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의 합창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진a 2018.04.29 10:58 조회 수 : 198

 예전 어떤 사람이 재미난 실험을 한 적 있다. 고전으로까지 평가받는 어떤 명작을 자신의 아이디로 어떤 사이트에 기재하고 난 후 그 사이트 이용자들에게 비평해달라고 한 것이다. 이용자들은 비아냥과 비웃음을 한껏 담아 글의 서두부터 조목조목 비판하고 물어뜯었다. 그 사람은 겸손히 비평을 수용했다.

 점점 글의 연재는 끝자락에 다다랐다. 결말 부분을 올린 후 그 사람은 실은 이 소설은 다른 나라에서 수천만부가 팔린 누군가의 글임을 소개했다. 매 편마다 신나게 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흠집을 내던 사람들의 댓글은 거짓말같이 마지막에서 사라졌다. 각 편에 달린 댓글들은 지나가는 개와 개미들이 물어라도 가는 듯 조금씩 조금씩 없어졌다.

 그 사람은 그 사이트와 그 사이트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직함이 곧 자신의 존재의 직함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보는 시각의 절대성을 신봉하며 그리스의 어떤 악인의 침대마냥 모든 것들을 자르고 늘리기만 하는 자들을 조롱했다. 곧 그 사람은 아이디를 삭제했다. 자신은 엘렌 소칼이 될 이유도 자격도 없다고 말하면서. 단 한 명이라도 이 글이 ‘그 분’의 ‘그 작품’이더라도 난 비판하겠다고 외쳤다면... 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소칼과 대척점인 라깡을 5년 가까이 공부했음에도 나는 그 사람의 심정에 공감했다.

 

 일정 수준 이상에만 다다르면 글의 수준은 평가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때 수준을 재는 기준은 독자들의 취향이나 연령대 개인적인 경험 공감 여부가 된다. (문학동네 2018년 봄호 젊은작가상 심사평 중) 어떤 글이든 잘썼다 못썼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이다. 자신이 말하고 시키는대로 타인이 따르고 공감해야 한다는 유아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평은 그 글의 구조와 인물의 개연성과 핍진성 연관성 등 다양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해 얼개에 대해 논하는 작업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몰입도를 가지고 대상 작품을 파악하는 데에 참고할 수는 있어도 두 소설을 비교하는 것을 넘어 우열을 판단하는 순간 비평은 유치해져 버린다. 자기가 보기에 재밌으므로 명작이고 자기가 보기에 재미없으니 그 글은 글만도 못하다고 주절거리는 것은 그 사람의 문학적 식견의 보잘것없음을 넘어 그 사람의 인격 수준을 의심해봄 직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자들이 많다.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모든 것들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정렬되어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저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그렇다. 꼴사납게 태극기를 흔들고 박근혜 탄핵 반대를 외치는- 태극기와 흰머리 휘날리며 틀니를 딱딱거리시는 그 분들처럼. 

 

 꼰대들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면 나이만 들고 추레한 자가 서 있다. 꼰대들은 자신의 실상 앞에서 눈을 감는다.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을 외면하는 이유는 외모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배려하고 이해하며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꼰대들은 더더욱 자신을 조이고 자기합리화의 길로 걸어간다. 자신이 옳지 않다는 마음 한 구석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목소리를 억누르고 '요즘 젊은 것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옳다.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그르다면 세상을 내식대로 바꾸면 내가 옳게 된다.'는 신념 아닌 신념을 무자비하게 행사한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는 직위를 가지고 집에서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친척들에게는 큰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린노무쉐리'들을 훈계한다. 젊고 능력있으며 개방적이며 겸손한 후배들에 대한 질투와 그앞에 보여질지 모를 자신의 초라함을 숨길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태극기를 흔드는 자들만이 꼰대는 아니다. 꼰대는 어디에나 어디서도 있다. 그 사이트에서도 꼰대는 있었고 우리가 사는 옆집에도 꼰대는 도사리고 있다. 꼰대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 잔혹한 마음의 칼을 꽂아넣고 약자들이 흘리는 피를 보며 쾌감을 느낄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꼰대들을 같은 방식으로 비웃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 또한 꼰대가 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파멸시켜서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질타하는 것도 우리 할 일이 아니다. 연극 속 악역을 자청하는 꼰대들에게 기회를 주자. 영화 속 지질함과 추잡함으로 어떻게든 카메라 앵글에 잡히겠다는 꼰대들을 내버려두자. 우리의 의무는 그저 꼰대가 틀렸음을 소극적으로 증명하는 데에 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위하고 가려진 글들을 끌어올리고 좀 더 다양하고 깊고 날카로운 시선을 내보이는 소수의 글쟁이들과 연대하면 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안의 꼰대와 싸우고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며 꼰대가 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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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진)자유비평 게시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 자유게시판으로 옮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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