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5회 장혜란

시스앤 2019.11.17 22:36 조회 수 : 22

수향이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자 준호가 문밖에 서 있었다. 수향은 반가웠으나 준호가 무슨 일로 초인종까지 누른 것인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준호가 수향의 어깨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보며 언니는 아직 안 왔어? 하고 묻자 그제서야 수향은 오늘 저녁식사 손님이 준호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고보니 준호의 손에는 케이크상자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이 기집애를 진짜.

-오늘 저녁 식사 삼인분 예약, ? 누가 와? 손님. 누군데? 그건 알 거 없고 그냥 밥이나 차려줘,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돼. 누군지 알아야 메뉴를 정하지. 옷차림도 그렇고. 청소도 해야 돼? 그냥 내가 자리 피해줄까? 성연이네 집에 가면 되잖아. 아니, 아니 너 있어야돼. 있어야 되는 건 또 뭐야? 누군데 그래? 알 필요없어. 아무것도 필요없고 그냥 밥만 좀 넉넉히 해. 남자야? 몰라도 돼.-

오전 중에 예지와 수향 사이에 오고간 카톡 대화가 이러했으므로 수향은 예지가 새로 사귄 친구-어쩌면 남자인-를 데려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성격이 밝고 사교적인 예지는 편한 회사 동료나 헬스클럽 따위에서 만난 친구들을 이따금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준호였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제야 행간에 녹아있던 어쩐지 장난끼 느껴지는 예지의 카톡 분위기가 다시금 돌아보였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문앞에 서 있는 준호를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향은 입구를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느닷없이 그에게 집을 보이게 되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청소라도 하라고 하든지. 고민하다 결국 안 했는데. 수향은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손님 초대해놓은 주제에 지는 왜 늦어? 수향은 집에 둘만 있는 게 어색해 자꾸만 예지가 기다려졌다.

준호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섰다. 똑같은 구조인데도, 집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노란빛이 도는 벽지 덕에 내부가 넓고 환해 보이면서도, 노란색의 톤이 낮아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거실에는 소파와 티비가 없었고, 일반적으로 소파를 두는 쪽에는 그때그때 달아낸 듯한 선반이 가득 달려 있었다. 그리고 선반마다에는 책이 가득 꽃혀 있었다. 가구라고는 책상으로 쓰는 듯한 넓은 좌탁과 좌식의자 두 개뿐이었고 벽에는 건조한 느낌의 드로잉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그 외에는 여자들이 사는 집 치고는 자질구레한 장식이 없었다. 분명 인테리어에 신경을 쓴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내의 모든 물건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뿜어내는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분위기 같은 게 느껴졌다. 보기 좋게 정리해놓은 거실 가득한 책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른다고 준호는 생각했다.

주방에는 식탁이 없고, 대신 조리대 대용으로 쓰는 듯한 작은 나무 아일랜드 식탁이 하나 있었다. 주방 집기들도 물잔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하네. 부지런한가봐.”

준호가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집에서 일해서 그래요.”

?”

... . 일요. 집안일요. 제가 집에서 집안일 하니까요.”

수향은 말실수를 깨닫고 급히 둘러댔다.

왠 책이 이렇게 많아?”

책을 좋아하거든요.”

그때 방에서 화려하게 미용한 갈색 푸들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나와 자꾸만 수향의 다리로 기어오르는 시늉을 했다.

저번에도 고양이 구경한다고 넋놓고 있더니, 개도 키우고, 동물 좋아하나봐.”

동물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 녀석은 제 개 아니에요. 포키, 이리 와. 누가 여행 간다고 며칠만 봐달래서 봐주고 있는 거에요. 형사님이 낯설어서, 무서워서 안아달라는 거에요. 겁이 많거든요.”

수향은 강아지를 안아올리며 말했다. 준호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수향의 모습을 보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이들과 복도에서 장난을 치던 그때 그 표정이었다. 대여섯살쯤돼보이는 어린애 하나가 교실을 나와 혀짧배기 소리로 선생님, 하고 부르며 그녀를 쫓아오자, 수향은 뒤돌아서더니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선생님 없~,하면서 장난을 쳤다.

애 눈에도 어이가 없는 장난인지 아이는 심드렁하게 선생님, 선생님 다리 다 보이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수향이 재빨리 한손으로 무릎을 가리더니, 이제 다리도 안 보이지? 하고 킥킥거렸다. 웃지도 심각하지도 못하는 아이이 표정은 준호가 봐도 우스웠다. 정말 유치한 장난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유쾌해지는 장면이기도 했었다.

그때 현관문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지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좀 늦었어요. 와 계시네요.”

무섭게 노려보는 수향의 눈길을 무시하며 예지가 준호를 향해 생글거렸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왜 이렇게 서 계세요? 너는 손님을 세워두니? 동생이 아직 어려서... 이해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예지는 기막혀하는 수향의 두고보자는 눈짓에도 아랑곳없이 준호를 좌탁의 상석으로 안내했다. 그러더니 수향을 향해, 뭐해? 동생. 배고파 하고 말했다. , 나도 상차리는 건 도와줄게.

언니는, 뭐가 그렇게 신날까?”

수향이 주방으로 들어서는 예지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깨물고 낮게 을러댔다.

재밌잖아. 우리 미스 신이 드디어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였는데.”

니가 불렀잖아.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누가 불렀건, 니 남자지, 내 남잔 아니잖아.”

, 누가.... 너 조용히 안해? 나중에 보자.”

수향은 혹 준호에게 예지의 말이 들렸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다행히 준호는 그저 무심히 집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수향은 바쁘게 상을 차렸다. 반찬은 시금치 된장국과 단호박소고기조림, 콩나물물침, 생선구이, 두부부침, 김치가 다인 간단한 상이었다. 좌탁에 상을 차려놓고 나니 수향은 어쩐지 좀 민망했다.

형사님 오시는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더 했을텐데. 너무 먹을 게 없죠?”

나 오는 거.. 몰랐어?”

준호는 되려 놀란 눈치였다.

그냥 언니가 친구 데려오는 줄 알고, 언니는 밥보다 안주라서...”

, 내가 언제.. 그리고 이게 뭐가 간단해. 이 정도면 엄청 신경 썼구만. 나한테는 반찬 두 가지 이상 안 주면서. 그나마 국 있으면 김치밖에 안 줘요.”

내놔도 안 먹잖아.”

원래가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가족처럼 자란 사이라, 두 사람은 누가봐도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좋은 자매처럼 보였다. 준호 눈에도 마찬가지여서 준호는 미소를 짓고 수향을 향해 잘먹겠다는 눈인사를 보냈다. 수향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준호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왠지 쑥쓰러웠다. 예지는 그런 수향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힐끔거렸다. 준호가 된장국을 한 숟갈 맛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맛있다. 요리 잘하네. 간단한 음식 같은데 이런 것도 괜찮네.”

어라, 오늘은 좀 간이 맞네. , 너 손님 온다고 진짜 신경썼구나. 평소에는 물맛에 된장 냄새만 나거든요. 짠 거 해롭다고.”

예지도 된장국을 한 숟가락 뜨더니 말을 보탰다.

준호는 기분이 묘했다. 뭔가 자신이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뭘 상상했는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이런 건 아니었다. 아직 자리를 못 잡은 살림, 미성숙하고 어딘가 혼란스러운 분위기, 다소 체계없는 무질서한 생활 같은 것을 상상했었다. 급하게 다듬었다해도 그런 건 숨길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집안은 생각보다 너무나 질서정연하고 차분했다. 마치 능숙한 주부가 있는 살림집 같았다. 준호는 문득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수향을 어리고 철없게만 봤던 자신의 시선이 민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상식을 벗어나는 아이인 건가. 내 상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나. 준호는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자신이 수향의 집에서, 수향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설레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때 방안으로 숨어들어가 있던 포키가 음식 냄새를 맡고 다시 기어나와 수향의 몸으로 기어올랐다. 수향은 포키를 안고 탁자 한구석에 뒀던 간식바구니에서 닭가슴살로 만든 간식을 꺼내 입에 물려주었다. 포키는 간식을 맛있게 먹어치우자 더 달라는 듯 수향의 가슴팍을 기어오르며 얼굴을 핥아댔다.

수향이 간지러워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포키는 뺨과 목덜미를 마구 핥아댔다. 포키의 앞발에 밀려 티셔츠 목자락이 끌려내려가자 수향은 포키를 고쳐안으며 티셔츠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포키가 몸을 마구 버둥거리는 통에 원래는 풍성한 티셔츠 앞자락이 가슴께에 찰싹 달라붙었고, 포키의 몸짓 때문에 수향의 풍만한 가슴살집과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밥을 먹다 말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돼, 포키, 간식 너무 많이 주지 말랬어.”

수향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간식바구니로 손을 뻗쳤다.

그만 줘. 애 버릇 나빠져.”

얘도 여행 온 거잖아. 여행오면 좀 즐겁게 놀아야지. 맛있는 것도 먹고. 아주, 그냥, 방탕하게 놀아야지, 그치, 포키. 다시 집에 가면 절제할 거잖아. 그치? 그치?”

수향은 포키의 얼굴에 코를 비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뽀뽀를 하고 젖먹이를 어르듯 혀차는 소리를 내며서 목을 긁어주었다. 결국 간식 한 봉지를 몽땅 약탈해낸 포키는 의기양양하게 방안에 있는 제 침대로 사라졌다. 그리고나서야 수향은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준호는 사라진 포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왜 그러세요?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준호가 어색하게 머뭇대는 듯한 느낌에 수향이 불안하게 물었다. 수향의 말에 준호는 깜짝 놀란 듯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정말 맛있어. 먹고 있어.”

준호는 다시 바쁘게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사실 입맛이 좀전 같지는 않았다.

수향은 이미 싱겁게 길들어진 자신의 입맛이 못 미더워 예지의 눈치를 살폈으나, 예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보다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수향이 차와 준호가 사온 롤케잌을 내왔다. 차는 무차였다. 무말랭이를 녹차잎처럼 오일없는 팬에 덖어서 뜨거운 물에 우려내 먹는 차였다. 준호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제법 괜찮았다.

암튼 이 집에 오면 정체는 몰라도 뭐든 다 몸에 좋은 거니까. 많이 드세요. 형사님.”

예지가 차를 권하며 농조로 말했다.

특이하긴 하지만 진짜 맛있는데요. 시원하네요.”

뜨거운 물에 시원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형사님도 나이 드셨나보네요. 근데 나이 여쭤봐도 될까요?”

예지가 묻자, 준호는 서른넷입니다, 하며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예지와 수향은 다소 의외다 싶었다. 서른한둘쯤밖에는 안되보인다 싶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저는 언니 분의 성함도 모르는데.”

아참, 내 정신 좀 봐라. ... 신예지에요. 나이는 스물여덟살이구요.”

동생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시네요.”

그렇죠. 미향이가 많이 늦둥이죠.”

예지의 마지막 말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예지는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기 위해 화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형사님은 실제로 처음 뵙네요.”

대게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리고 이상한 눈으로 힐끔힐끔 보시곤 하죠.”

준호가 웃음기 띤 어조로 대꾸했다.

그건 형사님이 미남이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예지의 탁 트인 농담에 순간 준호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준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두 여자가 서로 눈을 맞추며 웃는 모습을 보자 준호는 묘하게 오기가 났다. 그래서 짐짓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것도 대게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준호는 내심 한방 먹였다고 생각했으나 예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미남이 센스까지 있으시네요. 미향이가 왜 그렇게 형사님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이번에는 준호도 정말로 당황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차를 마시는 척했지만, 준호의 몸놀림에는 당황한 기색이 완연했다. 놀란 건 수향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집애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수향의 째려보는 눈빛에도 예지는 초지일관 흔들림이 없었다.

미향이가 형사님이 진짜 멋지다고 그러더라고요.”

예지를 향한 수향의 눈빛이 내가 언제?’를 외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형사님 같은 삼촌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니까, 조카처럼 생각하고 필요하면 막 부려 먹으세요. 밥 먹으러도 자주 오시구요. 얘가 집순이에 밥순이 더해서 집밥순이라 딴건 몰라도 집밥은 항상 콜이거든요. , 그리고 맨날 집에 있으니까 택배올 때도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택배 받을 일 있으면 언제든지 미향이한테 얘기하세요. 신속 정확하게 받아드릴 거에요.”

준호는 뭔지 몰라도 왠지 예지가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가지고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준호는 뭐가 뭔지 헷갈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러러면 전화번호 알려드려야겠다. 미향이 번호 아세요? 패턴 풀어주세요. 제가 넣어드릴게요.”

예지가 거의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빚 받을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수향이 얼른 그 손을 잡아 거두었다.

언니, 어제 먹은 술 아직 안 깼어? 아니면, 너무 매일 먹다보니 오늘은 안 마신 거 깜박한 거야? 이상한 소리 그만 하고 케잌이나 먹어.”

수향이 협박하듯 목소리를 잔뜩 깔고 말하며 예지 몫의 접시 하나를 밀어주었다.

?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택배 받는 거 진짜 큰일이라구. 경비 아저씨가 잔소리는 또 얼마나 하는데. 넌 집에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하루종일 신경쓰인다니까. 사양하지 마시고, 핸드폰 주세요.”

예지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보여 수향은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으나, 준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진짜로 핸드폰을 꺼내 순순히 넘겨 주었다. 수향은 준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으나, 예지는 재빨리 번호를 입력하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와, 맛있겠다, 드세요, 하며 케잌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문득 수향 앞에도 접시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너 밀가루 안 먹잖아?”

예지의 말을 듣자 준호는 아차 싶었다.

내가 실수했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아니에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몸에 안 좋을까봐 안 먹는 건데, 한번씩은 먹어요. 오늘은 그냥 먹고 싶네요. 먹을게요.”

수향은 롤케잌을 포크로 잘라 한입 먹었다. 그리고나서는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으며 준호에게 맛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준호는 미안하면서도 다행스럽고, 그러면서도 약간 불안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지는 그런 수향과 준호를 번갈아 살피면서 말없이 케잌을 먹었다.

그 순간 예지의 머릿속은 어떤 계산으로 나름 복잡했다. 이럴 때 자리를 피해주면 정말 좋은데. 아직은 시기상조겠지. 그래, 너무 부자연스럽게 밀어붙이면 될일도 안되지. 그치만 지금 분위기, 이거이거, 너무 나이스한데. 혹시 나보고 눈치 없다고 속으로 욕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그래, 아직 수향이를 미향이로 알고 있잖아. 그것도 그렇고, 아직은 아니야. 예지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형사님, 우리 아파트에 도둑 든 거 아세요?”

예지는 수향과 준호의 표정에서 이미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도둑맞은 집이, 글쎄, 우리과 팀장님 댁이래요.”

? 그 집 형사님하고 같이 일하시는 분, 이영민 형사라고 하셨었나, 그분 누님 댁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세 사람은 얽키고설킨 관계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동시에, 세상 참 좁구나 하고 생각했다.

피해가 많이 크진 않으셨나 몰라요?”

수향이 준호를 향해 물었다.

, 그다지, 현금 약간, 금붙이 몇 개 정도.”

그럼, , 장물아비 뭐 이런 사람 털어서 범인 잡고 그러는 거에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러기에는 너무 흔한 물건이라서 불가능해요. 금괴도 아니고, 18k 목걸이 같은 걸 어떻게 찾겠어요?”

예지는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렇겠구나 싶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이건 아직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좀 뭔가 이상한 게 많아요.”

수향과 예지의 귀가 동시에 솔깃해졌다.

그게 뭔데요?”

제 사건은 아니지만, 우연히 옆에서 좀 들었는데, 목격자가 있다나봐요. 뭐 그냥 빈집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정도긴 하지만, 그게 좀 이상해요. 피해자가, 그러니까 그 예지씨 회사의 팀장님이라는 분이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큰방, 욕실 문은 열려 있었는데, 작은 방, 그러니까 복도로 창문이 난 방 있잖아요. 그 방문은 닫겨 있었대요. 그 방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듯 깨끗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상한 목격자가 목격한 불빛이 작은 방의 불빛이었다는 거에요. 이상하잖아요. 도둑이 들어서 큰방을 털었다, 작은 방을 털려고 문을 열고 불을 켰다, 그런데, 학생 방이라서 별것이 없을 것 같아 그만뒀다. 그리고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불은 들킬까봐 껐다치더라도, 굳이 방문을 닫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실제로 다른 문은 다 열려 있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는데, 신발 한짝이 문에 끼워져서 그렇게 된 거였다더군요. 그것도 이상하죠. 대체 왜 신발짝이 문에 걸려 있게 된 걸까요?

세 번째로 이상한 건, 바닥에 신발 자국이 없었다더군요. 신발자국이 안 생길만한 신발을 신었거나, 신발을 벗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 팀장님 굉장히 깔끔하신 분이었나봐요. 바닥이 아주 깨끗했다더군요. 아무래도 신발을 벗었다고 보는 게 맞을 텐데. 그것도 이상하죠. 도둑은 보통 신발을 안 벗거든요. 그래서 내부에서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면식범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된다는 소견도 있어요.”

신발을 벗은 듯하다는 것 말고 앞의 두 가지 경우는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도둑이 급히 나가다가 실수로 신발을 걷어찼다거나.”

예지가 미심쩍은 어조로 물었다.

뭐 그렇긴 하죠. 그렇지만, 제가 만약 도둑이라면 딴 건 몰라도 나가면서는 굉장히 조심했을 것 같은데요. 문 소리나지 않게 천천히 살짝 닫고, 티 안나게 잘 잠겼는지 확인도 하고요. , 안 그럴 수도 있긴 하죠. 예지씨 말처럼. 사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낭 느낌이 좀 이상할 뿐이죠.”

면식범 소행이라면 뭘 노린 걸까요? 현금 약간, 금목걸이 정도? 없어진 건 그것뿐이라면서요?”

수향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 그것도 좀 이상해. 면식범이라고 돈을 노리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약소해. 돈을 노리고 아는 집을 털 정도면, 그 집에 뭔가 큰 게 있다는 걸 알거나 하는 경우가 보통 아닐까? 게다가 면식범이면 아마추어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마추어가 절도를 결심하려면, 그 보상이 좀 커야하잖아.”

그러네요. 여러 가지로 뭔가 좀 이상한 사건이네요.”

수향이 팔짱을 끼며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준호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현장 사진이 있는데, 한번 볼래?”

봐도 돼요? 남의 사생활인데...”

별거 없어. 그냥 혹시 뭐 놓친 게 있을까 싶어서. 눈이 많으면 보는 것도 많아지잖겠어.”

준호가 화면에 사진을 띄워 수향 쪽으로 밀어주었다. 수향이 휴대폰을 쥐자, 예지가 얼른 수향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수향은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겨가며 주의깊게 들여다보았으나, 역시나 별로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프로들이 못본 걸 내가 어떻게 보겠어. 수향은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 이거 진짜 팀장님 옷들 맞네. 지난 주에 입었던 샤넬 원피스야. 이 프라다도 자주 입는 거고, 이 회색 정장 되게 탐나던데. 어디 건지 모르겠어.”

작은 방 사진도 있네요. 거긴 손 댄 거 없다면서요?”

그냥 혹시 몰라서.”

어머, 얘는 책도 많이 보나봐. 얼굴도 예쁜 애가 교양까지 있으면 너무 완벽한 거 아니야?”

요즘 애들 책이야 다들 집에 쌓여 있지. 그걸 읽는지는 의문이지만.”

이건 본인 컬렉션이에요. 제법 책을 보나봐요.”

수향의 말에 준호가 잠시 멈칫 했다.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 있는데요. 취향이 보인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른 건 그만두고라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같은 책을 부모가 사주겠어요? , 김영하도 나름 수능 리스트긴 하지만요. . 딱 보니까 김영하빤데, 아무래도 나파권에 자빠진 거 같네요. 사강에, 클림트 화집에. 다비드도 있고, 취향이 좀 하드한 쪽인가봐요.”

잽싸게 책꽂이 주인의 독서경향을 읽어내는 수향의 표정과 말투가 평상시와 너무 달라 준호는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눈빛을 반짝이며 매료된 듯 서가를 탐닉하는 수향의 표정은 사탕을 빠는 어린아이같기도 하고, 매력적이고 자신감있는 여인 같기도 했다.

진짜 책을 좋아하나보네?”

문득 준호가 등 뒤로 가득 꽃혀 있는 책들을 돌아보았다.

준호가 꽃혀있는 책들을 대강 훑어보니, 대개는 낯선 작가의 소설집이나 시집이었지만, 난해해 보이는 인문학 서적도 제법 보였다. 프로이트는 전집으로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도 보였다. 게다가 소설책이라고는 하지만, 준호로서는 제목만 들어도 벌써 잠이 올 것 같은, 세계문학전집따위에 꼭 끼여있는, 그래서 이름과 제목만은 너무 익숙하지만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도 고루 포진해 있는 듯했다.

이런 책을 정말로 읽어?”

안 읽은 게 더 많아요. 읽지도 못할 책을 충동구매하는 게 병이라서요.”

그러다 문득 준호는 자신의 바로 아래쪽에 선반 하나 가득 꽂혀 있는 동화책을 발견했다.

동화책은 또 왜 있어?”

수향은 내심 찔끔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동화책도 볼만한 게 많아요.”

동화를 읽는다고? 고등학생이? 그게 재밌어?”

안돼요. 형사님. 제발 그 말만은.”

준호의 말에 예지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수향의 동화작가로서의 오기가 또다시 발동했다.

동화가 어때서요? 형사님이 봐도 어려울 그런 작품도 있어요. 동화 쉽게 보면 큰코 다치실 걸요.”

또 시작이다.”

동화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수향이 오기를 부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이런 풍경은 예지에게 이미 식상한 것이었다.

준호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픽, 헛웃음을 웃었다. 수향은 순간 머릿속에 동화의 자존심을 지켜줄만한 책 한권이 떠올랐다. 수향은 눈을 빛내며 묘한 표정으로 준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하고 내기 하실래요?”

내기?”

동화책 한권 보여드릴테니까, 그 책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한번 설명해보세요. 못하면 형사님이 지시는 거죠. 읽는 데 이십초도 안 걸리는 책이니까. 오분 드릴게요. .... 맥주 내기 어때요?”

순간 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차, 싶었다. 수향은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저 이런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는 흔한 상품을 떠올린 것뿐이었다. 술은 예지가 좋아하니, 자신은 맥주 한잔 정도만 마실 생각이었던 것이다.

... 그러니까.. 맥주 한잔 정도는 요새 음료수 아닌가요?”

수향은 말을 뱉어놓고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 말걸 싶었다. 다행히 예지가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하는 거니까. 너도 이제 다 컸는데, 한잔 정도야 뭐. 괜찮지.”

예지는 어색하게 수향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예지의 도움은 아니 준만 못했다. 준호의 표정이 볼만했다. 대놓고 문제가정의 문제아라더니, 하는 얼굴이었다.

술은 좀더 기다렸다 배우는 게 좋겠다. 그건 패스하고 뭐 다른 거 아무거나 걸어.”

그러나 수향은 따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래요. 아무거나 해요. 부탁 하나 들어주기. 바쁠 때 퀵서비스 심부름 같은 거. 어때요? 오케이.”

수향과 준호는 둘다 수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나서 수향은 곧장 책을 찾기 위해 준호 쪽으로 다가왔다. 동화 선반이 준호 바로 등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향이 거의 준호와 어깨를 부딪힐만큼 가까이 왔으나, 준호는 자리를 비켜주지않았다. 긴장으로 얼어붙어 미처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향이 불편한 동작으로 간신히 책을 꺼낸 뒤 곧장 준호에게 넘겨주었다.

저 창문에 뭐가 보이지?“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하드페이퍼에 큼지막한 그림 몇장뿐, 글씨도 별로 없는, 동화책 중에서도 아주 어린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 같았다. 아무려나 준호는 책보다 바로 옆에서 흥미진진하게 자신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는 수향이 더 신경쓰였다. 준호가 그녀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안그래도 긴장이 되는 판에, 수향이 준호의 옆으로 바짝 붙어왔다. 준호와 함께 책을 들여다보다가 이따금 몹시 재밌다는 듯 준호의 얼굴을 살폈다. 아기 분냄새 같은 수향의 체취와 보드라운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지 않고 있는데도 수향의 조용한 호흡까지 모조리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기에 집중해야 했다. 아무리 동화책이라고 해도 수향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준호가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애쓰며 동화책을 넘겨보니, 내용이 아주 간단했다. 첫 페이지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고, 두 번째 페이지에는 그저 작은 구멍만 하나 뚫려 있었다. 그리고 글은 저 창문에 뭐가 보이지?’라는 한 문장 뿐이었다.

책장을 넘기니 구멍이 뚫린 페이지에는 그림없이 저 창문에는 눈이 보이네라고 적혀 있었고 옆 페이지에는 입구가 물결무늬이며 전체적으로 동그란 형태인 어항에 물고기 세 마리가 놀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구멍뚫린 종이를 사이에 두고 돼지 한 마리와 장미꽃다발, 눈을 동그랗게 뜬 토끼와 헬리콥터, 우악스러운 곰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림과 도너츠, 새끼를 부르는 듯한 어미 고릴라와 어미를 향하고 있는 새끼 고릴라가 짝을 이루고 있었다.

순간 준호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게 뭐지? 생각만큼 내용이 곧바로 들어오지 않는데 내심 당황한 데다, 옆에서 그런 준호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는 수향이 신경쓰여 준호는 자꾸만 집중이 흩어졌다. 아주 희미하게 뭔가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느낌이 무척 고약했다.

삼분 남았습니다, 이분 남았어요, 일분 남았어요. 시간이 되자 수향은 땡, 하고 외치며 얄짤없이 책을 뺏어가 버렸다.

자 이제 설명해보세요. 책 내용이 뭐죠?”

준호는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조금만 시간을 더 주면 알 것도 같은데....”

안돼죠. 세 살짜리가 보는 책인데, 시간까지 넘치게 드려도 못 맞추면, 형사님 체면에 자존심 상하실 거 아니에요.”

준호는 능글능글 놀려대는 수향의 말에 약이 오르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수향 때문에 혼란스러워 더 집중이 안 되었던 것을 말하지 못해 억울하기도 했다. 정말로 뭔가 이미지 같은 게 잡히려는 찰나에 책을 뺏겨 버린 것이었다. 조금만 더 집중했으면 맞출 수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 억울했다. 준호는 책 내용을 다시 머릿속으로 되새겨보려했으나, 복잡한 기분 탓에 이제는 아예 책내용이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준호는 창피한 나머지 한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그래, 졌다. 이제 말해줘. 답이 뭐야. 대신 만약 그 답에 내가 납득을 못한다면 그럼 니가 이건 것도 아닌 거야.”

수향은 책을 돌려주며 한껏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설명해줄테니 잘 들으세요. 유준호 어린이. 정답은 인간의 다섯가지 감각이에요.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 유준호 어린이, 혹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수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호는 이마를 탁, 쳤다. 수향의 말은 간단 명료하면서 동시에 명백한 것이었다. 준호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몹시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로 몹시 유쾌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향이 책을 제자리에 다시 꽂아두고 멀어져가자 그 즐거움이 다소 줄어드는 듯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예지는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참 재밌어들 하네,하는 얼굴이었다. 진작에 그냥 자리 피해 줄걸 그랬나.

 

영민은 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한솔의 차를 얻어타고 누나인 영진의 집으로 왔다. 술을 한잔 한 탓에 차를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솔은 준호가 한동에 산다는 얘기를 듣더니 몇 동이냐고 물으며 영민을 바로 앞까지 태워다주었다. 영민이 고맙다는 손인사를 보내고 내리려는 찰나, 출입문에서 수향이 밖으로 나왔다.

어라. 미향씨네.”

한솔은 영민의 말에 수향을 흘깃 보더니 다시 자세를 고치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라, 어디서 본 얼굴인데.”

한솔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침내 수향을 알아보았다.

미향씨 알아요? 하긴 봤을 수도 있겠네.”

걔 맞지? 맞네. 맞아. 이름이 미향이야? 잠깐, 근데 너는 쟤 어떻게 알아? 그날 너 안 왔잖아.”

한솔은 팀전체가 참숲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갔던 날 영민이 불참했던 것을 떠올렸다.

뭔 소리에요? 유형사님이 벌써 소개시켜줬어요? , 나한테는 닳을까봐 쳐다도 못 보게 하더니,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유형사님이? 유형사님이 왜?”

왜긴, 자기 애인이니까 그렇지.”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한솔이 펄쩍 뛰어도 영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유 형사님 열나게 작업하는 거 다 봤는데 뭐. 내가 딴 건 몰라도 연애촉 하나는 홈즈잖아요.”

영민은 준호가 지나가는 말로 짐짓 무심한 척하며 여자 집에 갈 때는 뭘 가져가야하냐고 물어온 일이 떠올랐다. 그때 영민이 짖궂게 왜요? 디데이야?“하고 물었다가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민은 화를 내는 준호의 얼굴에서 한편 쑥스러운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솔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와트슨이구만.”

, 내가 봤다니까요. 내기할래요?”

그래, 내기 하자. 너 쟤 몇 살인 줄 아냐?”

그제서야 영민이 멈칫했다.

몇살인데요?”

고등학교 일학년이란다.”

~!”

영민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조카인 아라와 동갑인 셈이었다. 그러니까 완전 어린애라는 뜻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제아무리 예쁘다곤 하지만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아 여자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제 조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민은 한참만에야 겨우 웅얼웅얼 혼잣말을 했다.

형사님보다는 좀 어리겠다 싶긴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어려보이지는 않던데.... , 무지하게 조숙하네. 진짜에요? 진짜 고1이야? 어떻게 알았어요?”

영민이 뭔가 미심쩍은 듯 거듭 물었다.

그때 보육원 봉사활동 가서 봤어. 유 형사님도 그때 처음 봤을걸. 그때 거기 봉사활동 나와있더라고.”

영민은 또다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다 중얼거렸다

아닌데... 분명히 뭐 있던데. 진짜 내가 잘못 봤나. 그럼 여자집에 간다는 건 또 뭐야? 딴 여잔가?”

 

준호가 수향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이틀 뒤, 둘은 또 일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짐짓 무심한 척 수향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문득 준호는 수향 옆에 모여 서 있는 교복 입은 여자애들에게 시선이 갔다. 그런데 그중에 한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많이 본 얼굴이었다. 곧장 준호는 그 여자가 같은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순경임을 알아보았다.

준호는 놀란 나머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놀란 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듯했으나, 순간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모르는 척하라는 사인인 듯했다. 준호는 내심 잠복인가보다는 짐작이 들었지만, 너무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차림을 한 경찰을 마주치니 놀라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의아하기도 했다. 때문에 수향에게 인사를 하려했던 걸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탔다. 그런데 한편 수향은 점점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준호는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오고, 다정하게 대해주던 사람이 묵묵히 딴전을 피우고 있으니 수향은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준호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준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수향은 거울 속에서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준호를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수향이 가만히 눈치를 살피니 이따금 아닌 척하며 그쪽으로 눈길을 주는 건 준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수향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혹시 서로 아는 사인가? 아는 사이라면 왜 굳이 모르는 척하는 걸까.

형사님, 우리 언니한테 할말이 있다고 하셨다면서요?”

어젯밤 준호가 돌아간 뒤 예지는 수향이 마침내 무덤덤해질 때까지 실컷 놀려대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근데 참, 유형사님 할말이 있다고 했었는데,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준호는 무심결에 여학생 쪽을 흘깃거리더니 얼버무렸다.

... 그랬지. 그래, ,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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