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8회 장혜란

시스앤 2019.11.26 12:37 조회 수 : 76

해준이 게장을 바작바작 씹으며 빈정거리자 영민이 밥알에 뒤발한 곤드레 한 줄기를 집어 먹으며 맞장을 떴다.

형사님은 나만 보면 자꾸 바람둥이 취급하는데 뭐 찔리는 거 없으세요?”

없어.”

워낙에 선머슴 같은 성격인데다 보통의 여성들과는 관심사가 전혀 달라 어릴 때부터 해준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런 해준이 멋지다며 이성친구처럼 일방적으로 따르는 여자친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준은 그런 친구들과는 그다지 우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해준은 남자들과 남자들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사나이들의 우정을 나누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남들 눈에 해준에게 남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해준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남자들도 처음에는 해준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대개는 자기들보다 술도, 담배도, 기도, 심지어 욕도 센 해준에게 곧 질리게 마련이었다. 물론 해준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매니아들도 없지 않았고, 해준답게 걸리는 대로 연애도 화려하게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얘기였다. 어릴 때부터 항상 뭐든 빨랐고, 뭐든 제대로 해봤다. 이제는 세상도, 남자도 웬만큼 알 것 같고, 더 이상 지지부진한 인간관계 따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해도 좋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옛말 그른 거 없지. 안됐네, 엑스가 안 좋은 일을 당해서.”

영민이 밥숟가락을 내던질 듯이 움켜쥐고 해준을 째려보았다.

얼굴도 모르는 애에요. 친구 후배래요. 일이 어떻게 되가냐고 묻습디다. 됐습니까?”

누가 물어봤어? 안 궁금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모는 거, 그게 묻는 거죠. 여자들은 이상하다니까, 궁금하면 직접 묻지, 왜 자꾸 말을 꼬나.”

말은 니가 먼저 꺼냈어.”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다가 준호가 불쑥 물었다.

뭐 딴 건 없습니까?”

해준은 문득 항상 진지하게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준호답다는 생각을 하며 제 휴대폰을 끄집어내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게, 천행으로 현장을 건졌어요. 그날따라 청소원이 늦게 출근을 했다나요.”

준호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사진을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바닥에는 맥주병과 소주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침대는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것치고는 잘 정돈되어 있는 듯했지만, 여자가 만취한 상태였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수향도 호기심에 준호 곁에서 사진을 넘겨보았다. 화장실은 별다른 게 없이 깨끗했다. 휴지통 속의 내용물을 신문지 위에 쏟아놓고 찍은 사진이 보였다. 거기에는 휴지조각과 둘둘말린 휴지들이 한가득이었고, 포개진 종이컵 두 개가 한번에 구겨진 듯한 모양으로 버려져있었다. 수향은 속이 울렁거려 입맛이 싹 달아날 지경이었다. 세상에, 식사자리에서 이런 사진을 보다니, 정말 직업병자들이군.

하룻밤에 무슨 휴지를 이렇게 많이 써요?”

수향은 별생각없이 말했으나 그 말에 모두들 순간 어색해졌다. 심지어 준호는 먹던 음식에 사레가 걸려 잔기침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반응에 뒤늦게 자신의 말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졌음을 깨닫고 수향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 하지만 이건 화, 화장실 휴지통인데...”

그러나 더듬거리는 수향의 순진한 반응이 오히려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다. 영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넘어갈 듯 웃어버렸고, 해준도 야릇한 표정을 지었으며, 불쌍한 준호는 또다시 사례가 걸려 얼굴이 벌게지도록 기침을 했다. 수습불가능한 상황을 깨닫고 수향은 얼른 정신을 차려 말을 돌렸다.

“... 근데... 저 종이컵은 뭔가요?”

해준이 은근한 미소를 감추며 짐짓 무심하게 대꾸했다.

양치컵으로 썼겠지 뭐.”

양치컵이면 하나만 써도 되고, 각자 썼대도 각자 버렸을 텐데, 왜 포개져있죠?”

누군가 한꺼번에 버렸겠지.”

“...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수향은 순순한 대답과 달리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자기도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화장실에 놓인 두 개의 종이컵이라... 그래, 한꺼번에 버렸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 혹시... 콘텍트렌즈 통... 대용... 이라면요?”

모두의 눈이 동시에 반짝 빛났다.

아직 이 증거품들 남아 있나요? 검사해보면 담았던 내용물이 뭔지 알수 있나요? 이를테면 렌즈 보존액이라든지...”

해준이 흥분해서 수향의 말을 가로채듯 이어나갔다.

만약 여자가 렌즈를 꼈다면? 그런데, 그걸 여관에서 뺐다면? 그렇다면 바로 나오려고 했다는 건 좀 말이 안 되지?”

해준이 잠시 머리를 굴린 뒤 수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볼 만하겠네. 미향이가 한건 한 것 같은데?”

아직은 그냥 상상인데요, .”

수향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서인지 다들 입맛이 나는 듯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러나 막상 한건 올린수향은 기분이 좋았음에도 한번 달아난 입맛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계속 식사를 깨작거렸다. 그런 수향을 지켜보던 준호가 문득 조기살을 발라 수향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왜 그렇게 못 먹어. 더워서 그런가 얼굴도 안 돼보이고. 많이 먹어.”

영민이 눈을 껌벅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조기살을 발라 해준의 밥그릇에 놓아주었다. 해준이 거의 험상궂게 영민을 째려보자 수향은 민망해서 어쩔줄을 몰랐으나, 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다시 조기살을 발라 수향의 그릇에 놓아주고, 반찬이 너무 멀지, 하며 수향과 대각선 자리에 놓여있는 반찬을 집어주기까지 했다. 그런 준호를 보더니 영민은 일부러 해준 코 앞에 놓인 반찬까지 이것저것 집어서 해준의 밥그릇에 담아주었다. 대놓고 준호를 놀리는 듯한 영민의 짓거리에, 이제는 둔감한 준호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텐데도, 의외로 그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집어준 반찬을 먹는 수향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해준은 마치 영민이 자신의 밥그릇에 참기름을 때려부은 듯한 표정으로 쌓인 반찬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먹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영민은 왜, 비빔밤에는 역시 참기름을 많이 넣어야 많있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이 더워 그런가, 하도 술을 마시고 다녀 그런가, 형사님도 얼굴이 안돼 보이네요. 많이 드세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준호는 수향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은 왜 준호가 굳이 자신의 차를 따로 끌고 왔는지 깨달았다. 준호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올 때처럼 갈 때 역시 해준은 영민의 차를 타고 돌아갔다. 함께 돌아가는 차안의 분위기는 그러나 올 때와 사뭇 달랐다. 영민은 아라의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고, 해준은 수향에게 받은 인상을 되새기고 있었다. 인상이 순하고 맑은 데다, 말투에서 착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조숙한 나머지 좀 영악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나이답지 않게 너무 노련하다 싶은가하면 어떤 때는 오히려 지나치게 천진하달까, 그러면서도 그 불균형이 매력적이었다. 아무생각없이 휴지 얘기를 꺼내놓고 당황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해준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알 건 아나 보지. 아무튼 분명 보기 드문 타입이였다. 자신을 감추려고도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 순진하지는 않지만, 순수한 느낌, 왠지 준호와도 닮은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어딘가모르게 잘 어울려보여서 해준은 조금 심술이 났었다. 그래서 준호도 그 아이에게 호의적인 건가, 해준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준은 문득 영민이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카 일 때문이라는 짐작이 들자, 영민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게다가 나름 내색을 않고 밝게 굴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의외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영민이라면 틀림없이 엄살을 부리며 엉기려들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민은 그저 묵묵할 뿐이었다.

왜요? 자꾸 보니까 은근히 잘생겼죠? 아니지, 나 대놓고 잘생겼지 참. 내가 유 형사님만 아니었어도 우리 서에서 베스트였을텐데. 학교다닐 땐 원석이 형한테 치이고 회사 오니까 유 형사님 치이고, 난 왜 이렇게 이인자 인생인지.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노 형사님이 그동안 제대로 감상을 안해주니까 솔직히 은근히 서운하더라고요. 제대로 보니까 어때요?”

분명 그냥 생각없이 까부는 것 뿐인데, 왜 갑자기 생각이 깊은 애처럼 보이지. 꼭 일부러 밝은 척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아니야, 이 촐랑이가 그럴 리가 없어. 그래. 착각이야. 얜 그냥 조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일부러 자극적인 농담을 던졌건만, 해준이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자신을 힐끔힐끔 보기만 하자 영민이 또다시 농담을 던졌다.

뭡니까, 그 질척한 눈빛은? , 혹시 꽃힌 거야? 이 놈의 인기는 정말...”

분명 아무나 걸리라고 되는대로 막 던지는 건데, 왜 갑자기 이놈이 부끄러워서 이런 식으로 눙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부끄러워? 이 놈이? 말도 안돼. 내가 지금 동정심 때문에 눈에 뭐가 씐거야. 맞아. 내가 원래 쓰잘데없이 동정심이 많잖아. , 이렇게 속이 여린데 왜 아무도 몰라주지?

뭐야? 진짜야? ...아직 시간 있는데, 그럼 우리 어디 잠깐 쉬었다 갈까요?”

해준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며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 진짜 가자 그러면 막상 가지도 못할 게, 까불기는.”

뭐야? 내가 왜 못가?”

그래, 이놈은 치마만 둘렀다하면 아무나 따라나설거야. 맞아, 그런 놈이야.

진짜? 진짜? 진짜 간다?”

“...내가 니 친구냐?”

진짭니까?”

해준이 영민의 머리를 제대로 쥐어박았다. 놀란 영민이 잠시 움찔하는 틈에 차가 휘정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뒤에서 스포츠카 한 대가 클랙션을 울리며 추월해갔다.

아이씨. 이 여자가 미쳤나, 진짜. 운전하는데, 큰일나려고.”

? 이 여자? 너 당장 그놈의 말버릇 안 고치면, 오늘 진짜 사고날 줄 알아.”

 

두 사람을 보내고 나서 준호는 수향을 차로 데려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왔다갔다하려면 시간이 걸릴텐데요. 그리고 안 데려다 주셔도 되는데...”

수향이 다시한번 사양했으나 준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경쓰지마. 오후 회의 때까지만 가면 돼. 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찻집 많아. 좀 걷자.”

그렇게 준호와 수향은 나란히 오후의 한산한 거리를 걷게 되었다. 그곳은 요즘 들어 고풍스롭고 특이한 분위기로 젊은층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곳이었다. 옛날물건들을 취급하는 가게 사이사이로 작고 아기자기한 액서서리 가게나 옷가게, 음반가게, 서점, 그밖에도 특이한 아이템을 취급하는 가게들도 많아 볼거리가 많았다.

수향은 거리 분위기에 빠져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본인의 치장에는 서툴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수향은 그래도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은 무척 즐겼다. 준호는 그런 수향을 살피며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준호의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수향을 향했다. 볼수록 예쁜아이였다. 그것은 단순히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총명하고 단단하게 여문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들이 느끼는 일종의 흐뭇한 기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못생긴 아이라도 엄마눈에는 예쁜 자식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수향은 외모도 준호의 마음에 들었다. 수수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고 여성적인 얼굴, 차분하고 지적인 행동거지, 말투. 그 흔한 엑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고, 화장기도 전혀 없는데다 청바지에 남방차람인데 저 애는 어째서 저렇게 여성스러워보일까 준호는 그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린데. 준호는 문득 나중에 결혼을 해서 딸을 낳는다면, 이런 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결혼이란 걸 하기는 할까. 그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낯설음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해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났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끌려나간 선자리에서 만난 여자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동안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수향은 문득 지나가는 여자들의 시선이 자주 준호에게 머무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덩달아 시선을 받게된 수향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에게도 이런 허영이 있었나 싶어 수향은 기분이 좀 묘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준호는 멋진 남자였다. 사실 그녀 자신부터도 준호의 외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수향은 새삼 처음 준호를 만났을 때가 떠올라 무의식중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순간 미묘한 어색함이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갈라놓았다. 잠시 딴전을 부리던 준호가 마침 조용해보이는 찻집을 발견하고 수향을 이끌었다.

수향에게는 리더십 있는 준호의 성격이 새삼 돋보이는 듯했다. 오가며 간단한 대화만 나눌 때는 부드럽고 자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밖에서 만난 준호에게서는 의외로 강단이 느껴졌다. 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배려와 마이웨이가 반반씩 섞인 준호의 과감한 애티튜드에서는 묘한 균형감각이 느껴졌다. 세상도, 사람도, 자기자신도 모두 한꺼번에 다룰 줄 아는 노련함이라고 해야 할까. 수향은 팀 사람들도 그를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의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득 수향은 빌라도 그런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아메리카노를, 수향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두 사람은 즐겹게 별로 긴요하지 않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사람들이 나누는 그저그런 잡담들이 언제나 시시하게만 느껴졌던 준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쓸데없는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때로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 같았다. 준호는 계속해서 과장된 농담을 하며 수향을 웃기려고 애쓰는 자신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말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수향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래서 영민이 놈이 맨날 그렇게 여자들 붙잡고 쓰잘데없는 잡담을 늘어놓는 건가.

수향 역시 준호와 비슷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친구도 많지 않고 사교생활도 거의 없다시피한 그녀였지만, 그런 자신의 생활이 지루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녀는 자신의 삶이 좀 삭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저귀는 새들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준호는 그동안 맡았던 사건들 얘기며, 팀사람들 얘기를 늘어놓았고, 새로운 세계에 흥미를 느낀 수향의 질문도 계속 이어졌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덧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점점 사적인 내용으로 옮겨갔다.

형사님은 왜 혼자 사세요? 원래 집은 어디에요?”

북부야. 멀어서 불편해서 따로 나왔어. 언제부터 언니랑 둘이 살았어?”

언니 대학 가면서요. 형사님은 형제는 없어요?”

, 누나 하나씩 있고 내가 막내야. 형은 지방에서 은행 다니고, 누나는 결혼해서 지금은 매형 해외근무 때문에 뉴욕 가 있어. 그래서 귀찮아. 어머니가 지금 나밖에 관심가질 데가 없어서. 형도 결혼했고. ...조카도 있고, 형수도 같이 은행 다니고. 년 나중에 뭐 하고 싶어? 장래 희망 같은 거 없어?”

수향은 피식 웃고 말을 돌렸다.

형사님은 왜 형사가 됐어요?”

아버지가 경찰이었는데, 어렸을 땐 그게 싫었어, 너무 바쁘셔서. 그런데 막상 진학할 때 되니까 회사생활은 싫고, 골치 아픈 것도 싫고, 이상하게 그거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 ”

경찰대학 가신 거에요?”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잘 하셨네요.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 잔소리를 하시는가봐요. 본인이 공부 잘해서.”

준호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지는 듯하더니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놀리는 수향의 표정을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 정말, 한번씩 모르겠다. 진지하고 성실한 애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심각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애 같고. 생각이 없는 거냐, 천하태평인 거냐?”

글쎄요. 저도 그게 진짜 궁금해요. 신미향이 생각이 없는 건지, 천하태평인 건지, 저도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준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향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그를 놀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서도 수향은 짖굿은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다음주면 진짜 미향이 서울에 올라올 예정이었다. 그러면 수향은 그 녀석을 준호 앞에 세워놓고, 이 녀석이 진짜 말썽쟁이 신미향입니다, 하고 인사를 시킬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제 이런 식으로 준호의 관심을 받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수향은 자신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보호자나 그에 준하는 사람의 훈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한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준호는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다. 아마도 지금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완전히 차가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사람을 속였다, 그것도 너무 오랫동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반듯한 준호의 성격상 더더구나 용납이 안될지도 몰랐다.

수향은 그런 생각을 하자 이상할만큼 마음이 허전했다. 수향은 자신이 정체를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그냥 이대로 어린애처럼 계속 준호의 간섭과 관심을 받으며 지내고 싶었다. 어쩌면 여태껏 아무말않고 준호 앞에서 어린애인 척한 것도 사실은 그래서인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마 말이 안 나온다는 건 다 핑계였나. 수향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자신을 아는 척도 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느닷없이 수향의 표정이 변한 것을 준호도 느꼈는지 세심하게 수향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수향은 얼른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어른을 놀린 반성을 좀 하는 건가?”

준호가 농담을 하는데, 수향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수향이 꺼내보니 발신자는 서준이었다. 수향이 준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래, 서준이구나, ... 아니야,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데, 자꾸 일이 생겨서 정신이 좀 없었네. ... 그래, 나야 괜찮지. ... 그래,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됐어, 만나면 알게 될거야. 아참. 그러지 말고 너 방학이니까 평일에 시간 되지? 그냥 집으로 올래? ... 다음 주 화요일 쯤? ... 점심먹지 뭐... 그래, 그래, 나 지금 밖이거든. 또 통화하자. . 알았어.”

수향은 진짜 미향을 소개시켜줘야할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진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그 웃음을 준호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누구..?”

? , 친구요.”

“... 친구? ... 남자... 애 같은데?”

.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얼마 전에 우연히... 암튼 웃지 못할 일이 좀 있었죠. 나중에 기회되면 말씀 드릴게요.”

진짜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수향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 남자애를... 집으로 불러? ... 평일이면... 언니도 없을텐데.”

그제야 수향은 준호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향은 그때쯤 미향이 집에 와있을 테니 미향과 만나게해주고 자신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먹을 거나 만들어주면 딱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 뿐이었으나, 준호로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요. ... 다른 친구도 올 거에요.”

수향이 잠시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준호는 그녀가 뭔가 둘러댄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이 그랬지만 준호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는데, 그는 사실을 알길이 없었다. 준호는 뭔가 묻고 싶었으나 뭘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어 준호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기타를 든 가수가 가게 한켠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 올랐다. 안경을 쓴 회사원처럼 생긴 남자 하나가 외모와는 달리 감미로운 목소리를 뽐내며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불렀다. 수향의 시선이 그 가수에 고정되자 준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기타는 신형사가 잘 치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악기를 잘 다룬다는 말에 수향은 호기심이 생겼다.

신 형사님이 누군데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 저렇게 적당히 반주나 맞추는 수준이 아니야. 뭐 나야 잘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 한번 봤는데 프로 기타리스트 뺨 치겠더라고. 학교 다닐 때 기타밴드 동아리 회장도 했었다데. 영민이랑 그때부터 알았다더라고. 둘이 친하거든.”

이 형사님요? 그럼 이 형사님도 기타 치세요?”

“...보지는 않았지만, 동아리였다니까 그렇겠지.”

, 멋있겠다. 한번 봤으면 좋겠네요.”

수향이 감탄하자 준호는 괜히 심술이 났다. 안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터라 엉뚱한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되게 좋아하네. 그럼 기타 잘 치는 남자친구 만나면 되잖아.”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나중에 대학가서 기타 동아리 같은 데 들어봐. 그런 데 가면 저 정도는 발에 차여.”

수향은 준호의 말에 그저 웃기만 했으나, 준호는 점점더 화가 났다. 자신이 듣기에도 치사하고 심술궂은 꼬투리에 저 아이는 왜 하도 안 내는 걸까, 싶었다. 괜히 자기만 속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준호는 억울했다.

생각할수록 그건 분명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저 나이면 남녀관계를 모를 나이도 아닌데, 순진한 것도 아니고, 대체 뭐야. 사람도 없는 집에 남자애를 끌어들여? 백번 양보해서 저야 아무 생각없다손 치더라도, 남자애 입장에서는 절대 그럴 수가 없을 터였다. 준호로서는 그 나이때의 남자애들이 어떻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예 멍청한 애 같으면 이해나 되지.

준호는 생각을 거듭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으나 한번 타이밍을 놓치니 이제와 뒤늦게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분명 어른으로서 단속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처음부터 세게 나갔어야 했는데... 근데, 그 서준이라는 애는 기타 칠 줄 아냐, 는 말이 순간적으로 준호의 입에서 나올 뻔 했으나 다행히 준호는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모르긴하지만 뭔가 굳어진 듯한 분위기에 수향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음악을 감상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모습에마저 준호는 약이 올라 괜스레, 그동안 빨대로 휘젓기만 할뿐 입도 안 대고 있던, 이미 미지근해진 커피를, 빨대를 뽑아 내던져버리고는,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래, 내가 무슨 상관이냐. 준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토요일 오후가 되자 수향은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교복처럼 외출복이 정해져있어 평소에는 외출이고 뭐고 그다지 준비가 필요없는 그녀지만 오늘은 약속 장소가 클럽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마땅한 입을거리가 없었다. 예지의 옷들은 사이즈가 안 맞는데다 지나치게 섹시했다. 미향의 옷장을 뒤져봐도 클럽에 어울릴 만한 옷은 거의가 미니스커트였다.

키도 나보다 큰 게 웬 치마가 이렇게 짧아. 미향이 입을 땐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자신이 걸쳐보니 미향의 옷들은 너무 아슬아슬해서 불안할지경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마도 안 입는 수향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일단 본인의 눈에는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 자체가 낯설고 어색해서 봐줄 수가 없었다. 결국 수향은 치마를 벗어던지고 도로 청바지를 챙겨입었다.

그래, 요새 누가 촌스럽게 클럽 간다고 옷 차려 입나, 요새는 쿨하게 음악 즐기러 가는 거야. 그래도 미미가 보기에 이상하면 안 되는데. 수향은 약속시간까지 내내 고민하다 결국 평소차림으로 집을 나서고 말았다.

집을 나서봐야 옆집이긴 했다. 잔뜩 외출준비를 하고 집을 나오자마자 옆집 초인종을 누르자니 기분이 이상해서 수향은 웃음이 났다. 그런데 벨을 눌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시간은 분명 약속한 네 시였다. 수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준호에게 전화를 했다.

, 내가 문자 보낸다는 게 깜박 했다. 조금 늦을 거 같은데, 늦어도 다섯시 까지는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있어. 현관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줄게.”

수향은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면 되니 주인도 없는 남의 집에 먼저 들어가 있을 일이 전혀 없었다. 수향이 사양하려는데, 준호는 바쁜 모양인지 말도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향이 급히 다시 전화를 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곧 이어 정말로 준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현관 비밀번호를 이렇게 아무나한테 막 가르쳐주다니. 형사라 그런가. 범죄에 강하다 이거야, 뭐야. 수향은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시리 투덜거리는 척 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기분이 은근히 설렜다. 아무 의미 없는 것이긴 했지만, 남자에게 비밀번호를 받아본 게 처음인 데다, 더구나 그 상대가 준호였다. 그런 사람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싫을 리 없었다.

혹시 이 사람 원래 현관번호 막 뿌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이제껏 여자가 드나드는 건 본 적 없잖아. 수향이 번호를 받고도 왠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며 한참동안 망설이고 있는데 해준이 나타났다. 수향은 예상 밖이라 깜짝 놀랐다.

노 형사님. 늦으실 거라더니, 일찍 오셨네요

내가? ? , 유 형사님은 좀 늦으실거야, 일이 생겨서. 나 먼저 왔어. 준비도 해야하고 해서. 유경씨도 천천히 올 거야.”

해준이 손에 든 커다란 쇼핑백을 눈앞에 흔들어보이고는 수향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살짝 안습이네. 너무 쿨해도 곤란하지.”

수향은 아무래도 해준이 옷차림을 두고 하는 소리라는 짐작이 들어, 난처한 웃음을 지었고,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주인 없는 집으로 들어갔다.

해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닷없이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선 수향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수향이 깜짝 놀라 몸을 뺏으나 해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 역시 내가 눈썰미는 있단 말이야. 이 정도면 맞겠다. 사이즈를 몰라서 눈대중으로 몇 개 집어 왔는데, 입어 보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수향은 감사 인사를 하고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기가 마땅치 않아 익숙한 구조를 눈으로 더듬어 작은 방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어갔다. 그곳은 준호가 옷방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평소 눈에 익은 옷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준호의 내밀한 사생활을 막상 눈으로 보자 수향은 또다시 마음이 설렜다. 그에게 유독 잘어울려 보였던 청색 남방이 걸려 있는 걸 보고, 수향은 호기심에 못 이겨 살짝 그 옷을 만져보았다. 그러다 흠칫 그녀는 자신이 변태처럼 느껴져 얼른 고개를 내젓고 뚝 떨어져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정신 차려.

수향은 쇼핑백에 든 것들을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백에는 외출복 세 벌에, 새 속옷, 스타킹에 구두까지 들어있었다. 속옷은 탱크탑 스타일의 브라탑이었다. 그러고보니 어깨가 드러나 있거나 목이 많이 파여 있는 옷도 있어 이런 속옷이 필요할 듯싶었다.

생각보다 일을 빨리 끝마친 준호는 사실상 거의 해준의 바로 뒤를 이어 도착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보니 신발은 있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다 별생각없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작은 방 문을 열다 얼음처럼 그 자리에 못박히고 말았다.

수향이 아래는 평소처럼 청바지를 걸치고 있었으나 상의는 몸에 착 달라붙은 탑을 입고 뒤돌아 서 있었다. 매끈한 등허리와 군살없는 허리가 글래머러스한 골격 때문에 더 가늘어보였다. 게다가 등에 달린 지퍼를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던 터라 견갑골이 두드러져 보였는데, 그게 또 몹시 자극적이었다.

준호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생각해보니 클럽용 의상을 준비했다던 해준의 말이 떠올랐다. 여성용 속옷이 익숙하지 않은 준호는 순간적으로 수향이 겉옷을 입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한테 저런 옷을 입히다니.

잠시 얼어 있던 준호가 왠지 아무 소리도 못내고 얼른 뒤돌아나가려는데, 수향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형사님, 죄송한데 지퍼 좀 올려주세요.”

준호는 또한번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준호는 그냥 무시하고 나가자니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이 이렇게 이상하게 굴면 수향이 민망할 것 같고, 그렇다고 거의 벗은 듯한 여자 등허리에 손을 대자니 그것도 엄두가 안 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그런데 이거 컵이 조금 작은 거 같아요. 사이즈는 맞는 거 같은데, 살이 쪘나.”

준호가 불쌍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문이 홱 열리더니 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 아닌게아니라 옷을 입는 수향을 도와주기 위해 방에 들어섰던 것이다.

어라, 유 형사님, 일찍 오셨네요.”

그 목소리에 기겁을 한 사람은 수향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수향은 준호를 발견하고 엄마,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쯤 드러난 가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준호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수향이 지퍼를 올려주길 청한 형사는 유 형사가 아니라 노 형사였던 것이다. 준호는 차마 보기 민망할정도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사과의 말을 웅얼거리며 달아나버렸다. 해준은 헤, 하고 잠시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다가, 역시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쯧쯧, 요새는 길에서도 다들 이런 옷 입고 다니는데, 이까짓 거 같고 뭐 그렇게 놀라시나.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유 형사님, 의외로 순진하시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놀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수향을 보자 해준은 농담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진짜 놀랐나 보네.”

수향은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되새겨볼수록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반쯤 벗은 옷차림으로 준호에게 속옷지퍼를 올려달라고 부탁한 꼴이 아닌가. 갑자기 수향은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워지는 걸 느꼈다. 토할 것 같았다.

어머, 너 정말 괜찮아? 많이 놀랐니? 괜찮아. 유 형사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이거 그리고 속옷처럼 안 보여. 걱정마.”

해준은 별일이다 싶었지만, 수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위로해주려 애썼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몸이 좀 안 좋아서... 한번씩 그래요. 걱정마세요.”

수향은 구토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 어디 안 좋아? 아픈 데 있어?”

수향은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 한번씩 스트레스 받으면 좀 그래요. 좀 예민한 편이라서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관자놀이와 명치끝을 엄지손가락으로 풀어주는 수향의 손동작이 진지하고 숙련돼보여 해준은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마치 아픈 데 익숙한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밝고 구김살이 없어 그런 면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해준은 순간적으로 짠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도 어린 애가...

해준은 수향이 옷을 고르고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흐르는 듯 살결에 감겨오는 질감의 천에 익숙지 않은 수향은 세 벌 모두 그저 어색해하기만 할 뿐,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어떤지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화장과 전체적인 머리손질까지 마치고나자 수향은 해준도 놀랄만큼 달라보였다. 원래가 굳이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꾸미기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지만, 수향은 워낙 원래 몸매가 좋은 데다, 그에 반해 평소에 그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아 그 변화가 더 극적이었다.

수향이 치장을 마치고 나오자, 방금 예고편을 충분히 감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준호 역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향은 조금 전의 당황스러운 상황을 무마하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어보였지만, 준호는 그런 것을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해준이 골라준 것은 몸에 붙는 슬리브리스 상의에 플레어라인의 스커트가 달린 살구빛 원피스였다. 수향의 맑은 상아빛 피부에 살구색이 더없이 어울렸고, 단순한 디자인이 우아한 골격과 길고 아름다운 팔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수향의 몸매가 제대로 드러나니 준호는 평소에 수향이 왜 그렇게 여성스럽게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몸매에 적당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다져진 근육이 적절하게 살아있는 수향의 몸은 그 움직임마저 너무 예뻤다. 손짓과 몸짓, 걸음걸이 모든 동작이 유연하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그것이 그동안은 막연한 분위기로만 느껴지다가 옷을 가볍게 걸치니, 실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준호는 뚫어지게 수향을 바라보다가 문득 해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해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곧 준호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가 있었다. 공감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수향에 대한 질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참 예쁜아이구나 하는 감탄이 들었다. 예쁘고 강한, 누가봐도 매력적인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가 정신없이 빠져있는 것도 당연했다.

해준은 준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똑똑한 애에요, 조숙하기도 하고. 너무 그래서 오히려 좀 헤매는 것 같은데, 노 형사님이 좀 봐주시면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롤모델이 돼주실 수도 있을 것 같고.’

뭐야, 내가 많이 헤맸을 거 같다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염병. 수향이 매력적인 아이라는 건 충분히 인정할 만했지만, 사실 해준은 준호와는 생각이 좀 달랐다. 해준이 보기에 수향은 헤매는 아이가 아니었다. 심지어 해준은 도대체 자신이 수향에게 어떤 종류의 도움을 줘야할지도 알수 없었다. 그런데 왜 준호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까 의아했었던 해준은 어쩌면 그게 준호 나름의 호감 표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끌리면서도 그 끌림을 인정하기 힘드니 그런 식으로 관심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었다.

은연중에 자신 역시 모르지 않았으나, 사실 나이 차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해준은 이제와 서서히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수향의 됨됨이를 볼수록 또 지금 두 사람을 눈 앞에 놓고보니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졌다. 영민이 놈 왔으면 좋아죽었을텐데, 역시 떼놓고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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