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4회 장혜란

시스앤 2019.11.11 23:23 조회 수 : 159

한달만에 수향은 병원에 들렀다. 정기검진을 빼먹는 일이 없는 수향이었지만, 한동안은, 특히 지난 한 달은 이상할만큼 컨디션이 좋았다. 밤에 한번 깨는 일도 없이 잠을 푹 잤고, 약도 필요없었다. 심지어 두통이나 잊을 만하면 한번씩 올라오는 희미한 메스꺼움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약도 지난 번에 받은 게 그대로 남아 있건만, 그래도 성실한 성격을 지닌 수향은 상담을 두 번 연이어 건너뛰면 안 될 것 같아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수향은 상담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기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중간 멈춰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며 일층까지 다다랐다. 일층에 다다를 때쯤 되자 수향은 내리기 위해 문가로 다가섰다. 엘리베이터 벨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에 준호가 서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내가 집에 왔나?”

준호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농담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준호의 등장에 놀라 멈칫거리는 수향 뒤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던 사람들의 짜증스러운 기색이 느껴지자 준호는 얼른 수향의 팔을 잡아당겨 엘리베이터에서 끌어냈다.

사람들 내리는 데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면 어떡하냐?”

준호에게 팔이 잡힌 채 엘리베이터 근처의 창가까지 끌려온 수향은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수향이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틈에 수향과 준호는 창가에 놓여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병원엔 왠일이야? 어디 아파?”

형사님은요?”

난 누구 병문안 왔어.”

누군데요?”

수향은 자신의 건강문제를 얘기하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다행히 준호는 수향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고 선선히 자기 얘기를 해주었다.

사건 피해잔데, 지금 입원해 있거든.”

일 때문에 오신 거네요.”

그런 셈이지. , 너 볼일 끝났으면 나하고 같이 갈래?”

수향이 놀라서 되물었다.

저요?”

 

수향이 준호를 따라 들어간 곳은 이인실이었다. 준호가 찾아간 환자의 자리는 창가에서 떨어진 실내 쪽인 듯했고, 나머지 창가 쪽의 베드 하나는 비어 있었다. 사건 피해자라는 여자는 갈색 긴 파마머리를 어깨쯤에서 하나로 묶고 있었고, 얼굴에 거의 파스만한 반창고 같은 것을 붙이고 있었다.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창가에 기대서 있다가 준호가 들어서자 눈짓으로 가만히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덮으며 누워버렸다. 몸매는 이십대처럼 가늘었으나 가까이서 보니 마흔을 훨씬 넘기고 거의 쉰에 다다랐을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수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준호에게조차 말 한마디 없었다. 수향은 눈만 굴리며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좀 어떠세요?”

그냥 그래요.”

의사 말로는 이제 퇴원하셔도 될 것 같다던데, 아직 많이 안 좋으신가요?”

. 퇴원할 정도로 좋지는 않은 것 같네요. 집에 혼자 있을 생각을 하면 좀 무서워요.”

준호가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저희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얘기해주십시오.”

감사하지만,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여자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돌아가라는 뜻인 듯했다.

글쎄요. 예상외로 도움이 될 수도 있죠. 뭐든 얘기해주세요. 아무거나. 얘기하고 싶은 게 생기시면요. 혹시 모르잖아요?”

수향은 그제서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 여자 뭔가 감추는 게 있구나.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여자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건가. 준호는 그걸 캐려고 하고, 여자는 극구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그런 일종의 밀당인 듯했다.

그때 마침 전화가 걸려온 듯 준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 속에 혼자 남겨진 수향은 기둥처럼 멀거니 서 있기도 그렇고 해서 옆 자리의 빈 베드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자 여자가 실눈을 뜨고 잠시 수향을 살피는 듯했다.

처음 뵙는 거 같네요. 경찰이세요?”

아니에요. 형사님 친구에요.”

호기심으로 여자의 눈이 반짝 떠졌다. 순간 수향은 그녀가 병원생활에 무척 지루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친구요? 남녀사이에 친구란 건 없는데....”

수향은 가만히 웃어보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친구도 아닌가보네요.”

자신의 말에 그닥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여유로운 수향의 대답에 여자도 피식 웃었다.

그럼 여기는 왜 따라왔어요?”

병원에 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병원에는 왜 왔는데요? 어디 아파요?”

. 신경정신과에 다녀요. 일종의 공황장애 비슷한 게 있어서요.”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투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여자는 다소 미심쩍은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요?”

. 멀쩡해보이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할 경우엔 밤새도록 토하기도 하고, 두통이랑 복통이 심해서 온종일 땀 흘리며 앓다가 탈수가 온 적도 있어요. 뭐 그 정도로 힘든 적은 별로 없긴 했지만요. 대개는 한 며칠 잠을 못 자거나 악몽에 시달리거나, 좀 심한 생리통을 앓을 때처럼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안 좋은 정도에요. 그리고... 자주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는 증상도 있죠.”

여자의 얼굴에 동정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힘들겠네요.”

다행히 많이 괜찮아졌어요. 최근 이삼년 동안에는 거의 괜찮았어요. 의사 선생님도 좋아지는 과정 같다고 하시고요. 처음에는 일주일 사이에 응급실에 두 번 실려온 적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많이 힘들었죠.”

이런 얘기를... 언제나 이렇게 솔직히 다 얘기해요?”

여자의 묘한 표정에 수향은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아픈 분이시니, 제 얘기를 들으면 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저는 십년 동안 이주에 한번씩 병원에 왔는데요, 처음에는 환자들이 신기했어요. 세상에는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다들 어디가 그렇게들 아픈 걸까, 그랬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어느 순간 문득문득 지나가는 행인들이 이상해보일 때가 있더라구요. 저 사람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정말로 아픈 데도, 상처도, 불안한 마음도 우울한 마음도 없이 저렇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 활기차고 건강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아플 때는 세상에 저 말고도 아픈 사람이 있는 게 이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다른 사람들이 멀쩡한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아마도 내가 아픈 데 익숙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더더 지나니까, 요즈음에는 문득 문득 그래,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안 아픈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아픈 사람이 안 아픈 사람보다는 많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좀 이상한 결론이죠?”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해가더니 여자는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앉아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가는 손가락으로 역시나 가늘고 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손짓과 표정 때문에 수향은 여자에게 애연습벽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던 여자는 문득 다시 편안한 표정을 되찾더니 수향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나한테도 아가씨 같을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 돼버렸네.”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여자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보였다.

이따금 이 힘든 시기가 과연 지나갈까, 정말로 끝이 있을까, 있다면 언제쯤일까, 그런 생각을 해요. 점점더 몸이 좋아지고, 점점더 나이를 먹어서 지금의 내가 생각도 안 날 만큼 나이가 들면 어쩌면 지금의 고통도 덩달아 희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요.”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아가씨 말이 맞아요. 내가 단순히 이십대의 젊음을 되찾게된다는 것만 생각하면 순간 솔깃해지지만, 막상 누군가가 나를 그 시절의 나로 되돌려준다고하면 난 절대로 가지 않을 거에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끔찍했으니까. 그때만큼 어리석고 가진 게 없는 비참한 때의 나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아가씨도 너무 걱정말아요. 내 나이가 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에요.”

수향은 그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내 주제가 누군가를 위로하려 했다니 시건방진 시도였다. 수향은 순간 진심으로 자신이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통화를 끝낸 준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여자에게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준호는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준호가 인사를 건네자 수향도 일어서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빨리 쾌유하세요.”

아가씨도 잘 지내요.”

두 여자 사이에 다정한 미소가 오가는 것을 준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병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준호가 궁금해 못 참겠다는 듯 수향에게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별얘기 안 했어요.”

분위기가 확 바뀌었는데? 저 여자 웃는 거 처음 봤어.”

수향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 인생 이야기?”

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요? 공기에도 무게가 있는데, 저라고 인생의 무게가 없겠어요? 인정받은 거 보셨잖아요?”

수향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투와 제스처에는 장난기가 완연했다. 준호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나이 반밖에 안되는 어린 계집아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고, 게다가 자신은 진심으로 거기에 약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준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향을 홱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향이 바짝 따라오며 더 약을 올렸다.

형사님 설마 삐지신 거 아니죠? 설마, 여자들끼리 한 비밀 얘기 안 해준다고 남자’ ‘어른이 그러실 리가 있겠어요?”

결국 준호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수향은 화를 풀라는 듯 마주 웃어보였지만, 끝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수향은 몰랐지만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 준호는 함께 걷는 수향을 문득문득 쳐다보곤 했다. 정말로 이상한 여자애라고 생각하면서.

 

준호는 사양하는 수향을 거의 억지로 차에 태우고 집근처의 일식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모든 좌석이 방으로 되어 있는 곳이라 준호와 수향은 사인용 식탁이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받아 그곳에 마주앉았다. 준호는 초밥을 주문했고, 종업원이 나가고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수향은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한 기분을 털어버리려고 수향은 짐짓 궁금한 듯 준호에게 물었다.

아까 그분 얼굴에 뭘 붙이고 있던데, 혹시 상처가 난 건가요?”

. 강도가 들었는데, 어쩌다보니 얼굴에 칼을 맞았나봐.”

상처가 큰가요? 흉터가 남는 건가요?”

준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향도 예상했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씁쓸한 기분이었다.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미용수술분야도 많이 좋아졌다던데....”

의사 말로는 흉터가 크고 깊어서, 수술도 여러번에 걸쳐 해야하고, 그만큼 치료시기도 길어질테고, 비용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더군. 무엇보다 그렇게 한다고해도 완전히 깨끗해질 수는 없을 거래.”

수향은 진심으로 여자가 가여워졌다. 분명 미모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온 여자일텐데, 안그래도 이제 조금씩 늙음으로 미모가 사그라지려고 할 즈음에, 마치 하루아침에 미모와 젊음 모두가 사라져버린 기분이지 않을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수향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처음 자신이 건강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수향은 이제껏 살고 있던 세상에서 버려진 채 다른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도 수향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언젠가 병이 다 나으면 자신에게도 화려한 시절이 언젠가 한번쯤은 찾아와줄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치료를 마치고 예전의 미모를 되찿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세상에는 참 힘든 사람이 많아요. 경찰분들은 정말 대단하세요. 저 같으면 매일같이 이런 일을 대하게 되면 신경이 남아나지 않을 거에요. 그냥 모른 체 사는 게 속편할 것 같아요.”

그래, 그 여자도 많이 힘들겠지. 여자가, 그것도 얼굴에 흉이 졌으니 기분이 어떻겠어.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건 그 여자만이 아니야. 네 말처럼 세상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아. 그리고 우리 일은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생기도록 노력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 물론 그런 일은 계속 반복되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걸로 보람을 찾을 수 있지 않겠어?”

준호의 말은 무척 믿음직했다.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는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고통을 직시하면서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건 강한 내면을 가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수향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자신이 현재 정말 나른해질만큼 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늘 어떤 식으로든 주변사람을 도와준다. 때로는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수향은 문득 자신이 무척 비겁하게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오늘 아침만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둑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당장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었다. 도망칠 궁리부터 했던 것이다.

아참, 형사님, 우리 아파트에 도둑 든 것 아세요? 그것도 우리 동에요. 일층이래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관할이니까. , 그 집이 이 형사 누님 댁이라더군. 이 형사, 알지? 그때 왜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 봤잖아.”

준호와 수향은 동시에 그때 일을 떠올렸다. 준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갑자기 말아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느닷없이 물 한잔을 원샷해버렸다. 그러고도 준호는 계속 수향의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시선을 내둘렸다. 수향 역시도 그때를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하는 짐작 때문에 준호는 더 어색해졌다. 마치 이마에 땀이라도 흐르는 사람처럼 손등으로 이마를 꾹꾹 찍어대더니 그는 마침내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 그게.. 혹시나 오해할까봐 얘기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일종의 사고였다고 해야하나... 그게 이 형사가..... 그 녀석이 장난 친 거니까, 혹시라도 이상한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어색하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준호의 표정에, 애쓰고 있는 그에게는 몹시 미안하게도 수향은 자꾸만 웃음이 나려고 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웃을 수도 없어, 수향은 웃음을 참기 위해 준호의 얼굴을 외면해야만 했다. 그리고 분위기를 돌릴 겸 그동안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참 그때 형사님 저한테 할말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준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제서야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그에 더해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학교에서 상담 같은 거 받아본 적 있지?”

이번에는 수향이 당황할 차례였다.

, 그건 왜요?”

상담이라는 거 따분하게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네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유용한 기회가 될 수도 있어. 그리고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그건 곧 너의 과거와 너의 현재 모습을 모두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는 흥미로운 일이 될 수도 있고. 그걸 바탕으로 네 미래를 한번 진지하게 그려보는 거지. 내가 여성청소년과에 잘 아는 형사가 하나 있는데, 그 분이 전공도 그쪽이고, 경험도 많고, 뭐 꼭 딱히 진로 상담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밖에 뭐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너한테 도움이 많이 돼주실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왜요?”

수향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너무 바보스러운 대답이라고 느꼈다. 준호의 눈에 자신은 말썽쟁이 문제아니까 상담, 지도, 교화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준호는 맛있는 고급 간식만 잔뜩 먹여 기른 버릇없는 애완견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수향을 바라보았다. 수향은 마치 자신이 분리수거하지 않고 아무 쓰레기나 무조건 쑤셔넣어 처치곤란해진 쓰레기봉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향은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딱 말하기 좋은 타이밍인 것이다. 수향은 배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사님.. 사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러나 준호는 진지하고 경직된 수향의 반응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자신의 호의를 이상한 쪽으로 오해한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그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준호는 수향의 말을 들을 생각도 않고 잘라버렸다.

그래, 뭐 사실 네 입장에서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러니까, .... 그동안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너를 살펴볼 기회가 좀 많았어. 그런데 볼수록 네가 가능성이 참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정확한 네 사정을 모르기는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가.

그 나이 때는 모두 자신은 남들과 다르고 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똑똑한 아이일수록 그게 더하지. 어른들이, 그리고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 다 우스워보이니까. 넌 아주 영리하고 조숙한 아이고, 아마도 벌써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너 자신만의 잣대와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시작하고 있겠지. 그리고 내가 남들과는 다른 그런 너의 개성을 절대 이해 못한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알아. 나도 니 나이 때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도 나이로 밀고 나가긴 싫은데,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앞서 살아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정보들이 정말 중요하고, 또 도움이 될 거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 너는 지금 제도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도권 밖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잖아.

사실 학교 밖으로 밀려나는 아이들 가운데는 문제아도 많지만, 생각외로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도 많아. 그런 아이들이 어떻게 제 길을 찾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아? 지겨운 설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만약 니가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면 어떨 것 같아? 배낭여행을 떠나서 새로운 곳을 둘러보고 모르던 세계를 구경하고 오는 게 설교를 듣는 건 아니잖아?”

준호는 스스로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듯한 묘한 당황감을 느꼈다. 분명 진심을 말하고 있고, 요령있게 요점을 전달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꾸만 더 할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수향에게 진심을 제대로 전달한 건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한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수향 역시 그녀대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진지하고 열성적인, 한치의 의심도 없는 준호의 태도에 수향은 한편으로는 말문이 막혔고, 한편으로는 지금 꼭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말해야돼. 여기서 더 가면 형사님이 진짜 우스워지실거야. 수향이 결심하고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문득 준호가 한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물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짓에 주의가 쏠려 끊임없이 조그마한 손수건의 끝자락을 집적거리고 있는 준호의 긴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금 준호가 이상하게도 몹시 초조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초조하면서도 불안한 듯한 이상한 긴장감이 수향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초밥이 날라져왔다. 그런데 깔끔하고 먹음직스런 초밥이 정갈하게 담긴 접시가 수향 앞에 놓이차 느닷없이 초밥 냄새가 무척 역하게 느껴졌다. 수향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어 입을 가린채 구역질을 하며 후다닥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수향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종업원이 눈치빠르게 화장실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에서 수향은 변기를 끌어안고 차라리 토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나올 것도 없었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구토감은 곧 가라앉았다.

한동안 없던 일이어서 다시 이런 증상이 나타난 게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가벼운 증상이었으므로 수향은 개의치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나아지는 과정일 것이다. 그 말은 언제나 이런 때 수향이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이었다.

수향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오자 준호는 몹시 걱정이 되었던지 화장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여 수향은 괜찮다는 뜻으로 일부러 환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내심 몹시 부끄러웠다. 준호에게는 왠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향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짐짓 밝은 표정으로 준호를 지나쳐가려는데 느닷없이 준호가 수향을 잡아세웠다. 그러더니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너 혹시...그러니까.....”

수향은 준호의 태도가 이상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수향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듯했다. 수향은 의아함에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 혹시... 남자... 친구 있니? 그것 때문에 병원에 온 거야?”

남자친구? 남자친구 때문에 병원에 오다니? 수향은 생뚱맞은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준호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준호는 차마 임신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대놓고 하지 못해, 그런 식으로 돌려서 물어온 것이었다. 그의 오해를 깨닫자 수향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게아니라 그런 증상에 시달릴 때마다 한번씩, 누가 보면 오해하겠다는 식의 자조섞인 생각을 수향 스스로도 떠올리곤 했었다.

수향의 웃음에 준호의 얼굴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형사님,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에요?”

놀림을 가득 담은 수향의 눈웃음에 그제야 준호는 긴장이 풀린 듯 멋쩍은 표정으로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가뜩이나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 해준은 또다시 양손가득 들고온 서류더미를 보태고나서 입에 물고온 종이컵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자판기 커피 한잔과 점점 줄어드는 흡연실을 찾아 헤매야 간신히 맛볼 수 있는 담배 한모금 따위의 기호식품이 제 인생의 유일한 쾌락인가 싶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자조 또한 워커홀릭이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큰 그녀에게는 일종의 달달한 위안이었다.

해준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마실 땐 항상 빨리 마시는 데만 집중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담당하고 있는 사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강력계를 지원했었던 그녀는 처음 여성청소년과로 배치받았을 때 상당히 불만스러웠었다. 본격적이고 중차대한 일은 모두 강력계나 형사계에서 맡고, 여청과는 나머지 시시한 일들이나 떠맡는 곳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여자랑 애들이나 상대하라 이건가 속으로 혼자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막상 근무를 시작하고 책상 위에 쌓인 사건 파일이 하나씩 정리되어갈 때마다 그녀의 생각은 점점 바뀌어갔다. 나중에는 여자인 자신조차 여자와 아이들을 한데 싸잡아 나약하고 부차적인 존재로 여겼음을 깨닫고 심각하게 반성하기까지 했다.

사회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불합리한 처분들과 깨닫지도 못하고 당하는 폭력들은 결국 강력계와 형사계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완전히 닮은 꼴이면서 오히려 더 심각한 것들이었다.

특히나 학교폭력은 더 그랬다. 어린 아이들은 상처를 더 빨리 회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현실적으로는 상처입은 그대로 인격이 굳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이들의 부모를 포함한 우리 사회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다들 생존에만 급급해 아무도 약한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줄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해준은 일반인들이 폭력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지켜보며 충격을 받곤 했다. 범죄 수준의 폭력과 피해자, 어쩌면 가해자 역시도 가지게 되는, 정신병 수준의 후유증에도 부모들은 종종 그런 시기가 있고, 다 지나간다는 식으로 사태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물론 그렇게 둔감한 부모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꼭 그 정반대로 지나치게 과민한 부모들도 많았다. 그리고 과민한 부보들은 대게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보다 신세한탄과 자책감에 몰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부모 역시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힘이 없어 그런 식으로 회피하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준은 들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식으로 보호자가 책임을 방기한다면, 망가졌으나 혼자서는 자신을 일으킬 힘이 없는 미성숙한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해준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청소년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관련해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아직은 꿈 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현재 치여있는 일들로만도 먹고, 잘 시간조차 부족한 판이었다. 현재 중부서에는 여성청소년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여성인력은 더더군다나 씨가 마를 판이었다. 물론 여청과의 일이 일반적으로 여성이 수행하기에 힘든 일이긴 하다. 하지만 반드시 여성이 맡아줘야할 일들이 있는데, 그마저도 감당할 인력이 없으니, 홍일점인 해준만 죽을 지경인 것이다.

해준은 입에 커피잔을 물고 교통계 이유경 순경을 떠올렸다. 그녀가 처음 여청과에 파견근무를 나왔을 때는 해준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도 힘든 일인데, 잠시 지원이나 나온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 복사나 해주고 자료나 찾아주는 정도가 고작이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유경은 웬만한 남자 형사 못지 않은 근성을 가지고 일에 달려들었다. 확실히 전문적으로 수사를 담당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는 오히려 자기보다 낫다 싶을 때마저 있을 정도였다. 특히나 어린 피해자들을 상대로 일의 경위를 캐내야할 경우가 생기면 유경이 더할나위없이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부드럽게 보듬으며 상대의 고통을 위로해주면서도, 단순히 어르고 달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때로는 과감하게 몰아붙이기도 하고, 약점을 건드리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려 정신이 피폐해진 아이들은 이미 객관성과 의욕을 잃고 아무에게나 공격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경은 그런 아이들을 여러 방향에서 적절히 자극함으로써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유경은 상담이나 심리 쪽으로 아무 경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본인 자신이 그만큼 세상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건강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유경은 원래부터가 경찰서 내에서 평판이 좋은 아가씨였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데다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성격이 밝고 예의가 발라 특히나 나이가 많은 직원들 사이에서 탐나는 며느릿감으로 꼽히곤 했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살이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경찰에 입문했기 때문에 경력으로만 따지자면 해준보다 선배였다. 그런만큼 이제 직장생활에도 이력이 나, 그녀를 보고 있으면, 사회생활이란 건 이런 거야라고 가르쳐주는 듯 자신감있는 태도가 엿보였다.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작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작은 코, 부드러운 입술이 꽤나 귀여웠고, 여러 면으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해주는 센스가 있었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또래 동료들 사이에서도 그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 함께 일하기 전까지 그런 유경을 바라보는 해준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너무나 인형 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누구한테도 싫은 소리 없이 묵묵히 시시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여자. 그런 건 해준의 기준에서는 너무나 별볼일없는 삶처럼 느껴졌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걸까. 자기 생각이란 게 있기는 할까. 저런 게 착한 여자 콤플렉스란 거겠지. 해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와 함께 일하게 되자 해준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유경은 생각보다 몹시 순수했고, 그저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해준은 왜 사람들이 다들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넘어서서 그녀와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청과에 딱 맞는 인재가 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지금 해준은 또다시 유경을 불러낼 궁리 중이었다. 이제는 파견 기간이 끝나 원래 부서인 교통계로 돌아가 있는 그녀건만, 해준은 시시때때로 여성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고 교통계에 지원을 요청하고는 했고 그럴 때마다 유경은 기꺼운 마음으로 일을 돕곤 했다.

지금 해준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일은 사흘 전에 들어온 제보 전화였다. 정식 수사 접수도 아닌, 아직 사실 확인도 안된 한통의 제보전화일 뿐인데도, 이상하게 해준은 신경이 칼처럼 곤두섰다. 그것은 학교폭력에 관한 제보인데, 이상한 점은 가해자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가해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익명의 제보자는 자신의 직업을 상담교사라고 밝혔는데, 특정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상담교사는, 목소리로 봐서 사십대쯤 되는 여성이었는데, 요즘 들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청소년 자해문제에 대해 일종의 현실진단 차원의 조사, 설문, 상담을 진행중 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자해 전력이 있는 학생 세 명의 몸에서 똑같은 별모양의 상처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건 마치 같은 도안을 보고 만든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같은 별 모양이라고 해도, 왜 제각기 다를 수 있잖아요. 펜을 종이에서 떼지 않고 한선으로 모두 그리는 별로 있고, 그냥 외곽선만 그릴 수도 있고, 불가사리 팔 수가 다섯 개나 여섯 개일 수도 있고, 아무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근데, 그 모양들이 모두 똑같이 생긴 거에요. 마치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인 아이들이었거든요. 상처 모양이나, 위치, 깊이 로 보건대는 확실히 자해흔 같았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이 흔히 스스로 문신 따위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더군다나, 같은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세 명씩이나, 서로 모르는 아이들이 몸에 똑같은 무늬를 새겼다니 이상하더라구요. 그리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별무늬가 무슨 의미를 지녔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구요. 혹시, 제 상상일 뿐이긴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짓은 아닐까요? 공식적으로 문제를 삼자니, 아이들이 완강히 부인하고 있고, 사실 딱히 의심할 만한 점이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들어요.’

해준은 그 일이 일어난 곳이 중부고등학교라는 사실만 들었을 뿐 그밖의 아무런 정도보 얻을 수가 없었다. 제보자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해당 학생들의 신상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시작해야할지조차 해준은 감이 서질 않았다. 아니, 이런 제보를 얼마나 신뢰해야하는 건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냥 무시해버려도 그만이었다. 제보자조차 반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만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기위해, 자신의 책임을 휴지통에 휴지 버리듯 전화기에 밀어넣고 끊어버리지 않았나.

그러나 해준은 그 정체불명의 전화를 그냥 무시해버릴 수가 없었다. 적어도 정말로 그런 사실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확인해야하나. 공식적인 통로로 확인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보자가 걸린다면 아무 핑계나 만들어 갖다 붙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일이 커질 수도 있다. 학교 학생 전체를 상대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운이 좋아 쉽게 원하는 걸 건진다해도 그 제보가 거짓일 경우 마무리가 애매해진다. 누군가 일을 벌린 책임소재를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해준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준호는 어젯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잠을 푹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계란 두 개로 아침을 때우고 집을 나섰다. 벌써부터 공기가 찌는 듯이 더웠고, 매미소리도 일찌감치 요란스레 울려대고 있었으나 숙면을 취한 덕에 몸이 가볍고 기분이 좋았다.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수향의 집 현관문을 한번 흘깃 바라보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준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마침 수향의 집 현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또 보는구나 싶어 준호가 픽 웃으며 내심 수향을 기다리는데 현관문을 열고 나온 여자는 뜻밖에 예지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출근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예지도 단번에 준호를 알아보았다. 멀리서부터 준호에게 웃음을 보내며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유 형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고보니 준호는 그녀의 이름도 몰랐다. 그냥 수향의 언니라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지는 수향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이었다. 키는 수향과 엇비슷했지만, 각진 얼굴형에, 쌍거풀 진 눈, 광대뼈가 솟은 서구적인 외모에, 정장이 잘 어울리는 마른 몸매를 지녔다. 준호는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뜻하지 않게 예지를 만나자 준호는 수향이 어제 일을 언니에게 상의했는지 내심 궁금해졌다.

혹시 어제 미향이한테 무슨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예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준호는 수향이 자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언니에게 직접 수향의 일을 의논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보호자인데다 언니로서 그녀가 말썽꾸러기 동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게다가 수향에 대해서 직접 묻기 곤란한 여러 이야기도 혹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죄송한데, 저녁에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향이 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순간 예지의 큰눈이 더 커졌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제 얼굴까지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예지의 반응에 준호는 자신이 실수를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아니 낯선 사이에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자신이 수향의 일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너무 성급하게 군 것 같아 예지에게 미안해졌다.

,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좀 걱정돼서... 학교를 그만뒀다고 하기에요.”

아니에요. 실례랄 건 전혀 절대 없지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그냥 수... 미향이한테 직접 하시면 될텐데요. , 그러지 마시고, 그럼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으신 거죠? 저희 집에 저녁 먹으러 오실래요?”

뜻밖의 전개에 이번에는 준호의 눈이 커졌다. 저녁식사 초대라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준호의 상식으로는 거절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여자 둘만 사는 집인데다 자신은 아직 그들 자매에게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저녁을 대접한다는 건 보통 손 가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실례를 저지르는 셈이다. 하지만 준호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준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 미향이가 집순이라서 밥도 걔가 다 하거든요. 뭐 맛은 별로 없지만... 다 몸에 좋은 것들이니까 건강식이라고 생각하고 드시면 먹을 만은 해요. , 그리고 소금을 좀 치면 가끔은 정말 맛있는 것도 있어요.”

초대 멘트인지, 축객 멘트인지 헷갈리는 말이었지만, 준호는 사실 처음부터 거절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폐를 끼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 미향이도 좋아할 거에요. 형사님을 많이 따르더라구요. 저도 미향이한테 형사님 얘기 듣고 언제 한번 식사나 같이 했으면 싶었거든요. 잘됐네요.”

준호는 순간 왠지 예지에게 켕기는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준호를 바라보는 예지의 눈빛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예지는 언제나 수향이 연애를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향은 시도는커녕 언제나 혹시 모를 그런 기회조차 피하려고 애썼다. 수향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예지는 더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런 수향이 이 남자를 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 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껏 예지가 지켜본 바로는 수향 역시도 준호와 마주치는 순간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준호야 어쨌든 수향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었지만, 준호 역시 그렇다면 그건 정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예지는 속으로 자신의 음모에 한껏 흡족해하며 출근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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