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사회 평

청아비 2019.12.12 22:42 조회 수 : 126

1. 개괄적인 평가

 

25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얉은 책입니다. 얇은 만큼 화려한 묘사 없이 인물과 사건 위주로 빠르게 전개해나갑니다. 단편, 중편의 템포를 가진 장편이라고 할까요? 작중 내에 쓰인 소재들이 전부 온전히, 깔끔하게 활용되고 잘 만든 소설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2050년대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늙은 거물 빌런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배경인 만큼, 실제로 그런 빌런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약간 영화적인 빌런이에요. 터무니없는 이상이 있고요. 사실적으로 따져보면 그런 이상을 관철하기엔 다소 불가능해보이는 능력이 있고요. 그런데 세상이 약간 빌런에게 편의적으로 돌아가서 그런 이상을 관철할 수 있는 거죠. 그리하여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파괴되고 파멸해갑니다. 이 세계에서 보여주는 파멸은 침체적인 불안과 우울이죠. 이 역시 독특하고 재밌는 요소로 재밌게 봤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생각이 잘 들지 않습니다. 다 읽고 나서 어째서인지 언짢습니다.

 

 

2. 언짢게 편집된 세계.

 

책의 분량이 짧으면 필연적으로 필요한 얘기만 해야하죠. 이 책의 템포는 단편에 가까우니 특히 그렇습니다. 세계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작가가 필요한 부분과 필요한 요소들만 보여주고 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특히 빌런이 다소 영화적인, 비현실적인 야망을 지니고 있는 만큼(빌런 자체가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작품의 모습은 다소 개연성을 무시하게 됩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있을 법한 요소를 인위적으로 배제하고 추가해서 편집해낸 것이죠.

 

물론 그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이런 작업이야 아주 당연한 거니까요. 그런데 작가가 만들어낸 이 세계관, 그리고 그런 세계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듭니다. 작품의 핵심 소재가 바로 그래요.

 

 

3. 핵심소재-체념의 세대

 

작중 세계에서는 기본소득 세대라는 것이 나옵니다. 2050년대 거의 완전한 인공지능 시대가 돌입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산성을 잃었기 때문에 아예 생산성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정부에서 기본적으로 주는 최저시급보다도 못한 소득만 받고 최저치의 삶만을 누리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빌런의 계획은 이런 자들을 도태시켜서 마땅히 생산성 있는 사람들만 남기는 것이죠. 작품의 모든 줄거리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작중 내에서 90년대에 태어난(현재 20대) 늙은 체념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이게 사실 현재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게 드러나죠. 근데 사실 이 중요한 설정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안 듭니다.

 

일단 이 세대의 조형이 굉장히 인위적입니다. 체념의 세대라는 게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지긴 미래에서는 그런 체념과 우울이 더 심해질 거라고도 생각을 하고요. 하지만 지금 세대는 다른가요?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 시대에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최고 걸작들을 검색 한 번 돌리는 거로 1초에 수백 개씩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작을 멈추지 않아요. 사람들은 뭔가를 하기를, 또한 욕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네가 그래봤자 천재들에게 못 미쳐~"라고 하면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다 씨X아"라고 즉각 답이 나올 정도로 많아요. 곽재식 작가의 단편인 [고양이 그림 그리기 유토피아]가 바로 이런 세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멸사회]와 [고양이 그림 그리기 유토피아]의 세계관이 어느 쪽이 더 가능성 있는가? 라고 생각하면 후자라고 생각이 들고, 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체념의 세대와 이들을 도태시키려는 빌런의 계획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차용한 소재라고밖에 생각이 안 든단 말이죠.

 

하지만 창작물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서 다소 과장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할지라도 밀어붙이는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작품에서 배제해버린 것들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지금 시대에서도 기계가 못할 건 없지만 사람이 하는 게 훨씬 싸서 사람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이 카운터 직원을 한 명 더 고용하는 대신 자동 판매대를 넣을지언정 자동 청소기나 조리기를 구매하진 않죠. 왜냐면 그것보다 사람을 고용하는 게 더 싸니까. 전 인공지능이 정말 대중화되고 모든 것이 기계화되더라도 굳이 주방 조리기 틈새로 들어간 쓰레기 하나를 주워서 청소할 수 있는 움직임이 가능한 로봇 조리사를 고용하기보단 그냥 손 뻗어서 쓰레기 줍고 기름 닦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할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패스트푸드점을 예로 들었지만 정말 기계로만 돌아갈 것 같은 자동화된 공장에서도 기계가 하기에는 복잡한데 또 사소한 업무를 하는 생산직이 있죠.

 

이 책이 그럼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체념의 세대가 등장한 작품이니 확실히 조명이 필요하겠네요. 실제로 있긴 합니다. 47페이지. [여러 첨단 기술과 발달한 인공지능 때문에 사람이 필요없어진다는 말이 많았다. ~중략~ 2055년쯤 되자 부가가치가 최소한도 발생하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 혹은 최고 엘리트들이 필요한 곳을 빼고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끝. [소멸사회]는 여기서 [부가가치가 최소한도 발생하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어떤 서술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최저시급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더 적은 임금을 받았을 하찮은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그 일을 해서 받은 돈으로 자식들을 키우고요. 어떤 외국인 노동자는 고향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죠.  부가가치가 최소한도 발생하지 않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게 자동화된 시대'라는 걸 깊게 생각하지 않고 체념의 세대만 생각하다보니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배제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작중 내에서 가장 깨어있는 사람이라 주인공도 된 사람이 완전히 체념한데다가 어떤 다음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사로 써도 모자를 판에 집이 의사고 자기도 의대를 졸업해서 언제라도 결심만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나 기사로 만들고 있어요.  정말 슬픕니다.

 

 

4. 총평

 

이 책은 결말조차 구립니다. "사람이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여운이 남는 결말인가요? 아뇨. 역합니다. 이 책은 체념의 세대를 빌런의 말마따나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못할 바보들로 폄하하고 있어요. 아무 부가 가치 없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진짜로 아무 부가 가치 없는 일을 하고 있고 거대한 체념과 싸우는 일만 숭고하다고 알아주고 있죠.

 

마치....... 옆집 민수는 당장 가난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돈 많은 노랑이는 옆에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 체념의 시대가 와버릴 거야!"라고 징징거리고, 그걸 기자 수영씨는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이 책은 가치 없는 사람은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합리적 보수(웃음)을 빌런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대중을 뭔가를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진짜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읽는 내내 정체모를 언짢음을 느꼈고요. 다 읽은 다음은 그게 있어야 할 게 없어서 느낀 불쾌감이라는 걸 알았네요. 작가에게 악의가 전혀 없고 희망을 주려는 의도로만 책을 썼다는 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정말 이 불쾌함은 신묘한 경지에 이릅니다.

 

뭐 그러니, 저 역시 노랑이같다는 표현을 쓰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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