몇 가지를 창작의 본질로 숭배하기를 거부할 뿐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지 결코 우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트윗을 보고 어떤 분이 제법 언짢으셨는지 나의 트윗에 대해 재미난 멘션을 남겨주셨다. 그 멘션의 주인은 무척이나 의미가 깊은 족적을 남긴 학자의 이름을 대면서 나의 의문이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은 한국어를 쓸 수 있게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선각자들의 평생에 걸친 노력과 저작들이 후대 작가의 짧은 몇 글자 트윗에서 거칠기 그지없는 비유로 폄하"하는 일이라 지적했다.

 

  그분이 남겨주신 멘션을 본 나는 어쩌면 이렇게나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경향을 온몸으로 체화한 사람이 있는지 반가울 지경이었다. "선각자""평생에 걸친 노력"이라는 표현을 보라. 이 얼마나 권위주의적이며 또 신화적인가! 그리고 "후대 작가의 짧은 몇 글자 트윗"이라니! 이 권위에 부합하지 않는 누군가와 그 주장을 아주 점잖게 가리킨 표현이다. 비록 그 내용이 "민증이나 까고 말해라"와 다를 바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겉보기에 품위는 있으니 후대 작가인 나로써는 이 분이 경도된 선각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다.

 

  그렇기에 그 학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와 존경심과는 별개로 이러한 신화화가 유의미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져야만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후대 작가"로서 해야만 할 본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순적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전통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다시 고민해보길 권한다. 전통과 복원은 결코 동일한 개념이지 않다. 전통은 글자 그대로 전하고 통해야 하는 개념이다. 변화를 부정하고 어떤 원형을 복원해 그에 갇혀 있기만을 원한다면 그야말로 전통과 정반대되는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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