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의 생각 평

청아비 2019.06.24 10:06 조회 수 : 50

한 장르에서 가장 잘 쓰고 재밌는 작품은 누가 읽어도 재밌습니다. 호러, 스릴러, 로맨스, 액션. 심지어는 포르노조차 '이게 명작이다!'하는 것이 있으면 정말 누가 읽어도 재밌습니다. 출간 소설뿐만 아니라 웹소설, 그 사이에 있는 라이트 노벨, 소설에 한정하지 않고, 논픽션, 연극,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 작품의 완성도에서 오는 재미가 작품의 장르, 취향의 영역에서 오는 재미와 구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장르 취향의 불호도 구분되긴 합니다만.)

 

즉 업계에서 가장 재밌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그 장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죠. 어차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밌어할 작품이니까요. 진짜로 그 장르를 좋아한다면 다소 완성도가 낮고, 잘 안 팔리고, 인지도도 적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 장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론이 뭐냐면, 튜링의 생각이라고 하는 이 단편집은 SF라고 하는 장르에서 평범한 수준, 좀 세게 말하면 그저그런 정도의 책이라는 거죠. 시간이 좀 지나면 회자되지 않을 그런 책이요. 한 책으로 엮인 단편들에는 연결되는 주제나 테마가 없습니다. 작가도 다 다르죠. SF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따져보면 어떤 작품은 드라마고, 어떤 작품은 호러고, 어떤 작품은 액션이고 해서 다 구분되고, 각각의 단편들 중 참신한데? 굉장한데? 색다른 생각인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솔직히 말해서 없었습니다. 제가 SF에서 가장 기대하는 게 그런 건데 말이에요. 어디선가 다 본 내용...... 좀 실망했지만...... 이럴 때도 있는 거죠. 애초에 검증된 작품을 산 것도 아니고 해도연 작가의 단편이 있다고 해서 사봤을 뿐이니까요. 

 

단편 하나하나에 대한 평입니다.

 

[튜링의 생각]은 표제작이기도 하고, 서문의 소개글에 '놀라서 멍해질 정도로 멋진 반전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해서 굉장히 기대했습니다만....... 그 놀라운 반전이라는 게 제목만 보고 유추한 그것과 똑같더라고요. 반전이 나오고 멍하긴 했습니다. 이게 다인가 싶어서요. 이 반전은 너무나도 평범합니다! 이걸 반전이라고 쓰면 안 되죠. 하나도 새롭지가 않잖아요. 이런 소재를 사용했으면 거기서 그칠 게 아니라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으면 좋았을 텐데 뻔한 얘기에 뻔한 반전. 책에 대한 기대치가 확 낮아졌죠.

 

[그 미소에는 도파민이 없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알겠는데 몰입감이 적네요. [튜링의 생각]도 그렇고 [그 미소에는~]도 그렇고 2020년도에 로봇을 소재로 쓰면 아이작 아시모프 시절에서 좀 더 나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고전적이다못해 후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꿈의 지팡이]는 어라, 문체가 유독 다릅니다? 마치 네이버에서 연재되는 웹소설 같아요. 작가 경력을 보니 실제로도 그런 쪽이군요. 개인적으론 마음에 안 드는 문체긴 하지만 이것은 비판의 대상은 될 수가 없으니 넘어가면, 사실 읽은 작품들 중 가장 재미가 없었습니다. 문체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좀 싸구려 신파극 같습니다. 거기에 무슨 대학생들을 초등학생으로 보는 것 같은 너무나도 가볍고 정보 전달에 급급한 묘사에...... 가장 짜증나는 건 이 작품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SF라면 마땅히 발전된 기술에 대한 상상, 혹은 고민이 있고 그걸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이 작품은 기술에 대한 시각이 너무나도 편협하며, 주역들이 과학자면서도 딱히 과학자처럼, 하다못해 과학윤리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 기술을 사용한 비도덕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하는 건 좋다 이거예요. 근데 그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게 둘째를 낳고 바로 죽여서 장기를 꺼내는 거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미 있는 애를 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애를 낳고 죽이는 건데요? 그냥 이미 있는 애는 곱게 보내주고 새 애를 낳던가, 아니면 자기 애를 살리기 위해서 남의 아이, 혹은 죄없는 동물을 죽이던가, 자기 애를 살리기 위해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선택지를 고르던가, 직업적 성취를 포기하던가....... 뭐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주인공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딱히 SF가 아니더라도, 첫째를 살리기 위해서 둘째를 낳고 바로 죽인다 같은 선택지를 고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 중 아무도 없을 거라고요. 심지어 그렇게 해서 살리려는 애는 신생아잖아요? 한 5~6살 되는 애랑은 달리 대화를 하고, 교감을 나눠서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추억을 쌓은 애가 아니잖아요? 물론 부모와 자식의 추억이나 교감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식으로 정량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게 두 번째 자식을 '만들어서' 과감하게 죽이는 선택을 고를 정도인가? 전 절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정쩡한 해피엔딩. 기술에 대한 상상이나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악마화를 하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선택을 강요하는 냉혹한 의사 클리셰 같은 거요.

 

그리고 크게 논하고 싶진 않지만 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보면 주인공의 선택 뿐만 아니라 행보 역시 꽤 비판거리가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보이저 아노말리]는 보이저와 골든 레코드를 소재로 한 SF 호러고 딱히 나쁘지도 아주 좋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가장 나은 것 같았습니다.

 

[소녀, 동반자 그리고 노란 눈동자]는 사실 이것도 서문에 놀라운 반전이 있다고 해서 조금도 기대를 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라 실망해버렸습니다. 한 번 태어나는 사람들에 수록된 개와는 같이 살 수 없다와 비슷한 구도를 지닌 이야기인데 그쪽이 훨씬 낫네요.

 

[시간의 모자이크]는 꽤 감성적인 이야기고 영생과 불멸에 대해서 괜찮게 풀어나가고 있지만 이거 SF가 아니잖아요;; 과학은 어디로 간 거야? 시간을 소재로 쓸 거면 물리학, 영생을 소재로 쓸 거면 생물학, 의학 등 할 게 많은데 이게 과학 스토리 단편선에 수록된 이유가 뭐죠.

 

[우리가 살아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SF라고 부르기엔 좀....... 오히려 백합물(여성동성애를 다룬 장르)이라고 봐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이야기 자체는 괜찮았지만 해결 방식은 판타지고 기대했던 것은 나쁜 의미로 아니었습니다.

 

[다이버]는 SF액션인데 취향에 맞아서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성은 없지만 액션 장르는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죠.

 

 

전반적으로 따지면 별로인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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