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평

청아비 2019.12.05 12:06 조회 수 : 640

딜레마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철학적 딜레마에 대해서 그 때가 왔을 때 현실을 보고 따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딜레마가 있는 이야기는 작가의 생각과 해석을 보는 게 재밌죠. 어떤 사람은 딜레마에 대해 명확히 결론을 내려버리고, 어떤 쪽은 딜레마를 가지고 한참 놀다가 결론을 애매모호하게 뭉개버립니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떨까요? 그 말을 하기 전에 [테세우스의 배] 딜레마와 딜레마를 다루는 방식을 말하고 싶어요. 테세우스의 배 딜레마는,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보존한 그의 배가 낡을 때마다 판자를 떼어 새 판자로 교체하는 일을 계속 반복해서 결국 원래 배의 부품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이것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 그렇다면 이 배는 언제부터 테세우스의 배가 아닌가, 하는 딜레마입니다. 이 책에서는 [배]를 [인간성]에 비유하고 있죠. 기억을 일부 잃었으나 몸은 완전히 기계로 교체된 자, 육체는 온전하나 기억을 거의 잃어버린 자, 육체가 아예 없으나 기억은 완전히 가지고 있는 자. 책에서는 한 사람의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고, 이 사람의 법적 권리, 재산권과 연결지어 이 문제의 결론을 중요하게 만들고 있죠.

 

근데 '정답'이 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 책의 줄거리는 나 라는 인간의 정체성 찾기 같은 게 아니라 재벌가의 재산을 두고 벌이는 이권다툼이거든요. 때문에 이 책은 딜레마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등장인물들이 고민하는 부분이 적습니다. 있더라도 상대를 흔드는 계략의 목적이지 사고의 목적이 아니죠. 상대를 설득하는 장면도 없고, 각자의 관점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 이전에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총으로 대가리를 쏴버립니다. 총은 답을 알고 있다. 죽은 자는 답이 없기 때문이지.

 

해서, 이 책이 딜레마를 대충 다루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작가는 딜레마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독자가 그 고민을 할 수 있게끔 세련되게 떠넘기고 있어요.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간단히 총으로 쏴버리면서 '얘가 죽어도 되나? 진짜는 얘 아니야?' 내지, '얘가 진짜건 아니건 가장 괜찮은 애인 것 같은데 얘가 죽어도 되나?' '진짜가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식으로 모든 딜레마는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계속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이 궁금하거든요. 등장인물 전원이 자신이 이 승부에서 이겨야만 하는 이유와,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끔 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저는 누가 이겨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누군가를 응원하면서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짜임새가 있고 숙련된 독자라면 데이터 베이스를 뒤지는 것만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반전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결말을 확신할 수는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가능성 있는 예측을 수십 개 뿌렸을 때 하나가 맞는 정도. 그렇게 적중하고 빗나가는 것도 소설을 읽는데의 재미죠. 그래서 모든 사건이 끝나고 결말. 애매모호한 딜레마를 다룬 책들이 전부 그렇듯이, 애초에 줄거리가 그게 아니었던 만큼 이 책은 결국 누가 진짜 인간인지 답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계열에서는 정답을 내려버리면 이상한 느낌도 드니 당연한 걸까요.

 

그렇지만 줄거리상의 명백한 승자는 존재합니다. 작품의 최종 승자가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면, 대충 두 가지 해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더 나은 형태로 나아가는 진보가 중요하다."

 

또,  "개개의 인간성은 인간성은 육체나 기억이 아니라 행동원리에서 나온다." 완벽해지거나, 더 착해지거나, 본질의 형태가 더 남아 있더라도 이전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관점입니다. 테세우스의 배로 치면 배 판자를 아무리 바꿔도 우리가 테세우스의 배를 기리는 마음과 역사가 남아있는 한 그건 테세우스의 배라는 방향이죠.

 

그리고 이건 제 생각과 같습니다. 작가님이 저와 같은 입장을 지지하고 있어서 좋지만, 한 편으로는 아쉽군요. 기왕 읽는다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책을 읽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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