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SF # 1수록 단편 리뷰

CursedSF 2019.12.13 19:39 조회 수 : 153

평원으로 - 김현재

3회 과학문학상 수상작인 웬델른의 짧은 속편입니다. 못다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는 점에서는 괜찮지만, 과연 이걸 독립적인 단편으로 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즉 기존 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 대뜸 던져지는 과거의 사건과 세팅을 받아들이기란(그리고 거기에서 유의미한 감흥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친절한 존 - 김이환

편집증적으로 친절한 유비쿼터스-미래를 그려 나가다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서 무슨 사건이 일어나나 싶었는데…찝찝한 느낌만을 남기고는 곧바로 사태가 진압됩니다. 글의 분량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그리고 의도된 세팅이었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구태여 2019년에 이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가 있나 묻고 싶기도 합니다. 음산한 행복이 가져다주는 정서는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려지는 미래상은 사실 고루합니다. 메세지도 새롭다고 말하긴 어렵고요. 그러니까, 어떤 느낌의 미래냐면…위 문단에서 내가 굳이 유비쿼터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두들 아시다시피 20년쯤 전에는 유비쿼터스가 지금의 4차산업혁명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레토릭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만,  2020년을 한 달 앞둔데다가 4차산업혁명도 시들해진 지금, 우리 중 누군가는 여전히 유비쿼터스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하는. 

 

(미래상이 화려한 사변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보물에 박힌 상상일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대본 밖에서 - 듀나

다중세계를 날줄로 삼고 SF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 컨텐츠들에 대한 애정이 씨줄로 엮인, 잘 짜인 단편입니다. 거대한 농담 위에 세계를 쌓아올린 다음 그대로 밀어붙이는데, 문제는 이게 우리의 농담이지 등장인물들의 농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등장인물에게는 코즈믹 호러죠.

 

장을 넘어갈수록 점차 커져가는 스케일이 매력적입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예 폭발해 버리기까지 하죠. 덕분에 층위를 옮길 때마다 소모품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등장인물들이 나타납니다만, 그게 작품의 완성도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말 그대로 소모품이기 때문에…더 떠들면 스포일러를 하게 될 것 같군요!

 

재미있었습니다.

 

 

인지 공간 - 김초엽

유년기에 남은 친구와 혼자 성장해버린 나…의 이야기인가 싶더니, 중후반에 가서는 이야기가 훨씬 화려해집니다. 선각자의 파멸 대신 진일보한 미래를 향해 뒷이야기를 열어두는 마무리는 작가의 성향이겠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지상에서 한 뼘쯤 떠올라서 둥둥 움직여가는 사람과 세계가 나옵니다. 현실성이나 핍진성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인공적인 맛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도 형이상학적이고 인물들도 형이상학적입니다. 이게 대사의 문제인지(“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아니면 지문의 문제인지(“격자에 접근하려면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 하지만, 그전에도 구조물의 위압감이나 전체 구조가 표현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혹은 서술방식의 문제인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딱히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테마에 대해서라면 이런 스타일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군요.

 

 

밤의 끝 - 해도연

도입부의 장면은 사실 꽤 멋집니다만, 곧이어 쏟아지는 정보들이 그 감흥을 약화시킵니다. 설정을 줄줄줄 읊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려드릴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읽어두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초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대목이 그렇습니다. 악당마저도 네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고난이 있을 것인지를 구구절절하게 알려준단 말입니다. 물론 SF는 대체로 정보의 홍수를 요구하기 마련이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걸 저도 이해하지만…최대한 자연스럽게 설명을 읊는 게 작가의 소명 아니겠어요?

 

이런 불평을 걷어치우고 내러티브만을 보면, 이것 역시 전체주의적인 도시와 선각자의 이야기입니다. 선각자는 역경 끝에 자신이 바라는 미래에 도달하죠. 여기에 작가의 전공을 좀 섞어서 과학적으로 정밀한 우주를 구축했군요. 하지만 그 정교함이 과연 SF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냐 하면…거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여기에서 나타난 하드함은 결국 장식이고(저번에도 한 이야기지만, 링월드의 작동방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링월드의 세계는 여전히 장엄합니다!) 코어가 되는 이야기는 고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새로운 맛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빛과 어둠에 대한 행성적 특성이 좀더 강조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이 밝혀지면서 아! 그렇구나! 하게 되는 면은 있는데 그것보다는 더한 울림을 줄 수 있는 소재라 느껴지기 때문에… 

 

더 좋을 수 있어서 아쉬운 단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오소독스하고 희망찬 맛은 있군요.

 

 

희망을 사랑해 - 박해울

오래되었긴 해도 충분히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소재인데, 풀어나가는 방식이 좋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어딘가에서 눈을 뜨고, 쫓기다가, 멸망 이후의 인류를 만나서…음, 멸망 이후의 인류는 말 그대로 세상이 약간 망한 뉘앙스를 풍긴 뒤 사라집니다. 거의 모든 사건과 장면이 이야기 속에서 별 기능을 하지 않아요. 긴장을 위한 긴장이 있고 음울함을 위한 음울함이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갑자기 짜잔, 사실 주인공과 리트리버는 이랬습니다! 하면서 반전을 보여준단 말입니다. 하지만 서술 시간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과 반전 사이에 별 접점이 없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아 그래? 그렇구나…라는 반응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이 아무것도 모른 채 어벙벙하게 돌아다니고 어벙벙하게 위기도 겪다가(그리고 여기에서 별 쓸모없는 엑스트라들이 나왔다가 바로 퇴장하고) 갑자기 마무리가 된다고요. 

 

과거 이야기를 좀 더 했어야 했어요. 

 

 

복원 - 김창규

오소독스한 추리물의 세팅 속에서 오소독스한 사변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립된 별장에서의 연쇄살인과 마인드 백업은 판타지 세계의 마법사들이 파이어볼을 쓰는 것만큼이나 고착된 장르적 규약이지만 파이어볼을 가지고 뭘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지요.

 

세상이 대충 망한 다음 재구성된 小사회가 별장-연쇄살인과 만나는 지점은 메타적으로도, 작품 내적으로도, 그리고 작품 내적-메타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군요!). 주인공이 선뜻 사건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혼란스러워하며 “아니! 이건 혹시 마인드 서버 이상으로 인한 환각이 아닌가?!” 를 외치는 것 역시 마음에 드는군요.

 

사실 읽으면서 기대한 결말이 있는데(발랄하고 경쾌한 쪽으로),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쓸쓸하고 아픈 이야기였네요. 마지막 진실이 좀 툭 던져지는 느낌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좋다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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