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2회 장혜란

시스앤 2019.11.05 14:43 조회 수 : 29

두 사람은 저녁을 먹으며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금 한창 방 구하기가 어려워 지금 이사한 집도 석달만에 구한 거였다. 이 집을 못 구했다면 그야말로 거리로 나앉게 될 판이었었다. 게다가 말이 쉽지 막상 진짜로 이사를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얽힌 게 너무 많았다.

하는 수없지 뭐. 버텨야지. 죽기야 하겠어... 아니야,, 아니야.. 난 진짜 말라죽을 거야. 그 여자 얼마나 깐깐하다고. 보고서에 오탈자 하나도 그냥 못 넘기는 사람이야. 오탈자 뿐이야. 쉼표, 마침표까지 뭐라한다니까. 계다가 말은 안 하지만, 사람 쳐다보는 표정이 어떤 줄 알아? 출근길에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 옷차림, 머리, 화장, 귀걸이,, 어디 오탈자 없나, 쉼표, 마침표 잘못 찍은 거 없나 되새겨보느라 머리가 아파온다니까.”

그래도 넌 나아. 센스 없다고 콩밥 먹진 않잖아. 경찰이라고, 경찰. 아 정말 어ᄄᅠᆨ해. 나 걸리면 설마 빨간줄 그이는 거 아니겠지. 설마 징역까지야 살진 않겠지? 벌금형 받아도 빨간줄 그이나? 집행유예는? 어디서부터 빨간줄 그이는 거지?”

오바한다. 요새 같은 시대에 빨간 줄이라는 게 있기는 한지도 모르겠네.”

그래, 그래,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래도 행여나 미향이 학교에서 알면 진짜 큰일인데. 학교에 알리면 어떡하지? 설마 그렇게까지는 안하겠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있어. 내가 진짜 미향이 기집애 때문에 제 명에 못산다니까. 나 진짜 미쳐.”

미향은 잠시 풀이 죽어 있더니, 부엌 선반에 올려놓은 약병에서 신경안정제 한알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예지의 눈이 둥그래졌다.

? 또 안좋아? 뭘 그렇게까지 신경써, 설마 진짜 그러기야 하겠어?”

예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친구를 살피며 말했다.

아니야,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것보다 이사하고 마감이 겹쳐서 밤샘을 좀 했더니, 스트레스 받았나봐. 어제 잠도 설치고, 오늘은 가슴이 좀 두근거리네.”

수향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으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약 안 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힘들 때는 그냥 편하게 먹어. 뭘 그렇게 애를 써.”

아니야. 요새는 진짜 한동안 약이 필요없었어. 그리고 필요하면 챙겨먹으니까 걱정마.”

수향이 웃어보였으나, 예지는 수향이 안쓰러워 기분이 착잡해졌다.

 

준호는 마연동 사건이 생각보다 간단치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단 진짜 강도사건인지부터가 의심스러웠다. 피해자의 태도부터 이상했다. 내내 묵묵부답 모르겠다, 기억이 안난다는 말 뿐이었다. 목격자도 없었다. 범행장소가 지하의 다방인데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흔한 씨씨티비 하나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준호는 피해자 주변부터 뒤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알 수 있는 정황은 그것 뿐이니까 말이다.

준호가 생각에 잠겨 단지 내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수향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복도에서 두어번 스쳐지나긴 했지만, 산책로에서 마주치긴 처음이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준호는 수향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수향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준호가 거의 대여섯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는데도 전혀 알아차리는 기색이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수향은 멍하니 아파트 화단에 있는 둥근 주목나무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어이, 고삐리!”

수향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 말이 저를 가리키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채 건성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제서야 준호를 발견하고는 튕겨지듯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구십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러고나서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연기를 제대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완전히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격이군.

사실 수향은 며칠 전에 발견한 황갈색의, 아마도 수컷이 아닐까 싶은, 사람으로 치면 나이가 삼사십대쯤 되어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를 찾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몸집이 큰데다 얼굴도 다른 고양이에 비해 많이 컸다. 굵은 목주위로 살짝 주름이 잡혀 있고, 어딘가 노련하고 연륜이 넘치는 표정으로 여유있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원래가 고양이는 사자나 호랑이에 자주 비교되지만, 그놈은 정말이지 작은 사자 같았다. 아마도 이 구역을 주름잡는 수컷이리라. 고양이에 대해 기초적인 상식 뿐인 수향인지라 멋대로 프로필을 상상한 것이지만 그놈은 진짜 그럴 것만 같았다.

수향은 그 고양이에게 빌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놈을 볼 때마다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 그건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이야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 녀석을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산책을 겸해 아파트 단지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녀석은 주로 화단에서 많이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일층세대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베란다 아래에 생긴 좁은 빈공간에서 자주 휴식을 취하곤 하는 것 같았다.

수향이 어색하게 멈칫거리자, 준호는 수향이 보고 있던 화단 쪽을 보며 피식 웃더니 다가와 수향 옆에 앉았다. 수향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예의상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벤치에서 떨어질까 아슬할 정도로 엉덩이를 걸쳤다.

너 학교 안 갔냐? 벌써 방학인가?”

아닌게 아니라 아스팔트에서 더운 기운이 올라오고 매미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완연한 여름의 문턱이었다. 준호는 별뜻없이 그저 오늘이 며칠인가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수향으로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말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등줄기가 따끔따끔하고 이마에서 땀이 빠작빠작나는 것만 같았다.

뭘 그렇게 봐? 아무것도 없구만.”

“... 고양이요.”

화제가 바뀐 걸 다행스러워하며 수향은 얼른 말을 돌렸다.

고양이가.... 그러니까.... 재미있어 보이는 놈이 하나 있어서..”

준호는 자꾸만 피식, 피식 웃었다. 천상 어린애네, 하는 표정이었다. 준호의 잘생긴 옆얼굴에 알만하다는 기색이 느껴지자 수향은 묘하게 오기가 났다. 오기가 나니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 녀석이 궁금해져서요. 뭐하고 사는지, 뭘 먹고 사는지, 어디서 자는지, 어디서 볼일 보는지, 친구는 있는지, 가족은 있는지, 어떨 때 슬프고, 어떨 때 기분 좋은지,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꽤 나이든 녀석 같은데,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런 온갖 것들이 다 알고싶어져서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듯한 말이라 수향은 내심 찔끔했다. 하지만 준호는 잠시 수향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나랑 비슷하네. 사건을 맡게되면 항상 드는 생각이 그런 거거든. 범인 말이야. 이 놈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고, 어디를 돌아다니면서 뭐 해먹고, 어떻게 사는 놈인지, 가족은 있는지, 정서적인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은 누군지, 취미는 뭔지, 여자 취향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 하여튼 온갖 잡스러운 생각이 다 들지.”

별생각없이 말을 내뱉고보니 준호는 여자취향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어린애한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슬쩍 눈치를 보니, 다행히 수향은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좀전까지 긴장하고 있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몽골리안 특유의 살짝 옴팡한 눈에 희미한 웃음기마저 실렸다.

형사님이세요?”

수향은 긴장을 풀고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항상 후줄그레한 차림이라 그런지 그저 무심하게 수향을 봐왔던 준호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가까이서 보니 여자애가 꽤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수향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심지어 이름도 모를 것이었다.

그래. 유 형사지. 유준호야.”

제 이름을 말하려니 그는 살짝 멋쩍은 눈치였다. 괜스레 미간을 찡긋거리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수향은 웃음이 났다. 웬만큼 나이도 있고, 사회생활도 할만큼 했을 테고, 게다가 형사라면 강력범을 상대하는 거친 일에도 단련된 사람일 텐데, 어쩌면 저렇게 순진해보이는 표정을 다 지을까. 정말로 순진한 걸까, 아니면 그냥 매력적인 외모 덕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수향은 궁금해졌다.

실제로 형사님은 처음 봐요. 신기하네요. 일상이 진짜 영화 같겠어요.”

그렇지도 않아. 실제로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일은 잘 없어. 그냥 비슷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 그리고 비슷하게 수사하고, 쫓아다니고, 조사하고. 그게 반복되다보면 그냥 보통 사람들이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것처럼, 그냥 그런 느낌이야.”

수향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에 말이야. 좀 색다른 사건이 하나 생겼어.”

준호는 남자친구가 용의자로 올라있는, 오늘 아침에 여성청소년과에서 넘어온 사건의 대강을 이야기해주었다.

근데, 어쩐지 좀 찜찜한 데가 있어서 말이야. 피해자 진술에 따르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갑자기 담배가 떨어진 게 생각나서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다는데, 그 동네는 상당한 부촌이라 곳곳에 거의 그물처럼 씨씨티비가 있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그 범행장소가 씨씨티비의 사각지대였어. 일부러 찾기도 힘든 아주 절묘한 사각지대 말이야. 여자가 그곳에 간 건 분명 우연이었는데, 그게 정말 단순히 우연일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첫 번째로 이런 걸 가정해볼 수 있겠지. 남자친구가 어떤 연인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단서로 미리 여자의 편의점 행을 예측할 수 있었거나, 또는 유도했다. 두 번째...는 아직 말하기에는 정리가 안 됐지만,,, 아무튼 이상한 게 있어.”

그러니까 형사님은 두 번째 가정이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다른 이유가 있어요?”

준호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별뜻없는 말에 준호가 정색한 반응을 보이자 수향은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아니요. 그냥.. 그냥요. 그냥 이상하게 말을 자르시길래, ..느낌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내용인 것 같아서. 그렇다는 건 함부로 말하기 곤란한 중요한 얘기라는 거고, 거기 진짜 무게가 실려 있구나 싶어져서.... 아니면 말구요.”

준호는 수향의 예민함과 명민함에 잠시 감탄했다. 눈치가 빠른 건가. 준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껏 봐온 바로는 이 소녀는 아무리봐도 단순히 사고나 치고 다니는 문제야 같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 소녀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계기가 뭘까. 가정환경이 불우한가.

부모님은 뭐하셔?”

너무 느닷없는 질문에 수향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 내가 지금 들은 게 정확히 들은 건가. 부모님? 엄마, 아빠? 누구 부모님? 범인 부모님? 우리 부모님?

부모님요?”

엉뚱한 전개에 수향은 웃음이 나려고 했으나, 진지하기 그지 없는 준호를 보니 웃을 수가 없었다.

임업하세요. 밤나무 가꾸고, 양봉하고, 버섯 따고, 산나물 기르고.. 기타등등..”

여기서?”

당연히 아니죠. 지방에 계세요.”

논리적인 사고를 갖춘 제법 두뇌명석한 실력있는 형사 같아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통에 수향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러나 준호는 해맑게 웃는 수향을 보니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정말로 가정환경 탓인가.

너 오늘 학교 안 갔지?”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수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준호의 표정이 저렇게 심각한 까닭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칠월 초밖에 안됐는데, 벌써 방학도 아닐테고, , 재량휴업인가? 오늘 학교 안 간거 부모님도 아셔?”

준호의 눈동자가 빠져나갈 생각말라는 듯 수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수향은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제발 이해해주기를. 이해해 줄거야. 누가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겠어. 그러려니 하겠지.

그게.. 사실은...”

그러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걱정하는 듯한 준호의 표정에 수향은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정학 중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하루이틀 개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수향의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버리고 말았다.

, 학교 그만 뒀어요... 검정고시 치려고...”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구. 수향은 마음속으로 혀를 깨물고 있었다. 미향은 지금 지방에 있는 큰아버지댁에 끌려내려가 있었고, 전학 수속을 밟으려는 참이었다. 부모님이 계신 곳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큰아버지가 데리고 있어주기로 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야. 하지만 수향은 도저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슬쩍 눈치를 보니 준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수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그때 우리 아래층에 과외선생 산다고 했었지? 그 여자 제법 유명한가 보더라. 수업료도 강남권 빼고는 최고 수준이래. 우리 팀장이 그러는데, 그 여자 별명이 와여사인데, 그 계통에서 와여사라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더라. 자기 딸내미도 거기 보낸대.”

예지가 같은 동 일층에 산다는 팀장을 들먹이며 수다를 떨었으나, 수향은 그 얘기들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와여사가 뭐야?”

“‘스노우 와-이트의 와여사란다. 백설공주를 너무 좋아해서 수업할 때 스노우와이트를 입에 달고 산대. 말그대로 공주병이지 뭐. 그러고보니 생긴 것도 예쁘더라. 옷도 잘 입고. 과외해서 돈 끈다는 거 보면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고. 그 정도면 환자될 만 하지 뭐. 그 여자 봤지. 항상 어딘가에는 주먹만한 솜덩이를 달고 다닌다니까. 핸드폰이든, 뭐든, 암튼 그때부터 취향 알만하더니, 그게, 스노우~ 와이튼가.”

화제의 와여사는 수향과 예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바로 아랫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의 바닥이 와여사네 천장인 셈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실로 우연이었다. 어느날 예정에 없는 초인종 소리가 울려 수향이 나가보니 왠 교복입은 남학생 하나가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수향이 누구냐고 묻자 수업시간인데, 선생님이 안 계시냐고 했다. 알고보니 그 남학생은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한층을 더 올라온 것이었고, 낯선 얼굴이 문을 열어주니 저는 저대로 당황한 듯했다.

수향이 무슨 말인지 몰라하며 집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제서야 남학생은 호수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벌게져서 한층 더 올라온 것 같다며 입속으로 웅얼거리고는 달아났다. 수향은 그제서야 평수도 작은 이 동에 유독 교복 입은 애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근데, 우리 팀장 딸 있잖아. 걔 되게 예쁘다. 카스에서 우연히 봤는데, 깜짝 놀랐어. 팀장도 뭐, 나름 미인이라고 할수 있지만, 걔는 진짜 연예인해도 되겠더라.”

그말에 수향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나도 단지에서 엄청 예쁜 애 하나 봤는데, 혹시 걔 아닌가?”

팀장이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고등학생쯤 되겠던데, 짧은 단발에, 앞머리도 없이 앞가르마했는데, 그런 머리 어울리기 힘들잖아. 근데, 이마도 예쁘고 귀도 예뻐서 한쪽 귀 뒤로 머리 넘기고 있는데, 커다란 눈이 깜박깜박하는데, 정말 인형이 살아움직이는 것 같더라. 갑자기 배경에서 꽃그림이 뜨고, 내가 만화책 보고 있는 줄 알았어.”

사진에서 본 애는 머리 길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예쁜 애가 어디 흔하겠어. 걔 맞겠지. 아 잠깐만.”

예지는 먹던 숟가락까지 내팽개치고 핸드폰을 가져와 그 아이의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얘 맞지?”

사진 속의 아이는 예지 말대로 긴생머리를 눈부시게 내려뜨린 채 야경을 배경으로 프로필을 드러내고 있었다.

맞아. 맞는 거 같아. 옆모습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맞는 거 같다. 정말 예쁘네. 딸 자랑할 만하네.”

수향은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깊숙이 자리잡은 큰 눈과 각진 콧날 덕분에 프로필이l 선명하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옆모습이라 더 그래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 아이도 어느 정도 그랬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뭔가 모르게 마음을 자극하는 감정 같은 게 느껴졌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순수해보이는 반면 남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도 한 묘한 표정. 한편 고요한 듯하면서도 이제 어린 티를 벗고 막 어른이 되려하는 그 즈음의 복잡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표정이 참 분위기 있다. 모델 같은 거 해도 되겠는데... 십대라..... 나도 이랬나.”

예지가 코웃음을 쳤다.

뭐래는 거야. 지금 어디다가 숟가락 얹니? 말이 돼?”

표정 말이야. 표정. 마음 말이야. 불안하고 요동치는 마음, 그런 거 말이야. 얼굴 말고.”

오오.. 노우.. 확실히 얼굴 다음이 분위기야. 얼굴이 되야 분위기가 되지. 넌 아니었어. 절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수향은 혀를 차며 불현듯 유형사를 떠올렸다.

, 그때야 그렇다치고, 이렇게 교복 입고 다니는 애들 틈에서, 바로 옆에 놓고 보면서 어떻게 계속 나를 애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눈이 삔 거 야니야? 정말 형사 맞아?”

오우... 그것도 노우... 아라하고 넌, 나이로 비교하면 안 되지. 인종으로 비교하면 모를까 근데 그 형사 자주 마주치네.”

출퇴근이 불규칙해 그런가. 난 늘 집에 있으니까. 낮에도 자주 봐. 진짜 큰일이야. 차라리 처음에 털어놓을 걸. 시간이 지나니까 점점 더 얘기 못하겠어.”

걱정마. 걱정마. 죽이기야 하겠어. 잘봐줄거야. 밥까지 갖다바쳤는데. 근데, 너 설마 그 형사한테 관심있는 건 아니지?”

수향의 째려보는 눈길에도 예지는 아랑곳이 없었다. 처음 유형사와 마주쳤을 때, 예지는 상상했던 사람과 너무 다른 준호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수향의 얘기만 듣고서는 꼬장꼬장한 사오십대 아저씨를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 준호는 또래의 젊은 청년인데다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호남이었다. 게다가 준호 쪽에서 먼저 싹싹하게 인사를 차려왔다. 수향의 언니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눈치여서, 예지도 얼떨결에 대충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 요것 봐라, 중요한 얘기는 쏙 빼놓고, 엄살만 떨었네. 예지는 출근길 내내 얼굴에 짖굿은 미소를 피워 올렸고, 그날 이후 틈만 나면 수향을 놀려댔다.

미쳤니? 지금도 복잡해죽겠어.”

근데, 왜 밥은 챙겨주고 난리야. 혼자 사는 젊은 남자 마음 설레게.”

수향의 노려보는 눈길이 더 사나워졌으나 역시 예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지는 어젯밤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젯밤 슈퍼에 가려고 나서던 길에 수향은 복도에서 준호와 마주쳤다. 일주일 만이었다. 준호는 퍽이나 지친 얼굴이었다.

삼일 밤 새고 들어와서. 세 시간 있다 나가야 되는데,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네. 아까는 잠이 와서 밥 생각이 없더니, 막상 누우니까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온다. 우습지도 않네, . 그러고 보니 밥을 언제 먹었나 싶다. 근데, 넌 이 밤에 어디 가냐?”

슈퍼에요.”

잘 됐네. 가는 길에 나 라면 하나 사다 줄 수 있어?”

준호는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들고 말했다. 수향은 마침 준호가 안쓰러워보였던 참이라 선뜻 돈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내처 가던 길을 가려다 문득 라면 한 봉지쯤이야 집에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가져다주면 빨리 먹고 일분이라도 더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수향은 준호가 사라진 그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라면 한 봉지를 꺼내들고 락앤락 통에 밥을 한 공기 분량쯤 덜어담은 뒤 반찬 몇 가지도 챙겨서 옆집으로 갔다. 배고픈 남자라면 라면 하나로는 양이 안 찰 것 같아서였다.

문은 열려있었다. 준호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수향은 별기척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

준호가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준호를 부르려던 수향은 방안에서 티셔츠를 갈아입고 있는 준호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향은 당황해서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당황스럽기는 준호가 더했다. 부랴부랴 새 티셔츠를 꿰어입는 동장에 당황과 민망함이 뒤섞여 평소보다 더 더뎌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티셔츠를 입은 준호는 어색하게 말했다.

.. 너 어떻게 벌써...”

그냥... 집에서 가져왔어요. 여기 두고 갈게요.”

수향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근처에 있던 식탁에 가져온 것들을 대충 부려놓고 후다닥 나가버렸다. 그러느라, 준호 역시 수향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어색해한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준호는 나중에야 식탁에 만원짜리가 고스란히 놓여있는 걸 발견하고는, , 돈 가져가, 라고 외쳤으나, 수향은 벌써 사라진 뒤였다.

저런 어린애도 여자라고, 쪽팔리네.. 아이씨.. , 날은 또 왜 이렇게 더워. 준호는 괜스레 혼자 손부채질을 하며 사라진 수향의 튓통수에 대고 겸연쩍게 혼잣말을 흘렸다.

 

애한테 무슨.... 설레기는...”

어린애도 여자는 여자지, 남자냐? 게다가 여자가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밥까지 챙겨들고 들락거리고 그러면, 남자들 딱 오해한다. .”

대충 좀 하지?”

수향은 빙글빙글 놀려대는 예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이 짐짓 무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괜한 짓을 했나, 은근히 후회가 되었다. 예지의 놀림처럼 혹 그가 오해를 한다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친해지면 곤란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 앞으로는 절대 오바하지 말자. 되도록 마주치지도 말고. 수향은 결심했으나, 사실 이웃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집에서 일하는 수향은 집이 집이자 직장이었기 때문에, 하루종일 집안팎을 돌아다니는 게 일과였다. 그녀로서는 피하고 싶어도 도저히 피할 곳이 없는 것이다.

 

김동현 씨. 지금 사태가 불리한 거 알죠?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니까요. 뭘 더 어떻게 말합니까? 뭐든 물어보시라구요. 내가 참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에이, 씨발 진짜..”

본인은 결백하다는 건데, 그럼 여자친구 분한테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달리 또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여자친군데, 별로 신뢰가 없나봐요?”

김동현은 잠시 찔끔하는 눈치였다.

사랑하기는 하지만, 성질머리 못된 거야 저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조사실에서 용의자와 마주않은 준호의 머릿속에 잠시 이 남자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게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준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김동현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 뭐 별겁니까? 적당히 마음 맞고, 웬만큼 알만하고, 정도 좀 들었다 싶고, , 그럼 된 거 아닙니까? 어차피 여자라는 거 다 똑같지 않습니까? 뭐 별거 있나요?”

여자친구 분은 김동현씨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엿 먹으라는 거겠죠.”

왜요?”

“...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니까요.”

바람 피우셨습니까?”

아니오. 결단코 그런 적 없습니다. .. 몇 번... 만나서 밥 먹고 그런 적은 있죠. 하지만 심각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냥 가볍게 한두번 만난 정도였어요. 정말 그뿐이었습니다.”

증거로 나온 혈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죠. 아니, 현장에 있지도 않은 내 피가 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입니까?”

손등에 있는 상처는 그럼 언제 생긴 겁니까?”

김동현은 손등에 있는 상처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안 나요. 그냥 보니까 나 있더라구요. 다칠 땐 몰랐나봐요.”

상처를 처음 발견 한 게 언제였습니까?”

정말로 기가 막힌다니까요. 그날 여기 끌려왔던 날 아침요.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보니까 손등에 상처가 나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이로군요.”

김동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준호와 해준은 궁궐처럼 호화로운 부잣집의 높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바깥을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문이 열렸다. 백평은 됨직한 넓은 잔디마당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가죽 소파에 앉아 있던 미인이 두 형사를 맞이했다. 거실 한구석에는 비숑프리제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솜뭉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우리 씨.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해준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준호를 소개했다. 이우리는 낯선 남자 형사를 경계하듯 표정을 굳히고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의례적인 절차니까, 너무 긴장 안하셔도 됩니다.”

준호가 웃어보이자, 이우리도 긴장을 풀고 따라 웃어보이는 듯했다. 이우리는 곧 가까이에서 본 준호가 무척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을 깨닫고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보였다. 고개를 숙이면 코가 더 길어보인다는 것을 의식한 이우리의 버릇이었다.

거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준호는 구석에 있는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 녀석은 뒷걸음질을 치더니 낑낑대며 소파뒷쪽 구석진 곳으로 도망가버렸다.

라미가 낯을 좀 가려서요. 앉으세요.”

가사도우미인 듯한 중년 여인이 어느 틈에 거실 탁자에 음료를 내놓고 있었다. 해준은 이우리의 옆자리에 앉았고, 준호는 맞은편에 앉았다.

인테리어가 참 멋지네요. 저번에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볼수록 더 근사해요. 취향이 좋으신가봐요.”

바닥에는 한눈에 봐도 고급 목재인 듯한 묵직한 질감의 나무를 사용했고, 벽은 살짝 톤이 낮은 푸른 색이 주를 이루었다. 소파는 고급스런 검은 가죽소파였으며 한쪽 벽면을 차지한 특이한 장식장이 그밖의 유일한 가구였다. 그곳에는 해외여행에서 구입했음직한 기념품과 도자기, 그림 따위가 드문드문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진열돼 있었다. 전체적으로 클래식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실이었다.

취향이랄 것도 없어요. 그저 너저분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화려한 것 보다는 심플한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자랑하듯 은근히 액세서리가 돋보이는 포즈를 취해보였다. 단순하면서도 질감과 색감이 은은한 디자인의 작은 귀걸이와 아주 작은 사각형이 줄줄이 이어져있는 듯한 형태의 가는 팔찌가 액세서리의 전부였지만, 역시나 고급품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집이 너무 예뻐요. 잡지에서 본 집 같아요. 집구경 좀 해도 될까요?”

해준은 활짝 웃으며 애교스런 미소를 지었다.

 

준호와 해준은 비닐봉투에 든 물건들을 감식반에 넘겼다.

되도록 빨리 좀 부탁할게요. 결과 나오는대로 바로 알려주세요.”

해준이 말하자 국립과학수사원 소속인 조 연구원도 웃으며 받았다.

그러죠. 누구 부탁인데요.”

결과가 나온 건 이틀 뒤였다. 결과가 나왔음을 알리러 해준이 준호를 찾아왔다. 다행히 그 이틀동안 별다른 말썽도 없었다. 준호는 결과를 듣고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해준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마침 비어있던 옆자리 차 형사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긴장돼 죽는 줄 알았네. 그러니까 유 형사님 생각대로인 거네요.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소름끼치네요.”

기분 좋을 일은 아니죠.”

준호는 심상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믿어줘서 고마워요.”

,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노 형사님을 믿은 게 아니라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영장 신청해야겠네요.”

준호는 담백하게 대답하고 용무가 끝났으면 돌아가라는 듯 제자리로 몸을 돌렸다. 그런 준호가 은근히 서운해 해준은 한동안 머뭇거렸지만, 별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마침 차형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형사는 노형사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곧장 준호에게 말했다.

유 형사님. 마연동 사건 말입니다. 용의자 특정될 것 같아요. 피해자가 만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사건 다음 날 사라졌답니다. 워낙에 몰래 만나던 사인가봐요. 주변 사람들도 아무도 몰랐답니다.”

그래? 그럼 현재 소재 파악이 안 된다는 거야?”

일단은요. 그래봤자. 금방 찾겠죠. 해외로 안 튀었으면 지가 어디 갔겠어요.”

왜 그렇게 몰래 만났지? 불륜인가? 유부남이야?”

그건 아닌데... 아무튼 법적으로는 미혼입니다. 사채업자 밑에서 똘마니 노릇하던 놈인데, 빛 받은 돈까지 빼돌려서 발랐나봐요.”

얼마나?”

꽤 커요. 일억이 넘는답니다.”

준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마침 옆에서 듣고있던 해준이 물었다.

그 다방마담 상해 건 말인가요?”

한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을 다쳤다죠? 흉터가 심한가요?”

역시 한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해준은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죽은 게 어딥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여자 얼굴에 흉이 졌는데,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일 걸요.”

준호의 무신경한 말투에 해준이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다. 정말 여자 기분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모르는 남자였다. 무식한 것도 죄에요, 유형사님. 해준은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준호는 아침에 퇴근했다가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이우리가 무고 혐의로 체포되면서 사건 하나가 마무리 되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마연동 사건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용의자 손우철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호의 직감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쪽으로 자꾸만 쏠리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그 앞으로 수향이 지나가는 게 눈에 띄었다. 언제나처럼 청바지에 남방차림이었지만 수향은 낯설어보였다. 평소보다 훨씬 몸에 피트되는 스타일의 옷인데다 언제나 묶고 다니던 긴 머리를 차분하게 늘어뜨린 탓이었다. 가는 허리가 드러나니 평소보다 우아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통통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글래머러스한 체형인 듯했다. 원래부터도 또래보다 많이 숙성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모습의 수향은 대뜸 반말을 건네기 머쓱할 정도로 성숙해보였다.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수향을 놓칠세라 차를 출발시켰다.

수향은 방송국 관계자와 미팅을 위해 길을 나서는 참이었다. 말이 나온 건 오래전부터였지만, 계속 될 듯 말 듯 번번이 무산되어버렸기에 수향은 그동안 별로 그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젯밤에 판권이 있는 출판사의 담당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방송국에서 수향의 데뷔작이자, 동시에 출세작이기도 한 아기천사의 장난감 상자를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최종결정했고, 때문에 담당피디가 수향을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자신이 직접 피디를 만나야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수향도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아닌게아니라 수향도 기분이 새로웠다. 수향이 즐거운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데, 곁에서 차소리가 났다. 수향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비켜서 가만히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차는 수향 곁에 멈춰 서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수향이 뭔가 이상한 느낌에 차를 살피자 그제서야 준호가 말을 걸었다.

어이, 고삐리, 어디 가냐?”

수향은 이제 준호를 봐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어색하게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아이가 어른에게 하는 것 같은 인사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귀여워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눈빛을 반짝이며 미소 짓자 준호의 잘생긴 얼굴이 더 돋보였다. 수향은 그런 준호를 빤히 쳐다보다 준호가 왜 그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어디 가?”

종로에요. 볼일이 좀 있어서.”

준호는 무슨 볼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나친 참견 같아 말을 삼켰다.

. 지하철까지 태워줄게.”

수향은 거절했지만, 준호가 몇 번이나 완강하게 권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준호의 옆좌석에 올라탔다.

저번에 고마웠어. 밥 한끼 빚졌으니, 나도 밥 한번 사줘야 되나?”

준호가 지난번의 받은 호의에 감사 인사를 했다. 수향은 그제야 그때 일을 떠올리고 민망해졌다.

별말씀을요. 신경쓰지 마세요. 이웃사촌이잖아요. , 그러고보니,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 해결됐나요?”

수향은 말을 돌릴 겸 내심 계속 궁금했던 일을 물었다.

. 결국 피해자 자작극으로 판명났어.”

형사님 생각대로였던 거네요.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사건 장소가 너무 절묘했던 것 말고 또 달리 의심가는 게 있으셨던 거에요?”

준호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둘렀다. 이 꼬맹이는 어떻게 내 속을 훤히 보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냥, 몇가지. 일단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는 것도 좀 그랬어, 용의자 손등에 난 상처도 좀 그랬고. 용의자가 자기 손등에 난 상처가 언제 난 건지 모르겠다고 진술했는데, 만약 그 녀석이 범인이라면, 어떻게해서든 거짓 핑계를 꾸며대려는 노력이라도 하지 않았겠어. 그냥 밤새 잤다, 상처는 언제 생겼는지 모른다고만하면서 버티지는 않았을 것 같았거든,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말이야.”

그러네요.”

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해자의 가방도 좀 그랬지. 숄더백이었는데, 거기에 무척 크고 화려한, 그러니까 브로치 같은 장식이 달려 있는 가방인데, 아무리 봐도 평소 그 여자 스타일 같지가 않더라고. 드물게 매는 가방이라고 해도 하필 그날 그 가방을 멘 것도, 그리고 차에서 내려서 바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가는데, 그런 거추장스러운 가방을 굳이 챙겨 메고 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지갑만 들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 굳이 말이 안된다고 할수도 없지만, 아주 자연스럽기만 하지도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수향은 다음말을 재촉하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래서, 남자가 정말로 진실을 말하는 거라면, 사실은 어떤 걸까 몇가지 상상을 해봤지. 확실한 팩트는 핸드백의 혈흔과 남자의 손등 상처 뿐인데, 그건 꼭 반드시 사건 장소가 아니라도 가능한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여자와 남자는 애인사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그러니까 다른 장소에서, 예를 들어 여자가 자신의 집이나 남자의 집에서 수면제 따위로 남자를 재우고 그가 잠든 사이에 상처를 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장식이 제법 뾰족하기 때문에 세게 내리쳤을 때 상처를 입힐 수는 있지만, 그냥 긁는 정도로는 상처를 입히기 힘들 것 같았지. 그럼 잠든 남자를 핸드백으로 내리쳐야하는데 그러면 아무래도 남자가 잠에서 깰 위험이 있겠지. 그렇다면 뭔가 핸드백 장식을 대신할 만한 것로 상처를 내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칼이라면 상처가 너무 날카로워 위화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핸드백 장식과 비슷한 것, 그러니까 브로치 같은 것으로 대신 상처를 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동료 형사에게 부탁해서 집구경을 시켜달라고 하게 한 다음 집안을 뒤져 몰래 후보감들을 좀 빼냈지. 조사해보니까 아니나다를까 낚아온 브로치 중 한 개에서 용의자 DNA가 나왔다고 하더라고. 그 가방에 달린 장식품과 제일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었지. 그리고 정밀 감식 결과 상처도 핸드백 장식이 아닌, 그 브로치에서 생긴 상처로 판명됐지.”

, 혹시 형사님이 범인 아니에요? 그렇게 별것 아닌 단서들로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지고, 자꾸만 머릿속이 어수선해지면 그건 뭔가 풀리지 않은 게 있다는 거거든. , 그런 것도 있었지. 여자 집에 갔을 때 그집 강아지가 좀 이상하더라고, 부잣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녀석치고는 좀 이상했어, 자꾸만 움츠러드는 게. 그렇다고 제 주인한테 파고드는 것도 아니고, 뭐랄까. 단순히 경계심이 강한 게 아니라, 마치 학대받아 기가 죽은 녀석 같았달까. 그래서 좀 살펴봤더니, 그 녀석 몸에 남자 손등에 있는 상처와 비슷한 상처가 여러 개 나 있는 걸 발견했지. 그때 확신이 들더군. 아마도 시험해본 거겠지. 핸드백으로 정말 눈에 띄는 상처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 어떨지 말이야. 애초에 될 것 같아서 생각해낸 일이겠지만, 그래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겠지.”

준호와 수향의 인상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소름끼치는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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