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11회 장혜란

시스앤 2020.01.21 12:25 조회 수 : 95

영민이 맥주를 두 잔 마시는 동안 해준은 맥주 두 병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그래도 해준에게서는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피곤한 듯 침대에 기대 늘어져 있는 모습이 제집에 있는 듯 편해보여 영민은 그게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영민이 그녀를 집에 데려온 목적도 사실 막연하게나마 그런 것에 가까웠다. 언제나 날을 세우고 공격태세를 늦추지 않는 해준의 태도에 영민은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었다. 참 괜찮은 여잔데, 능력도 있고, 성격도 좋고, 조건도 좋고,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고. 빠진 거 없이 두루 갖추고는 왜 저렇게 긴장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민을 바람둥이로 여겼지만, 사실은 좀 달랐다. 영민은 분명 여자를 좋아했지만, 그가 좋아하는 여자는 생물학적인 여자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여자였다. 영민은 여자들의 밝고 감성적이며 다채로운 세계가 재밌고 그들과 교류하는 게 즐거웠다. 남자들의 세계는 마치 그들이 입은 옷처럼 단조롭고 무채색에 가까운 데다, 심하게 서열짓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도 사실상 자유로운 영민의 본성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여자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항상 여자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란 이성에 대한 감정보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배려심깊은 동성친구에 대한 호감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래서 영민은 어릴때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여자들과 잘 지내왔고, 그 모습은 남들 눈에는, 마치 해준이 남자 많은 여자처럼 보이는 것과 똑같이 영민에게 수많은 여자가 있을 거라는 오해를 낳았다.

하지만 실제적인 이성관계에 있어서 영민은 오히려 고지식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민은 사귀지 않는 여자와 잠자리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동안 사귀었던 여자가 많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친구와는 이년 전에 헤어졌고, 그것은 영민이 여자와 자본 지도 이년이 넘었다는 얘기였다.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영민도 잘 알았다. 하지만 천성이 너그러운 데다 배려심도 있는 영민은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에도 그다지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그러건 그게 뭐가 대순가, 그런 거야 다 자승자박이지, 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유독 이상하게 해준의 날선 태도는 언제나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지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바람둥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지, 나참 웃기지도 않네. 저런 말대가리도 선배라고 꼴같잖아서 정말. 처음 중부서에 발령받아 해준을 알게 되었을 때 영민은 그녀의 빈정거림을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곤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겉보기에는 맺힌 데 없이 시원시원한 성격이지만 생각보다 속이 여린 면이 많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으면서부터는 점차 해준의 인간성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해준의 사내처럼 터덜터덜한 성미가 조금씩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런 여자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 영민은 해준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오고 싶어졌을까 영민이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자, 그는 대답이 궁해졌다. 영민은 스스로 호기심이나 동정심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동류의식과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폭압적인 남자들의 세상에서 느끼는 불만이 언제나 찡그린 이마에 한가득 붙어있는 해준의 모습에서 영민은 어쩌면 묘한 공감을 느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문에 그 세계에 언제나 나름의 애티튜드로 항변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또한 지지해주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민이 혼자 제 생각을 곱씹으며 맥주를 들이켜다 문득 해준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추었다. 영민의 표정이 왜? 하고 묻자, 해준이 고갯짓으로 기타를 흘깃 가리켰다. 영민이 피식 웃고나서 몸을 일으키더니 기타를 가져와 소파에 앉았다.

신청곡 있으십니까?”

몰라, 그런 거.”

알면 이상하지. 노형사님 한테 그런 거 묻는 내가 미친 놈이다.”

영민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몇 번 줄을 튕기고 코드를 잡아보며 손을 풀더니, 이내 에릭 크랩튼의 ‘tears in heaven’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원곡의 절절한 울림이 제법 느껴지는 괜찮은 솜씨였다. 뭔지는 몰라도 어떤 느낌이 해준의 마음에도 점차 파문을 일으켰다. 흐응, 이래서 여자들이 항상 기타치는 남자한테 뻑가는가보군. 진부한 수작이지만, 그래, 진부한 건 언제나 잘 먹히지.

영민은 연주실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노래솜씨가 좋은데다 음악 자체를 즐기는 듯한 무대매너가 또한 볼만해 기타 동아리 시절에 공연멤버를 선발할 때도 난다긴다하는 선수들 중에서 언제나 일순위로 지명되곤 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시 말하면 기타치는 모습이 매우 멋있다는 뜻이었다. 영민의 연주가 끝나자 해준이 장식은 아닌 모양이네하더니 반나마 남아있던 맥주잔의 폭탄주를 한번에 비웠다.

좀 천천히 마셔요. 음악까지 깔아주고 있는데, 분위기도 좀 느끼고 그래봐. 하여튼. 쯧쯧. 감성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어. 진짜 뭐 듣고 싶은 거 없어요? 기회가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닌데.”

“...김윤아 거 있으면... 아무거나 하나 해보든지.”

어라? 또 의외로 취향이 있네. 김윤아라... 그렇다면 좋은 거 하나 있지.”

영민은 드라마 시그널’ OST을 연주했다. 영민의 목소리는 남자면서도 미성이라 여자면서도 중저음 느낌인 김윤아의 보이스와는 또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영민은 을 끝내고 곧장 자신의 애창곡인 조용필의 을 이어서 불렀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끝인지

그누구도 말을 않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을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두 노래는 마치 커플처럼 분위기가 잘 어우러져 영민의 선곡센스를 느끼게 했다. 영민은 세곡을 부르고 나서 기타를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놓았다.

? 더 해봐. 벌써 밑천 떨어졌냐?”

쯧쯧, 예술을 대하는 저 저렴한 태도 좀 봐. 보람이 없어, 보람이.”

영민이 고개를 내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해준은 그런 영민의 빈정거림에도 아무 대꾸가 없었고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의 침묵은 여태 것과는 달리 어쩐지 적막하고 적적한 느낌이었다. 침묵 끝에 문득 생각난 듯 영민이 말했다.

, 그 건 그거 결국 무고로 나왔다며요?”

. 여자가 모텔에서 렌즈를 뺐다는 게 결정타였어. 바람 피우다가 남자친구한테 들키는 바람에 쇼하다가 일이 커진거더라고.”

미향이 그 기집애, 웃기긴 웃기네. 보통내기가 아니야.”

해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정말 아무리봐도 애 같지가 않아. 똑똑한 거야 그렇다쳐도, 분위기도 그렇고, 몸매는 또 얼마나 좋은지. 너도 봤어야 하는데. 차려입혀놓으니까 심지어 아라하고 있는데도 안 밀리더라. 포스가 있더라니까. 여자인 내가 다 자꾸 눈길이 가더라구. 웬만큼 희안한 애들 많이 봤는데, 그런 애는 정말 처음 봤어. 유형사님이 정신 못 차리는 것도 이해가 돼. ...벌써 현관비번까지 깠던데.”

해준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준호를 언급하자 영민은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발랑 까진 거지 뭐. 별거 있어.”

영민으로서는 위로삼아 던진 말이었으나, 그말에 해준이 오히려 발끈했다.

그런 거 아니야. 저도 진지하다고, 지딴에는. 보면 알지. 남모르는 사정도 있는 것 같고. 힘든 것도 아는 애 같고. 철도 든 것 같고. 암튼 너무 나이가 안 보여서 좀 이상할 지경이야. 어디 한군데서는 그래도 좀 모자라야 인간적인데, 비상식적이야, 아무튼.”

해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나 영민은, 저야말로 좀 인간적으로 굴면 어때서, 저렇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찼다. 영민은 괜히 제가 다 속이 상하는 것 같아 잔에 남은 술을 한번에 비웠다. 그리고는 제 잔에도 이번에는 맥주와 소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었다. 해준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한소리했다.

괜히 허세부리지 말고 맥주나 마셔.”

마시고 싶으니까 마시는 겁니다, 신경꺼주십시오.”

너 그거 마시면 안 설텐데.”

영민이 막 섞은 폭탄주를 한모금 가득 입에 머금고 삼키려다, 해준의 말이 무슨 소린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쓰고 해준을 건너다보았다. 그러다 눈도 깜짝거리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해준의 시선에서 그 의미를 깨닫고 놀란 나머지 고개를 돌리며 입에 든 술을 푹, 내뿜어버렸다.

에이씨, 뭐야 진짜. 미쳤어? 무슨소리 해, 지금.”

영민이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소리를 질렀다.

해준이 여유롭게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놀리듯이 말했다.

제 집에 여자 데려와서 술 먹이고, 안주 먹이고, 기타까지 쳐가면서 분위기 잡은 게 니 놈이지, 나냐?”

그런 거 아니거든.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오해살 짓은 왜 해?”

해준의 말에 영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또 이런다. 제발, 릴렉스, 릴렉스 응, 좀 살자 좀. 왜 그렇게 자꾸 트집잡고 싸우려고 들어, 여자가. 입 다물고 있으면 제법 예쁘구만. 제발 입 좀 닫고 술이나 마셔.”

입 닫고 술을 어떻게 먹어?”

술 마실 때만 열어.”

그래서 싫다는 거야?”

뭐가?”

영민이 휴지를 둘둘말아 바닥에 내뿜은 술을 닦으며 또다시 해준의 엉뚱한 소리를 얼른 알아듣지 못하다가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 펄쩍 뛰었다.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 자꾸 이럴 거야? 취한 거야, 뭐야? 이런 것도 다 성희롱이야, 그것도 위계에 의한 성희롱.”

웃기시네. 너 제법 연기 잘 한다. 진짜 당황한 사람 같은데. 실감나.”

해준이 말을 마치더니 잔을 내려놓고 기대있던 침대 위로 올라 앉았다. 그러더니 영민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빨리와.”

영민은 놀란 나머지 눈이 둥그레져서 숨도 못쉬고 그런 해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영민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얼어있자, 해준이 또다시 말했다.

빨리 튀어 와, 마음 변하기 전에.”

그래도 여전히 영민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해준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셋 셀 동안, 안 오면 취소야. 하나... 너 근데 잘하냐? 아무래도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거겠지? 그럼 기대해도 되나? ... 콘돔 있어? 설마 그 정도 준비성은 있겠지? 나 콘돔 없음 안해. , 술 잘 마셨다.”

말을 마치고 해준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영민이 총알처럼 튀어가 해준을 침대에 쓰러뜨렸다.

이 여자가 진짜 미쳤어.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오랄 땐 빼더니 간다니까 왜 붙잡아.”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나중에 나 콩밥 먹일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영민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인상을 쓰고 덧붙였다.

혹시 뭐 자포자기해서 막나가는 거라던가, 뭐 그런 건 아니지?”

해준이 의아스러운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왜 날 포기해?”

정말 아니지? 만약 그런 거면 나 진짜로 안해.”

“...이게 지금 뭐래는 거야? 아 됐어, 어차피 셋 셀 동안 안 왔으니까 취소야.”

취소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해준이 영민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영민이 어림도 없다는 듯 도로 그녀를 내리눌렀다. 그렇지만 차마 그이상 어떻게 하지는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해준을 아래위로 훑어보기만 하는 모습이 우스워 해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 거울 앞에 가서 니놈 표정 좀 봐라. 오늘 덕분에 웃긴 하네.”

영민은 해준의 웃음에 오기가 발동해 해준의 티셔츠를 끌어올려 벗기려했다. 그러자 해준이 그 손을 막으며 말했다.

콘돔 있냐니까?”

그러자 이미 흥분하기 시작한 영민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있어. 새 거 있어.”

, 사놓고 한번도 못했구만. 역시 뻥카였어. 왠지 실망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제발 입 좀 닫아.”

입 닫고 키스는 어떻게 해?”

 

화요일 오전, 수향은 요가클래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향은 요가를 좋아했다. 강하고 유연한 근육의 힘과 탄력을 마음껏 즐기며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한 시간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끝나버리고,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서 언제나 요가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은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이 되곤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지난 토요일에 겪었던 일이 아직도 수향의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요가를 하면서도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려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준호에게 사실을 확인받은 건 어제였다. 어젯밤 내내 잠을 설치며 악몽에 시달렸었다. 수향은 마음이 무거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책임감, 죄책감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마치 자신의 일인 것만 같은 이상한 기시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수향이 힘없이 터덜터덜 단지 안을 걷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으니 그것은 놀랍게도 아라였다. 수향이 놀란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고 아라가 말했다.

지금 좀 볼수 있을까? 이름이 신미향이라며?”

, 그래. 나야 괜찮지만, 지금 어디야?”

.”

동입구에서 아라를 만난 수향은 그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아라는 말없이 수향을 따라왔다. 그리고 수향의 집 거실, 준호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수향이 내준 레몬티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내내 말이 없었다. 도대체 왜 나를 보자고 한 걸까. 수향은 궁금했지만, 용건을 물을 수가 없었다.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아라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아라가 입을 열었다.

넌 어느 학교 다니니?”

수향은 잠시 고민 했으나, 둘러댈 말이 없었다. 결국 준호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거짓말이라도 이왕이면 맞춰서 해야지.

안 다녀. 관뒀어.”

아라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넌 그런 얘기도 참 담담하게 하는구나. 다른 애들이랑 많이 다르긴 해. 왜 그럴까. 왜 그만 뒀어?”

거기서는 수향도 정말로 대답이 궁해지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그래, 어쩌다보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적어도 그건 진실이야. 수향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찔리는 기분을 위로했다. 아라는 묘한 표정으로 수향을 바라보더니 등뒤에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래, 어울린다. 이렇게 책 많이 가지고 있는 애 처음 봐. 너 꼭 동화속에 나오는 벨 같아. 왠지 현실감이 없어. 학교도 관두고 이런 데서 책만 읽으면서 사는 애라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한대. 너야말로 비현실적인 미모잖아.”

아라가 픽, 웃었다.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아무 위로도 못 돼. 왜 사람들은 예쁘면 인생이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까.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거라고 쎄실도 그랬잖아. 나도 그말이 맞다고 생각해.”

쎄실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틀려. 나는 불행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어도 거기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어.”

거리감 때문일 거야. 너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너와 다른 사람들한테서 어떤 칭찬을 받아도 그건 별로 기쁘지 않지. 너는 너와 같은 부류를 찾고 있지. 적어도 같은 것처럼 느껴지는 부류. 이상한 일도 아니야. 누구나 그래.”

그때 또다시 수향의 전화벨이 울렸다. 하루에 한번 전화벨이 울리는 것도 수향에게는 드문 일이라 그녀는 흠칫 놀랐다. 예지인가하고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발신자는 뜻밖에도 준호였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궁금했지만, 수향은 왠지 아라 앞에서 전화를 받기가 망설여졌다. 수향이 망설이는 동안에도 전화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받지 그래?”

아라의 말에 수향이 하는수없이 전화를 받자 어딘가 좀 들뜬 듯한 준호이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르게 성급함 같은 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디야? 뭐해?”

수향은 어쩐지 의아스러워 대답을 머뭇거렸다.

? ...집이에요. ...친구가 놀러와서요.”

수향은 슬쩍 아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라는 팔짱을 끼고 어딘가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친구?”

. 무슨 일이세요?”

사실 준호는 오늘 아침부터 내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수향이 전화기를 확인하지 않아 몰랐지만, 수향의 전화기에는 준호의 부재중 수신 전화가 이미 한 통 들어와 있었다. 수향이 요가클래스를 듣고 있던 중에 걸려온 것이었다.

아침부터 준호는 내내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수향이 서준과 통화를 하며 나눈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내내 그일에 신경이 쓰였으나 그냥 무시하자고 마음을 먹어왔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준호는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이 엉덩이에 뿔난 기집애를 진짜 어떡해야 되는 거야. 차라리 모르면 속이나 편할 걸, 대체 그런 건 왜 들어가지고. 미치겠네, 진짜. 준호는 하루종일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니 딴생각에 빠지거나 실수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수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수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번 주중에 서준과 보기로 한 수향의 약속은 이미 취소한 상태였다. 아직까지 안심을 못하신 아버지가 반대하시는 바람에 미향의 귀경이 미뤄졌고 그에 따라 수향이 서준과의 약속도 연기시킨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준호는 수향이 전화를 받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이제 두번 다시 수향의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한 다음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를 책상서랍속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준호는 참다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혼자 자판기커피를 뽑아들고 휴게실에 앉아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때 영민과 원석이 담배를 피우러 휴게실로 들어왔다.

유 형사님. 여기 계셨어요? , 형시2팀 커피타임이네.”

영민의 너스레에 준호는 마지못해 웃는 시늉을 해보였으나, 굳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영민은 준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느끼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준호는 별만 내색하고 싶지 않은 기분인지, 그런 영민의 시선을 외면했다. 준호의 머릿속에서는 그날 클럽에 갔던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향의 다리를 훔쳐보던 남자애의 야릇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남자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며, 자신 앞에서도 태연하게 술을 홀짝이던 수향의 모습도 떠올랐다. 원석과 영민이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도 준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무심한 척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요새 애들은 우리 때보다 많이 빠를 것 같은데, 그게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봐.”

원석과 영민이 앞뒤없는 준호의 말에 무슨말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 그냥 전반적으로. . ..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 생각하는 거나, ...이성친구나 뭐... . 그냥 그런 거.”

영민은 곧장 감을 잡은 듯 혼자 속으로 웃음을 삼켰지만, 원석으로서는 갈수록 구름잡는 소리라 눈만 껌벅거리다 준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커피를 홀짝이며 일반론을 늘어놓았다.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겠죠.”

그렇지? 그래, 그래, 늦는 애들은 한없이 늦어, 그치?”

수향과 관계된 일일 거라는 짐작은 맞았으나, 영민은 반만 맞추었다. 준호의 애매한 말에 영민은 그가 수향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영민은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에이. 안 그래요. 요새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 요즘에는 초등학교 문방구에서도 커플링을 파는 세상이라구요. 제가 어디 설문조사에서 봤는데, 우리나라 청소년 첫 성관계 평균 연령이 몇 살인 줄 아세요? 열일곱살이래요.”

영민으로서는 순수하게 준호에게 긍정적인 기운을 심어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원석이 다소 놀란 듯 말했다.

정말? 와하, 진짜 요새 애들 빠르네. 하기사, 우리 때도 빠른 놈들은 더 빨랐지 뭐.”

에이, 그거하고는 다르지. 평균이라니까. 평균이 뭐에요? 상식이잖아요. 요새 열일곱살짜리들의 평균 대가리 속에 성관계라는 게 이제 더 이상 낯설고 먼 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 때로 치면 첫키스 정도. 요새 애들한테 성관계라는 단어는 그 정도 느낌밖에 안 되는 거죠. 우리때만 해도 죄책감이란 게 있었잖아요. 기회가 되도 왠지 피하게 되는 뭐 그런 거요. 그런데 요새 애들은 안 그래요. 기회가 되면 굳이 피할 것도 없는 거죠. 뭐 별것도 아닌데 뭐. 입술 한번 부딪치는 거나 다른 것도 없는 거에요.”

영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호는 마시던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쏜살같이 휴게실을 뛰쳐나와 또다시 수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안 받으면 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이미 마음을 결정한 상태였다. 다행히 수향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 ? 친구? 친구 누구야? 둘이 있어? 언제 왔어? 당장 안 나가? 이 기집애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서 사람도 없는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고, 뭔 일이라도 당해봐야 정신 차릴래? 준호는 이런 말이 두서없이 쏟아지려는 걸 꾹 참느라 수향의 물음에 대꾸할 겨를도 없었다.

형사님?”

준호가 아무 대답이 없자, 수향이 무의식중에 형사라는 단어를 내뱉고 아차 싶어, 다시 한번 아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라는 뭔가 재밌다는 듯 이제는 노골적으로 구경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 .... 그러니까, 내가 왜 전화를 했냐하면...”

준호는 미처 그 핑계를 만들어두지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최대한 잽싸게 머리를 굴렸으나, 머릿속이 텅빈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수향은 아라가 신경쓰여 통화를 미뤄야겠다는 생각으로 준호의 말을 잘랐다. 혹시라도 준호가 블랙스타나 아라에 관한 얘기를 꺼낼까봐서였다.

저 형사님, 지금 친구랑 얘기하는 중이라서요. 제가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수향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자, 준호는 잠시 멍하니 전화기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뛰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어른으로서 단속해야 돼. 남의 일이라고 방관하면 안돼. 더구나 난 경찰이잖아. 시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런데 준호가 주차장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수향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사님, 지금 아라하고 얘기 중이에요. 먼저 전화를 걸었더라구요.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준호는 그 문자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수향이 전화를 끊고 잽싸게 문자를 넣는 모습을 보며, 아라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너 그 아저씨랑 사귀니?”

전혀 예상치 못한 아라의 말에 수향은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 아저씨라니? , 누구 말이야? 아니, 누구든, 난 아무랑도 안 사귀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럼 대체 무슨 사이길래 단지에서 맨날 붙어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클럽까지 쫓아오고, 또 전화해서 사생활까지 감시해?”

수향은 아라가 준호를 알고 있는 건 그렇다쳐도 클럽에서까지 알아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정말로 할말이 궁해졌다. 그건 바로 너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향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할말을 잃고 나오는대로 중얼거렸다.

감시라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옆집에 사시니까 ...한번씩 택배도 받아주고.”

수향은 자신의 생각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답인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준호 아저씨가 옆집에 살아? 아무리 그래도 그 아저씨 그렇게 사교적인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던데...”

, 유 형사님 알아?”

수향은 그제서야 준호가 아라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라도 준호를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수향은 그동안 준호의 존재를 감추려고 애썼던 노력이 허망해져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우리 삼촌하고 같이 일하니까.”

그럼 넌 삼촌 친구가 보고 있다는 거 다 알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런 거야?”

그럼 그때 그 아저씨 정말로 너 따라온 거였어? 그럼 같이 앉아 있던 여자는 누구야? ...별로 꼰지르고 다닐 스타일 같지는 않아서. 그런 데서 마주치면 서로 모른 척해줘야 하는 거 야니야? 자기도 그렇게 떳떳하진 않잖아?”

떳떳하지 않다니? ?”

아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몰라서 물어? 형사가 원조교제하다가 걸리면 아마 바로 잘릴 걸.”

, , ? ? , 무슨 교...?”

아라가 냉소를 머금었다.

펄쩍 뛸 거 없어. 그런 애들 꽤 봤으니까. 아는 척 안 할게. 아까도 말했지만 상부상조지 뭐.”

수향이 잠시 침묵을 지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난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발랑 까진 십대 기집애들 뒤치다꺼리에 청춘을 바쳐야 하는 거야. 난 십대 때 개고생만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 나이까지 애들 뒤치다꺼리로 늙어가야 해? 하느님, 미향이는 동생이라 그렇다 치지만 얘는 또 뭡니까? 미향이로도 모자란 겁니까? 걔를 잘 모르시나본데 걔 하나로도 충분하거든요.

수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속으로 당장 방으로 달려가 지갑을 뒤져 민증을 까면 어떨까 진지하게 검토해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아라가 마음의 문을 닫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른들을, 세상을 대하는 아라의 지금의 냉소로 보건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수향을 조금씩 믿으려드는 아라에게 어쩌면 상처까지 될 배신감을 안겨줄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지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뭐 일이 묘하게 그렇게 보인 모양인데,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유 형사님은 그런 분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 아니야!

수향은 어떻게 통화 전의 분위기로 돌아갈 수없을까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필 그 타이밍에 전화가 걸려와 일이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수향은 문득 준호가 왜 전화를 했을까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머뭇거리고 이상하게 굴었을까. 진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그럼 문자라도 했을텐데.

그럼 정말로 진지하게 사귀는 거야?”

아니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아무랑도 안 사귀어. 그리고 유형사님도...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야.”

문득 수향은 준호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해준과 많이 친해보이던 게 신경쓰였다. 겉으로는 냉랭한 척 하지만 준호는 속으로는 해준을 무척 신뢰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수향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짜 좋아하나. 미인이고 성격도 좋은 데다 신뢰가 가는 동료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충분히 인생의 동반자가 될 만한 여자로 여겨질 수 있었다.

혹시 벌써 둘이 사귀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그런 거 티 안낼 거야. 수향은 갑자기 준호가 능구렁이처럼 느껴져 얄미워졌다. , 몰라 몰라,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무슨 상관이야.

남의 속을 어수선하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아라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님 말고.”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다 의외의 말을 내놓았다.

하지만, 진지하게 만나는 거라면 나쁘지 않잖아. 나도 가끔은 정말로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 진짜 어른 같은 사람 말이야. 나한테 뭔가 가르쳐줄 수 있고, 보기만 해도 뭔가 배울 게 있는, 철든 사람. 내가 진짜 마음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그런 사람.”

아라의 말은 묘하게 허전하게 들렸다. 어른이 없다. 어른의 부재라. 수향은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아라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나에게는 어른이 없다고.

그게 꼭 나이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난 어른스러운 사람이 좋아. 유치한 애들은 정말 싫어. 니가 그 아저씨를 만난다고 해도 난 색안경 끼고 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정말로 만난다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님 말고.”

그래, 마는 게 좋겠다, 아니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갑자기 왜 나를 보자고 한 건지 궁금한데 물어봐도 될까?”

수향은 왠지 이제 아라에게 솔직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니야? 그 아저씨 진짜 잘생겼던데, 스타일도 죽이고. 클럽에서 같이 있던 그 여자는 누구야? 설마 양다리는 아니지?”

호기심에 눈이 반짝이는 아라는 그제야 조금 제 나이다워보였다.

말기로 하지 않았어?”

정말 아무것도 없어? 살짝 썸이라도? 스킨십 한번도 안해봤어? 꼭 진한 거 아니라도. 그냥 손만 잡아도 스킨십 해보면 확인이 되는데.”

확인해 볼 거 없어.”

그럼 너는? 너 혼자 일방적으로라도 정말 아무 느낌이 없어? 그렇게 멋진 사람이랑 맨날 붙어다니면서?”

수향은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라의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런 아라이 모습은 딱 제 또래 계집아이들의 모습이라 귀여웠다.

유 형사님이 그렇게 좋으면 소개시켜 줄까?”

기집애, 되게 재미없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인데.”

그런 말을 하는 아라는 꼭 영민 같았다. 수향은 영민을 잘 모르긴 했지만, 그동안 봐온 바로는 짖궂고 능글능글한 듯하면서도 타인에게 애정을 가진 친화력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었다. 아라의 차가운 가면 아래에는 타인을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수향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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