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과 퀴어 서사의 교차 (하)

yora 2020.02.22 09:51 조회 수 : 472

 

비당사자들의 경우 : 본인들만 모르는 성소수자 혐오

 

 

다만 이건 여성애자 여성 당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굳이 백합과 레즈를 구분하려 든다면 동성애 혐오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강력한 의심이 듭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요. 과거 위킥스 시절부터 저는 몇몇 남성이 동성애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자식이 동성애자면 얼굴을 갈아버리겠다느니 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하더군요. 이러한 시각은 그들의 감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어떤 남성은 레즈비언인 사야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인 사에키 사아카에 관하여’(이윽고 네가 된다 외전 소설)를 퀴어 소설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분명히 사야카가 책의 서두에서 나는 여자밖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도 말입니다. 레즈비언이 주인공이지만 퀴어 소설은 아니라니 무슨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식의 헛소리입니까. 애초에 외전에서는 사야카가 계속해서 자기 이름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뭐겠습니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잖아요. 매체를 막론하고 등장인물이 자기 이름을 외치거나 거울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정체성과 관련된 장면입니다. 겨울왕국2에서 엘사가 ‘Into the unknown’을 부르면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지난번 텍스트릿 논쟁에서도 모 남성 평론가가 사야카를 레즈비언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셨죠.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오독입니다. 사에키 사야카는 그냥 레즈비언입니다. 외전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해석하는 게 맞아요. 레즈비언이 무슨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정체성입니까. 2020년에 레즈비언을 레즈비언으로 제대로 부르자는 호레호즈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 참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물론 이성애자 여성이라고 거기서 딱히 자유로운 것도 아닙니다. 제가 블로그에 설문조사 결과 및 분석을 올리자 누군가가 '저는 유리가면 시절부터 백합을 팠던 이성애자 여성인데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게 기분 나쁘다. 그래서 이 설문조사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댓글을 달았더군요. 백합을 파는 여성들 전부가 퀴어라고 언급한 것도 아니고, 고작 설문조사에 그리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당신의 퀴어 혐오 때문이라고 대놓고 받아쳤습니다. 사실 저를 믿고 개인정보를 남겨 주신 레즈비언이나 바이 여성분들이 짊어진 위험에 비하면 이성애자 여성의 기분 따위 알 게 뭡니까. 성소수자들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아웃팅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데 저렇게 태평하게 배려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죠. 당신의 기분은 당신이 알아서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혐오까지는 안 한다고 생각하겠죠. 한번 직접 예시를 봅시다. 다음은 2020112일에 제가 서찬휘 평론가와 나눴던 논쟁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논쟁의 발단은 그분이 쓰신 기사의 한 구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백합 장르’(여성 간의 우정과 유대에 천착하는 판타지 픽션장르. 레즈비언 장르와는 구분됨) 독자라면 즐거울 만한 대목이 많다. 가까운 미래를 다룬 에스에프(SF)물이 디스토피아적 소재로 이처럼 아기자기하고 인간미 넘치는 얼개를 만들긴 쉽지 않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923937.html#csidx83720939cbe600d968b5cb86f077b90

 

 

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 항의하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서찬휘 평론가(이하 서)

 

 

저는 BL과 장미를 같은 궤로 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선으로 백합과 퀴어로서의 레즈비언 장르를 구분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애의 유무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제가 정리한 백합의 정의는 제 책 <키워드 오덕학>에 있사오니 내용을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관심 두어주셔서 고맙습니다.”

 

 

yora(이하 Y)

 

 

그 책 저 아예 샀고 백합 파트 다 읽어보았습니다. 현재 선생님이 2020년에 나온 '코믹스 유리히메'에 실리는 작품들을 단 하나라도 읽어보셨는지 궁금해지네요. 아예 레즈비언 업소 앤솔로지가 나오고, 타치며 네코 같은 성소수자 은어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여성 연인과의 일상을 그린 생활툰도 (당연히 작가도 여성) 유리히메 코믹스에 실리는 시대입니다. 그 책을 읽어보니 마리미테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는 거진 언급도 안 하셨던데요. 업데이트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국 백합 /GL 작품은 거진 여성애자 여성들의 욕망을 다룬 성애물인데 아주 당연하게 빼버리시는군요.”

 

 

사실 제 책이 다루는 바도 벌써 수 년 전(2016) 것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성애를 포함하기도 한다는 바를 안 적진 않았습니다.”

 

 

Y “아뇨. 넓은 의미에서 성애를 포함하는 게 아니라 장르의 핵심이 여성 간의 성애고 로맨스예요. 2차 창작으로 파는 경우에도 대부분은 로맨스로 엮는 것입니다.”

 

 

저는 성애가 백합 장르의 본래 '핵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네요. 특히 한국 상업지면에서 명칭을 도입할 당시 매체들이 오히려 장르를 오도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거나 이후의 흐름은 시간이 흘러 이미 온 현재가 된 셈이죠.”

 

 

Y “일본이나 한국에서 나온 최신작 열 개만 봐도 그런 소리는 못하실 겁니다. 마리미테 팬사이트로 시작해서 백합 커뮤니티가 된 '위킥스'에서 향유자들이 욕망했던 게 무엇인지 알면 더더군다나요. 장르를 오도한 게 아니라 여성애자 여성들의 욕망을 오히려 제대로 읽어냈다고 봐야죠.”

 

 

Y “당장 장르의 원형인 꽃 이야기의 저자인 요시야 노부코부터가 여성 연인이 있었던 사람인데요. 레진코믹스나 한국 플랫폼에서 19금 성애물 위주로 흘러가는 게 장르의 '오도'라니요. 무슨 자격으로 그걸 판단합니까? 그게 팔리고, 향유자들이 욕망하니까 그런 작품들이 나오는 거지.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요. 지금 한국 / 일본 백합 최신작 열 개 당장 댈 수 없으시면 님은 함부로 장르를 정의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제 책을 근거로 들어서 백합 쓰지마 파와 싸우던 분이 그 때 그 책에 버젓이 등장하던 똑같은 문장들은 대체 어떻게 참으셨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늘 백합 과목 시험 감독관 노릇하시느라 바쁘신 건 잘 봐 왔습니다만, "원래 어떻게 형성됐든 지금은 이렇다"고 할 문제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Y “그야 예전에 쓰인 글인 만큼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넘어갔던 것이고요. 비꼬지 마십시오. 제 말에 반박하고 싶으면 실제 백합 타이틀 단 작품명으로 하시고요. 그래서 그 '레즈물' 열 개나 대실 수 있습니까?”

 

 

Y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부터가 마리미테로 입문한 사람인데 당장 아까 탐라에서 나온 여성 간 연애 소재 백합물 '푸른 꽃'이나 '걸프렌즈'도 비슷한 동시기에 유명했던 작품입니다. 작품명을 대세요. 당신의 뇌피셜 정의는 아무런 관심 없고 당신 책 인용했던 건 이토 분카쿠의 인터뷰 때문입니다. '원래' 장르의 원형인 요시야 노부코부터가 여성 연인 있었던 퀴어라고 지금 몇 번째 말합니까.”

 

 

Y “장르를 정의하려 들면서 백합 작품 열 개도 인용 못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전에 싸웠던 남성 평론가도 그러시던데 이쯤 되면 그 성별에 뭐가 있나 싶네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하는 것은 동성애 혐오입니다. 어떻게든 여성 간 성애를 우정으로 희석시키려 드시는데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참 전형적이네요.”

 

 

아무리 경계가 희석되고 있지만 BL이 곧 장미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테지요. 독립만화의 범주 등에서 여성 퀴어 레즈 만화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백합이라는 표현을 안 쓰는 건 둘에 간격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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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저는 이 캡쳐 화면을 반례로 제시했습니다. #GL, #백합, #현실적 퀴어물이라는 해시태그가 나란히 달려 있네요. 물론 거기에 대한 답변은 달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성의 성 표현과 연애를 표현한다는(코드를 삽입한다는) 이유로 여성 서사나 퀴어의 범주에 무조건 놓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제 구분은 그 지점에서 퀴어와 백합을 구분하는 것이고, 귀하는 백합에서 연애와 성애를 지우고 우정에 국한하려 한다는 혐의를 저에게 씌워 드잡이를 하고 있고.”

 

 

심지어 로맨스와 성애가 백합의 주축이라고 주장하면 그게 멋대로 정답이 되나요. 그게 백합 장르의 전체 정체성이에요? 나 비꼬기는 싫지만 무례하고는 싶으신 시험감독관님. 쏟아낸 말들이 너무 주옥 같아서 놀랍습니다만, 잘 보관해두고 백합 이슈 있을 때 고이고이 꺼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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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당장 일본 백합 소개 사이트인 유리내비(http://yurinavi.com)에서 실시하는 백합 작품 인기투표만 봐도 상위권에 로맨스와 성애가 들어가니까 그렇게 정의한 건인데요. 님이야말로 아까부터 구체적인 작품명 하나 제대로 대지도 못하면서 뇌피셜 정의만 이어가시네요. 작품명 열 개도 못 대는 장르 알못님.”

 

 

Y “유리내비 상위권에 들어간 야가키미(이윽고 네가 된다) 같은 작품이 여성 간 성애와 로맨스를 다루고 있으니까, 그리고 백합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여성 간 성애와 로맨스를 욕망했으니까, 다 근거 자료 댈 수 있어요. 님은 정작 이 트윗 타래에서 유리히메 작품 하나도 못 대시면서 아주 잘도 장르를 정의하려 드시는군요.”

 

 

Y “나는 백합 장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힘드십니까? , 여자가 따박따박 지적하니까 기분이 나쁘세요?”

 

 

Y “그리고 저도 다음 텍스트릿 글에서 백합 작품 열 개도 인용하지 못하면서 장르에 대해 입을 터는 사람의 대표격으로 두고두고 박제해서 인용해 드리죠. 근거 자료를 누가 더 잘 갖추고 있는지는 다른 이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동감입니다. 이런 식으로 애먼 싸움을 거는 사람이 무슨 장르론을 한다고 그러는지 당췌 알 수가 없어요. 뭔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는지 모르겠네...”

 

 

저야말로 작품명 열 개도 인용 못하면서 무슨 밑천으로 나대시는지가 의문이지만, 어차피 말 안 통하니 이제 갈 길 갑시다.”

 

 

다음은 소나타빠/小使(@yl_piment)님이(이하 소) 달아주신 부연 설명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서찬휘 평론가님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으셨더군요. 허락을 받고 전문 인용합니다.

 

 

사실 제 책이 다루는 바도 벌써 수 년 전(2016) 것이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성애를 포함하기도 한다는 바를 안 적진 않았습니다.”

 

 

범위가 반대라고 생각하는데요. 넓은 의미에서 백합이 성애가 아닌 부분도 포함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성애만을 이야기하죠. 백합의 바이블이라고도 불리는 마리미떼의 경우도 협의의 백합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요. 마리미떼 후기에도 명확하게 명시 된 적이 있는데요, 작가님께서 받았던 감상 중에서 이거(=마리미떼)는 아닌 척 하지만 완전 백합이다라는 소리가 있었다고 언급합니다. 만약 서찬휘님의 기준으로 해석하면 말이 안되는 소리죠. 마리미떼가 비성애적인 (일부 조연 제외) 여성간의 우정과 유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왜 아닌 척한다고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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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내용은 이 구절인 듯합니다. 이미 마리미테 연재 당시부터 백합이라는 단어는 쓰이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리고 소프트하지만이라는 구절이 달려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성 간의 연대와 우애가 장르의 기본이라면 굳이 저런 구절이 나올 이유도 없죠. 그냥 백합물이라고 하면 되니까요. 한국에서는 2004년에 정식으로 발매된 마리미테와 2차 창작으로서의 백합으로 입문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광의의 백합 정의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당당하게 여성 간의 성애를 제외하는 것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소리밖에 안 나오죠.)

 

 

저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 정확히 몇권인지는 생각 안나지만, 상당히 초반이었다고 기억합니다. (2권입니다) 즉 마리미떼의 애니화와 거기에서 비롯된 백합붐이 일어나기도 전부터 백합=여성간의 성애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증거죠. 백합물의 핵심이 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서찬휘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는김에 조금만 더 웃긴 이야기를 해볼까요? 백합이라는 이름은 본디 여성간의 성애를 의미하는 표현이었습니다만, 광의의 백합에 왜 여성간의 비성애적 우정과 연대가 포함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굳이 그걸 백합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는데 지금은 서찬휘님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비성애적인 작품들의 비중이 늘어났을까요?”

 

 

아까 말한 예시로 돌아갑니다만 2000년대 초 백합붐을 타고 백합러가 된 사람들은 마리미떼를 버릴 수가 없었거든요. 그사람들한테 마리미떼는 근원이자 바이블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백합이라는 장르명은 마리미떼를 포함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약간 사기를 칠 수 밖에 없었어요. 백합은 여성간의 성애를 다루는 장르지만 그걸 어떻게 잘 확대하고 비틀면 얼핏 비성애적이라도 성애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깊은 관계까지 끼워넣을 수 있지 않겠냐고요. 하필 마리미떼에는 산백합회라는 단체도 나오는 바람에 새로운 이름을 만들 수도 없었겠죠.”

 

 

당시에 한국도 일본도 자주 논란이 되었던게 과연 마리미떼는 백합인가 아닌가?라는 주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성애를 뺀 것이 백합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당당하게 나왔다는 사실이 재밌기도 하네요ㅋㅋㅋㅋㅋㅋㅋ

 

 

판단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장르를 정의한다면서 작품명 열 개를 대지도 못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자격 조건을 요구한 저에게 장르 감독관이니 뭐니 하면서 비꼬면서 정작 주장에 대한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작품명 하나 못 대면서 세상을 향해 백합은 여성 간의 우정과 연대다라고 뜬금없이 선언하면 절로 거기에 무게가 실립니까? 그것 참 비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자의식이네요. 이왕 저를 장르 시험 감독관으로 임명해 주셨으니 채점까지 꼼꼼하게 해드리죠. 일본 백합에 대해 언급하면서 코믹스 유리히메작품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그 답안지는 낙제점입니다. 일본에서 애니메이션까지 만들어졌으며 3년간 유리내비(일본의 백합물 소개 사이트) 코믹스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작품인 이윽고 네가 된다를 포괄하지도 못하는 정의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야가키미는 아마존재팬에서도 연애물로 소개되고 사랑을 모르던 소녀가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줄거리 요약이 적혀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장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는 발언권을 억지로라도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발언자가 남자라면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저는 위의 논쟁(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지만)을 하면서 레베카 솔닛이 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을 썼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저는 백합 장르만 15년 넘게 파왔고 창작도 그만큼 해왔으며 당사자성을 지닌 여성애자 여성이기도 합니다. 무슨 자신감으로 함부로 저한테 장르의 정의를 가르치려 드십니까. 그야말로 맨스플레인이 따로 없더군요.

 

 

물론 아까도 언급했듯이 꼭 남자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대략 2019년 연초부터 백합은 순결을 의미하는 단어라 빻았으니 대신 GL을 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무수히 싸워 왔는데요. 통칭 백쓰마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고장 난 녹음기처럼 떠들어대는 백합 쓰지 마세요를 줄여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성애자) 여성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입만 열면 헛소리를 끊임없이 내뱉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발언 두 개만 골라서 인용하겠습니다.

 

 

근데 감성비엘에서 정말정말 좋은 여성을 잡아서 만나면서도 그 여성에 비해 한참 모자란 남자를 못놓아서 구질거리는 남캐 백번은 본거 같은데 백합에서는 그런 식으로 백마탄 왕자님 상을 절대 등장시키지 않음. 보통 전남친은 다 쓰레기들이거나 찌질하고 노답이라 갖고놀기 쉬운 얘들임. 지들도 본능적으로 아나봐 진짜로 소위 백마탄 남자 만난 여자가 있다면 레즈 되기는 커녕 결혼해서 영원히 사회로 안돌아온다는거.”

 

 

저는 결국 그려낸듯한 훌륭한 남자가 존재한다면 그 자리를 여성은 채워줄수 없다는 즉 레즈던 여캐러던 레즈연애를 완전한 사랑으로 봐주지 못하는 시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래서 백합에 남캐가 섞이면 알레르기 반응 심하게 보이는거임 진짜로 위협적인 방해라고 생각하니까.

 

 

백합러 대부분은 남자나 남캐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음 백합에 나오는 민폐남캐를 싫어하는거지.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향에 나오는 남캐들은 소위 이케멘처럼 만들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빈틈이랄게 없음...이런 남캐를 옆에 붙여놔도 정말 백합에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미워할지는 의문임.”

 

 

백합을 파는 사람들은 멋진 남자가 없으니 남자의 대체재로 여자를 선택한다는 것인데 정말 모욕적인 발언입니다. 백합 장르의 대전제인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를 이렇게까지 전면에서 부정하기도 힘든 일이죠. 이것은 바이 여성들이 받는 혐오와도 연결되는 구석이 있더군요. 바이 여성들이 흔히 듣는 말이 있죠. “어차피 남자랑 결혼할 건데.” 그런데 정작 백합 작품에서 남자를 묘사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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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과 카세 씨)

  

 

백합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아무리 잘생기고 좋은 남자가 있어도 그 남자를 차버리고 여자를 선택합니다. ‘신무월의 무녀에서도 히메코가 선택한 건 소마가 아니라 자기를 강간한 치카네였어요. 야가키미의 사에키 사야카는 여학교에서 남녀 공학으로 진학했지만 여전히 여자를 좋아하죠. 남자라는 선택지가 있건 말건 여자를 선택한 겁니다. 백합 장르의 등장인물은 남자의 대체재로 여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좋아서 선택하는 겁니다. 애초에 그게 장르 문법이니까요. 이쯤 되면 누가 과연 남자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지 알 만합니다.

 

 

이렇듯 백합 장르에서 어떻게든 여성 간의 성애/로맨스를 걷어내고 연대로 희석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직시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난번 텍스트릿 논쟁에서 이브나님이 말씀하셨듯이, 여성의 몸은 언제나 전쟁터였고 퀴어 여성이라면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이성애 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두 여성의 사랑은 언제나 지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틈만 나면 백합 장르의 주류는 두 여자의 로맨스 / 성애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굳이 작중에서 선언하지 않아도 로맨스가 중심인 백합 작품의 주연은 여성애자 여성으로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있는 법입니다. 제가 지난 텍스트릿 논쟁에서 사에키 사야카는 레즈비언이다라는 선언으로 서두를 열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4. 글을 맺으며 장르의 정의, 그리고 남성향의 과대대표 문제에 관하여

 

 

장르의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죠. 그래서 장르의 정의를 둘러싸고는 언제나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백합만 그런 게 아니라 로맨스판타지나 BL등 다른 여성향 장르도 그런 논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한 분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오해를 풀고 잘 해결되었는데 제가 전에 올린 분석에서 로맨스가 없다면 가짜 백합이다라고 언급했다고 하시더군요. 협의의 분석에 우선권을 준다는 이야기가 오해를 부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들더군요. 사실 협의의 백합조차도 전부 여성 간의 로맨스는 아닙니다. 유루유리 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코믹스 유리히메 레이블인데 여고생 일상물에다가 백합 코드만 살짝 첨가한 정도이지 로맨스는 아니거든요.

 

 

우선권은 장르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다면 최소한 이것만큼은 들어가야 한다의 우선권입니다. 일본 백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면 코믹스 유리히메에서 나온 작품들은 무조건 들어가야죠. 15년간 발매된 백합 전문 잡지인데 그걸 빼놓고서 어떻게 논의를 전개합니까. 하다못해 인기작 위주로라도 보고 나서 말을 얹어야죠. 한국 백합도 마찬가지고요. 리디북스 기준으로 백합 /GL 카테고리에 분류된 웹소설이 최소한 200개인데 마찬가지로 인기작 위주로라도 봐야 합니다. 아까 언급한 백쓰마들의 태반은 백합 상업작을 단 열 개도 대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어떻게 장르를 정의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도 이것만큼은 들어가야 한다이것만 들어가도 된다가 아닙니다.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도 백합 레이블을 달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백합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작품이죠. 또한 2000년대는 ‘2차 창작으로서의 백합의 전성기이기도 했습니다. 마리미테의 전성기와 2차 창작으로서의 백합의 전성기는 대부분 겹칩니다. 제가 꾸준히 언급하는 마이히메도 이 시절의 작품인데 원작 자체만으로 따지면 협의의 백합 작품은 아닙니다. 원작 자체는 남성향인 미소녀 이능 배틀물인 데다가 후지노 시즈루는 엄연히 조연입니다. 다만 후지노 시즈루는 20화 이후로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면서 나츠키에 대한 광기어린 사랑을 과시하는데 여기에 여성 동인들이 대거 달려들면서 일본 백합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지금도 백합 고전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게시글에는 마이히메가 꼭 들어갑니다. 동인 중 한 분인 난자키 이쿠 씨는 2019년에도 여전히 시즈나츠 동인지를 내고 계시더군요. 참 대단한 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2차 창작으로서의 백합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죠. 동방프로젝트(이하 동방)입니다. 사실 동방은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서 일본 동인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방도 원작은 아예 협의의 백합과는 상관도 없는 슈팅게임입니다.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백합으로 엮는 케이스가 많았고, 머지않아 일본 백합의 역사에서 필수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일본 백합 계보를 이야기한다면 동방은 따로 빼놓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장르예요. 일본에서는 동방 동인 출신의 백합 코믹스 작가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당장 이윽고 네가 된다의 나카타니 니오 작가님만 하더라도 동방 동인 출신이었죠. 한국에서는 2007~2008년 즈음에 동방의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 그 당시에 백합러는 동방을 알기 전과 알게 된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유리히메 편집장도 최대한 넓은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분이야 잡지를 대중에게 판매해야 하니 기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장르의 정의는 기본적으로 창작자와 향유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겁니다. 지나치게 넓게 잡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좁게 잡을 필요도 없어요. 이를테면 감정선이 섬세하면 성별 상관없이 무조건 백합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백합의 범위를 넓게 잡은 것입니다. 2차 창작으로 엮든, 오리지널 상업작이든 간에 백합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최소한 두 여성의 깊은 관계가 나와야죠. 그 관계는 로맨스일 확률이 대부분이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텀인 두 남성이 나오는 BL을 호모백합이라는 식으로 언급하면 대부분의 백합러는 치를 떨며 비분강개합니다. BL과 백합은 엄연히 다른 장르인데 그런 식으로 백합을 BL의 하위 장르로 취급하면 안 되는 것이죠. 소프트 BL이라고 쓰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협의의 백합만을 백합이라고 주장하면 마리미테와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그 많은 작품들, 로맨스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작품들을(이를테면 일상계 백합) 한꺼번에 놓치게 되는 것이죠. 마이히메, 나노하, 동방프로젝트,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물론 호무라는 반역의 이야기에서 마도카를 사랑한다고 했으므로 애매합니다만) 겨울왕국 등등도 이런 정의에서는 다 빠집니다. 이 모든 케이스를 전부 포괄하려면 장르의 정의는 느슨하게 잡아둘 수밖에 없어요. 결국 장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저는 장르의 정의를 느슨하게 잡아두는 것과는 별개로 백합 장르의 주류와 핵심 욕망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소위 남성향의 과대대표 문제 때문인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백합 장르의 주류, 내지는 향유자들의 핵심 욕망은 두 여자의 로맨스가 맞습니다. 사실 백합 향유자들이 여성 간 로맨스(성애) 작품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유루유리처럼 라이트한 이야기를 경(가벼울 경, )백합, 또렷하게 연애 관계를 그리는 작품을 진(참 진, )백합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일상계(유루계) 백합과 가치(ガチ)백합이라고 하죠. 가치(ガチ)라는 말은 일본의 스모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진짜, 혹은 선을 넘는다는 뜻입니다. 한국어의 보다 조금 더 강렬한 뉘앙스라고 보시면 돼요. 한국에서는 착즙 백합과 찐 백합입니다. 여자 둘이서 진한 성애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면 한국의 백합러들은 하나같이 이건 찐이다!’라고 외칩니다. , 동북아시아 3개국에서는 두 여성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을 진짜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가 아닌 백합 작품이 가짜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지만요. 다만 여성 간의 로맨스와 성애가 백합 향유자들의 핵심적인 욕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번 구체적인 자료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백합 작품 소개 사이트인 유리내비(yurinavi.com)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백합 만화 총선거를 열고 있는데요. 쉽게 말해 인기투표입니다. 작년(2019)에 열린 제 3회 총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1위부터 10위까지가 전부 두 여자가 확실하게 사귀고 연애를 하는 로맨스 만화였습니다. 한국어로 표기한 것은 정식 발매가 된 작품이고 원어 그대로 표기한 것은 정식 발매가 되지 않은 작품입니다.

 

 

1: 이윽고 네가 된다

2: 시트러스

3: 熱帯魚がれる

4: ささやくように

5:나의 백합은 일입니다!

6: 꽃에게 폭풍

7: 저 아이에게 키스와 하얀 백합꽃을

8:とどのつまりの有頂天

9: 나팔꽃과 카세 씨

10: 行進子犬恋文

 

 

원문

http://yurinavi.com/2019/08/14/daisankai-yurimanga-sousenkyo-01_10/

 

 

11위부터 20위까지 살펴보면 유루유리 같은 일상계가 섞이기 시작하죠. 그 외에도 한쪽만이 사랑하는 케이스거나, 작품 자체는 일상계이지만 로맨스 요소가 들어가서 조금 애매한 케이스도 있습니다.

 

 

11: ってあげてもいいかな (로맨스. 둘이 사귀는 장면부터 시작함)

12: 스쿨 존 (일상계)

13: still sick (정발 작품. 로맨스)

14オトメの帝国 (우정 이상 사랑 미만. 비로맨스)

15: ふたりべや (일상계인데 조금 애매. 로맨스 요소가 있음)

16: 설령 닿지 않을 실이라 해도(짝사랑. 서브커플은 사귀고 있음)

17: 将来的んでくれ (애매한 케이스)

18: 徒然日和 (일상계는 맞는데 로맨스 요소가 있음)

19: 새내기 자매와 두 사람의 식탁(일상계. 비로맨스)

20: 유루유리 (일상계, 비로맨스)

 

 

21위부터 30위까지는 다시 로맨스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21: 不揃いの連理 (로맨스)

22: 투룸, G, 알람시계 (로맨스)

23: きみがぬまでをしたい(비로맨스, 애매)

24: ルミナスブルー (로맨스)

25: 오빠의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비로맨스)

26: 定時にあがれたら (로맨스)

27: できそこないの姫君たち(비로맨스, 애매)

28: 푸른 꽃 (로맨스)

29: 天使りた!(비로맨스)

30: 羽山先生寺野先生っている(로맨스)

 

 

사실 이것도 로맨스의 기준을 매우 빡빡하게 잡은 겁니다. 작중에 둘이 확실하게 사귄다는 언급이 나오거나, 소개문이나 제목에 사랑이 들어가는 경우에 한해서만 포함시켰거든요. 이렇게 보수적인 기준으로 잡아도 전체 30개의 작품 중 17개가 확고한 로맨스입니다. 짝사랑이나 로맨스 요소가 있는 작품까지 포함한다면 더 늘어나겠죠. 제가 애매하다고 한 작품 중에서는 결말에서 고백하고 사귀는 작품도 있습니다. 로맨스의 범위를 더 넓게 잡는다면 30개 중에서 20개는 거뜬히 넘어갈 것입니다. , 아직까지도 일본 백합물의 주류는 두 여자의 로맨스 / 성애가 맞습니다.

 

 

그나마 이건 일본의 경우고 한국 웹툰이나 웹소설의 경우는 로맨스 아닌 작품을 세는 게 더 빠를 지경입니다. 이왕 유리내비 총선거를 언급한 김에 한국의 플랫폼도 같이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레진코믹스나 저스툰의 GL/백합 카테고리에 분류된 웹툰 작품들 중에서 확고한 로맨스인 작품의 개수를 세어보려고 하다가 도중에 그만뒀습니다. 굳이 개수를 세는 의미가 없을 지경이거든요. 한국에서 GL/백합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작품은 십중팔구 여성 간 로맨스 작품입니다. 봄툰, 피너툰, 레진코믹스, 저스툰, 어느 플랫폼을 가든 백합 웹툰은 전반적으로 로맨스가 압도적인 강세를 보입니다. 기껏해야 로맨스가 주요 소재냐, 부소재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웹소설도 마찬가지 경향을 보입니다. GL 웹소설은 알라딘의 경우 아예 로맨스의 하위 카테고리입니다. 로맨스 > GL로 분류되어 있어요. 리디북스의 경우는 GL/백합 웹소설을 찾으려면 로맨스카테고리에서 키워드 검색을 들어가야 합니다.

 

 

ridibooks.png

 

  

 

이러한 경향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일상계 백합이라는 장르의 소분류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물론 그런 감성의 작품이야 찾아보면 꽤 있습니다. 보글보글 챱챱이나 레진코믹스의 여자친구 같은 작품을 예시로 들 수 있죠. 다만 백합 향유자들이 이걸 백합으로 부르고 소비하는가 하면 그건 흔한 경우는 아니거든요. 물론 백합러들이야 돌에서 물을 착즙하는 사람들이니 여자들이 잔뜩 나온 작품이라면 어떻게든 백합으로 소비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처럼 일상계 백합이라는 하나의 작품군이 형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일상계 백합 작품을 유리내비 같은 백합물 소개 사이트에 꼬박꼬박 넣지만, 한국 플랫폼에서는 유루유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GL 카테고리에 분류하지 않습니다. ‘새내기 자매와 두 사람의 식탁도 리디북스에서 GL로 분류되지는 않더라고요. ‘오빠의 아내와 살고 있습니다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이 두 작품의 경우는 한국 백합 향유자들 사이에서도 백합 작품으로 소개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한국 플랫폼에서도 일본처럼 점차 정의가 확장될 수도 있겠지요. 결국 향유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한 것이고 플랫폼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마련이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비교적 남성향인) 일상계 백합 작품이 백합 장르의 대표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유루유리 같은 일상계 작품은 백합 장르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에요. 애초에 일상계 작품이 백합 장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리 일찍 잡아도 2000년대 중후반입니다. 케이온이나 러키스타가 그 즈음에 히트를 친 작품이니까요. , 이쪽은 후발 주자인 데다가 기존 백합물의 소녀만화/소녀소설 계보와도 상당히 거리가 있어요. 그 계보를 따르는 정통 백합물은 아직까지도 꾸준히 나오고 그중 상당수가 인기작 반열에 듭니다. 굳이 백합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을 골라야 한다면 이쪽에서 골라야죠. 이쪽이 더 역사가 오래됐고 장르의 핵심 욕망인 여성 간의 로맨스/성애를 그리고 있으며 장르의 당사자인 (여성애자) 여성들이 주로 읽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계보를 싹 무시하고 백합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데 아즈망가 대왕같은 작품만 인용하면 당신은 이 장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15년 전부터 계속해서 대중을 상대로 백합 작품을 판매한 백합 전문 잡지 코믹스 유리히메는 언급조차 없더군요. 본인이 모른다고 해서 여자들이 그간 만들어온 계보가 없어집니까. 이런 행태를 한두 번 보는 것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이가 갈립니다. 90년대 한국 순정만화도 이런 식으로 지워지더군요. 의도적인 누락 또한 억압의 한 형태입니다. 어디를 가든 남자들은 과대 대표되고 본인들이 보는 작품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합니다. 자기들이 주로 보는 일상계 작품이 곧 백합 장르의 중심이라는 그 자기중심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물론 모를 수는 있는데 그 장르의 향유자들이 아니라고 지적하면 듣기라도 해야죠. 기껏 지적해줘도 듣지도 않고 여자들이 그간 써내려온 계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우면서 자기가 멋대로 내린 정의만 끝까지 고집하는 작태만은 못 봐주겠더라고요. 작품을 보고서 장르의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니라 혼자서 뜬금없이 선언한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엄연히 존재하는 비주얼 노벨 백합 작품을 백합 장르에서 제외하는데, 그야말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따로 없습니다. 본인들이 세상의 보편이라는 그 오만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들의 헛소리에 더 가차 없이 굴게 되더군요.

 

 

그러므로 저는 이 글 전체를 근거로 다시 한 번 선언하고자 합니다. 백합의 주류는 여성 간 로맨스(성애)가 맞으며, 이 장르의 핵심적인 욕망은 여성애자 여성의 욕망입니다. 장르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장르였습니다. 근거 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작품명도 못 대는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대는데 이 사람들한테서 발언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늘 말하지만 장르의 당사자인 여성애자 여성분들이 더 많은 기록을 남겨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서찬휘 평론가와 나눈 논쟁을 일부러 통째로 인용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걸 읽으면서 내가 써도 저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분명 계실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기억이 생생할 때 부디 기록으로 남겨 주세요. 한 사람의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교차검증은 꼭 필요하거든요. 저만 하더라도 백합 장르의 확장을 정확히 반대로 알고 있다가(여성 간 깊은 우애에서 성애로 확장되었다고) 다른 분들의 증언과 자료로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몇몇 분들은 좀 의아하다 싶은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아이돌(소녀시대) 팬픽이나 아이마스나 러브라이브 등 아이돌 백합물의 2차 창작에 대한 언급이 제 글에는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서요. 한국 백합 계보에서 이 분야는 정말 중요한데 문제는 저는 거기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아이돌물은 애초에 취향이 아니라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이 제가 놓친 부분을 대신 채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형식이든 좋으니 기록으로 남겨 주세요. 그런 기록 하나하나가 모여서 계보로 남는 것입니다.

 

 

참고 자료

 

 

조선의 퀴어 5: 경계를 위협하는 여성들의 욕망

 

 

장르 백합에 대한 정의와 장르감독관, 그리고 레즈()에 대해 :

http://posty.pe/1wg0al 서찬휘 평론가에게 이브나님이 하신 장문의 반박입니다. 물론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장르 백합과 동북아의 여성애자 여성들에 대하여 : https://evelovestory.tistory.com/6

 

 

중국인 미스터리 작가와의 인터뷰(경백합과 진백합이라는 용어는 여기서 발췌했습니다) :

百合ミステリ小説いときかつそのときに刊行記念中国人作家陸秋槎中国百合事情いてみた

원문 : http://yurinavi.com/2019/10/24/riku-syusa-interview/

번역 http://maidsuki.egloos.com/444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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