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을 맺음.

키안 2019.09.24 02:41 조회 수 : 252

 

 지난 '두번째 답변'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보고 저는 매우 강한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애초에 우리네 논쟁이 줄곧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글은 답변의 연장을 계속해나가기 보다는─이미 도피오님과 yora님도 '마지막 답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고, 제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도 하지 않으셨기에─왜 이 논쟁에서 저 그리고 관전자들이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우선 설명하고, 그럼에도 여럿 분들이 지적하신 제 견해에 대해 반복되는 확대해석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답변만을 제공하며 이 답변의 연속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이것이 이 논쟁에 대한 답변으로서는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1. 이는 우선적으로 제가 '텍스트릿'이라는 나무 아래에 모이는 사람들의 범주를 실제보다 조금 엇나가게 보고 있었다는 데에 의거합니다. 그러니 1차적으로 이는 제 불찰입니다. 저는 '장르'를 논하는 점에서 있어서 텍스트릿에서 이야기되는 작품들이 꼭 '(협의의 의미에서)텍스트'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텍스트릿 역시 지난 문학신문 기사에 스스로가 '장르문학 비평팀'이 아니라 '장르 비평팀'임을 명시했듯이 텍스트 위주의 비평에서 벗어나기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지금 <비주류선언>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텍스트릿은 장르 문학 이외의 장르까지 논의 범위에 포함을 시키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자생해 온 장르 문학이나 웹소설을 '주로' 논하는 곳이며 텍스트릿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도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자생해 온 장르 텍스트와 함께 해온 장르 향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일본 서브컬처를 받아들이는 1차 과정으로서 그것이 한국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흡수되었나를 논하기 이전의 지점에서 오로지 일본 서브컬처에 한정하여 작품을 이해하고자 했던 제 리뷰는, 텍스트릿에 올린 순간부터 제 의도를 떠나 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야가키미>리뷰를 텍스트릿에 올리기 전에 텍스트릿의 환경에 맞게 글을 다시 손 보아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서술은 결코 텍스트릿 또는 텍스트릿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내려보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처럼 텍스트보다는 만화나 영화같은 시각매체를 통해 주로 장르를 향유하는 사람도 텍스트릿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2. 저는 제가 애니메이션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논의를 만화애니메이션 특히 애니메이션에 한정하려 했던 이유도 제가 그 바깥에 대해 이렇다저렇다를 논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장르를 논함에 있어서 제가 해당 장르 전체에 대해 충분한 존중을 취하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제 <야가키미>리뷰가 작품 비평과 동시에 장르 비평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통감했으며, 하여 <야가키미>리뷰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향유자들에게 <야가키미>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나'를 이해할만한 기록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야가키미>에 대한 매우 제한적인 이해입니다. 그러나 틀린 이해는 아닙니다. <야가키미>는 훌륭한 작품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다양한 입장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반복해서 말하지만 저는 성애를 여부로 백합과 레즈를 나누고자 하지 않습니다. 작품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지화된 사랑인가 현실 기반의 사랑인가에 그 여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이미지와 현실이 뚜렷히 구분되지 않는데 어떻게 백합과 레즈를 구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둘을 뚜렷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허나 두 축이 완전히 합일된 상태도 아님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르의 이미지이고,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근대를 통과하면서 형성한 여성애의 이미지─그래서 계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며 이 '근대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 늘어감에 따라 백합물 역시 훨씬 다양한 진화양상을 띄어가게 될 것임─이미 그러고 있음─역시 분명합니다. 허나 동시에 '장르'로서, 백합물이 나름의 규칙과 이미지를 재생산해나갈 것임도 분명하며 여기에 대한 관찰 또한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합(물)과 레즈비언(서사)에 대한 정의는 지난 두번째 답변에서 제시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서 재차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건데, 리뷰에서 '종래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과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서술을 구분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4. '제대로 된 장르 향유자'라는 워딩은 매우 위험한 표현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것은 해당 장르를 향유하는 사람들에 일정한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내쫓는 언사입니다. 이는 마치 그 장르 향유자가 되기 위해 특정한 자격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 자격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다수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하여 거기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씀은 원천봉쇄의 오류임에 다름없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비평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백쓰마(백합쓰지마세요)'라는 말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관련하여 어떤 플로우가 있어왔는지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서사창작물에서 '클린'함을 찾으려는 시도는─더욱이 그게 장르 작품이라면─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5. 저는 한국에서 백합물을 창작하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지우려고 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합니다. 지난 글에서 순정만화와 쇼죠망가의 영향관계를 굳이 언급했듯이, 쇼죠망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게 곧 순정만화를 지우는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영향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각자가 속한 사회 속에서 각자의 다른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다른 토양을 일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비슷하게 오히려 일본 서브컬처의 백합물과 한국 서브컬처의 백합물은 따로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철저히 일본 서브컬처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것이 한국의 상황에 바로 대입해서는 아니됨을, 그리고 한국에서 진화해온 백합물을 차마 설명하기에는 맞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백합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기회가 된다면 yora님의 작품도 읽어보겠습니다.

 

 6. 장르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이고 약속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상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며, 계속 변화해왔기도 했습니다. 장르는 결코 고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저는 요리를 할 때에 그 재료들의 원산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반 향유자들이 커피의 품종과 로스팅 과정에 대해 일일이 따지지는 않지만 커피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커피의 가지를 분류합니다. 이렇게 분류된 커피들이 이어지는 실험들을 거듭하여 새로운 커피를 생산해냅니다. 백합의 시작을 아는 것은 우리가 외부의 백합을 받아들일 때에도, 우리의 백합을 논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저는 계속해서 백합물에 대한 제 이해가 협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제가 제가 그것들을 어느정도 아우를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7. 지금까지 이 허탈한 이야기를 지켜봐주신 분들께는 감사와 미안함의 마음만을 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텍스트릿이 지향하는 바 그리고 그 아래에 모이는 사람들께, 저는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응원과 존경을 보낼 것입니다. 앞으로 텍스트릿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도 그것이 텍스트릿이 하려는 '담론의 기록'에 도움이 되는 것이 되기를 부디 바라마지 않습니다.

 

 

 

ps. 저는 이 사안에 대한 반응들을 서치하는 과정에서 차마 제 스스로는 담지 못할 여러 비하 표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반박을 하고 의견을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텍스트에서 말해진 것만을 대상으로 해야지 그 이상의 것을 미루어짐작하여 상대의 정체성을 프레이밍하는 것은 굉장히 좋지 못한 태도라고 보여지며, 그런 발언을 하신 분들께는 유감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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