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쓴 글에서 나는 그 글에 대한 피드백에 답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NS에 올라오는 피드백은 텍스트릿에 쓰는 글과 다른 매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응답하기 힘든 점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는데, 이융희님이 글을 써준 것에 대해 몇 가지 보충을 할 필요를 느끼고 이 글을 쓴다. 

 

 

 

 

 

1. 장르 문학을 지워내는 언론과 문단의 태도

 

 

순문학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장르문학을 쓰는 소설가가 자신이 발표한 일반 소설(등단 제도를 거치지 않았지만 장르문학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을 '순문학'이라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 경우에서, 그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이 문단 시스템 안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쓴 일반 소설이 장르소설보다 더 고급하거나 덜 재밌다는 의미도 아니다. 특정한 장르로 분류될 색채가 없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비슷하게 이영도의 <봄이 왔다>나 좌백의 <호랑이들의 밤> 같은 작품들을 장르 팬덤 내부에서 '순문학'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문단에 의해서 공인받은 작품'이라는 의미는 담겨 있지 않다. 장르 팬덤은 애초에 문단에 관심이 없다. 이런 경우에서 순문학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기성 문단과 무관하게 장르 문학이 주체가 되어서 쓰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단 내부자들은 장르문학에서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저런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장르문학 팬덤에서 '장르문학이 아닌 것'이라는 의미로 이영도의 <봄이 왔다>를 순문학이라고 불렀을 때, 문단 측에서는 '등단을 안 한 작가의 작품을 어째서 순문학이라고 부르냐'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생각에 그런 반발을 진지하게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문단이나 언론에서도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쓸 때 경우마다 다른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문단에서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경우를 보자면 1. 문단 시스템 안에서 제조되는 모든 문학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경우. 2. 문단 시스템 안에서 제조되는 문학 중에 통속적인 것을 뺀 것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경우. (이런 기준 안에서는 신경숙의 <외딴방>은 순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순문학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3. 원래의 정의대로 참여 문학에 반대되는 문예 사조에 속하는 것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경우 등으로 나눠진다. 그런데 3번의 경우만 보더라도 시대마다 '순수 문학'의 정의가 달라지는 편이다. 김동리의 '순수 문학'이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문학 자체를 반대했다면 김현의 '순수 문학'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문학을 적극 지지한다. 의미가 다 제각각이다. 원래 의미대로 '순수 문학'이라는 뜻으로 쓰자면 문단 문학의 상당수는 순문학이 아닌 게 돼 버린다. 애초에 '순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에 따라서 좀 억지스럽게 만들어놓은 단어인 것이다. 여기에 '장르문학과 구분되는 일반 소설'이라는 한 가지 의미를 추가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맥락은, 사회에서 특정한 상징권력을 보장받고 있는 문단이 그 상징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용대운 작가의 증언이 시사하는 게 그 부분일 것이다. 장르문학에 대한 차별이 실재한다는 점이나, '순문학'이라는 단어가 그 차별에 부역하는 방법으로 활용된 용례가 많다는 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장르문학이 주체가 되어서 '순문학'이라는 단어를 '장르인 것'과 '장르가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경우에서, 우리는 그 단어가 쓰이는 방식을 통해서 장르의 정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나는 한상운의 <무림사계>가 무협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협의 비중이 적다고 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한상운의 단편 <그해 여름>이 장편 <무림사계>로 개작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추가된 요소가 바로 '협'이라는 점이다. <그해 여름>이 세상을 철저히 냉소적이게 바라보고 있다면, <무림사계>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주인공과 끝까지 대적하는 방무석 같은 인물이 추가되었으며 주인공 자신도 비록 소속된 문파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나왔지만 그 문파의 명예를 의식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협이라는 장르 자체가 작품들의 개별적인 창작에 실제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변화라고 생각한다. 장르의 테두리는 작가와 독자들이 오가며 만든 창작과 소비의 울타리 같다고 생각한다. 이 울타리가 보수적인 장벽이 될 필요는 없지만, 이 울타리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오간 그 흔적을 지워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울타리를 둘러싼 차별을 지워내는 것과 그 울타리 자체를 지워내는 건 다른 일이다.

 

 

이융희님이 다소 오해하고 있는 점은, 내가 "장르 문학의 소재가 섞여있는 애매한 소설들이 문단 문학의 독자를 탈락"시킨다로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먼저 쓴 글에서 내가 '공모전 대중 소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난 이런 애매한 문단 문학이 오히려 문단 문학의 독자를 감소시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천명관의 <고래>를 예로 들자면, 이 소설은 장르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지루한 순문학 작품이다. 꼭 웹소설이 아니라 길리언 플린이나 마이클 코넬리 같은 작가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지루하다. 문단에서 금박을 씌우는 공모전 대중 소설에서 '재미'란 것은 '가독성'에 다름 아니며 흥미진진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욕망 자체를 추구하진 않기 때문에. 반대로 관습적인 문학관을 지닌 독자들이 보기에 <고래>는 <백 년의 고독>에서 사회적인 맥락을 다 빼먹은 카피캣에 불과하다. 대중소설 독자들이 보기엔 너무 따분하고, 진지한 문학의 독자들이 보기엔 '진지한 게 아닌 것을 문단에서 억지로 포장하는' 형국이다. 난 그렇게 해서 문단이 단발적으로는 적당히 팔리는 작품을 발굴했어도 장기적으로는 양쪽 독자들을 모두 잃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건 장르적인 색채가 섞인 글 때문에 문단 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는 얘기가 아니다. 차라리 길리언 플린이나 마이클 코넬리 같이 흥미진진한 장르문학을 썼다면 나았을 텐데, 작가들은 심사위원의 눈치를 보면서 애매한 대중문학(혹은 통속문학)을 써서 내고, 문단에서는 그것에 문학적 가치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금박을 씌우면서 오히려 독자들한테 회의를 불러일으킨 게 아니냐는 것이다. 공모전 소설은 아니지만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문단 문학의 소비층은 물론이요, 비평가들한테서까지 문단 체제에 회의를 일으킨 바 있다. <엄마를 부탁해>는 100만부 넘게 팔리면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저 작품에 대하여 '이런 걸 진지한 문학으로 포장한다고? 문단이 갈 데까지 갔구나'하는 반응 역시 꽤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엄마를 부탁해>는 적어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라도 했다. 근데 문단에서 나온 많은 소설들이 그만한 상업적 성과는 못 거두었으되, 대중성을 쫓으면서도 노골적인 재미를 추구하진 않으면서 애매한 형태의 대중소설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단 공모전에 응모된 작품들은 장르적인 색채가 적은 편이다. 정유정이 '세계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한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심사위원들을 의식해서 장르적인 색채를 줄였지만, 그 이후에 자유롭게 발표한 <7년의 밤>은 장르적인 색채를 마음껏 넣었다'고 말한 게 그 사례이다.)

 

문단에서 저런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문단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문단 체제 안에서 조금이라도 상업적으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먼저 쓴 글에서 말했듯이 저런 공모전 시스템으로는 지속적인 독자층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이미 문단 바깥에 지속적인 독자층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들을 발굴해야 한다. 문단에서야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 저런 방향을 취한다고 해보자. 근데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대체 왜 문단 외부에서까지 문단을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하고, 문단한테 잘 팔리는 소설을 쓸 것을 요구하냐는 것이다.

 

 

언론에서 한국 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상업적 부진을 말할 때) 보통 호명되는 것은 문단 문학이다. 문단 작가들의 판매량을 가늠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하거나(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102103395&code=960100 ), <트와일라잇>이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같은 작품이 국내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문단의 방향성과 연결 지어서 설명한다(https://blog.naver.com/khhan21/110152293432 ). 그런데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성행하기를 바란다면 국내 장르문학을 다룬다는 분명한 방법이 있다. 반드시 그것을 문단 문학이라는 집단에 요구할 필요는 없다. 사실 문단 문학은 <트와일라잇>이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담당할 전문성을 지닌 집단을 찾을 때 가장 마지막에 고려해야 할 후보군에 가깝다. 뒤에서 더 할 얘기지만, 배명훈은 <신의 궤도>를 출간했던 2011년도에 이미 문단 문학의 비평은 인물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조명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문단 체제 안에서 출간된 장르 문학 작품도 조명하지 못하는 집단한테 어떻게 장르 문학의 발굴을 맡긴다는 말인가?

 

 

https://twitter.com/goldenboughbook/status/629729029554245632

 

 

 

황금가지 출판사에서는 자기 출판사를 대표하는 작가가 누군지를 묻는 언론의 질문에 '이영도'라고 답했다가 '외국 작가로 말해달라'는 요청에 '스티븐 킹'이라고 답을 바꿨던 일화를 말한 적 있다. 언론이 장르 문학을 다룰 때 국내 작가들은 이상할 만큼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언론의 태도는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작품이 읽히는지 실상을 왜곡해서 전달한다. 문학 평론가들 중에서는 이영도가 90년대 후반에 반짝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가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실제로 이영도는 그 이후로도 문단 작가들보다 항상 많이 팔린 작가였는데도). 전민희의 경우에서는 조금 더 심각하다. 전민희는 주류 언론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다. 판타지 문학 팬덤 안에서 이영도와 전민희는 인기나 작품성 측면에서 보통 동등한 위치의 작가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영도가 판타지 문학을 대표해서 문학 평론가들의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대외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다뤄진 편이라면 전민희는 아예 언급이 되지 않는 편이다. 전민희의 소설이 언론에서 다뤄질 때는 독립적인 문학 작품보다는 게임의 파생 상품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전민희가 인기 작가이기 때문에 그 독자층을 끌어오려고 한 게임 브랜드와 협업하게 되었다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언론에서는 전민희를 게임이라는 매체와 협업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작가인 것처럼 다뤘다. 자기들이 안 다룬 작가이기 때문에 게임을 통해서만 호명되는 대상인 것이다. 전민희의 작품들이 얼마나 많이 읽혔는지를 생각하면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룬의 아이들> 윈터러가 국내에서 76만부 가량 팔린 것이 2008년의 일이다. <룬의 아이들>이 76만부 팔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논할 때는, 저 76만부가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룬의 아이들>은 대여점에서 1000원도 안 되는 값에 빌려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연재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텍스트 파일이 돌아다닌다. 자신들의 작은 공동체에서 영웅이 되고 싶었던 철없는 팬들 중에서 이 작품을 한 문장씩 옮겨서 텍스트 파일로 만든 다음에 인터넷에 배포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룬의 아이들>을 구매하는 청소년의 부모들은 판타지 소설을 혐오했다. 교사들은 그런 것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기계적으로 강변했다. 언론에서는 <룬의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냈다. 비판적으로 언급을 한 게 아니라 아예 언급 자체를 안 한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백만 부 넘게 팔린 데는 저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인 환경의 요인이 크다. 여러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서로한테 추천했고, 가수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것은 저 작품이 팔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건이라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그 작품이 팔리는 데 최선의 협조를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룬의 아이들>은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이 작품이 안 팔리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룬의 아이들>은 76만부가 팔렸다. 11년이 지난 지금에는 훨씬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 아마도 윈터러를 1권에서 7권까지 모두 읽은 독자들의 숫자가 <82년생 김지영> 한 권을 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지 않을까 난 생각한다.

 

 

<룬의 아이들> 윈터러는 일본에 번역된 이후에 야후 제팬이 선정한 '2006년 가장 많이 읽힌 소설'로 꼽혔다. 판타지 소설의 팬덤에서는 이것을 대부분 다 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전민희라는 작가의 존재를 지워내었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의 소비층 바깥에서는 조금도 조명되지 않는 것이다. 엄연히 실재하는 국내 장르문학이 있는데 그들의 존재를 지워내고 있다. 대신에 문단 문학이 장르 문학의 영역까지 떠맡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에 대한 이중의 혐오와 같다. 국내 장르 문학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고, 문단 문학은 '해외 장르 문학처럼 잘 팔리지 못한다'고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장르 문학의 존재를 지워내는 언론의 태도가 실제로 어떤 작품들이 사람들한테 읽히고 있는지 실상을 왜곡한다면, 문학 비평에서 장르의 흔적을 지워내는 시도는 작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막는다. 비평에서도 장르의 흔적을 무시하는 시도가 있다. 정은경의 <밖으로부터의 고백―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웨스턴 소설 국경 삼부작을 다루면서, 코맥 매카시의 소설의 특징으로 현대 문학과는 상이하게도 강렬한 이야기와 모험을 다룬다고 말한다. 근대 국가의 발달과 완성 과정에서 사라진 개개인의 모험이 코맥 매카시의 소설에서는 예외적으로 살아 있다는 뭐 그런 얘기였다고 기억하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의아스러운 것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문학의 전통 안에서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코맥 매카시가 멜빌, 포크너, 헤밍웨이의 스타일을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에서 '이야기의 격렬함'은 다 장르 문학에서 나온 것이다. 아마존에 올라온 <모두 다 예쁜 말들>(국경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 리뷰를 보면 '나는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 사는데 조금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서평을 남긴 사람이 있다. 당연한 얘기다. 코맥 매카시는 토속적 사실주의 소설로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코맥 매카시는 정말로 뻔뻔스럽게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허구적인 세상으로 들어가서, 장르의 전통이 쌓아져가는 과정에서 축적된 낯익은 세상, 인물 군상, 상황들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조명하면서 성장 서사를 썼다(여기서 뻔뻔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국경 삼부작이 멕시코라는 나라를 정말로 뻔뻔스럽게 대상화시키면서 백인 십대 남자 소년이 겪는 성장 서사의 재료로 밖에 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국경 삼부작을 좋아하지만, 정말로 백인 남자 작가다운 글임을 부정할 순 없다). 그게 국경 삼부작이다. 물론 코맥 매카시는 난해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개성은 관점에 따라서는 장르 문학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코맥 매카시의 작품이 장르에서 나왔다는 것을 무시하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은경은 근대 국가가 완성되면서 개개인한테서 극적인 서사가 사라진 세상에서 코맥 매카시는 문명 바깥으로 나가면서 극적인 서사를 복원했다고 말한다. 이때 코맥 매카시는 현대 주류 문학의 다른 작품들과 대비되는 예외적인 성질을 띤다. 그런데 사실 코맥 매카시가 쓰는 이야기의 소재는 예외적이지 않다. 다 장르에서 갖고 온 거다. 장르문학은 근대 국가가 완성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이야기를 계속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근대 국가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서사를 복원하기 위해 문명 바깥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자본주의 시장에서 유통되던 장르문학의 재료를 활용한 것이다. 물론 모든 장르 소설가들이 코맥 매카시 같은 방향을 추구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장르의 흔적을 지워낸 상태에서 어떻게 장르에서 나온 작품을 이해한다는 말인가? 내 생각엔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한다. 주류 문학에서 개개인한테 극적인 서사가 사라진 상황에서 코맥 매카시는 웨스턴 장르를 토대로 개개인한테 극적인 서사가 복원된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학적으로 훌륭한 성과물을 냈다면 주류 문학에서는 장르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특히 장르문학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이뤄진 한국 문학의 대부분보다 코맥 매카시가 문학적으로 월등하다면, 한국 문단은 장르문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코맥 매카시가 본격적으로 쓴 첫 번째 웨스턴 작품은 <핏빛 자오선>이다. 해럴드 블룸은 <핏빛 자오선>에 대해 다음과 평한다.  (https://www.avclub.com/harold-bloom-on-blood-meridian-1798216782 )

 

 

'이전의 코맥 매카시는 훌륭하다고 해도 포크너를 뛰어넘는 개성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핏빛 자오선>에서 확실히 자신의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듯 보인다.' 

 

 

'<핏빛 자오선>은 웨스턴이라는 장르에 잠재되어 있는 미학을 집대성한 궁극의 웨스턴이다.' 

 

 

해럴드 블룸은 해리 포터와 스티븐 킹을 맹비난하고 셰익스피어를 숭상하는 문학적 보수주의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해럴드 블룸은 장르를 차별하진 않는다. 반대로 코맥 매카시가 웨스턴이라는 장르로 나아간 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그 작품이 대중 문학의 특정한 장르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해럴드 블룸의 저 평가를 보자면 좀 씁쓸한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광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학 국문과 교수에 문예지 편집위원에 속하는 이가 '이 작가는 사실주의적 작품을 썼을 때는 선배 작가 모모의 영향에 갇혀 있었지만, 장르의 세계로 나아가면서 자기만의 독보적인 개성을 갖추겠다'고 평가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서 '웨스턴 장르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평가가 가능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소리는 다 핑계라고 생각한다. 짜장면이 중국 본토에는 없는 한국 음식이듯이 한국에서 창작된 장르문학은 배경을 가상의 중국이나 중세로 하고 있다고 해도 그냥 한국 문학이다. 똑같은 보수적인 순문학주의자라고 해도 해럴드 블룸과 한국 문단 사이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다. 스티븐 킹의 팬으로 유명한 김성곤 교수는 '미국에서는 이미 영문과에서 스티븐 킹이나 톰 클랜시 같은 작가들이 다뤄지는데 영문학의 변방에 불과한 국내 대학에서는 훨씬 더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방이기 때문에 더 정통성에 집착하는 거 같다'는 애기를 한 적이 있다. 스티븐 킹이나 톰 클랜시는 대학교 영문학에서 다뤄질 뿐만 아니라, 그런 작가들한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해럴드 블룸도 적어도 장르문학 자체를 지워내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장르의 자리를 철저히 지워내려고 하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드물게 '장르'가 호명되는 것은, 문단 시스템 안에서 장르적인 코드가 섞인 글이 나오는 경우다. 하지만 난 이런 경우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장르 코드로 쓰인 문단 작품'을 모두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런 작품들은 작품 자체가 굉장히 나쁜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문단 작가들이 장르문학을 썼는데 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이야기의 영역에서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 SF 소설가는 자신이 SF 소설을 쓰는 이유가 현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문단 작가들이 현실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것은 현실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에서 산문을 잘 쓸 수 있는 영역을 찾아내어서, 그 영역에서 산문을 펼쳐놓는 것이 문단 문학의 글쓰기 전략이다. 일단 자신이 산문을 잘 쓸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서 비집고 들어가서 산문을 계속 전개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서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서사적으로 소홀해지는 경우가 적잖게 발생한다.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 장르문학을 쓰려고 시도하는 경우다. 장르문학에서는 장르적으로 해결을 거쳐야만 하는 이야기의 영역이 있다. 그런데 문단 작가들은 장르의 세계에 일단 들어와놓고 종종 그냥 산문을 펼쳐놓으면서, 이야기로 해결해야 하는 영역을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2. 장르의 표면적인 코드를 탐닉하느라고 세상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장르 작가들은 장르적인 틀을 다루는 데 능숙하기 때문에 그 틀을 이용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말하고는 한다. 장르 문학 안의 세계(컨벤션으로 이뤄진 허구)를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단 작가들은 장르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 그 허구의 세계가 어떤 구조로 이뤄졌는지를 말해야 하는 시점에서 장르의 표면적인 이미지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김언수의 <설계자들>과 구병모의 <파과>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구병모는 SF 작가 연대에도 가입한 작가지만, 내가 보기에 <파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문단 문학에 속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반전이 없다는 것이다. 김언수의 <설계자들>은 중후반부 쯤의 부분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인물 미토와 그런 변혁을 믿지 않는 주인공 래생을 대치시킨다. 하지만 이때 이야기의 갈등을 진전시키면서 두 사람의 입장에 균열을 내거나 보충을 하는 대신에, 작가는 래생의 입장을 계속해서 반복해주는 방법을 취한다. 이야기적으로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래생의 세상은 너무나 분명하게 고정되어 있다. 스릴러 소설에서의 반전이라는 것은 결국에 세상의 균열을 보여주면서 누가 선이고 악인지를 계속해서 질문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언수가 스릴러의 세상에 들어와놓고 그 질문을 피하려고 했을 때 결국에 남은 것은 장르의 표면적인 이미지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여주는 일뿐이다. 스릴러적으로 나쁠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으로도 나쁘다. 흔히들 소설은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는 균열된 세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논픽션이 갖지 못한 사회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고 말해진다. <설계자들>은 그 지점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미토와 래생의 이분된 입장은 균열이 없다), 대신에 장르의 표면적인 이미지만을 퇴행적으로 탐닉한다.

 

<파과> 역시 반전이 없다. 정확히 말해서 <파과>는 반전이 성립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 자체를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인과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조각에 의해서 가족을 잃은 투우는, 조각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딸을 납치하면서 조각을 불러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조각이 투우와 대결을 펼친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이야기인데, 문제는 대체 왜 투우가 조각한테 저렇게 집착을 하는지 작품 안에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다. 투우는 아버지를 죽인 것을 복수하기 위해 조각한테 집착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투우한테는 조각한테 복수할 의향이 없다고 선언해 버린다(복수는 "삼류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이때 투우는 분명히 조각한테 복수의 행동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복수라고 선언할 권리는 포기하는 것이다. 투우는 조각한테 가족을 잃은 다음에, 조각과 마찬가지로 살인청부업의 업계에 들어선다. 여기에는 분명히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 하지만 투우는 그 악순환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이제는 자신이 그 일부가 돼 버린 세상의 구조에는 무관심한 것이다. 이때 투우가 자신의 행동을 '복수'로 명명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삼류 무협지" 같은 통속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에 복수할 권리, 혹은 복수라는 행위를 통해서 사회 구조와 직접 부딪칠 권리를 포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투우의 행동은 조각을 향한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통속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르적인 코드는 들어가 있지만, 장르적인 쾌감은 빠져 있는 문단 문학식 통속 문학인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조각이 어린 시절의 투우를 기억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근데 이건 진짜 이야기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저 정보가 추가된다고 해도 이야기에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오래 전부터 서로를 기억했다는 감상주의만이 맴돈다. 문단 문학에선 장르적 코드를 통속이라고 쉽게 배척하는데, 그런 환경에서 유일하게 용인되는 통속성은 저런 감상주의다.

 

 

능숙한 장르문학 작가들은 장르의 틀을 이용해서 세상이 어떤 형태로 이뤄졌는지 그 구조를 말하고는 한다. 이때 장르적인 코드에 충실하고, 관습적인 문학의 기준에서도 훌륭한 작품들이 나온다. 문단 문학에서 장르적인 코드가 나올 때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것을 유예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장르 문학에서는 장르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서 정면 승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장르 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문단 체제 안에서 나온 작품들은 그 지점을 회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단 문학에서 장르적인 코드를 써서 나온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이라고 생각한다. <물속 골리앗>은 관점에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건 꼭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물속 골리앗>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현실에 밀착한 김애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나아간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속 골리앗>은 비가 내려서 세상이 물에 잠긴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한 채 주인공이 그 상황을 타개해가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애란이 현실에 밀착한 채 쓴 소설 <서른>의 주인공이 아무리 불쌍한 척 해봐야 학원에서 만난 학생을 죽음에 몰아넣고 나 몰라라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물속 골리앗>은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을 기반으로 해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자리에 가서, 아버지를 죽인 세상과 대면하게 하는 성장 서사를 쓴다. 김애란의 단편 중에서 성장 소설로 분류되는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나 <칼자국>의 주인공들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일 줄 모르는 것에 비하면 <물속 골리앗>의 주인공은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과정에서 훨씬 더 분명한 성장 서사를 구현한다. 물론 <물속 골리앗>은 근본적으로 터무니 없는 얘기다. 주인공이 아파트의 베란다 바로 밑까지 물이 차오른 상황에서 집에 있는 문을 뜯어서 임시 보트를 만들고 결국에 살아남는다는 설정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독자들은 저것을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장르적 허용'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하는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기본적으로 과장스러운 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뻥을 통해서 더 나아간 지점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과장스러운 얘기를 하는 것은 괜찮다. 작가와 독자 양측이 그 과장된 이야기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있기만 한다면. 장르 문학의 미덕 중 하나는 이렇게 특정한 문제가 주어진 상황을 만들고(그것이 연애든 모험이든 생존이든 범죄든 간에), 그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맥 매카시의 국경 삼부작이 실제의 멕시코가 아니라 장르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걸 모두가 다 안다. 때문에 우리는 국경 삼부작이 가상의 세계를 통해서 현실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지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실에 완전히 밀착해서 쓰이는 소설이 종종 한계에 부딪칠 때 장르적인 접근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열 수가 있다. 현실에 대해 말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자신들의 산업 바깥에 있는 장르 문학의 존재를 지워내는 문단의 태도는 문학의 크기를 축소시킨다. 그 문단의 기준을 받아들여서 한국 문학을 문단 문학과 동일시하는 언론의 태도는 실제로 읽히는 작품들의 존재를 지워낸다. 그런데 이때 언론에서는 다뤄야 하지만 문단에서는 다룰 필요가 없는 작품들(문단이 그런 작품들을 다룰 만한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혹은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도 엄연히 있다. 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는 2번에서 이어진다.

 

 

 

2. 중간 문학과 서점용 장르 문학

 

 

판타지, 무협, 로맨스 장르소설의 특징은 대여점을 위주로 구체적인 소비층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대여점에서 유통되는 출간작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다. 때문에 저런 작품들은 공공 도서관에 들어오는 경우도 드물고, 판타지나 무협 같은 경우엔 대형 서점에 가도 눈에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언론에서는 저런 작품들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언론에서 위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을 드물게나마 다루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1. <드래곤 라자>처럼 출간 당시에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작품. <드래곤 라자>는 출간 당시에 민음사에서 주류 일간지에 광고를 어마어마하게 때렸기로 유명하다. 그랬기 때문에 <드래곤 라자>는 언론에서 그 존재를 지우진 않지만 그 이후에 나온(여전히 많은 흥행고를 올린) <퓨쳐 워커>, <폴라리스 랩소디>나 <눈물을 마시는 새> 시리즈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2.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나 <해를 품은 달> 같이 영상화된 작품. 하지만 언론에서는 영상화되지 않은 로맨스 소설 작품의 존재는 지워낸다. 2009년에 출간된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이 일주일도 안 돼서 초판 2만부를 모두 소진하고 증쇄에 돌입하는 등 상업적 성과가 있었음에도 다뤄지지 않은 게 대표적인 예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드라마가 된 이후에 그 시리즈는 언론에서 조명되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에도 다른 로맨스 소설은 조명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아쉬운 점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향유하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인데 정작 언론은 그 향유층을 통해 성공한 작품을 다루면서 시장에 있는 다른 작품들의 존재는 무시했다는 것이다. 언론이 상업성 있는 문학을 발굴하고 싶다면 국내 장르문학을 다루는 방법이 있었다. 국내 장르문학의 질적인 수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면 된다. 출간 부수를 적게 유지하더라도 출간작의 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로 결정한 출판사들이 있으니 언론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작품을 더 다루려는 의향이 있다면 '문단 문학이 안 팔리네' 같은 소리를 하는 대신에 그냥 그 출판사에서 나오는 작품들을 더 다뤘으면 되었던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해외 장르문학만을 다루고, 더 나아가서 한국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냉소한 것이다. 장르문학 출판계에서는 이미 식사를 다 차려뒀는데 언론에서는 식탁에 앉기를 거부한 채 먹을 게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여러 출판사에서 서점용 장르문학을 내려고 한 것은 장르 문학에 대한 대외적인 선입견을 깨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판타스틱 2008년 12월 호에서 노블레스 클럽은 자신들의 방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외 장르 문학 작품은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에서 국내에 들어오기 때문에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지만 국내 장르 문학은 비평이나 문학상이 부재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무엇인지를 판별하기 힘들다. 때문에 독자들은 장르문학에 진입하기 힘들어 한다. 노블레스 클럽은 그런 상황에서 기준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먼저 쓴 글에서 얘기했듯이, 노블레스 클럽이나 이타카 같은 브랜드는 서점용 소설을 지향하는 와중에 장르의 소비층하고 다소 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시장에서 안착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상을 받고는 한다. 먼저 쓴 글에서 나는 한상운의 <무림사계>에 대해 한 독자가 남긴 블로그 서평에 대해 얘기했다. 그 독자는 평소에 '힘이 센 주인공이 승승가도를 달리는' 내용의 작품 위주로 판타지/무협 소설을 읽었는데, 대여점에서 <무림사계>를 빌려보았다가, 무협 소설에서 이렇게 인간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무림사계>가 대여점에 들어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여점 체제를 떠난 서점용 소설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어졌다. 이는 파란미디어 같이 소장용 로맨스 소설을 지향하는 출판사가 대여점 체제 자체를 떠나지는 않은 점, 그리고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가 4권 짜리 양장본 외에도 대여점에만 공급되는 6권 짜리 판본이 따로 있었다는 점과 대비된다. 비슷한 방향성을 추구하는 장르문학 브랜드 새파란 상상에서도 주로 인기 있는 작품은 좌백이나 윤현승처럼 대여점 시스템에서 인기를 얻었던 작가들이다. 기존 장르문학의 소비층을 자신의 팬층으로 흡수한 경우이기 때문에 팬들은 그들이 새로운 영역에서 낸 작품을 샀다. 반면에 그 새로운 영역(서점용 장르문학)에서 굳건한 소비층을 만드는 것은 아직 그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소되고 있는 것 같다. 웹소설을 통해서 대여점을 거치지 않고 독자가 직접적으로 소설을 읽는 시스템이 확보되었고, 읽는 사람의 숫자에 비례해서 작가들한테 직접적으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대여 체제와는 다르게) 시스템에 따라서 업계에 잠재되어 있던 상업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웹소설에 주목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기존에 장르문학을 다루지 않던 매체에서도 웹소설을 다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서점용 소설은 대여점 체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로 모색되었지만 장르 문학의 소비층을 너무 떠나버린 것이 일정 부분 한계로 작용했고, 웹소설은 그 대여점 체제의 소비층을 유지했다는 데서 성공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다만 먼저 쓴 글에서 이런 내용을 넣지 않은 것은, 이것이 근본적으로 웹소설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외부적으로 관망하면서 느끼는 단상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서점용 장르문학을 개척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한 시도라면, 내부적으로는 대여점 체제에서 장르 문학이 갖게 되는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단 이융희님이 먼저 쓴 글에서 느낀 의문부터 답하고 싶다. 이융희님은 맨 처음 내가 올린 글을 보면서 '<달빛 조각사>가 글에서 전체적으로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고 <달빛 조각사>와 출판 장르문학의 독자가 겹치지 않을 거라는 부분에서 의아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맨 처음에 올린 글에서 <달빛 조각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문단 문학이 <달빛 조각사>를 다루지 않았다고 해도 언론에서는 <달빛 조각사>를 다뤘어야 했는데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김보영의 <스크립터>를 읽는 독자층이 <달빛 조각사>나 <유레카>의 독자층은 아닐 거 같다.' 

 

 

'문단 문학이 <달빛 조각사>를 다루지 않았다고 해도 언론에서는 <달빛 조각사>를 다뤘어야 했는데 다루지 않았다'는 건 언론이 장르문학을 다루지 않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예로 든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달빛 조각사>보다 배명훈의 인터뷰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달빛 조각사>가 다소 겉돈다는 점, 그리고 <달빛 조각사>가 언급된 것에 비해서 웹소설에 대해서는 비어 있는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한 지적은 납득한다. 그런데 <스크립터>의 독자와 <달빛 조각사>의 독자층이 겹치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한 이견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았다.

 

 

내가 김보영의 <스크립터>를 읽는 사람들이 <달빛 조각사>를 읽는 사람들과 크게 겹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스크립터>는 단편 소설이다. 단편 소설의 미학은 장편 연재 소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구축된다. 어찌 보면 똑같은 판타지의 카테고리에 속한다고 해도 단편과 장편은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할 수 있다(나는 단순히 문학의 갈래 안에서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이 다르게 분류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시작 출판사에선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을 두 편 내었는데, 2008년에 나온 첫 번째 단편선에서는 홍정훈처럼 장편 소설로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지만 2009년에 나온 두 번째 단편선은 거울에 소속된 작가들 위주로 바뀐 것이 그 예다. 인터넷에서 장편 소설을 연재하면서 인기를 끈 작가들한테 한정된 분량 안에서 이야기를 맺고 끊는 단편 소설은 다소 낯선 영역일 수도 있었고, 2008~2010년에 판타지/무협 단편선이 간혹 나올 때 장편 소설가들이 종종 단편을 실었던 경우가 있었지만 종래에는 대부분 떠났으며, 반면에 원래부터 단편 소설의 글쓰기에 숙달된 작가들이 그 영역을 채워넣었다. 이영도나 좌백처럼 장편 소설로 데뷔했지만 계속 단편 소설을 쓴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본인들이 개인 단편집을 따로 낼 만큼 처음부터 단편 소설 쓰기에 관심이 꽤 있는 경우였다. 이렇게 인터넷의 장편 연재 소설과 단편 소설이 서로 구분된 영역에 있다고 하면 <달빛 조각사>와 <스크립터>도 구분된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노블레스 클럽과 이타카의 시장에 안착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대여점 시장을 떠나는 와중에 판타지 소설 소비층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스크립터>는 게임 판타지가 소비되는 시장에서 더욱 멀리에 있다.

 

 

사실 내가 <스크립터>를 함부로 게임 판타지로 분류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스크립터>는 전직 게임 개발자가 쓴 SF 소설이다. 원래는 인공 지능 로봇에 대한 소설을 쓰려다가 작가한테 가장 익숙한 영토인 게임 세상으로 배경이 선택된 것이다. 이때 이 작품을 섣불리 '게임 판타지'로 분류하는 것은 일반 문학에서 말하는 '환상성'을 가지고 '장르 판타지'를 설명하려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될 수 있다. 장르와 상관 없는 것을 가지고 장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스크립터>는 근본적으로 게임 판타지 세상에 대한 의심을 계속 던지는 작품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게임으로 구현된 판타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에. 판타지 문학의 미학을 보존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판타지 장르에 속한다는 게 먼저 글에서의 결론이었다.

 

 

'서점용 장르문학과 대여점용 장르 문학이 얼마나 겹치냐'는 것에 대해서 나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예는 해외 무협 소설과 한국 무협 소설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국내 무협 소설가들 중에서도 인터뷰에서 '김용의 소설은 좋아했지만 대본소에 있던 한국 무협 소설을 몇 권 읽고 실망했었다. 그래서 한국 무협은 읽지 않았는데 우연히 용대운이나 좌백의 작품을 읽고 생각이 달라져서 한국 무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무협 소설을 쓰게 된 사람들 중에서도 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면 일반적인 독자들 사이에서는 '김용의 무협 소설은 읽어보았지만 대본소/대여점에 있는 무협을 굳이 읽진 않는' 경우의 비중이 적잖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런 경향은 판타지 쪽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데, 번역된 해외 판타지 소설은 읽지만 대여점 소설은 아예 읽지 않는 독자들의 비중은 절대 적지 않다. 서점용 장르 문학과 대여점 장르 문학의 수요층이 명백하게 갈렸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 무협의 경우에서, 저렇게 한국 무협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된 사람들을 다시 독자로 되돌린 것도 한국 무협이라는 것이다. 용대운이나 좌백의 작품을 읽고 한국 무협을 찾게 되었다는 증언이 그렇다. 서점용 무협(김용)을 읽는 독자들도 가이드 라인만 있다면 대여점 소설(용대운, 좌백)의 독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장르문학에 진입 장벽이 있다고 했을 때,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장르 자체에 진입 장벽을 느끼는 경우다. 모든 장르에는 그 장르만의 오글거림이 있다. 판타지, 무협, SF, 로맨스, 추리, 문단 문학 모두 다 그 소비층은 좋아하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닭살 돋는 정서라는 게 존재하는데, 그런 오글거림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고 적응을 하는 게 장르문학의 독자가 되기 위해 통과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의 진입 장벽이라면, 두 번째 의미의 진입 장벽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 따라갈 만한 기준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김용의 작품을 좋아할 만큼 무협이라는 장르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지만 한국 무협은 몇 권 들춰보니 실망스러운 내용이라서 관심을 끊게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어떤 작품이 좋은 것인지 고를 만한 기준이 없어서 떠나게 된다. 대여점에서 유통되는 장르 문학에는 두 번째 의미의 진입 장벽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서점용 소설과 대여점용 소설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난 무협이나 판타지에서 서점용 소설을 내는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는 대여점 체제에서 이미 나온 작품을 발굴하는 경우다. 시공사에서 <대도오>와 같은 신무협 작품을 양장본으로 재간한 것, 넥스비젼에서 1세대 판타지 소설을 양장본으로 출간한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미 대여점 체제에서 나와서 인기를 끌고 작품성이 검증된 작품들을 새로운 독자들이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고전이 되게 서점용 소설로 출간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좋은 작품이 어떤 것인지 고르기 힘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대여점 체제에서 나오기 힘든 소설을 발굴하는 것일 거다. 혹은 대여점 체제에서 맞지 않는 작품을 출간하는 경우다. 김근우는 <바람의 마도사>를 그리핀 북스에서 재간할 때 판매량이 저조하다는 이유에서 작품을 원래 길이보다 빨리 마무리지었어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 김근우가 이후에 노블레스 클럽이나 이타카에서 책을 낸 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 대여점 체제 바깥에서 작가로서의 활로를 모색한 것이었다. 한상운은 자신이 무협 장르 안에서 작가로서 브랜드를 키우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일단 더 넓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 서점용 소설을 시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두 사람의 경우에서는 대여점 체제의 관습이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에 서점용 소설을 쓰려고 한 것이다. 대여점 체제에 대한 안티 테제적인 맥락에서 나온 서점용 소설이었다. 

 

 

이융희님이 내가 먼저 쓴 글에 대하여 '서점용 장르소설의 공로를 특정한 출판사와 독자들한테만 돌리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다. 웹소설 연재본과 서점용 장르소설의 성공은 반드시 구분되지 않는다. 로맨스 소설은 오랜 시간 동안 양쪽 영역을 동시에 맡아 왔다.' 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 의도는 반드시 일부 특정 출판사들한테만 서점용 장르소설의 시장을 개척하려고 한 공로를 돌리려는 것은 아녔다. 그보다는 대여점을 위주로 소비되는 장르 문학은 창작자한테 몇 가지 제약을 걸어놓는데 서점용 장르문학(혹은 소장용 장르문학)을 지향하는 출판사는 창작자한테 보다 자유로운 환경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단편 <그해 여름>이 <무림사계>로 개작되는 와중에 원래 하나의 문단으로 이뤄져 있던 여러 문장들이 잘게 나뉘어서 여러 개의 문단으로 흩어진 것, <바람의 마도사>가 판매량을 이유로 조기 종결을 당한 것이 그런 제약에 속한다. 파란미디어의 박대일 대표는 로맨스 소설이 대여점에 정착하는 와중에 교열을 보지 않고 무성의하게 책을 내는 사례가 늘어났고, 그 와중에 장르 팬덤 내부에서 장르에 대한 냉소가 퍼져나갔으며, 그런 상황에 대한 책임은 독자나 대여점이 아닌 출판사에 있다고 말했다(https://teen.munjang.or.kr/archives/2137 ). 다른 글에서 박대일 대표는 자신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게 된 이유로, 교정을 보지 않고 책을 내는 흐름이 로맨스 소설을 잠식했을 때 그런 흐름에 반대하는 자신은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던 출판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여점 시장을 목적으로 책을 내는 경우에서 교정을 소홀히 하거나, 길게 이어지는 문단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작품을 작가가 자의적으로 완결짓지도 못하게 강제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90년대 후반에 <드래곤 라자>를 비롯한 판타지 소설이 나왔을 때 기성 문학 비평가들은 무협 소설과 판타지 소설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하고는 했다. 그때 판타지 소설이 무협 소설과 차별되는 점으로 꼽힌 것 중에 하나가 작품들이 문단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무협 소설은 문단이 서너 문장 이상 넘어가지 못하지만 판타지 소설은 더 일반적인 문단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생각해볼 점은 저 판타지 소설들이 모두 다 인터넷에서 그냥 연재된 소설들이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돈 한 푼 안 내고 읽는 글들이니 재미가 없으면 읽는 것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러 가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글들을 모두 다 따라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여점에 들어오는 소설들 역시 문단을 굳이 잘개 쪼개어서 짧은 여러 개의 문단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웹소설처럼 핸드폰으로 보기 때문에 작은 화면에 글의 스타일이 맞춰지는 경우도 아니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서너 개의 문장 이상으로 문단이 이어진다고 해서 독자들이 이미 대여료를 지불한 책을 읽는 일을 그만둘 만큼 인내심이 없다면 대체 해외에서 성공해 한국으로 번역되는 대중 소설들은 모두 다 문단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단순히 문단을 짧게 유지할 것을 권장하는 환경에서 특정한 문체 스타일이 발달하는 상황이 아니다. 여러 번 예로 들었듯이 <무림사계>의 경우처럼 이미 문단이 조금 길게 이어지는 스타일로 완성된 글도 대여점 체제에 들어오면서 문단이 잘게 잘게 나눠지도록 강제되는 상황인 것이다. 

 

 

'외국에는 스티븐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처럼 대중성도 갖추고 작품성도 훌륭한 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야기의 재미를 경시하고, 장르에 대한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작가들이 나오지 못한다.' 문학계를 성토할 때 흔히 나오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저 말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 작품은 완결성을 지니지 못한 채 시장에 나왔다가 반응에 따라서 조기 종결을 당할 수 있고, 문단은 길게 이어지지도 못한 채 잘게 잘려 있는 대여점 소설이 스티븐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반문이 떠오른다. 작가가 완성된 작품을 선보이고, 온전한 문단을 유지한 채 글을 쓸 만한 최소한의 창작의 자유가 보장된 다음에야 한국의 스티븐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단권으로 선보여지고 문단의 길이에 대한 제약이 없는 서점용 장르소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점용 장르 문학이 출범했다. 이때 서점용 장르 문학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종종 등장하는 것이 '중간 문학'이다. 문학평론가 김성곤은 저서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을 통해서 레슬리 피들러의 중간 문학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중간 문학이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 중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하며, 중간 문학 작품은 독자들한테 등장 인물에 대한 감정의 이입을 자아내어서 사고의 외연을 넓히는 사회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고, 문학 평론가들은 그런 종류의 문학 작품에 비평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레슬리 피들러는 문학이 사회에서 갖는 교시적인 기능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한테 널리 읽히는 작품들에 그러한 기능이 있으니까 비평가들은 그런 작품을을 비평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장르 문학의 기준으로는 훌륭하지만 중간 문학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그런 경우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꼼꼼한 교열을 거쳐서 나온 소설이고, 문장력과 인물 묘사, 이야기의 전개 모두 다 훌륭하다. 게다가 많이 팔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중간 문학의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이것은 사실 방향성의 문제인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김윤희가 아버지의 자리에 서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의 이야기다. 김윤희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남동생 김윤식은 병약해서 과거에 응시를 하지 못하고, 김윤희는 책을 필사하거나 사수 노릇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둘 다 여자의 신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김윤희는 남장을 한 채 동생 '김윤식'으로 정체를 위조한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부재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 김윤희는 동생을 대신해서 과거에 응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윤희는 여자지만 부재한 아버지와 아픈 남동생 대신에 집안에서 남자의 의무를 수행하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남자의 특권을 누리지만, 동시에 여자로서의 욕망은 좌절된다. 김윤희는 과거를 응시하는 와중에 만난 이선준한테 연심을 품지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난관에 부딪친다.

 

 

김윤희가 사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여성 혐오적인 세상이다. 작중에서 김윤희는 자신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려는 불량배들한테 '목소리가 고자 같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은 '고자 같다'는 말이 모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근이 부재하다는 것만으로도 모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모르는 것은 김윤희가 실제로 남근이 없는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남근이 부재하다는 것을 인간의 결함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김윤희는 학문을 익히고 신분의 상승을 추구하기 위해 동생인 김윤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춰야 한다. 하지만 이때 김윤희가 잃는 것은 이선준과 사랑을 할 권리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서 김윤희와 이선준의 관계에는 다른 연적이 개입하지 않는다. 삼각 관계는 이뤄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선준은 부용화한테 단 한 번도 연심을 느낀 적 없다. 문재신은 김윤희한테 연심을 품지만 사랑을 놓고 이선준과 경쟁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자신은 이선준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비켜선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이선준과 김윤희의 결합을 막는 것은 제 3의 연적이 아니라 사회 체제다. 이선준은 남자라고 알려진 김윤희한테 연심을 느끼는 자기 자신한테 혼란을 느끼고(그가 속한 사회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한다), 김윤희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 사회의 규칙을 속였다는 것을 밝혀야 하다는 점에서 갈등을 느낀다.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사회에 들어서는 미성년의 성장을 다룬 서사라고 해석할 여지가 많다. 김윤희는 성균관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해올 것을 선배 구용하한테 요구받는다. 그 입사식을 거치면서 김윤희는 '대물'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남근에 허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허락된 가장 영예로운 칭호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장치기 놀이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속한 팀을 승리로 이끌면서 상징적인 업적을 남긴다. 남자들만이 참여하게 허락된 경쟁에 출전해서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남자들의 공동체를 승리로 이끈 것이다. 소년 -> 남자로 상징적인 성장을 거치는 정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김윤희가 소년이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잘금 4인방은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할 때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주인공들은 분명히 성장 서사 안에 있긴 한데 성장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장재신이 당파를 넘어서 이선준과 연대하기로 결정하는 부분이 등장 인물들 간의 유일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혐오 측면에서 보자면 이 등장 인물들은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상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여성 혐오를 끊임 없이 재생산한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여림' 구용하다. 구용하는 기생을 어마어마하게 밝히는 인물이지만 사실 여성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혐오하는 인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남자다. 구용하는 처음 김윤희를 본 순간에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성균관에서 쫓아낼 생각을 한다. 구용하는 선배로서 김윤희한테 '기생의 속곳을 갖고 올 것'을 과제로 요구하는데, 그 과제를 해내지 못하면 김윤희는 유생들 사이의 규칙에 따라서 발가벗은 채 냇물에 뛰어들어가야만 한다. 남자들의 공동체에서는 부끄러워도 웃고 넘어갈 일일지 모르지만 여자인 김윤희는 그런 일을 당하면 정체가 들키고, 성별을 위조한 것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된다. 구용하는 처음부터 김윤희의 성별을 밝혀내어서 쫓아낼 생각으로 그런 과제를 내린다(하지만 몇 가지 운이 따라서 김윤희는 속곳을 갖고 오게 된다). '남자가 아니니 내쫓아낸다'라는 구용하의 태도는 이후에 김윤희와 친해진 다음에 '진짜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변화한다. 결국에 장치기 놀이에서 구용하는 김윤희를 인정하게 된다. 김윤희가 상대 팀이 자신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겁해지기 싫다'면서 출전하려고 하자 구용하는 김윤희한테 "이제부터 넌 나의 벗이다. 음과 양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네"라고 선언한다. 남자든 여자든 너를 내 친구로 인정하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구용하한테 인정을 받고 경기에 나선 김윤희는 팀을 승리로 이끈다. 그런데 구용하가 '여자니까 쫓아내자' ->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으면 좋겠다' -> '여자이든 남자이든 넌 내 벗이다'라는 태도의 변화를 거치면서 결국에 직시하지 않으려는 것은 김윤희가 여자라는 사실 그 자체다. 구용하는 김윤희를 벗으로 삼기 위해서 여성에 대한 자신의 편향된 태도를 버리는 대신에 김윤희의 성별 자체를 지워내려고 한다. 이후에 김윤희가 남자인 줄 알고 있는 기녀 초선이 김윤희의 남근을 잘라내려고 소동을 벌이는데, 이때 김윤희를 구해주러 온 구용하는 김윤희한테 남근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모른 척한다. 그는 김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윤희한테 "큰일은 큰일이었지. 사내의 중심이 날아갈 뻔했는데." 라고 말하면서 마치 김윤희가 남근을 갖고 있는 것처럼 꾸며댄다. 처음엔 남근이 없다는 이유에서 김윤희를 쫓아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김윤희와 함께 벗으로 지내기 위해서 없는 남근을 있는 것처럼 믿기로 한 것이다. 태도의 변화는 있지만 의식의 본질적인 성장은 거치지 않고 있다. 

 

 

작품의 중반부에서 구용하는 이선준과 장재신한테 '대물(김윤희)이 여자라고 의심해본 적 없냐?'라고 묻는다. 그 시점에 이선준과 장재신은 김윤희한테 이성적으로 끌리고 있었지만 김윤희가 여자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선준은 구용하한테 '대물 도령의 외모가 예쁘다고 해서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서 그를 여자로 의심하는 것은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며 대물 도령의 품성은 사내답기 그지 없다'고 답하고 장재신은 '대물 같은 여자는 고분고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내감이 될 수 없으며 여자가 아는 거 많고 똑똑하면 집안 시끄러워진다'고 답한다. 이는 각각 메인 남주와 서브 남주의 역할이 반영된 답이다. 메인 남주(이선준)는 여자 주인공을 극진히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인격은 훌륭하니 여자라고 의심하지 마라'고 답하고, 서브 남주는 츤데레답게 여자 주인공에 대한 감정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나는 저런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 두 답변은 각각 메인 남주 버전의 여성 혐오, 그리고 서브 남주 버전의 여성 혐오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여자 주인공을 극진히 대해야 하는 이선준은 '대물의 인성은 훌륭하다. 그런 훌륭함은 남자다움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으니 그를 여자로 의심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훌륭한 성품을 남자다움과 연결짓는 성차별적인 관념을 보여주고(이선준의 머릿속에서 남자의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그 아름다운 외모가 여성성하고 연결되는 순간 "약점"이 돼 버리는 것이다), 여주에 대한 연심을 츤데레답게 숨겨야 하는 장재신은 '대물 같은 성격은 여자답지 못하다. 여자는 똑똑할 필요 없다'고 마찬가지로 여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서 김윤희는 이선준한테 여자라는 정체를 밝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장재신은 김윤희가 여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다음에 그것을 함구하기로 결심한다. 구용하는 김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에 남자로 대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이선준, 장재신, 구용하 세 남자는 모두 다 김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자신이 안다는 걸 서로한테까지 비밀로 감추고 있다. 결국 모두 다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의식의 변화가 없는 결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김윤희가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로 이뤄진 사회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선준에 있다. 이선준은 김윤희가 여자라는 것을 모를 때부터, 그 사회 구조 안에서 김윤희를 도와주려고 했다. 김윤희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밝혀진 순간 자신을 도와준 이선준까지 공범으로 몰릴까봐 걱정해서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체제 안에 있는 선한 인물(이선준) 때문에 결국에 김윤희는 그 사회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성장 소설로서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사회 체제 자체에 대한 변혁은 꿈꾸지 않아도 그 안에서 등장 인물이 조금이나마 의식의 성장을 거치고 작게나마 자신의 편견을 수정해내간다면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김윤희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사회와 충돌하면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지만, 결국에 모든 주요 인물들이 김윤희가 여자라는 사실을 눈감기로 하는 것으로 끝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게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는 중간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진 않을 거 같다. 이것은 글솜씨의 문제라기 보다는 방향성의 문제인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문체는 읽기 좋은 간결한 호흡으로 이뤄져 있으며, 묘사가 아름다운 대목들도 가득하다. 등장 인물은 풍부하게 표현되었고 이야기는 설득력 있다. 다만 특정한 선에서 남자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나은 답을 찾아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브로맨스, 더 나아가서 야오이적인 환상에 기반해서 쓰였다. 이선준과 장재신이 주먹다짐을 했다가 뒤끝 없이 화해하는 장면이나 구용하가 장재신한테 장난스럽게 키스하는 장면 모두 다 그런 환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적인 욕망인 것이다.

 

 

레슬리 피들러의 중간 문학론은, 장르와 발표 지면에 구애받지 말고 널리 읽히고 있는 좋은 작품은 모두 발굴하라고 비평가들한테 말한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좋은 문학에는 사회적인 기능이 전제되어 있다.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레슬리 피들러 같은 비평가가 말하는 중간 문학에 속하진 않는다. 비평가들이 발굴해야 하는 작품에 들어가진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 당연히 다뤘어야 했다.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는, 좋은 문장으로 쓰였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을 언론이 외면했어야 했던 이유가 어딨겠나. 작품 자체에는 변한 게 없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드라마화된 다음엔 갑자기 다루기 시작한 것도 우스운 일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2010년에 드라마화되기 이전에 이미 50만부 가량 팔렸다고 한다. 2007년에 출간된 작품이니 삼 년에 걸쳐서 팔린 양이고, 그 사이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언론에서 존재가 지워진 채 시간을 보내었다. 장강명은 2011년도에 <표백>으로 데뷔한 이후에 지금까지 내놓은 저서의 판매량을 총합했을 때 12만부 가량 팔렸다고 한다. 장강명이 수많은 문학 공모전에서 입상하면서 언론의 조명을 받은 것이 저 판매량에 분명 영향을 줬을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조금이라도 그런 조명을 받았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많이 알려졌을 테고, 로맨스 소설 시장은 더 커졌을 것이며, 그렇게 많은 작품이 나오는 환경에서는 로맨스 장르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는 중간 문학적인 성향을 띤 소설도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책이 안 팔린다고 통곡 소리가 나올 일도 적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잘 팔리고 있는 책을 사람들이 인식에서 지워내지 않았다면 활로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3. 장르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

 

 

이융희 님이 먼저 쓴 글에서 장르의 정체성에 대해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르 문학의 독자들은 개별적인 작품을 하나의 장르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한다. 한 작품을 읽을 때도 장르라는 맥락 안에서 읽는다면 이것을 대중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르 문학이 대중 문학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장르적인 요소가 이미 대중 문화에도 퍼져서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 문화에서 장르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단 문학에서도 장르적인 요소를 찾아내고는 한다. 이때 장르의 정체성은 작품의 부분적인 요소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작품을 독해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SF, 무협, 판타지 같은 단일적인 개념으로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조금 낡은 발상이다.'

 

 

 

개인적으로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주변에서 '그 책은 무슨 장르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때 난감한 경우는 특정한 장르로 분류되기 힘든 소설을 읽고 있을 때다. 문단 문학을 읽는 독자층에서는 서로가 읽는 책이 무슨 장르에 속하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김연수나 김영하의 책을 읽는 사람한테 '그 작가는 무슨 장르를 쓰냐?'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문단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장르문학의 독자인 것도 아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SF나 판타지 같은 개별적인 장르의 기원이나 역사, 특징에는 무지한 편이다. 다시 말하면 장르에 무지한 사람들도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장르적으로 분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르 문학의 팬덤은 개별적인 작품을 장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장르 문학은 대중 문학이 될 수 없는 매니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라기 보다는 '장르에 무지한 사람들조차도 작품을 장르 단위에서 이해하려고 할 만큼, 장르적인 독해가 일반적인 경향이 돼버린 게 아니냐'라는 게 개인적으로 평소에 갖고 있던 인상이다.

 

 

영화관에 가면 모든 영화를 장르별로 분류해서 설명해놓는다. 그 분류는 장르 팬덤의 섬세한 기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냥 편의를 위해서 뭉그러뜨리듯이 영화를 몇 가지 카테고리에 집어넣은 것이다. 영화관에서 그런 일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들이 영화를 고르는 일을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일이다. 서점에서 장르별로 책을 구분해놓는 것도 일단은 편의를 위해서 하는 일이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장르 단위에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판타지', 'SF', '로맨스' 같은 구분이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막연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류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계속 의의를 지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저런 틀 안에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구분은 생각보다 미약할 수 있다. 'SF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세상에 미치는 변화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스타 워즈는 SF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테드 창은 SF 장르 안에서 중심부에 있는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다루는 것이 SF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라는 저 주장에 동의를 하지 않는 창작자들도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다루는 SF의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수 있고, SF와 다른 장르의 경계에 있는 작품에도 그런 가치가 반영될 수 있다. 그런 경우에서는 주변부에 있으면서 중심부의 가치가 담긴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장르 문학 = 대중 문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작품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에 가장 많이 팔리는 문학 작품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처럼 독자들한테 2차 창작의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판타지 장르가 될 수밖에 없지 않냐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먼저 쓴 글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것은, 처음 배명훈에 대해 얘기할 때는 '글 잘 쓰지만 문단 스타일은 아닌데 꼭 문단에서 다뤄야 할 필요가 있었냐?'라고 하면서 취향이나 코드의 문제로 쉽게 넘어갔던 반면에 김보영에 대해서는 '문단에서 무조건 다뤘어야 했다'고 말하면서 취향이나 코드 이전에 가치의 문제로 다뤘다는 것이다. 취향이나 코드 이전에 문단에서 다뤄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거기에 문단과 방향성이 다른 소설은 포함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간단해질 수 없는 논쟁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논쟁이 흐르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에서 문단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배명훈은 <신의 궤도>가 출간되었던 당시에 열렸던 거울 합평회에서 문단 문학은 인물 중심의 비평이 치우쳐 있기 때문에 자신한테는 잘 맞지 않으며, 특히 <신의 궤도>의 전쟁 소설적인 부분을 문단 비평은 다뤄내지 못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합평회에서 거울 작가 한 명은, 평론가 신형철의 비평이 실린 단편집이 출간된 다음에 배명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면서 문단 비평이 사회적으로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 말했다. 저 말을 종합해서 보자면, 지금 한국 문학은 전쟁 소설을 온전히 독해하지 못하는 세력의 검증을 거쳐야만 사람들 사이에서 그 전쟁 소설이 소비되는 기괴한 상황인 것이다. 그 검증을 거치지 못한 대중 문학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운 물품인 것처럼 취급 받고 언론에서 다뤄주지도 않는다. 사회에서 문단에 과대한 무게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문단은 문학의 전체 집합에서 작은 부분 집합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에 사회는 문단에 모든 것을 맡을 것을 요구할 이유가 없다. 그 사고의 틀에서 빠져나왔을 때 우리는 문단의 영역 바깥에 있는 작가들까지 포함된 온전한 문학의 세계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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