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는 멸망해야한다

jc159 2020.01.19 21:22 조회 수 : 1119

 

 

 

*작품 결말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단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는 글을 구성할 때부터 뒤틀려버린 글이었습니다.

 

정훈鄭薰, 이 세계는 멸망해야한다 / 후기

 

 

통일전쟁에 다리를 잘려 돌아온 상해장교 정철은 PSTD에 시달리며 가족들을 외면한채 가상현실게임에 빠져지낸다. 어느날, 게임 속에서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들은 정철은 자신의 불효를 뒤늦게 후회한다.

 

그 순간 정철은 인간의 생사여탈마저 함부로 다루는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소원권이 걸린 배틀로얄에 초대된다. 게임의 배경은 정철이 줄곧 플레이해온 세계멸망게임, ‘황녀를 위하여’. 정철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들을 배제하고 자신이 누구보다 사랑해온 게임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기로 결의한다.

 

 

 

2018년 정훈 작가의 소설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는 이미 세계멸망의 시나리오가 정해져있는 하드코어 온라인 게임을 배경으로, 세계 멸망을 앞당기려드는 고인물 주인공 정철과 처음 접해본 게임 세상을 뭣모르고 지키려드는 뉴비 서브주인공 박현수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다.

 

여기에 ‘사실 이 세계는 고정 스토리를 지닌 게임이 아닌 진짜 이세계였고, 게임 주최자들은 플레이러들을 속여 여러 세계를 집어삼켜온 악신들이었다’는 흔하다면 흔한 반전이 더해지며 두 주인공의 갈등은 게임 해석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명운이 갈린 선악의 대결로 확장된다.

 

 

작가 후기에 풀어놓은 작품 의도에 따르면 이는 각각 ‘이기적으로 소망을 추구하는 최근형 주인공’과 ‘얼핏 답답할 정도로 선의를 추구하는 고전형 주인공’의 대결이며, ‘최근 장르소설계에 영웅으로 취급받는 이기적인 주인공의 행보는 결국 악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고 작가의 가치관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이세멸이라는 작품은 최근 웹소설 주인공 주류에 대한 작가 나름의 반감이 담긴 해석인 셈이다.

 

 

그런데 작가 후기에는 이러한 작품 의도를 스스로 털어놓는 동시에, 이러한 것들을 작품 속에서 충분히 구현해내지 못한 점에 대한 괴로운 자책과 독자를 향한 사죄를 병행한다.

 

성향이 다른 두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다보니 정철을 확고한 주인공으로 여기던 독자들에게 박현수가 배신자 취급을 받았으며, 이에 정철을 깎아내리고 악당으로 만드는 과정에도 불만이 생겼다. 이런 과정에서 연독수가 떨어지고 작가 스스로도 비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글을 쓰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구상한 이야기와 의도를 전부 펼치지 못하고 작품을 빠르게 접어야 했다고 독자를 향한 사죄를 거듭한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결말은 3부, 빛과 어둠의 노래, 최종막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세 개나 연이어 붙여썼음에도 겨우 5화 만에 급하게 완결난다.

 

 

결말 자체도 상당히 허무하다. 세계의 존망을 건 두 주인공 최후의 결투는 악신의 개입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린다. 박현수는 악신에게 의해 참살당하고, 게임세계는 예정대로 멸망한다. 소원을 이뤄 어머니를 되살린 정철은 악신의 부하가 되어 세계멸망 사업의 중간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게임세상에서 여포로 군림하던 주인공이 한순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느 게임 폐인이 가족을 위해 갱생하여 게임을 끊고 게임경력을 통해 게임회사에 취업하게 된 훈훈한 미담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죄가 거듭되는 작가 후기는 이렇게 허무한 결말에 대한 변명이며, 작품 속에서 말해야할 작품의도를 구질구질하게 작품 밖에 꺼내어 말한다, 그렇게 작가를 쉽게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죄와 변명으로 가득한 작가 후기를 읽으며 묘한 감명을 받았는데, 그건 작가 후기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입장이 등장인물과 대치되는 측면이 있었기 떄문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신=외계신=성좌의 존재는 이세멸 월드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다.

 

웹소설에 등장하는 성좌라는 설정은 외부에서 필멸자를 관음하며 운명을 농락하는 신적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크툴루 신화에서 비롯된 단어에 인터넷 방송 문화가 더해지며 하나의 장르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성좌 설정을 차용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역시 전지적 독자 시점일 것이다. 웹소설 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독시는 성좌라는 존자를 독자 혹은 문화 소비자와 등치시킨다. 인터넷 방송 문화가 오늘날 현대문명 전체를 아우르는 첨단에 위치한다면 성좌라는 설정 또한 웹소설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메타적인 가능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전독시보다 세 달 쯤 늦게 연재된 이세멸의 경우, 성좌라는 존재는 보다 두렵고 사악한 존재로 묘사된다. 단어의 기원이 되는 크툴루 신화의 영향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여러 세계를 침공해 선신들을 죽이고 필멸자들의 인간성을 갈취해 세계를 멸망시키는 존재로, 그 과정에서 게임과 소설 따위 매체를 이용한다. 한 세계의 필멸자를 유혹해 다른 세계로 보내 멸망시키고, 또 다른 세계의 필멸자를 그 세계로 보내 멸망시키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살던 지구는 ‘황녀를 위하여’의 세계가 멸망한 다음번 침공 대상이다.

 

악신들은 관리자와 시청자 두 부류로 나뉘는데, 관리자가 게임의 무대를 만들고 플레이어들을 모아 배틀로얄을 주최하면 시청자는 단어 그대로 이를 관음하고 플레이어를 후원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후원을 얻기 위해 끔찍한 행위를 자행해야 한다.

 

 

 

처음 배틀로얄이 시작될 때만 해도 게임의 고인물 정철은 누구보다 빠삭한 지식을 활용해 다른 플레이어들을 제치고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그러나 정철의 계획은 두 가지 지점에서 틀어지고 마는데, 애초에 본무대는 게임이 아닌 실제 세상이었을 뿐더러 악신들의 개입으로 그나마 자신이 쓰려고 했던 전개 또한 일그러진 것이다.

 

시청자들의 후원을 업은 상대 플레이어들은 기괴한 치트와 먼치킨 전개를 남발하며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부하로 영입했던 게임 초보 박현수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상상도 못한 전개로 세계를 구원할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정철에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관리자들은 그의 게임 방식에 끊임없이 간섭하며 그가 지켜온 마지막 인간성, 동료들마저 죽이려 든다.

 

작가 후기가 작품과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게임세계와 자신이 따라야하는 악신들 사이에 끼어 고통받는 정철의 입장은 그대로 작품과 독자 사이에 끼어 고통받는 작가의 입장에 대치된다. 결국 정철은 절규한다.

 

 

“좀 내버려두란 말입니다. 관리자님. 제가 애새낍니까?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는?”

 

(중략)

 

“근데 대체 뭐가 그리 걱정입니까?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제가 알아서 다 죽인단 말입니다! 요정 왕국이고 인간 왕국이고 제국이고 세계고 모조리 멸망시킬 테니까 신경 좀 끄고 살란 말입니다!”

 

 

정훈鄭薰, 이 세계는 멸망해야한다 / 98.[2.개전전야] 별똥별 (1) 

 

 

 

소설 2부를 막 시작하는 이 장면에서 정철은 웹소설 주인공으로서의 쫀심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을 세우며 관리자와 대등한 입장임을 어필한다. 그러나 애초에 둘 사이의 갑을관계는 누가 봐도 명백하다.

 

사실 정철은 소설 처음부터 이미 웹소설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계율, 나쁜 놈이 될지언정 을이 되면 안된다는 금기를 범하고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세멸의 최대 실패 요인은 주인공 둘을 내세웠던게 아니라 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을의 입장이라는 점을 꼽고 싶다. 아무리 주인공이 이기적 못된척 굴어봤자 뭐하랴, 을인것을.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정철은 박현수, 어쩌면 정철 자신보다 작가의 애정을 받았을 진주인공을 끝내 자기 손으로 마무리하지 못한다. 결국 정철은 박현수를 관리자의 손에 맡기고 현실 세계로 도망친다. 그렇게 게임세계는 대충 멸망하고, 그 보답으로 가정을 복구하려는 정철의 소원은 이뤄진다. 그 다음은? 그 자신 또한 새로운 관리자의 일원이 되어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다.

 

 

멘탈 약한 초보 작가들에게 있어 웹소설 장르시장이란 크툴루 악신들이 둥둥 떠다니는 우주공간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경쟁 작가들은 치트, 먼치킨, 사이다를 남발하며 승승장구하는듯 보이는데, 누군가의 댓글에는 발암 등장인물을 매달라는 비난이나 달린다. 심지어 그마저도 갈수록 연독수가 줄어든다. 그럼에도 작가는 비난 댓글을 향해 울분조차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자칫 독자를 개돼지 취급하는 작가라고 여론몰이라도 당했다간 작품은커녕 작가 인생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결국 이 냉혹한 외우주 속에 수많은 작가들이 어둠에 묻혀 사라지고, 살아남는 것은 어느새 외우주의 일원이 된 한 줌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내가 이세멸에서 가장 좋아하는 설정은 박현수가 얻는 직업, 봉화지기라는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필멸자들은 미약한 회귀 능력을 바탕으로 외신에 저항해 싸워왔고, 이 회귀 능력을 대대로 물려받으며 봉화처럼 계승해왔다는 설정이다. ‘황녀를 위하여’ 세계에서 봉화는 서로 전쟁을 벌이던 인간과 요정 종족의 화해를 상징한다. 세계의 위기가 닥쳤을때, 봉화지기가 봉화를 올리는 것으로 세계가 단합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작품의 결말에서 봉화지기 박현수는 어이없게 죽어나가 세계는 악신들의 손에 떨어지고 말지만, 그의 능력과 선의는 정훈 작가가 네이버 웹소설에서 작년 11월ㅂ 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차기작 ‘멸망한 세계의 검성’의 주인공에게 성공적으로 계승된다. 아마 이것이 작가가 다음으로 준비한다던 <배틀로얄 트릴로지>의 차기작일 것이다.

 

 

독자들 중에서는 허무한 결말에 실망하여 작가의 차기작을 다시는 안읽겠다고 선언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정 이세멸의 결말이 안타까웠던 독자라면 전작에서 이어지는 멸세검을 읽으며 이번에야말로 작가가 온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도록 응원해주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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