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과 퀴어 서사의 교차 (상)

yora 2020.02.22 09:43 조회 수 : 844

 

0. 들어가기 전에

 

이 글에서는 백합‘GL’을 동의어로 쓰고 있습니다. 2020년 현재 대부분의 한국 플랫폼에서는 #백합 #GL 해시태그가 동시에 달린 것을 볼 수 있으니 사실상의 동의어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텍스트릿 백합 논쟁 관련 게시글, 유리히메 편집장 인터뷰, 백합 향유층 분석을 다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텍스트릿 백합 논쟁  : http://textreet.net/board_YNKV61  이 게시판에서 '이윽고 네가 된다 리뷰 - 백합과 레즈 사이'라는 제목의 글로부터 파생된 일련의 논쟁을 가리킵니다.

 

유리히메 편집장 인터뷰 : http://textreet.net/board_YNKV61/96515

  

백합 향유층 분석 : http://textreet.net/board_YNKV61/114108

  

1. 백합은 BL과는 달리 분명히 당사자성을 지닌다.

 

작년(2019) 5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리디북스 BL 신간란에 유부남인 게이를 다룬 퀴어 소설이 올라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죠. 그 소설을 낸 출판사는 해울출판사라는 곳인데 퀴어 문학, 그중에서도 동성애 문학을 주로 출판하던 곳입니다. 이건 출판사가 시장을 잘못 분석했다고 봐야겠죠. 왜냐하면 BL의 주 향유층은 이성애자 여성인데 그 사람들한테 유부남 게이 이야기를 들이대 봤자 팔리겠습니까. 당장 자기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서 거리 두기가 쉽지가 않으니까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리디북스에서 그 소설은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6월에 이 출판사가 냈던 레즈비언 소설 몇 개가 저스툰에서 GL 카테고리에 올라왔습니다. 모가님과 마모님이 쓰신 소설이었는데 이분들은 레즈비언 소설 연재 사이트였던 필라인에서 활동하셨던 분들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BL 사태와는 달리 향유자들의 항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칠게나마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백합 / GL은 분명히 어떤 당사자성을 지니며 퀴어 서사의 일부를 지니고 있다고.

 

이것은 사실 향유자들 사이에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마리미테 팬사이트이자 백합 커뮤니티였던 애니메위킥스에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레즈비언과 바이섹슈얼 여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죠. 또한 백합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유리토피아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http://textreet.net/board_YNKV61/169761

  

제가 구글폼으로 만들었던 설문조사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설문조사 결과 및 자세한 분석은 지난 글에서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결론만 언급하겠습니다. 백합 장르의 주된 향유층은 여성애자 여성입니다. 위의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백합 장르가 어느 정도 당사자성이 있다는 결론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죠. 물론 남성들도 생각보다는 많이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장르에서 드러나는 욕망이 여성애자 여성의 것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90년대 순정 만화는 남성들도 꽤 많이 읽었지만 주된 독자층은 엄연히 여성이며, 거기서 여성들의 욕망과 의식 구조를 읽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합 장르의 창작자 역시 대부분 여성이라고 알고 있는데 창작자는 곧 그 장르의 향유자이기도 하니까요. 애초에 창작자가 장르 문법을 익히려면 그 장르의 작품을 수도 없이 섭렵해야 합니다. 백합과 퀴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차되는지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백합과 퀴어 서사가 교차되는 지점에 대하여

  

물론 백합과 현실의 동성애가 완전히 등치되지는 않습니다. 서브컬쳐인 만큼 엄연히 판타지라고 볼 수밖에 없는 부분도 꽤 있어요. 이를테면 GL 웹소설인 ‘SOL 당신이 나를 모르던 시간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이엘과 세서는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마법이 등장하고 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계관이니 동성애가 딱히 신기할 것도 없겠죠. 일본에서 나온 백합 게임인 백의성연애증후군과 그 후속작인 백의성연애의존증은 아예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어진 가상의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백합 장르의 계보를 살펴보면 결국은 퀴어 서사를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일본의 경우부터 보죠.

  

일본에서 백합의 시초로 불리는 작품은 요시야 노부코의 花物語(꽃 이야기)’입니다. 1916년부터 1924년까지 일본에서 연재되었는데 당시에는 여학생의 바이블이라고까지 불린 베스트셀러였죠.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학생들도 꽤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문화적 레퍼런스로 삼아 당대의 일본과 조선 여학생들은 주로 선후배 간에 로맨틱한 우정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S’(혹은 S관계)입니다. 일본에서 ‘S’는 자매들을 의미하는 시스터Sisters’ 혹은 소녀를 의미하는 일본어 쇼죠때로는 섹스Sex’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동성연애와 현대의 동성애가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요시야 노부코는 실제로도 여성인 연인과 오랜 기간 동거 생활을 했습니다. 꽃 이야기를 퀴어 서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이죠.

 

꽃 이야기 이후로는 주로 소녀소설과 소녀만화 위주로 백합 장르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후지모토 유카리의 居場所はどこにあるの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책에서 1990년대 이전의 백합 계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고전 백합 작품을 자세하게 짚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간략하게만 이야기하자면 주로 비극으로 끝나는 레즈비언들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1971년의 部屋のふたり(새하얀 방의 두 사람)’이라는 작품이 그렇지요. 한국에도 방영된 적이 있는 디어 브라더(원제 : おにいさまへ)’1974년의 작품입니다.

 

1988년에는 세계 최초의 상업 백합 코믹스가 일본의 白夜書房에서 나왔는데 무려 성인 만화였습니다. 제목은 秘密花園lesbian collection(비밀의 화원, 레즈비언 콜렉션)’입니다. 제목부터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군요. 이 시기만 하더라도 백합은 여성 간의 성애/로맨스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최근에 GLosia님이 이 책을 아마존재팬에서 구입해서 감상을 남겨 주셨는데 상당히 수위가 높아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링크 https://twitter.com/wixoss_ssul/status/1229255715564310528?s=20)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백합 작품의 색채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점차 밝은 레즈비언들이 나오기 시작하죠. 1992년에 방영된 세일러문 시리즈에 등장하는 우라누스와 넵튠은 그야말로 백합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에는 백합 애니메이션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소녀혁명 우테나가 방영되었죠. 그리고 1998년부터 그 유명한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이하 마리미테)가 연재됩니다. 마리미테는 100년 전에 존재했던 S문화를 쇠르라는 형태로 현대에 부활시킨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계보를 따지자면 꽃 이야기의 고손녀쯤 되는 작품입니다. 마리미테는 백합 장르의 시초라기보다는 백합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작품이라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마리미테는 여성 간의 성애/로맨스가 주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백합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마리미테가 과연 백합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는데요. 결국은 여성 간의 성애/로맨스에서 여성 간의 깊은 우애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장르의 범위가 확장되게 됩니다. 여기서 마리미테의 프롤로그 장면을 잠깐 소개하고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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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소위 여학교 백합물의 장르 문법입니다. 폐쇄된 여학생들만의 공간, 초중고교로 쭉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식 진학, 가톨릭계 미션 스쿨, 교원으로 등장하는 수녀들, 학생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혹은 주연 중 한 명이 학생회장), 상급생과 하급생 간의 배타적이고 돈독한 우애, 종종 등장하는 연극(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관계 변화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음), 맥락 없이 배경에 종종 등장하는 꽃. 이런 장르 문법을 지닌 작품군을 저는 편의상 여학교 백합물내지는 정통 백합물이라고 불렀는데 여학교가 배경이 아닌 작품도 있으므로 여기서는 정통 백합물이라고 통일하겠습니다.

  

꽃 이야기에서 시작해 레즈비언을 다룬 소녀소설과 소녀만화(이를테면 새하얀 방의 두 사람’), 그리고 마리미테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그 뒤로도 꾸준히 맥을 이어가게 됩니다. 푸른 꽃(코믹스), 블루 드롭(애니), 저 아이에게 키스와 흰 백합꽃을(코믹스), FLOWERS(비주얼 노벨)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그 꽃잎에 입맞춤을같은 18금 비주얼 노벨 게임이나 이러한 정통 백합의 클리셰를 패러디한 작품인 청순소녀 패러다임도 여기에 넣을 수 있겠죠. 범위를 조금 넓게 잡자면 배경이 여학교가 아닌 작품까지 한데 묶을 수 있습니다. ‘속삭임이나 이윽고 네가 된다는 배경이 남녀 공학이지만 순정 만화의 문법을 지녔으며 소녀들 간의 연정이 주된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속삭임의 작가는 푸른 꽃의 작가인 시무라 타카코를 존경해서 대담집이 실려 있기도 하며, 그 시무라 타카코는 자료 조사를 위해 가마쿠라에 간 김에 요시야 노부코 기념관에 가려고 하죠. 휴관일이어서 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가 한눈에 들어오지요.

 

이러한 정통 백합 작품은 기본적으로 소녀소설이나 소녀만화 계보이기 때문에 확고한 여성향이고요. 마리미테를 제외하면 전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정통 백합에서는 여자끼리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꽤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전작일수록 더더욱 그렇죠. 이를테면 속삭임에서는 주변의 동성애 혐오적인 시선에 상처를 받는 우시오의 모습이 종종 등장합니다. 과거에는 동성 친구한테 고백했다가 기분 나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그런 우시오를 사랑하는 스미카는 이런 독백을 합니다. 나와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지 알게 된다고. 이건 성소수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게 퀴어 서사가 아니면 대체 뭐겠어요. 작품 안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질서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공유합니다. 전에 올린 인터뷰에서 유리히메 편집장이 한 말을 떠올려 봅시다. 여성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다 보니 좀 더 리얼한 시선으로 백합을 본다는 구절이 있죠. 이걸 다른 말로 풀면 여성애자 여성 당사자들의 이야기라는 뜻도 됩니다.

  

게다가 로맨스가 중심 소재가 아닌 마리미테조차도 퀴어 서사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시나무 숲에 등장하는 세이는 시오리를 좋아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세이가 시오리한테 키스하려다 뺨을 맞는 장면도 나오죠. 결말에서는 세이와 시오리가 동반자살을 할 수 있었다는 암시가 나오는데 사실 100년 전의 일본에서 S관계를 맺은 여성들이 낭만적인 동반 자살을 기획하는 일은 꽤 흔했습니다. 일본어로는 신쥬(心中)라고 하고 한국어로는 정사(情死)라고 하죠. 또한 요시노와 레이의 어머니도 (물론 직접적인 암시는 없지만) 친구가 너무 좋아서 친구의 오빠와 결혼했다는 구절을 보면 과연 둘이 친구였을까 싶지요. 둘이서 사귀었지만 사회와 맞설 자신이 없어서 헤어졌고,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는 차선책을 찾아낸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선택지가 지극히 제한되었던 과거의 퀴어 여성들의 서사로 충분히 읽어낼 수 있어요.

  

2015년부터 연재된 이윽고 네가 된다’(이하 야가키미)는 신세대의 백합이라고 불리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요. 이 야가키미 역시 앞서 언급한 선배 작품들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색을 덧입힌 수작입니다. 양 갈래 머리의 소녀와 긴 머리의 소녀, 상급생과 하급생, 그리고 작중 배경이 되는 학생회. 사실 정통 백합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것만 보고도 바로 마리미테를 떠올립니다. 심지어 사에키 사야카는 앞서 언급한 에스컬레이터식 여학교 출신이죠. 정통 백합물에 흔히 등장하는 아가씨 캐릭터를 살짝 꼬아서 만든 캐릭터가 사야카입니다. 이런 작품에다 대고 백합과 레즈의 충돌이라고 하면 정통 백합 계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정작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왕도 백합 소리를 듣고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야가키미는 선배 작품들보다 한 술 더 뜹니다. 여학생들 간의 연애는 어차피 일시적이라는 편견을 아예 정면에서 반박하죠. 사에키 사야카는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을 찼던 여자 선배 앞에서 대놓고 토오코의 팔짱을 끼며 자기는 여전히 여자를 좋아한다는 점을 과시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야카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성인 여성 간 커플을 알아보고 연애 상담까지 받으러 가죠. 이 부분만 놓고 보면 퀴어 영화의 문법과 그리 다르지도 않습니다. 퀴어 영화인 캐롤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거든요. 캐롤에서도 테레즈가 다른 레즈비언들을 알아보고 눈짓을 주고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애초에 성인 여성들을 조연으로 등장시킨 이유가 뭐겠습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여자끼리 사랑하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기 위해서잖아요. 사야카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진심으로 안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2010년 말부터 이러한 정통 백합물 계보에서 약간 벗어난 사회인 백합물이라는 작품군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요. 코믹스 유리히메가 아닌 다른 출판사(이를테면 카도카와)에서도 사회인 백합 엔솔로지가 꾸준히 발매되는 중입니다. 한국에서도 사회인 백합물이 일부 정식 발매되었습니다. ‘막차로 못 가게 하는 단 한 가지 방법’, ‘투룸, G, 알람시계를 비롯하여 얼마 전에는 유리 구두를 벗어던지고도 정식으로 발매되었죠. 제가 최근에 읽은 코믹스인 らしいほどしてる얄미울 정도로 사랑한다에서는 기혼 여성 상사와 미혼 여성 부하의 불륜을 그리고 있는데요. 현대의 여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등신대로 그려냈다는 구절이 표지에 적혀 있더군요. 여성 부하는 당연히 스스로를 성소수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성애자 여성만 짝사랑해 왔다는 과거도 짤막하게 언급되고요. 이런 사회인 백합물은 등장인물들이 성인이다 보니 이야기도 대체로 진지하고 무거운 편이고, 퀴어 서사라고 해도 무방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몇몇 작품에서는 아예 타치네코같은 성소수자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쓰더군요. ‘타치네코는 한국어에 딱 들어맞는 번역어는 없고 기브테이크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성관계에서의 포지션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두 여성 간의 결혼을 소재로 한 백합 작품도 등장합니다. White Lilies in Love (신혼 백합 앤솔로지)엄마 아빠 때문에 후배()랑 위장 결혼 했습니다같은 작품들인데요. 시부야 구나 삿포로 등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 동성 파트너십 제도를 시행한 이후로 그 여파가 창작물에도 영향을 미친 케이스라고 봐야 합니다. 참고로 동성 파트너십 제도는 동성 결혼으로 가는 중간 단계라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이제는 선결혼 후연애키워드의 작품도 백합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다음은 한국의 백합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왕 일본의 백합 계보를 언급한 김에 한국의 백합 계보도 짚고 가지요. 한국에서도 90년대 말에 세일러문이 방영되었고, 우테나도 비디오로 알음알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백합 팬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백합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시점은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가 정식으로 발매된 2004년으로 잡는 게 맞다고 봅니다. 비슷한 시기에 마리미테의 팬사이트이자 이후에는 백합 전문 커뮤니티로 발전한 애니메위킥스가 만들어집니다. , 한국에서는 마리미테와 마이히메(2004년 일본에서 방영), 신무월의 무녀(2004년 일본에서 방영)를 거의 동시기에 접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또한 이 커뮤니티에서 한국의 백합 향유자들은 2003년에 일본에서 창간된 백합 전문 잡지인 유리시마이(백합자매)’와 그 후계자인 코믹스 유리히메(2005)’의 백합 작품도 같이 접하게 되지요. 나노하나 럭키스타, 동방프로젝트 등의 2차 창작으로서의 백합도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제가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위킥스에서는 퀴어 문학이나 실제 성소수자를 다루는 웹툰, 퀴어가 나오는 해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작품을 포괄했습니다. 퀴어 문학으로는 분홍빛 손톱’, ‘그녀의 여자’,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핑거스미스등등이 소개되었고요. 실제 바이인 작가가 레즈비언 애인과 연애하는 네이버 웹툰인 모두에게 완자가’, 한국 성소수자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네이버 웹툰인 어서 오세요, 305호에!’도 언급되었습니다. 영국 드라마인 스킨스의 시즌 3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커플과 아예 레즈비언들을 본격적으로 그려낸 드라마인 ‘The L word’도 가끔씩 소개되곤 했죠. 저도 위킥스에서 만난 지인한테 일본 퀴어 영화인 ‘Love my life’를 소개받아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키야마 하루의 작품인 옥타브를 두고 이건 백합이라기보다는 퀴어 만화가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지만 전반적으로 위킥스 유저들은 딱히 퀴어 서사를 백합과 구분하지 않고 같이 소비했습니다.

  

또한 2000년대 중후반에는 레즈비언 소설 사이트인 필라인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이트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위킥스 유저들 사이에서도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필라인 주소를 알려달라는 글이 잊을 만하면 위킥스에도 한 번씩 올라왔으니까요. 이 필라인의 인기 작가인 마모님의 소설이 2008년에 열린 제 1회 백합제에서 부스로 판매되었습니다. ‘비쳐 보이는 그녀라는 제목의 단편집이었죠. 저를 비롯하여 제 주변의 백합러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 책은 아직도 제 책장에 있습니다. 이 시절 필라인에서 연재된 작품들은 알라딘에서 전자책으로 다수 발매되었습니다. ‘해울출판사로 검색하면 뜨니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다만 게이 문학도 섞여 있기 때문에 약간의 품을 들여서 걸러낼 필요는 있습니다.

  

2010년에 열린 제3회 백합제의 팜플렛에는 305호의 등장인물인 오윤아가 떡하니 그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등신대로 만들어진 캐릭터이기도 했죠. 이 오윤아가 다름 아닌 레즈비언입니다. 305호 후반부에서는 백설이라는 연상의 여자와 사귀게 되는데 이 둘을 그려낸 회지도 백합제에 종종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레즈비언 캐릭터인 오윤아가 서브컬쳐 온리전인 백합제의 팜플렛에 등장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시절부터 퀴어 서사는 백합의 일부였다는 뜻입니다.

 

2010년도에 들어서자 한국에서는 일본의 영향으로 아이돌 마스터러브라이브등의 아이돌물 백합이 인기를 끌게 됩니다. 2011년에는 네이버 백합 카페인 유리토피아가 창설되었고요.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의 백합 향유층은 필라인이나 아이돌 팬픽을 제외하고서는 해외 작품을 주로 소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에 레진코믹스에서 나의 보람을 필두로 최초의 백합/GL 상업작을 내놓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한국에 백합/GL 카테고리의 작품군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레진코믹스는 2015년에 백합/GL 웹소설 카테고리를 신설했다가 2017년에 졸속으로 종료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레진코믹스는 일본의 백합 코믹스 인기작을 여럿 정식으로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푸른 꽃이나 이윽고 네가 된다가 대표적이죠. 어찌 보면 레진코믹스가 백합 코믹스의 한국 정발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도 그리 좋아하는 회사는 아닙니다만 한국의 백합 계보를 언급할 때 레진코믹스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2017년에는 웹소설 연재 사이트인 조아라에서도 GL 카테고리가 신설되고,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지만 피너툰이나 저스툰 같은 플랫폼에서도 GL 카테고리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봄툰이나 리디북스 같은 플랫폼은 GL 카테고리가 따로 있지는 않지만 해쉬태그(#GL)이나 키워드 검색(GL/백합)으로 따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2020년 현재 리디북스에는 대략 200개가 넘는 백합/GL 웹소설이 있는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한국 백합도 참 단기간에 발전했습니다. 물론 메이저인 로맨스나 BL에 비하면 아직은 작은 규모지만 이 정도면 하나의 작품군을 형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죠.

  

한국의 백합 상업작, 그중에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사실상 퀴어 서사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된 백합 웹툰인 블루밍 시퀀스’, ‘따뜻한 달’, ‘청아와 휘민은 한국에서 여성애자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얼버무리지 않고 똑바로 그려냅니다. 동성을 사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흔한 연애 상담도 제대로 못 하는 경우는 다반사고 따뜻한 달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쫓겨나기도 하죠. GL 웹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봄바람에서 이수는 본인이 이성애자인 줄 알고 살다가 처음으로 여자인 휘경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 성소수자로 자각하는 케이스인데요. 여자를 사귀는 게 처음이다 보니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됩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선배인 재이가 호모포비아라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아도 털어놓을 수도 없죠. 이 부분만 발췌하면 이게 GL 웹소설인지 퀴어 문학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BL과 백합은 애초에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BL(예전에는 야오이)은 이성애자 여성이 주된 향유층입니다. 최근에는 당사자인 게이 작가들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여전히 이성애자 여성의 장르입니다. 반면 백합 장르의 주된 향유층은 여성애자 여성입니다. 장르의 시초인 꽃 이야기시절부터 당사자성을 지니고 있었어요. 동성 간 연애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백합과 BL이 자주 묶이곤 하는데 따져보면 생각보다 그리 가까운 장르는 아닙니다. 여성향 BL은 계보를 따져보면 소녀만화의 소년애에서 유래한 장르인데요. ‘주네’, 혹은 야오이로 이어졌다가 최근에는 ‘BL’이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죠. BL이라는 장르의 주된 향유층과 창작층은 이성애자 여성입니다. 게이 남성들이 창작하고 소비하는 장르는 장미물(바라물)이라고 따로 있는데 타카메 겐고로의 만화를 떠올리면 쉽습니다. 물론 두 장르 모두 외할머니격인 소녀만화/소녀소설에서 유래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데면데면한 사촌지간 정도는 되겠지만, 어쨌거나 당사자성 유무에서 두 장르는 크게 갈립니다. 이를테면 저는 작년 11월에 개봉한 여성 퀴어 영화인 윤희에게GV 후기를 보면서 꽤 놀랐습니다. GV에 다녀온 사람들이 스스로를 백합러라고 지칭하더라고요.

  

이런 디테일한 착즙은 백합러들밖에 못 한다

“(GV에서 감독님이 영화의 등장인물인 쥰과 료코의 백허그 장면이 시나리오 북에 들어간다고 하자 다들 환호하면서) 이게 영화 GV인지 백합 온리전인지 모르겠다.”

실제 GV에서 윤희X, 윤희X영양사, 윤희X새봄이 친구 같은 커플링 투표까지 하더라.(2020122일에 모모 아트하우스에서 열린 GV입니다. 저는 윤희X쥰에 투표했는데 이왕이면 쥰X료코도 넣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에 실제 게이인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환절기같은 영화에서 ‘BL라든가 ‘BL 온리전이라는 말이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성애자 여성들의 성소수자 대상화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합은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당사자성을 지닌 장르라서 가능한 겁니다. ‘아가씨도 엄밀히 따지자면 퀴어 영화지만 개봉 당시 백합러들은 아무도 장르 구분은 신경 쓰지 않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위킥스 시절부터 늘 그래 왔습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퀴어 서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백합 장르의 일부였으니까요.

  

3. 왜 백합 향유자들은 백합레즈를 구분하려 했을까?

 

그렇지만 향유자들 내부에서는 백합과 실제 퀴어 서사 사이에 선을 긋고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그간 꾸준히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유리토피아의 게시판 분리 사태도 그렇고요. 소위 백합과 레즈의 차이논쟁에서 그 지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죠. 지난번의 텍스트릿 백합 논쟁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논쟁은 한국뿐 아니라 백합의 본토인 일본에서도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 흔적을 2012년에 발매된 백합 비주얼 노벨 게임인 옥상의 백합령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령인 메구미가 마찬가지로 유령인 사치 씨를 사랑한다고 하자 주인공인 유나가 묻습니다. 그럼 너희는 레즈비언이냐고. 메구미는 펄쩍 뛰면서 우리는 레즈가 아니라 백합이라고 받아칩니다. 유나의 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아노도 비슷한 헛소리를 하면서 타치네코라는 일본의 성소수자 용어를 적당히 섞어서 쓰죠.

 

최근에 이 게임의 한국어 패치가 만들어져서 다른 분들의 플레이 감상을 종종 보게 되는데 다들 이 지점을 동성애 혐오라고 짚고 넘어가셔서 꽤 놀랐습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레즈비언이 추접스러운 존재도 아닐진대 레즈라는 단어에 그렇게까지 펄쩍 뛰면서 부정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레즈비언은 그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발매 당시에 그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 그런 지적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다들 그냥 웃고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저런 백합러가 주변에 꼭 한 명씩은 있었으니까요. 최근에 체험판이 나온 しのラブよりのラブ라는 백합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대놓고 밝히더군요. 8년 사이에 백합 향유자들의 인식도 많이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백합과 레즈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앞에서 실컷 이야기했듯이 백합의 주된 향유층은 여성애자 여성이며, 장르의 시초인 꽃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당사자성을 분명 지니고 있으니까요. 일본에서도 요새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아직도 쇼와 시대에 갇혀 있냐. 이제는 연호가 레이와다. 업데이트 좀 하고 와라는 야유를 듣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지난 텍스트릿 논쟁을 보고서 제 주변의 백합 향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 한국에 마리미테가 들어왔던 2004년부터 향유자들은 그 주제로 수없이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애초에 백합에서 레즈를 분리하기란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한번쯤은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논쟁 자체보다는 향유자들이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분하려 한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애초에 당사자성을 지닌 장르였다면 왜 그렇게 백합과 레즈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일까요. 그러한 선 긋기는 과연 장르의 당사자인 여성애자 여성들과 비당사자인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미였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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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킥스 시절부터 늘 보던 이야기입니다. 백합은 애절한 감정선 위주의 여성향이고, 레즈는 그냥 여자 둘이서 맥락 없이 섹스하는 남성향이다. 백합은 순정이고 레즈는 포르노다. 백합은 가상의 창작물이고 레즈는 실제 퀴어 서사다. 백합은 2D고 레즈는 3D. (그렇다면 캐롤이나 윤희에게같은 영화, 그러니까 소위 2.5D는 백합일까요, 레즈일까요?) 보시다시피 이 레즈라는 말이 굉장히 애매해서 사람들마다 쓰는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용어부터가 합의되지 않았으니 향유자들 사이에서는 늘 갑론을박이 벌어졌죠. 저는 편의상 레즈라는 말을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레즈 = 실제 레즈비언, 즉 퀴어 서사.

2. 레즈 = 고수위 백합물. , 여성과 여성의 섹스 묘사가 주가 되는 작품.

  

1번의 정의는 글의 앞부분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2번의 레즈’, 즉 고수위 백합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이번에도 2000년대의 백합 커뮤니티인 애니메위킥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위킥스는 처음에는 마리미테의 팬사이트로 출발했죠. 마리미테는 여성 간의 로맨스나 성애를 다룬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킥스 유저들이 과연 우정 이상 사랑 미만의 백합물만 소비했는가 하면 그건 확실히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위킥스에서 자가 붙었던 3대 캐릭터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세 명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마리미테의 오가사와라 사치코

신무월의 무녀의 히메미야 치카네

마이히메의 후지노 시즈루

  

이 중에서 치카네와 시즈루는 친구들 짝사랑하다 돌아버린 나머지 친구를 강간한(!) 분들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인데 백합러들이 좋아하는 여자 캐릭터는 유해한 장녀 레즈비언입니다. 한국과 일본 가릴 것 없이 이 두 명은 인기 캐릭터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느 위킥스 유저가 어떻게 수학 선생님(50, )과 치카네님을 똑같이 좋아할 수 있냐며 절규하던 게시물이 떠오르는데요. 아마 부모님한테 덕질할 열정으로 공부를 해라 운운하는 잔소리를 들었던 유저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위킥스에서는 ??? 게시판이라는 금단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이 게시판은 비교적 수위가 있는 작품을 올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소녀섹트같은 고수위 백합물이나 옥타브같은 퀴어 서사까지 골고루 올라오는 편이었습니다. 마리미테나 마이히메의 182차 창작도 물론 꽤 올라왔고요. 그런데 어느 날, 미성년자가 이 게시판을 이용한 흔적이 발각되면서 이곳이 잠시 폐쇄되었습니다. 그때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났습니다. 다들 나라 잃은 백성들처럼 황망히 울어댔죠.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심지어 몇몇 유저들은 그 미성년자를 향해 과격한 욕설을 하는 바람에 운영진이 자제를 요청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폐쇄되고 나서도 ??? 게시판은 언제 다시 열리냐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위킥스 유저의 70%는 여성이었고 그중 과반수가 여성애자 여성이었습니다. 결국 그때부터 고수위 백합물에 대한 욕망은 꾸준히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바꿔서 말하자면 여성애자 여성의 욕망이기도 하지요.

 

이런 경향은 2020년 현재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디북스에서 키워드 검색으로 백합 / GL 소설만 나오게 한 다음 인기순으로 정렬하니 1위부터 40위 중 6개를 제외한 34개가 전부 19금이었습니다. (2020220일 기준) 게다가 이런 고수위 GL 소설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가 여성입니다. 고수위 백합 단편집인 방앗간의 구매자 성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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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작년 12월에 저는 코믹스 유리히메에서 나온 레즈비언 업소 앤솔로지라는 코믹스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제목부터 벌써 레즈비언(원문에서는 레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군요. 여기서 레즈비언 업소란 쉽게 말해서 성매매 업소입니다. 당연히 여성 간의 노골적인 섹스 묘사도 나오죠. 19금이 아닌지 보는 내내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만화가 백합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게 최근의 일본 시장입니다. 코믹스 유리히메 레이블을 달았으니 명실상부한 백합 상업작이고요. 이게 상당히 잘 팔려서 얼마 전에는 두 번째 엔솔로지가 나왔더군요. 심지어 2020327일에는 쌍둥이 백합 섹스 엔솔로지가 발매될 예정입니다. 정말로 제목이 이렇습니다.

 

 

hutagoH.jpg

 

 

이쯤 되면 백합과 레즈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을 지경입니다. 퀴어 서사로서의 레즈든, 고수위 백합물로서의 레즈든 간에 결국 레즈는 언제나 백합의 일부였습니다. 둘을 분리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죠. 백합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동성애자 여성만을 의미하다 장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이니까요.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왜 백합 향유자들은 백합레즈를 집요하게 구분하며 선을 그으려 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디나이얼 성소수자의 어둠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인 억압,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디나이얼이란 부인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성소수자를 가리킬 때 주로 쓰입니다. ‘어서 오세요, 305호에!’ 초반의 오윤아를 생각하시면 쉬울 거예요. 결국 한마디로 방어기제였던 것이죠. 앞서 언급한 시즈루와 치카네를 보면 그 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시즈루와 치카네는 본인이 친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계속 숨겨오다가 그만 돌아버리는 캐릭터입니다. 소위 크레이지 싸이코 레즈비언(크싸레)’ 캐릭터인데요. 이 둘이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하는 독백이 있습니다.

  

너의 좋아해와 나의 좋아해는 달라.”

  

유구한 백합물의 클리셰죠. 그 둘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친구의 신뢰를 이용하여 강간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2000년대 중반의 백합러들은 그런 시즈루와 치카네한테 유독 감정 이입을 하며 그것을 애절한 짝사랑으로 소비했습니다. 이성애자인 친구를 사랑한 레즈비언의 이야기가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대부분은 우정조차 잃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연심을 속이고 계속해서 좋은 친구를 연기하다 결국 미쳐버리게 되는데요. 2000년대 백합 작품에서는 이러한 자기기만의 괴로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속삭임의 우시오도 스스로한테 계속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자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죠. 자기기만이란 게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뒤틀리게 하니까요. 서비스직에 종사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주 잠깐의 감정 노동조차 상당히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그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더더군다나 그렇겠죠. 이러한 자기기만이 당시의 백합 향유자들의 마음에 공명했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는 디나이얼 성소수자의 어둠을 그 캐릭터들이 제대로 건드렸다고 봐야죠.

  

이러한 디나이얼의 어둠은 한국의 레즈비언 소설 사이트인 필라인에 연재되었던 작품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저스툰에서 모가님의 천애지락이라는 작품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거기서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여자가 이런 대사를 하더군요. 나는 네가 여자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너라서 좋아하는 거라고. 전형적인 디나이얼의 대사죠. 여자라서 좋아한다고 한들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니까요. 설령 등장인물이 레즈비언이 아니라 양성애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저런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말로 끝내면 그만입니다. 사랑을 전하는 말에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애자 여성들이 겪는 억압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또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인 억압도 분명히 한몫했을 겁니다. 여기서 제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당시 저는 19살이었고 일본 웹사이트에서 마이히메의 2차 창작을 번역기로 돌려가며 신나게 읽었습니다. 주로 18금 위주로요. 당시의 일본 홈페이지는 딱히 성인인증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 꽃잎에 입맞춤을을 비롯하여 온갖 18금 백합 게임을 섭렵하고 다녔죠. 앞서 언급한 위킥스의 ???란도 매일같이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블로그에 백합과 레즈를 구분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지금은 삭제되었지만 안 봐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백합은 애절한 감정이 들끓는 상태에서 서로가 맺어지는 것이니 육체적 관계가 중심이 되는 레즈와는 다르다며 선을 긋는 내용이었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이중적이죠.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백합 향유자들은 그렇게 애절한 감정 따위의 너절한 변명을 해야 했을까요. 아무런 맥락 없이 여자 둘이서 섹스를 한들 뭐 어떻습니까. 여성 간의 섹스가 더러운 건가요? 합의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원나잇을 하든 채찍으로 상대의 나신을 때리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여성의 성적 억압으로 인한 자기검열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저를 비롯한 여성애자 여성들은 퀴어로서의 억압이 한 겹 더해지죠. 이러한 자기검열의 분위기는 위킥스에서도 있었습니다. 마이히메의 2차 창작 소설 하나가 음핵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운영진으로부터 제재를 받았던 사건도 있었거든요. 헤테로 로맨스 쪽에서도 비슷한 검열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성애자 여성도 성에 대한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억압당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쪽도 19금 로맨스가 잘나가기는 매한가지였죠. 제 지인분의 발언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장르에서 분리하자거나 배제하자고 하는 담론은, 결국 그 장르 향유자들의 욕망과 터부나 의식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결국 애초에 그렇게 분리하려 애쓰는 시점에서 둘이(이 경우에는 백합과 레즈가) 깊게 얽혀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이 아웃팅에 대한 공포인데요. 백합 장르를 향유하는 여성들이라면 꼭 한번쯤은 들었을 말이 있습니다. “너 설마 레즈야?” 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었죠.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건 절대로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닙니다. 너를 아웃팅시키겠다는 악의가 한가득 담겨 있거든요. 한국이 얼마나 퀴어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회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물어보지 않습니다. 상대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죠. 사실 작년에도 오랜만에 비슷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실제 퀴어냐고 묻더니 그렇다고 답하니까 그래서 백합 좋아하시는 거예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정색하면서 그건 정말로 무례한 질문이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그렇게 받아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교를 다니던 19살의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가 얼마나 성소수자한테 관대하지 못한 공간인지 당사자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때는 나 레즈 아니라고, 백합이랑 레즈는 엄연히 다르다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그런 식의 선 긋기는 아웃팅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자기방어의 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백합러들은 예전처럼 레즈라는 단어를 무슨 금기처럼 대하지 않더군요.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를 유성애로 엮는 2차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근레’(근친 레즈)를 판다고 말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여성 간 커플을 청레’(청춘 레즈, 혹은 청소년 레즈)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심지어 저는 트위터에서 백합을 판다고 해서 다 레즈는 아니지만, 일단 저는 맞습니다.”며 자연스럽게 커밍아웃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실제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레즈라는 단어를 장르명으로 쓰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백합 작품 중에서 바이나 팬으로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 한둘이 아닌데 자칫하면 그 캐릭터들을 지우는 처사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과거에 비해서 레즈라는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과거와는 달리 여성애자 여성들이 스스로의 욕망과 정체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요.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에키 사야카는 더 이상 나의 좋아해와 너의 좋아해는 다르다며 아련한 눈빛으로 독백하지 않습니다. 고백의 타이밍만 고민하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요새 나오는 백합 작품에서는 자기기만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체화 장면을 한 페이지로 퉁치고 넘어가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최근의 유리히메 잡지에는(20201) 아예 실제로 여자와 사귀며 동거하는 여성애자 여성의 에세이 만화가(今日もひとつ屋根) 실리기도 했습니다. 사회인 백합물인 定時にあがれたら犬井あゆ작가님이시죠. 이렇듯 백합 작품 속에서 여성애자 여성들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냅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계속 이어지리라고 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옥상 위의 백합령씨에 등장하는 아노를 지나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디나이얼이라서 저렇게 말할 뿐이지 나중에는 여성애자로 재정체화할 게 뻔히 보이니까요. 아노는 오래 전에 입문한 백합러들이 간직한 부끄러운 과거이기도 합니다. ‘렛 잇 고Let it go’를 설산에서 열창하던 겨울왕국의 엘사를 보는 마음으로 관대하게 지켜보는 게 최선입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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