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9회 장혜란

시스앤 2019.12.06 04:40 조회 수 : 60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니 수향은 몹시 어색했다. 특히나 준호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건조한 목소리로 예쁘다고 해주는 것도 그저 예의상 해주는 말처럼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낯설어하는 그의 모습에 수향은 이런 옷이 안 어울려보이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녀는 새삼 자신이 그동안 이런 옷도 한번 입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닐텐데, 언제나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며 또래들과 어울릴 일이 그다지 없었고, 독립하고부터는 공부에, 살림에, 아르바이트에, 일에 항상 정신이 없었다. 글쓰는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건강관리를 위해 정해진 스케줄대로만 살았다. 한달 내내 함께 사는 동생과 예지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거기다 사실 수향은 그런 혼자만이 세계 속에 사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원래 타고난 성향을 환경이 키워주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었다.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준호가 다음 순간에는 아예 시선을 주지 않자 수향은 그래, 내려놓자, 내 옷도 아니고, 연극의상인데 뭐, 하고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그때마침 유경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해준이 문을 열어주자 현관을 들어서다 수향을 발견한 유경 또한 눈이 커다래져서 이게 누구야, 하며 찬탄어린 시선을 보냈다.

너무 예쁘다. 왜 평소에 좀 이렇게 입고 다니지 그랬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유경 본인도 평소와 완전히 달라 보였다. 원래도 예쁘장한 그녀였지만, 몸집이 작아 앳되보이던 그녀가 세련된 화장과 옷차림으로 월씬 성숙하고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경씨도 만만치 않은데. 유경 씨가 이렇게 섹시한지 몰랐네.”

해준의 말에 유경의 볼이 붉게 물들었으나 준호의 신경은 계속해서 수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따금 우연히 스치는 척하며 수향을 살피는 준호의 눈길에는 찬탄에 더해 일종의 호기심 같은 것이 어렸다. 해준은 수향의 긴머리를 풀어내리고 앞머리와 한쪽 옆머리를 모두어 비스듬히 쓸어넘긴 뒤 금빛 핀을 꽂아주었었다. 그 헤어스타일은 수향의 계란형 얼굴을 돋보이게 했고, 화려한 금빛이 수수한 외모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어 지금 준호의 눈앞에 서 그녀는 누가봐도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무르익은 여인이었다.

준호는 정말로 얘가 열입곱살짜리가 맞나 싶었다. 같은 사람인데도 남자와 여자는 다른 생명체구나, 준호는 새삼스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수향의 드러난 목과 팔뚝의 부드러워보이는 피부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여자를 안 만나본 것도 아니건만 여자 피부가 이렇게 부드러웠었나 싶었다. 아무래도 수향의 피부가 좀더 그런 것 같았다. 정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부드러울까, 준호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도모르게 그 피부의 느낌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그것은 처음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난생처음 보는 뭔가를 발견했을 때처럼 그게 뭔지 궁금해 이리저리 집적거리며 탐색을 시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무의식중에 남녀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탐색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문득 준호는 자신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시선을 돌렸다. 미친놈, 지금 내가 어린애 두고 무슨 생각을, 변태도 아니고.

그럼 준비도 다 됐고, 시간도 다 돼가고, 출발할까요?”

해준이 쾌활하게 말했다.

네 사람은 준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보조석에는 해준이 타고, 뒷자리에 성장을 한 두 여자가 함께 탔다. 수향은 조금 긴장이 돼 숨을 골랐다. 그런 수향을 보더니 유경이 자상하게 말했다.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해.”

수향이 감사의 빛을 띄고 쑥스러운 듯 웃자 유경은 안심시키려는 듯 수향의 손을 잡아주었다. 유경의 손에는 특이한 모양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붉고 푸른 색깔의 자잘한 보석들이 모자이크처럼 무슨 옆으로 누운 눈사람 같은 모양의 무늬를 이룬 듯한 금반지였는데 얼른 그 무늬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아무튼 무척 아름다웠다.

반지가 예쁘네요. 이거 무슨, 무늬인가요? ”

수향이 유경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자, 유경은 순간 당황한 듯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이내 반지를 낀 손등을 내려다보더니 다른 손으로 반지낀 손을 감쌌다.

그냥 별거 아니야. 눈에 띄어?”

디자인이 특이하네요. 맞춘 건가봐요.”

.”

수향은 반지가 마음에 들어, 이런 걸 어디서 맞췄을까 궁금했지만, 유경이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해 묻기를 단념했다.

아직 날이 훤한데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한 대학가 거리는 이미 흥청거리며 불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더위에 지칠 법도 하련만 사람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생기에 넘쳐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 속을 걷다 자연스럽게 수향과 준호는 따로 처지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며칠 전 함께 거리를 걸었던 일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이미 익숙한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고,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또 동시에 상대방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했다.

예쁘게 치장한 수향과 젊은 연인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준호는 마치 데이트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준호는 수향을 흘깃 바라보며 남들 눈에는 자신들도 평범한 연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수향은 지나가는 여자들이 남자친구를 옆에 두고도 준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며, 그 여자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아무래도 내가 좀 딸리겠지. 그래도 오늘은 제법 꾸몄는대, 평소보다는 좀 낫겠지.

오늘따라 수향은 이상하게도 이 거리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수향 역시 이곳에서 대학시절을 보냈고, 이 근처 지리도 손바닥 보듯 알고 있건만 마치 처음 와보는 장소를 보듯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준호가 옆에서 그런 수향을 보며 말했다.

여기 처음 와봐?”

수향이 피식 웃었다.

그럴리가요. 오랜만이라 그런가봐요. 좀 변하기는 했네요. 그런데 그 클럽은 어디에요?”

안 멀어.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야. 이거 손에서 놓지말고 가지고 있어.”

준호가 주머니에게 뭔가 버튼 같은 것이 달린 물건을 꺼내 수향에게 건네주었다. 수향이 그게 무엇인지 눈으로 물었다.

호출기 같은 거야. 급한 일 있으면 눌러. 그럼 내가 바로 들어갈 테니까. 전화도 바로 받고, 못 받을 상황이면 바로 문자 하고.”

너무 걱정마세요, 유 형사님. 유경씨 있잖아요. 그리고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앞서 걷던 유경이 해준의 말에 뒤돌아서 그쯤에서 두 사람은 따로 앞서겠다는 듯 수향의 팔을 이끌어 준호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준호는 허락하지 않았다.

같이 들어가지 뭐.”

클럽은 골목 안쪽 구석에 외따로 떨어져 저 혼자 높이 서 있는 육층 빌딩에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클럽이 꼭대기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핏 봐도, 나름 어른스러운 차림새를 했으나, 대번에 십대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아마도 수향과 목적지가 같은 아이들인 듯했다. 쟤들 좀 봐. 딱봐도 십대잖아. 이 틈에 섞여 내가 십대로 보일 수 있을까. 차라리 이 순경님이 더 그렇게 보이는데. 수향은 은근히 마음이 불안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모두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수향 일행은 앞쪽에 위치했다. 수향이 가운데, 유경과 준호가 그녀의 양쪽 옆에 서게 되었다. 준호는 왠지 자꾸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수향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문득 뒤쪽에 서 있던 남자애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제법 깔끔하게 생긴, 안경을 낀 남자애 하나가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수향의 다리를 감상하다가 준호와 시선이 부딪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부렸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준호는 순간적으로 열이 올라 수향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앞에 세웠다. 놀란 수향이 휘청거리다 등이 준호의 몸에 닿았다. 수향은 부끄러워 몸을 떼려고 했으나 그럴수가 없었다. 수향을 끌어당긴 준호의 손이 그러고도 계속 그녀의 드러난 팔뚝에 머물러 있어, 준호에게 잡혀 있는 듯한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수향의 팔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푸딩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다. 반대로 수향에게 준호의 손바닥은 뜨거웠다. 준호가 무심코 수향의 귓가에 속삭였다.

추워?”

수향은 안그래도 붙어 있는 준호가 더 다가오자 얼어붙어 미처 대답도 못하고 얼결에 그저 고개만 세차게 저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 차에서 에어컨이 너무 셌나?”

긴장한 듯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는 수향의 태도가 사뭇 이상해 준호는 어디 불편한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수향을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준호는 흠칫 몸을 떼며 미, 미안 하고 더듬더듬 사과를 했다. 남자애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다가 미처 수향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했다.

수향은 입구에서 핸드폰에 띄운 초대장을 보였다. 클럽은 예약제인 듯, 어떤 식으로든 입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해준이 미리 준비한 듯 준호와 해준은 따로 입장을 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클럽인 듯했는데, 고등학생이 이런 곳에서 모임을 하다니, 수향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향과 유경은 복도를 돌고 돌아 끝쪽에 있는 한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그곳은 방이라기보다는 마치 클럽 안에 있는 또다른 클럽 같았다. 시간이 다 되어가서인지 이미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다들 한눈에 봐도 십대임이 분명했으나, 남녀보두 옷차림들이 웬만한 성인들의 사교모임을 방불케했다. 뭐야. 여기가 어느 나라야. 무슨 가십걸이야, 뭐야.

어쨌거나 수향은 해준에게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감사의 절을 했다. 여기에 청바지차림으로 왔었다가는 쫓겨나지 않았을까. 애들한테 구질구질하다고 쫓겨났으면 왠 개망신인가 말이다. 그것도 준호가 보는데.

수향은 유경과 함께 벽쪽에 붙어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미미가 정말 아라일까.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제서야 수향의 머릿속은 그런 생각들로 분주해졌다. 사실 미미는 말없이 초대장만 보냈을 뿐, 서로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지, 과연 그곳에서 만날 수나 있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때 수향이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살피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서준이었다. 서준은 수향보다 더 놀란 듯했다. 안그래도 큰 눈이 더 커다래져 수향을 향해 다가왔다. 수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에게로 다가갔다.

너 여기 왠일이야? 어떻게 왔어?”

반가움보다는 놀라움과 묘하게 캐묻는 듯한 느낌이 섞인 말투였다.

난 미미라는 친구한테 초대 받았어. 너는 어떻게 왔어? 블랙스탄가 뭔가 하는 동아리에서 하는 모임이라던데, 너도 그거야?”

아니야. 나도 우연히 친구따라 왔어. 난 볼일이 있어 왔지만, 별로 재밌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뭐하러 왔어?”

아무래도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닌 듯 순하기 그지없는 서준의 얼굴이 오늘따라 굳어보였다. 수향이 대꾸를 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서준을 불렀다. 서준을 부른 친구는 키가 크고 생김새가 날카로운 남자애였다. 말쑥하고 스키니한 정장이 잘 어울렸고 어딘가모르게 부티가 나는 귀공자타입이었다. 현규였다.

곽서준. 니가 여기 웬일이야? 언제는 싫다더니.”

서준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너한테는 할 얘기 없어.”

여기 온 이유를 물었어.”

너랑은 상관없어.”

내가 주최한 모임인데?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쫓아낼 수도 있어. 사실 이유는 몰라도 이미 그러고 싶긴 하지만.”

현규는 웨이터가 서 있는 입구쪽을 흘깃 돌아보며 말했다. 서준이 남자아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신이 없나 보지. 그럼 마음대로 해.”

현규의 시선이 잠시 수향에게 머무르더니, 누구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처음보는 얼굴 같은데. 오늘 따라 모임에 낯선 얼굴이 많네.”

내 친구야. 너랑은 상관없어. 바쁠텐데 회장님은 그만 가보시지, 그래.”

서준이 수향을 막아서며 아마도 현규를 찾고 있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애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현규 또한 이미 그쪽을 의식하고 있었던 듯 입술을 비틀며 흑기사냐,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비웃더니 자리를 떠버렸다.

참석한 아이들은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들인 듯,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떠들어댔고 게중에는 작정한 듯 음악과 춤에만 빠져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모두들 별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노는 데 집중하는 듯했다. 할리우드 십대영화 속에서나 봤었던 듯한 파티장면이어서 수향은 세대차인지, 계급차인지 모를 그 장면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에서 수향과 유경은 다행히 서준 덕분에 물 위에 뜬 기름 신세를 면할 수가 있었다. 서준 덕분에 오가는 아이들이 자주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준과 함께 있는 것 역시 편하지만은 않았다. 서준이 자주 해맑게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럴때마다 수향은 어찌할바를 몰라 말을 돌리곤 했다.

그러다 수향은 주변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그 시선을 따라가니 거기에는 아라가 이제 막 들어서고 있었다. 수향은 역시 아라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긴장했다. 하지만 먼저 아는 척 할수도 없어 살짝 애가 탔다. 오늘 아무 소득이 없으면 모두에게, 특히 영민에게 많이 미안할 듯싶었다.

아라는 청미니스커트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있었다. 원피스 차림이 대부분인 여자애들 틈에서 튀었지만, 초라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혼자 조명이라도 받고 있는 듯 이곳 분위기를 제 무대로 바꿔버렸다. 그것은 비단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라에게는 뭔가 타고난 카리스마 같은 게 있는 듯했다. 그것은 주변을 압도하고 좌지우지하는 힘이나 매력 같은 것이었다.

아라는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듯하더니 곧장 현규 쪽으로 다가갔다. 현규가 반가운 미소를 띠고 아라를 맞이하는 게 보였고,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며 함께 수향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테이블로 갔다. 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순간 수향은 서준이 아라와 아는 사이인 듯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서준의 볼일이란 게 아라였던가. 수향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블랙스타란 게 뭐야? 뭘 하는 모임이야?”

그냥 있는 집 애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는 거야.”

너도 있는 집 자식이야?”

서준이 수향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난 아니라니까. 볼일이 있어서 친구 붙잡고 좀 데려가달라고 사정해서 겨우 따라온 거야.”

그런데, 왜 하필 이름이 블랙스타일까? 검은별이라, 좀 유치하기도 하고. 무슨 의미지?”

수향은 별무늬 상흔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캐보고 싶은 것이었다.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름에 뭐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다 그냥그런 거지 뭐.”

유경이 곁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한마디 했다.

노는 거 말고 하는 일은 없어? 놀아도 뭐 노는 방식이랄까, 스타일이랄까. 보통 컨셉 같은 게 있잖아. 고급사교모임은 자선활동 같은 거 내세우고 그러잖아. 아니면 스포츠라든가.”

몰랐어? 영화모임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 핑계대고 노는 것 같지만.”

영화?”

수향과 유경은 의외의 대답에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몰랐나보구나. 나름 유명한데. 하기사 사실 영화는 핵심 멤버 몇 명이서 다 알아서 하고, 나머지는 그냥 들러리니까. 블랙스타라는 모임 자체는 별로 인지도가 없긴 하지.”

수향과 유경은 말이 나온 김에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으나 서준이 말을 마치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만, 하고는 사라졌다.

유경과 둘만 남은 수향은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라도 주워담기 위해 귀를 곤두세웠다. 이대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너무 답답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수향은 손안에 든 호출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런 수향의 마음을 읽은 듯 유경이 수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초조해할 것 없어. 사실 이런 일 열 번 중에 한번 소득이 있으면 다행인 거거든. 원래가 시간낭비가 일인 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재밌게 논다고 생각해. 또 모르지, 그러다보면 뭔가 얻어걸릴지. 아까부터 저쪽에 있는 남자애가 계속 너 쳐다보는데. 말 걸어올지도 모르겠다. 말 걸어오면 거절하지 말고 재밌게 놀아.”

수향이 유경이 은근히 가리키는 쪽을 살펴보니, 제법 매력적인 남자애 하나가 정말로 유경의 말대로 그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아니라 형사님을 보는 것 같은데요.”

수향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유경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남자친구 있어?”

수향은 고개를 저었다.

남자애들이 많이 따를 것 같은데, 왜 안 사귀어?”

그런 얘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데요.”

머리털 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부터 많이 들을거야. 아직 제대로 꾸미는 법을 몰라서 그렇지.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너 꾸미면 예쁘겠다고 생각했었어.”

형사님이야말로 정말 예쁘신데, 형사님은 남자친구 있으세요?”

수향의 질문에 유경은 겸연쩍은 듯 말없이 웃었다. 그때 정말로 유경의 말처럼 그 남자애가 수향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처음보는 얼굴인데, 누구 따라 온 거야?”

수향으로서는 뭔가 캐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아 신이 났으나, 유경은 수향과 남자애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선심 쓰듯 자리를 피해주었다.

 

말을 걸어온 남자애와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나, 그 아이는 서준의 표현대로 하자면 들러리인 듯 막상 영화나, 동아리의 핵심적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 아이는 이 모임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유일한 관심사인 듯했다. 수향은 곧 남자아이와의 대화가 지루해졌다. 수향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뜬 유경은 중간보고 겸 한숨 돌릴 겸 잠시 준호와 해준을 찾아나섰다. 긴 복도를 빠져나와 메인 홀로 가니 한 구석에서 해준과 준호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유경을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유경이 자리에 앉자마자 준호가 물었다.

미향이는요?”

유경이 슬쩍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놀아요. 애는 앤가봐요.”

분위기는 어때요?”

해준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견과류 안주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그냥 그래요. 아직까지는 별 거 없는데요. 그냥 어지간히 있는 집 애들인가보다, 뭐 그정도에요. 정말 이러고 노는 애들이 있구나 싶네요.”

보고 배운 게 돈지랄뿐이니 뭔들 못 하겠어요. 이 클럽 상당한 고급클럽이더라고요. 회원제라 예약하는 데 애먹었어요. 들어와보니 별것도 없구만. 똑같은 술 비싸게 파는 것 말고는.”

해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투덜거렸다.

애 혼자 두고 와도 돼요?”

괜찮아요. , 아는 애도 있더라고요.”

아는 애요?”

. 서준이라고 초등학교 동창이라대요. 둘이 우연히 여기서 만났나봐요.”

준호는 대번에 그 이름이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준호는 순간 이게 정말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둘이 놀아요?”

아니요. 지금은 다른 애랑 얘기하고 있어요. 지들끼리 마음 편하게 놀라고 잠시 자리 피해주는 길이에요. 미향이가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부담스러운가봐요. 자기 말 때문에 다들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죠. 애는 그냥 별생각없이 재미있게 놀면 되는데 애가 워낙 진지한 성격이네요.”

그러더니 유경은 말하는 도중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쿡쿡, 웃고는 말을 이었다.

미향이가 꾸며놓으니까 진짜 예쁘네요. 남자애들이 많이 쳐다보더라고요. 한 녀석은 아예 대놓고 들이대던데요. 다들 어찌나 귀여운지. 저는 왜 저때 저렇게 귀엽지 못했나 몰라요.”

해준은 슬쩍 준호의 눈치를 살폈다. 유경이 의외로 이런 쪽으로 둔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아니나다를까 준호는 점점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경은 여전히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듯했다.

서준이란 애도 미향이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던데, 미향이 오늘 고민 좀 해야되겠던데요.”

열받은 준호가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는 걸 보며 해준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아야했다. 둔감한 유경의 모습과 열받은 티를 감추려고 애쓰는 준호의 모습 모두 평소에 모르던 모습들이라 해준은 갑자기 두 사람이 몹시 귀엽게 느껴졌다.

영민이 놈이 이런 재미에 맨날 사람 속 긁는 소리만 척척 해대는 건가. 평소 해준은 영민이 눈치가 없고 무례하다고 생각해왔으나, 지금에 와서는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가 지나치게 빠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예의 쌈 싸먹은 놈인 건 맞지. 영민이 놈 왔었더라면 웃겨 죽었을텐데 아깝게 됐네.

그때 화장실에 다녀오던 수향을 발견한 준호가 어, 하고 말했다. 덕분에 해준과 유경도 수향을 발견했다. 해준이 수향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수향은 준호를 보자 잠시 그 자리에 합석해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다가 영영 아무것도 못 건지면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자신도 해준의 인사에 답례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내처 가던 길을 갔다.

먼발치에서,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본 수향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마르지는 않았지만, 풍만하고 탄력있는 몸매에서 느껴지는 건강하고 성숙한 여성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특별히 변태적인 사람이 아니어도 수향의 몸은 왠지 벗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원시적인 매력 같은 게 있었다. 어떤 아름다운 옷도 다만 그녀를 가리고 있는 장막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디자인이 단순한 옷은 그런 효과를 배가시켰다. 준호는 남자의 본능으로 수향을 흘깃거리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저딴 옷은 입혀가지고. 괜히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면서도 준호는 자신이 왜 그런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모임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가려던 수향은 입구에 아라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놀랐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쉬움을 삼키며 아라를 지나쳐가려는데 놀랍게도 아라 쪽에서 먼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무례할만큼 빤한 시선이었다. 수향이 어찌할바를 몰라 잠시 망설이는데 더 놀라운 말이 아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물의향기?”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아라가 미미라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하자 수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연도 묘하네. 너 우리 아파트 살지? 서준이 아니었으면 몰라볼 뻔했어.”

아라가 수향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가까이에서 본 아라는 정말로 예뻤고 짐작보다 도도하거나 새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하다고 해야할까. 수향과 채팅을 통해 열렬하게 관심사를 나누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 만남 자체에도 별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미미가 누군지 많이 궁금했거든. 서준이하고 아는 사이야?”

서준이라는 이름에 아라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초등학교 동창이었어. 일년뿐이었지만. 서준이가 전학갔거든.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어. 이사온지 얼마 안 돼서.”

아라는 흐응, 하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고 앞장서 걸었다. 아라는 메인홀로 나가더니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몇자리 건너에 준호 일행이 앉아 있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을테지만, 살펴보기에는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수향은 일부로 준호 일행 쪽을 완전히 무시하며 아는 척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향이 맞은편에 앉자 아라는 쭉 곧은 허벅지를 포개고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어디선가 웨이트리스가 잽싸게 다가와 라이터와 재떨이를 내주고, 음료를 주문 받았다. 아라는 마르가리타를 주문했고, 수향은 칵테일에 대해서는 물론, 술을 전혀 몰라 같은 걸로 주문했다.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아가고나자 아라는 담배를 피워물고 길게 한모금 내뱉더니 권하듯 담배갑을 들어보였다. 수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한동안 아라는 말없이 수향을 바라보기만하며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반 개비쯤을 피우고나서야 담배를 비벼끄고 말을 건넸다.

별로 재미없지? 시시해 이런 모임. 나도 영화만 보고 갈 거야.”

영화? , 영화시사회가 있다고 했었나? 어떤 영화야?”

도희상이 뻔하지 뭐. 되는대로 갖다붙인, 영환지, 다큐인지 모를, 그런 분위기겠지.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주제가 없으면 재미라도 있든지.”

도희상?”

수향의 질문에 이상스럽다는 듯이 아라가 그녀를 훑어보았다.

도희상 몰라? , 너 우리 학교 아니지. 그럼 모를 수도 있겠네. 우리학교에서 유명한 영화쟁이야. 중학교때부터 유명한 상은 다 탔다더라. 그래봐야 돈빨에 장비빨이지 뭐.”

아라는 도희상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듯 시종 시큰둥했다.

블랙스타가 영화동아리라고 하던데, 그럼 도희상이라는 애도 거기 회원이야?”

그래, 블랙스타란 건 사실상 걔들을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걔네들이 다 좌지우지하는 거니까.”

걔네들?”

있어. 석현규라고 벼락부자집 아들. 일종의 스폰서랄까, 걔가 돈줄이고, 도희상이 영화를 만들어. 그리고 몇몇 핵심 스텝 걔들 빼면 나머지는 들러리나 마찬가지야.”

수향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얘기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향을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아라가 말했다.

생각보다 여성스럽네. 난 안경낀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제법 설교를 잘하길래.”

그렇게 들렸어? 난 재밌었는데.”

재미없다곤 안 했어. 그럼 얘기도 안 했겠지. 뭐랄까, 너무 반듯해서 오히려 재미있었달까. 누구나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자기변호를 하면서 살지만, 범생이들 자기변호만큼 따분한 것도 없는데, 넌 모범생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들어줄만한 소리를 하더라고. 좀 특이했어. 하지만 아마 네 눈에는 내가 치기어린 어린 계집애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니까 오기도 좀 나더라. 그런 자극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 니가 실제로 어떤 사람일까 좀 궁금했어. 너도 내가 궁금했니? 아님, 그냥 한심했니? 솔직히 말해봐.”

사실 난 우울한 분위기는 별로야. 하지만 니 블로그에서는 뭔가, 뭐랄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항변이 보였달까, 너만의 목소리가 들렸달까. 매력있다고 생각했어. 궁금했지. 김영하를 좋아하는, 나파권에 푹 빠진 여자아이가 대체 어떤 아인지.”

나 생각만큼 그렇게 퇴폐주의자는 아니야.”

그런 뜻 아니야. 그건 리얼한 문제가 아니지. 감정의 문제야. 불안함과 우울함과 두려움, 공포, 열망과 그에 따르는 필연적인 절망. 그런 것들 말이야.”

아라는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너는 네가 정말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니?”

아는 척하는 말로 들렸다면 사과할게. 그냥 떠오르는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게 내 한계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아니, 사과받고 싶지 않아.”

아라는 느닷없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라의 커다란 눈에 맺힌 물기가 정말로 눈물이 맞을까 싶을만큼 무표정했지만 호흡이 깊어지고 입가가 희미하게 씰룩였다. 태연한 척하려고 하지만 감정이 격해진 것이 분명했다. 수향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어느 사이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레몬향이 시원했다.

지금 나 아주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은 기분.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만나서 반가웠어. 잘가. 또 보면 좋겠다.”

아라는 말을 마치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수향은 잠시 그대로 앉아 혼자 칵테일을 마셨다. 아라의 마지막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걸까. 수향은 아라와 나눈 대화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때 준호가 다가와 수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생각에 잠겨있던 수향은 미처 준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아라가 맞았군.”

수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예쁘다 싶었지만, 이런 데서 보니까 진짜 연예인 같네.”

순간 수향은 야릇한 질투를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어린애 상대로 질투라니. 어른이 돼가지고 이게 무슨 창피한 노릇이람. 수향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조명이 낮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얘기했어?”

준호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수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워낙에 순식간이라 말할 틈도 없었어요. 몇마디 못했어요. 뭔지 잘 몰라도 저한테 화가 난 것 같아요. 물어보려고 생각해뒀던 게 많았는데, 한 마디도 못했네요. 이 형사님한테 죄송해요. 그래도 아직 기회가 완전히 날아간 건 아닌 것 같아요. 갈 때 또 보자고 하더라고요. 마음에 없는 말 할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아마 또 연락할 것 같아요.”

정말 괜찮아?”

어쩐지 표정이 가라앉은 듯 보이는 수향이 걱정스러워 준호는 신경이 쓰였다.

, 안 괜찮을 일이 뭐 있나요. 다만, 어쩐지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좀 마음이 쓰여요. 외로운 아이 같아요. 아니, 그 외롭다는 게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사랑을 받고 살아도 마음이 외로울 때가 있잖아요, 세상에 나 혼자 뿐인 것 같고, 그런 느낌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런 건 어쩌면 일종의 병 같은 거죠. 실제로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안다고해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씩 앓는 병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 아이는 그게 좀 심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기쁨을 모르는 것 같아요.

환경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환경 탓일 수도 있고, 그저 본인이 너무 예민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위험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안 그럴지도 몰라요. 예전에 사람들이 독감에 걸려죽는 숫자만큼 이제는 다들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판이잖아요. 인간은 원래가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아라는 어쩌면 건강하고 평범한 소녀인지도 몰라요. 그 아슬아슬한 위험 속에서 사는 의미를 찾아가려고 기를 쓰고 있으니까요. 아주 예뻐서 엉덩이라도 두들겨주고 싶도록 장한 아이에요. 말이 왜 이렇게 횡설수설이죠? 술 몇모금에 취했나?”

제 생각에도 두서가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나서 수향은 말 끝에 민망한 듯 손에 쥔 잔을 들어보이며 핑계를 덧붙였다. 어쨌든 요지는 수향 자신도 아라에게 호감이 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왠지 준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기분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에 말이 늘어져버린 것이었다. 왜 자꾸 준호에게 쓸데없는 말이 하고 싶어질까. 왜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까. 수향은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묘한 의문들을 무시하며 아라의 칵테일을 가리켰다.

아라는 손도 안 댔어요. 아까운데 형사님 드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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