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빛에 물든 바다

키안 2018.12.27 00:19 조회 수 : 119

 

※ 이 글은 마루님의 글 (http://textreet.net/board_GybH00/1816)을 읽고 든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비판보다는 첨언정도로 읽혔으면 좋겠다.
※ 글을 쓰던 중에, 마루님이 트위터로 이 글의 답변과도 같은 트윗을 먼저 올리셔서 본문을 폐기할까하다가 그냥 공개합니다.
 
 
 1. 적어도 00년대까지, '오타쿠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하면 누구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떠올리곤 했다. <에반게리온>시리즈의 인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누적되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이 제작되기에 이르렀고, 2012년에 개봉한 <에반게리온 Q>는 기존에 <에반게리온>시리즈를 보아왔던 세대와 새롭게 <에반게리온>을 접하게 된 세대의 조명을 잔뜩 받으며 일본에서 36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2013년에 <에반게리온Q>가 개봉하였는데, 최종누적관객수는 약 6만명 정도에 그쳤다.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름은 전설적인데, 그에 비해 이 수치는 다소 초라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오타쿠의 본토라 불리어지는 일본과 본토가 아닌 한국의 차이인가? 그러니까, 여기서 '본토'라는 구분은 중요한가?
 
 2015~16년에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일본에서 1천9백만 관객을 돌파한 데에 비해 한국에서는 약 370만 관객을 동원했다. 물론 370만명도 매우 많은 수이나, 1천9백만과 비교하면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치다. 이 낙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낙차를 가로지르는 문화적-사회적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이 '오타쿠'와 オタク의 차이라고 나는 가늠한다.
 
 
 2. 모두가 알듯이, <너의 이름은.>은 오타쿠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이지만 그것을 오타쿠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면 고개를 가우뚱하게 된다. 2천만과 400만에 가까운 수치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국가전체인구의 약 20%가 조금 안되는 정도인데, 이는 결코 오타쿠들의 화력지원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이 오타쿠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은 그것이 단지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타쿠 그들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인가? 당시 오타쿠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몇몇 칼럼들은 <너의 이름은.>을 오타쿠라는 특수성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었다. 무엇이 오타쿠의 특수성인가?
 
 
 3. 일본에서 オタク가 '발견'된 것은 텔레비전과 비디오 등 전자제품의 발명과 보급이 일본의 전후 경제부흥과 겹쳐지면서이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의 성지라고 불리는 아키하바라도 보다 이전에 전자제품의 성지였다. 전자제품의 하드웨어가 발달함에 따라 그 소프트웨어(영화, 애니메이션 등)도 질적-양적으로 폭증했다. 오늘날에 넷플릭스를 주구장창 시청하는 사람은 신인류가 아니지만, 당시 일본사회에서 비디오를 수십번씩 돌려보던 사람들은 신인류(뉴타입)였다. 일본사회는 그들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단어가 탄생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왜 그것이 하필 'オタク'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이다. 오타쿠 연구의 초기저서인 <오타쿠>에서 저자 오카다 토시오는 オタク의 유래와 어원을 분석한다. 그 과정과 결과를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진 않겠으나, 어쨌든 그것은 굉장히 일본적인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이후 그 단어가 고유명사화 되어 일본발 서브컬처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オタク가 철저히 일본적인 토양에서 자란 물건이라는 점은 탈락되어 오타쿠라는 기표만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일본과 굉장히 (지리적으로도 지정적으로도)가까운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오타쿠의 기표는 마치 그 위의 비릿내와 얼룩만 약간 제거한다면 바로 회 떠먹을 수 있는 바닷물고기와 같아 보이지만, 상기했듯이 オタク란 짧게는 일본의 전후환경부터 길게는 우키요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일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을 가지고 구체적인 논의를 시도하면 할수록 필연적으로 버그를 발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그 부재가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사회'라는 것을 잊어 마치 그것이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이론인 것 마냥 오용한다. 그것은 オタク라는 특수성을 통해 일본사회의 포스트모던적 현대성을 읽어내려는 시도이지, 오타쿠만을 위한 오타쿠-이론은 아니다. 때문에 아즈마의 이론을 가지고 그것을 오타쿠 분석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들은 그 시도가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어느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オタク에 대한 논의를 오타쿠로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까? 그 이론들은 オタク의 영지를 벗어나면 그냥 참고용으로만 쓰고 버려질 것들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オタク와 그 기반이 되는 일본 서브컬처의 지정학적 영향력이란 결코 オタク 이전에 서브컬처의 생태계에서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망가시아>라는 도서는 아시아의 만화에 대해 탐구한다. 한데 왜 '망가'+'아시아'인가? 일본의 망가가 아시아의 만화들을 모두 대변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다는걸까? 물론 그것은 비약이겠지만, 터무니없는 비약은 아닌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일본을 이미지의 '제국'이라고 부르는걸까?)
 
 
 4.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기 전까지 비공식적인 루트로 일본발 서브컬처가 유입되었다. 그 때에 오타쿠라는 용어는 이후와 같이 쓰이지 않았지만, 오타쿠같은 사람들은 존재했다. 오히려 일본발 서브컬처를 즐기던 사람들은 정식수입이 되지도 않은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서 향유했다는 것으로도 지금의 오타쿠들보다 더욱 오타쿠같은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사용하는 오타쿠라는 지칭 속에는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사용되어왔던 오타쿠-같은 것들의 언명이 마구 뒤섞여있다. 여기에는 오타쿠와 '오타쿠'의 구분조차 흐릿하다. (물론 이 둘을 구분하려는 사람들은 주로 오타쿠-'오타쿠'다..) 오타쿠 비평이라는 개념은 서브컬처의 바다에 존재하는 수많은 해저생태계를 그저 단어조각으로 뭉개버린다. 이제 어느 나라나 21세기에 와서는 정보화의 강물에 휩쓸려 그 안에서 오타쿠'같은'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것이 일본과 같은 상류에서 시작하지 않았다고한들 그리고 オタク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 않아왔다고한들 인터넷 바다의 흐름 속에서 서로의 흐름이 뒤엉켜 어디부터가 어디 출신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고한들, 오타쿠'같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칭할 적당한 이름이 존재하지않아 '오타쿠같은' 식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지만, 오타쿠와 덕후가 다르고 덕후와 마니아가 다르고 다시 만화광이 다르듯이, 그들은 언제부턴가 어디에서든 존재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오늘날에 오타쿠라고 대략적으로 퉁치고 있을 뿐이다. 이 오타쿠라는 언명 때문에, 문화향유의 이렇고저러한 형태와 줄기가 모두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뭉개진다.
 
 한데 나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타쿠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굳이 '오타쿠'라는 언명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타쿠라는 정체성을 고수하든지 여기서 탈출하든지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오타쿠라는 언명으로부터 자유로운 향유의 미시사를 자기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증명적 비평은 그냥 거기에서 그칠 뿐인가? 모든 비평적 드러냄은 오히려 자기증명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오타쿠라는 언명 속에 뭉개져버린 향유의 생태사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타쿠라는 대상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5. 여느 규정성이 그렇듯이 오타쿠 역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스펙트럼적이다. 규정적 오타쿠는 그 스펙트럼에서 색이 가장 선명한 부분만을 특징화한다. 오타쿠 비평의 역할은 여태까지의 선명성=특징성을 해체하고 이 중에서 아직 색이 비치지 않은 곳에 '있'는 오타쿠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의 '오타쿠'라는 언명을 때로는 긍정하면서 때로는 부정하면서 오타쿠-언어를 좀 더 풍부한 지점으로 끌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잡아낼 오타쿠가 '있다'고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가령 나는 코믹월드나 케이크스퀘어 같은 동인행사장에 방문하면 그곳의 행사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곳에 있는 것일까?에 대해 상상한다. 그들은 오타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거기에는 분명 자신을 '오타쿠'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타쿠'가 무엇인지 그 흐름과 현동성에 대해 분명하고 명료하게 알고 구분하고 있어서 그와 같이 자신하는 걸까? 그런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구나 스스로를 '오타쿠'라고 자신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이 가진 취향과 지향을 결코 하나로 묶을 수 없음을 취향존중의 증여가 자기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취미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하여 동인지를 만들고 즉매회에서 만나 정보를 공유하며, 좋아하는 캐릭터를 코스프레하고 사진찍으며 '놀이'한다. 이러한 행사장에 출현하는 불특정다수의 흐릿한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적당할까? 그 무엇은 일본의 オタク를 '원본'으로 하는 문화적 사본일까? 만약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과 문화는 단순히 사본이 아니라, 원형들마저 전복함으로써 모든 사본들을 전복하는 가족유사성의 원본이다. 언제나 원본은 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나름의 방향으로 출현한다.
 
원문: http://ungzx.blog.me/221427099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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