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된 사실 평

청아비 2019.09.03 21:48 조회 수 : 44

책 소개문에 따르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SF 작가'인 이산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작품과, 스타일과, 소재 등등에 대해서 아주 고평가를 하는 사람이고, 취향인 부분은 취향이라서 좋아하고 취향이 아닌 부분은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아하는 작가입니다만, 이 책에는 아주 크고 중대한 문제가 있어요. 뭐냐면, 제가 이 작가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을 이미 읽은 상태라는 것이죠. 단편 한두 개에 책 한 권 값을 지불했군요. 사실 사소한 문제입니다. 좋아하는 작가에겐 그 정도는 해도 돼요.

 

이산화 작가는 "이건 안 돼. 너무 급진적이야." 하고 제지하는 소리에 그냥 시동 키고 액셀 끝까지 밟아버립니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청소년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대신 학교를 터트리고요. 연애를 한다면 로봇, 기계, 괴물과 연애합니다. 인간성에 집착하는 대신 육체는 다 뜯어버리고 완벽한 기계의 모습이 되는 걸 진심으로 이상적으로 묘사하죠. 자기 취향에 대해서 타협을 안 합니다. 그래서 '대중적이지 못하다.' 같은 비판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효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털끝만큼도 신경을 안 쓴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좋아해주니까요.

 

그러한 독특한 시도에 대해서 주목하고 싶네요.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는 청소년 소설입니다. 학업 스트레스에 대한 청소년 소설의 일반적인 해결책은 밴드를 구성하는 겁니다. 공부가 아닌 일탈행위면 밴드가 아니라 뭐라도 좋지만요. 현실의 해결책은 그냥 순응해서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OO대생이 비판하는 현 정부' 같은 영상을 올리며 이런 세상 구조에 타협하는 거죠 그렇지만 이 작품은 세 번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문제의 근원을 파괴한다. 학교를 파괴하고 선생과 학생들을 몰살시키는 거죠. 사실 작중 내에서는 이게 두 학생들의 즐거운 일탈행위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은 완성됩니다. 그들의 광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너무나도 명백하니까요. 그냥 남아 있어서 체제에 순응할 수 있는데, 다른 길이 있는데, 여태까지 해온 모든 노력조차 물거품으로 만들고 다 터트린다는 해결책을 선택하는 것.

 

그것과 별개로 이 작품에는 다른 광기가 있는데, 작가의 문제는 아닙니다. 아니, 왜 이 작품의 주인공들 성별이 그렇게 궁금하신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의도적으로 완전히 묘사를 빼버린 거거든요? 그걸 어떠한 형태로든 확정시키면 작품의 의의가 훼손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타자화될 인물들이 아닌 것 같은데요.

 

[증명된 사실]은 표제작입니다. 초자연적인 유령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모조리 긍정하고 과학 이론의 체계 내에 넣어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는 대상이라고 인식시키고는, 그렇게 때문에 공포스러울 수 있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저 앞에는 무서운 괴물이 있어.'를 지나 '저 앞에는 너를 죽일 수 있는 괴물이 있을지도 몰라' 를 넘어 '저 앞에는 괴물이 있고 널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너를 죽이려고 하고 있고 그걸 막을 수도 없어.' 의 영역에 진입한 거죠. 그래서 후기는 사족이었네요.

 

[지옥구더기의 분류학적 위치에 대하여]는 생물학 SF입니다. 보통 무섭게 묘사하는 소재를 그냥 자연스럽게 긍정해버리는 게 작가의 특기인데 그게 드러난 단편이죠. 좋아하는 소재입니다.

 

[햄스터는 천천히 쳇바퀴를 돌린다]는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종류의 SF인데 솔직히 별 감흥 없었습니다. 햄스터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사실 애완동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한 숨 먼지 속]은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의 프리퀄입니다. 본편의 주역들이 왜 이러한 파멸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학업 스트레스와 그 절망을 써내려간 작품인데....... 의의가 있고 잘 쓴 글인 것과는 별개로 이 단편 자체가 사족 아닌가요? 설명함으로써 오히려 본편의 완성도를 해친 것 같습니다. 사연이 묘사되지 않으니까, 그냥 파멸을 긍정해버리니까 좋은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을 굳이 해설할 필요가 있었는지? 무엇보다 이산화 작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시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품보단 작가를 위한 글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무서운 도마뱀]은 역사-생물학 SF입니다. 이종간 연애를 다룬 작품인데 옛날 작품이라서 그런지 인간적인 감성이 많이 남아 있죠. 만약 작중의 내용이 '상상'이 아니라 그냥 그 둘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이었다면 더욱 과격한 접근이 나올 수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이후의 [희박한 환각]처럼 말이죠.

 

[연약한 두 오목면] 역시 이종족과 인간 사이의 교류를 다룬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이었으면 핵심으로 두었을 독특함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기본 설정으로 깔려 있죠. 설정설명만 하다가 해결이 난데없이 되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멋진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는 물에서 먹을거리를 잡아 돌아오는 잠수부]는, 또 다시 이종족이 나왔고, 무서운 도마뱀의 호러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옛날 글이라서 그런가요? 소재 빼고는 와닿는 부분이 없습니다.

 

[카르멘 엘렉트라, 그녀가 내게 키스를]은, 복제인간을 소재로 해선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엽편입니다.

 

[희박한 환각]은 단연코 이 작품집 최고의 단편이고 어쩌면 이산화 작가의 작품 중 최고의 단편일지도 모르는 소설입니다. 이종족과 인간 사이의 교류를 넘어선 연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이종족 연인이 이종족의 레벨 중 최고의 단계에 있습니다. 가장 낮은 위치에는 엘프 드워프 같은 그냥 현실 인간에도 있을 법한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창작해서 이종족으로 불리는 애들이 있고요. 그 다음은 머리에 귀, 엉덩이에 꼬리 같은 코스프레한 인간 느낌의 이종족. 그 다음은 반인반수 및 수인 계열로 의인화한 동물 같은 애들이 있고, 그 다음은 포유류가 아니라 파충류나 연체동물과 융합한 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넘어가면 크툴루, 니알라토텝 같은 사지가 달려있고 머리가 달려서 '일단은' 인간형인 애들이 나오죠. 얘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 것도 있네요. 하지만 이 작품의 이종족은 한발짝 더 나아갔습니다. 그냥 촉수들이 꿈틀대는 벌레무리입니다. 인간의 형상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모방하려는 의지조차 없고 사고방식도 인간을 초월하고 있죠. 그리고 이런 괴생물을 상대로 호러가 아니라 순애 로맨스를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꽤 로맨틱합니다.

 

[2억년 전에 무리 짓다]는 일상추리극입니다. 다만 학교를 폭파시키는 대신 밴드를 만든 애들과 장애가 캐릭터성과 서사의 전부가 아닌 장애인 캐릭터가 나옵니다.

 

[공자가 성스러운 새에 대해 말하다]는 2억년 전에 무리 짓다의 후속작으로 저번에는 의뢰인을 맡은 소녀가 탐정을 맡아 수수께끼를 풀어나갑니다. 후기에도 언급되었지만 끝난 이야기를 확장짓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나온 글입니다. 그래도 증명된 사실의 후기나, 한 숨 먼지속 과는 달리 사족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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