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평

청아비 2019.06.22 12:16 조회 수 : 84

SF출판사 아작에서 한국SF작가선 시리즈로 나온 단편집입니다만, 사실 SF는 하나밖에 없고 다 판타지/호러입니다. 하지만 그게 결점은 아니죠. 책을 보고 난 다음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먼저 튀어나오는 저고, 이 작품집 역시 사소한 불평거리가 있긴 하지만....... 전 판타지도 호러도 판타지 호러도 다 좋아하고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윽 이건 아닌데' 같은 게 없었습니다.

 

단편집이지만 단편 전체에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어서 하나의 책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한 작가가 썼지만 비슷한 정서를 다른 주제와 방식으로 써내려풀어내려갔고, 그래서 단편들을 읽으면서 계속 색달랐습니다. 같은 이야기,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으니까요.

 

본 작품은 복수를 소재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뒷표지 소개글처럼 "세상 몹쓸 것들을 제대로 응징하는, 어여쁜 저주 이야기!" 는 아닙니다. 작가도 왜 그렇게 소개했는지 모르겠다고 후기에서 난색을 표하고 있죠. 통쾌한 복수극이 되려면 적이 명확해야하고, 악행이 명확해야 하고, 복수의 방식이 처절하고 장렬하며 끝난 다음에 후련하고 피해자들끼리 모여서 웃으면서 파티라도 벌여야 하는데 이 책이 복수를 다루는 방식은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 작품의 주된 정서는 쓸쓸함입니다. 제가 알아낸 건 아니고....... 사실 작가 후기에서 작가 본인이 첫문장부터 언급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이야기고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그런 감정을 느꼈으니, 쓸쓸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불타는 감정에 화끈하게 터트리는 파괴행위만이 복수는 아닙니다. 냉혹하게 수십 년을 기다렸다가 상대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그가 차지했던 것들을 모조리 가져간 뒤 안 보이는 곳에서 작게 미소짓는 것만이 복수도 아니죠. 아픔에 눈물을 훔치며, 애통해하며 저질러버리고 난 다음에 후회하고 마는, 혹은 파괴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복수. 이 작품의 복수는 그런 것입니다.

 

본 작품의 주역들은 선하지 않습니다. 정당하지 않죠. 심지어는 당사자가 아니거나 복수자조차 아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심을 품고 복수합니다. 자신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상대가 용서해선 안 될 악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서럽기 때문에, 억울하기 때문에 복수합니다. 그러니 복수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쓸쓸하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는 무섭습니다. 약자가 약자로서 약자인 상태로 남으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죠. 그렇다고 복수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렇게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여겨 볼 점은 부모-자식에 의한 구도가 꾸준히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매 작품마다 다르죠. 부모의 죄를 뒤집어쓴 죄없는 자식, 부모에 의해 고통받는 자식,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자식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등등등.... 정말 다양한 구도로 존재해요. 부부관계나 형제관계도 나옵니다. 말하자면 모든 작품이 혈족 내지 가족에 대한 것을 소재로 삼고 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두가 비극적이고 긍정적인 요소로 쓰이는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묘사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면, 사람이 첫째로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 부모 등 가족이며, 유독 깊은 원한이고 이 작품의 복수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것보다 나은 구도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족이 상처입은 자신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괴롭게 만드는 원인이니 그를 향해서 원망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것은 기술적인 해석이고 사실은 결과론입니다. 해답은 노골적이고 단순할지도 모르죠. 작품 내의 부모관계에서, 혹은 등장인물에게서 보여지는 공통된 감정. "대체 나를 왜 낳아서 이런 괴로운 세상에 떨어트렸나요?" 라고 하는 것...... 그리고 '어머니'라던가 '자식'과 떼어놓고 여성을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원망, 혹은 그러한 비판...... 작품에 나오는 판타지 요소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다 현실에 대한 은유니까요.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기이하게도 호러 영화의 소재로 자주 출현하는 토끼를 진짜로 무섭게 만드는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최고로 장렬한 복수를 했지만 통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복수자 역시 끔찍한 저주에 걸리고 말았거든요. 자신도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 복수의 결말은 씁쓸합니다.

 

[머리]는 보통이라면 공포의 대상이어야 할 괴물, 가해자여야 할 괴물이 기이하게도 복수자로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 때문에 괴물은 혐오스럽고 역겨운 모습일지언정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대상과 같이 여겨집니다. 결말에서 괴물이 토해내는 원망은 괴물이 인간에게 토해내는 분노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토하는 분노라고 생각하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자식은 흉측한 괴물이며 실제 자식은 다른 곳에 있죠. 역시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가운 손가락]은 섬뜩한 작품입니다. 제대로 설명되는 것이 없고, 주인공이 죄를 지은 건지 아니면 그저 광인에게 붙들렸을 뿐인지도 명확하지가 않죠.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호러는 별로 취향이 아니네요. 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보단 그저 끔찍한 진실이 있는 게 저에겐 더 나아요.

 

[몸하다]는 여성의 생리부터 시작해서 출산과 가정에 대한 고민까지 담아낸 한 편의 부조리극입니다. 다른 작품들에선 보이지 않는 개그호러죠.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당연한 것인 것마냥 뻔뻔스럽게 밀어붙여서 주인공은 그저 당혹해할 뿐이고 겉으로 보기엔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호러죠.

 

[안녕, 내 사랑]은 주인공이 구형 로봇인 연인을 그리워하며, 연인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애틋한 로맨스 같게 느껴지지만....... 결말부분에서 로봇이 말하는 걸 보면 그저 일방적인 사랑으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을 뿐이죠. 

 

[덫]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끔찍한 변주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했던 남자는 그 가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결국 자식들을 말 그대로 쥐어짜죠. 유지하고 싶었던 건 가정이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 결말은 당연히 하나밖에 없습니다.

 

[흉터]는 솔직히 재밌게 못 읽었습니다. 다른 주제와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건 좋은데 전 라이트 노벨이나 소년만화를 읽던 뇌다보니 싸움이나 이능력 같은 게 소재로 들어가면 굉장히 꼬장꼬장해지는데, 이 작품이 딱 그러한 작품이라서....... 보스와의 결전은 좀 더 비장해야 하거든요? 이능력이 개연성이 없거든요? 필살기는 좀 더 임팩트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뇌가 신호를 준단 말이죠. 딱히 그런 걸 쓰려고 했던 작품이 아닌데도 말이죠.

 

[즐거운 나의 집]은 남편과 세상에게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일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자식'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호러였기 때문에 이러한 소재를 쓴 것이지 '고양이'나 '덕질 대상'이어도 별 차이가 없을 니다. 완벽히 현실에 대한 은유고 그 때문에 재밌다기보단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도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자가 없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몸하다], 남편이 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면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남자와 연애하려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차이점이 있다면 앞의 두 이야기와는 달리 호러가 아니라는 것. 가장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은유를 빼면 사랑하는 남자가 힘들다고 해서 헌신했지만 사실 그 남자는 나쁜 놈이라서 이용만 당한 것이었으며, 그래도 세상에 좋은 남자가 있긴 할 테니 열심히 살겠다는 그러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쉬운 점은 결말일까요.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문제가 해결되었고 결말도 진취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제 편견일지도, 어쨌든 단편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엔 한계가 있죠.

 

[재회]는 가장 서정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읽고 난 다음 뭔가 인상적인 게 없었습니다. 가장 별로인 이야기였던 것 같네요.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엔 익숙치 않아서요.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후 읽을 붉은 칼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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