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평

청아비 2019.09.03 10:51 조회 수 : 74

엽편, 단편, 중편이 전부 있는 작품집입니다. 수록된 글의 장르와 소재 역시 다양합니다. 하지만 길이나 장르에 관계없이 전부 장강명 작가가 어떤 글을 쓰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아마도 작가가 기자 출신이기 때문일까요? 글에 나타나는 작가의 의도와 목적성이 명료합니다. 스토리, 주제, 해석, 인물 등등. 작가가 원하는 만큼 복잡하고 작가가 원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이색적인 소재를 써서 독자를 당황시키는 지점도 없이 글 전체가 굉장히 편하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허나, 아쉬운 점도 있어요. 책에 나온 글들을 다 읽고 난 직후엔 재밌다. 잘 썼다. 좋은 작가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읽은 다음 한 달이 지나니 지나니 이 작가가 그래서 어떤 작가였지? 어떠한 글들이 있었지? 하고 생각해보니 여운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의도한 만큼의 충격. 의도한 만큼의 감동. 그렇다고 나쁜 글이었나, 아니면 진부하고 평범한 글이었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실망한 부분조차도 작가가 의도한 폭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할 말이 별로 없군요.

 

[정시에 복용하십시오]는, 소재 하나, 이야기 하나로 이루어진 엽편입니다. 공연히 연인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연인을 잃어버린 남자에 대한 이야기지만 따지고 보면 여자 입장에선 세뇌에서 풀려난 거니 좋은 결말이네요!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저에게는 다소 생소한 역사 SF 장르였습니다. '과거에 이러이러한 기술이 있었다면' 하는 장르죠. 왠지 있을 법한 기술에 현실감 있는 전개. 해석. 그리고 건조한 문체. 작품의 줄거리를 읽고 독자가 생각할 만한 여지를 작품 내에서 전부 다 말해버리는 작품입니다.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넘기는 게 아니라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 자체가 결말이죠.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은 엽편이면서 표제작입니다. 가장 재밌는 작품, 가장 잘 쓴 작품, 가장 독특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을 대표하는 작품이기에 표제작입니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는 한 편의 쇼입니다. 한 편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네요. 무려 세 개의 쇼가 겹쳐진 활극이니까요. 언급만 되는 극중극. 그러한 극중극에서 부모를 구하려고 하는 자식. 그리고 그런 극을 내려다보는 자본주의자들의 만담. 이러한 모든 것은 작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죠.

 

[센서스 코무니스]는 어라? SF 사소설이네요?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 본인입니다. 그 외에는 정석적인 단편이지만 그런 독특한 점이 인상에 남네요. 새로운 거면 뭐든 고평가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아스타틴]은 선택받은 후계자들이 하나의 왕좌를 두고 서로 살육을 벌이고 패싸움을 하는 판타지-배틀 장르를 SF로 컨버젼한 블록버스터입니다. 한국이 상황만 됐다면 이 작품은 장편 소설로 나오고 영화화가 됐을 겁니다. 제 취향에도 맞아서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전개 자체는 평범하고 의외성조차도 상상의 범위 내에 있지만 액션 장르에 그게 중요한가요?

 

[여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엽편입니다. 그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작가가 작품 후기에 다 썼는 걸요.

 

[알골]은 소재 하나를 밀어붙인 단편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듯...... 굳이 말하자면 [아스타틴] 처럼 분량을 길게 하고 등장인물을 늘려서 스케일 큰 이야기로 했으면 더 재밌게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이건 빌런, 히어로의 탄생 배경 정도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 같거든요.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는 제목처럼 공무도하가를 소재로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공무도하가를 소재로 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는 단편이었습니다.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좋은 소재 하나로 만들어낸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그냥 뻔한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되겠죠. 왜냐면 장르 내에서 장르 클리셰를 까면 무조건 결말은 클리셰적으로 나거든요. '난 이 작품 스토리가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뻔하게 결말을 낼 것이지만 그러면 진짜 뻔한 이야기가 되니 뭔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게끔 변주를 주겠다!' 라는 작가의 의도가 보이는 대목이죠 그래도 소재에 정석적인 전개를 이어가는 작가의 성향을 이해한 것 같아요. 미디어믹스가 쉽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장편영화 계약이 됐네요? 행복회로를 최대한 돌리면 장편영화가 성공하고 비슷한 SF 로맨틱 코미디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결과적으로 SF 시장이 넓어질 수 있겠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리뷰/비평 게시판입니다 텍스트릿 2018.05.28 93
38 한국 웹소설 장르(판타지 등)를 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file 이브 2019.09.20 200
37 일본의 백합 만화 시장에 대해 이것저것 nanmi 2019.09.20 211
36 저 역시 답변에 대한 반박입니다. yora 2019.09.18 174
35 이윽고 장르 이해도가 망하게 된다 – 답변에 답변 맞습니다 도피오 2019.09.18 276
34 <이윽고 네가 된다> 리뷰에 달린 도피오님과 yora님의 댓글에 대한 답변 키안 2019.09.18 194
33 허공 말뚝이 3권 평 청아비 2019.09.17 59
32 <이윽고 네가 된다> 리뷰 - 백합과 레즈 사이 [2] 키안 2019.09.17 295
31 증명된 사실 평 청아비 2019.09.03 44
»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평 청아비 2019.09.03 74
29 구미베어 살인사건 평 청아비 2019.07.17 102
28 붉은 칼 평 청아비 2019.07.12 120
27 튜링의 생각 평 청아비 2019.06.24 85
26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평 청아비 2019.06.22 313
25 제 3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한 번 태어나는 사람들 평 청아비 2019.05.21 185
24 녹을 먹는 비스코 1권 평 청아비 2019.05.13 183
23 갑각 나비 총평 청아비 2019.05.07 736
22 작은 소용돌이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면-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우리학교, 2019. file 박해울 2019.04.09 195
21 "옆집에는 호랑이가 산다" 리뷰 게으른독서가 2019.03.10 162
20 이차원 용병 - 금호 file 쿠탈리온 2019.03.10 320
19 『냉면』에 실린 5가지 단편에 대한 감상 file 김귤 2019.03.10 10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