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 우리를 읽을 수 있는가

 - 웹소설을 둘러싼 비평 담론들

 

 

 

2013년 1월, 포탈사이트 네이버는 자사 포탈에 아마추어 소설 창작자들이 소설을 창작, 개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동시에 프로 장르 소설작가들을 섭외해서 연재를 시작한다. 이것이 네이버 웹소설, 나아가서 ‘웹소설’이라는 것의 명칭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웹소설이라는 명칭이 이때 시작되었을 뿐, 웹소설이라는 형태가 탄생한 것은 아니다. 장르 소설의 창작은 그로부터 약 20년 전부터 PC통신 상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인터넷 소설, 통신 소설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개발되었다. 게임과 웹툰처럼 유희 친화적인 이 멀티 디바이스에 웹소설 역시 제외될 리 없었다. 막대한 자본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약 5년 사이, 웹소설은 이제 도서시장의 괴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웹소설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논리구조와 욕망을 바탕으로 작동하는지 많은 관심을 가졌다. 도서시장, 또는 소설/문학 시장의 희망처럼 포장되거나 또는 하급 대중문학이 문학의 영역을 망치는 것처럼 매도하기도 했다. 다양한 해석과 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분석과 비평도 시장 내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깥의 시선에서 웹소설을 바라보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 아니, 사실상 바깥에 있는 사람이 웹소설을 읽어내겠다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까닭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기존의 연구자들이 웹소설을 접근하는 방법이 굉장히 단편적이란 점이다. 대부분의 시선은 지금 발생하는 현상을 횡적으로 살펴보는 데 그치고 만다. 웹소설이라는 단순한 명칭 속에는 웹이라는 미디어 매체, 장르문학이라는 대상,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고 창작하는 팬덤 집단군까지 다양한 층위가 섞여 있다.

 

그럼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 대상을 바라보아야 할까.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과연 웹소설을 ‘비평’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방향을 위해서 제일 첫 번째 명제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분명 뜬금없게 다가올지 모른다. 웹소설을 읽을 수 있냐니. 웹소설도 ‘소설’인만큼 정해진 서사의 구조와 양식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 아닌가.

 

한 대학의 문예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회차의 대회는 두 개의 장르 소설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하나는 우수상을 탄 좀비 소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은 대상을 수상했다. 그 작품은 라이트노벨이었다. 물론 이것은 라이트노벨이 문학상의 수상을 할 정도로 작품성이 있다 없다 같은 지난한 논쟁을 꺼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상을 수상한 소설의 구조를 살펴보자.

 

여기 소년과 소녀가 있다. 소년은 가족을 사고로 모두 잃은 후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하고자 한다. 그 자살의 순간,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독특한 능력에 보유하고 있는데 그 능력 때문에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소년은 독특한 분위기의 소녀와 만나고 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 소녀는 사망하고 남은 소년은 살아남아서 살아갈 의지를 다진다. 소설의 서사에는 두 명의 캐릭터가 더 등장하는데, 하나는 시니컬하고 현실주의적인 의사이고 또 한 명은 두 사람의 연결을 도와주는 간호사이다.

 

캐릭터 구도도, 서사도, 단편 분량 안에서 보여주는 캐릭터 성격과 대사까지. 모든 내용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라이트노벨을 즐기는 팬들이라면 이러한 설정이 굉장한 클리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장르적 클리셰를 제거하고 보면 소설의 서사는 비어있다. 부모님의 죽음도 도구화 되어 있고, 소녀가 왜 그러한 병을 걸리게 되었는지, 왜 하필 제대로 된 의사도 아니고 어설픈 연구시설 같은 곳에서 제대로 된 의학적 관리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남자주인공의 키스신 한 번으로 소비된 여자주인공은 그저 도구에 불과한 채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해당 소설은 장르적 문제점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장르를 복제한 것만으로도 대상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설은 왜 대상을 받았을까? 대상 수상의 심사평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한 명민한 고민을 밀고 나갔다”

 

즉, 장르가 쌓아오면서 만들어 놓은 틀이 마치 한 작가의 창작물이고 고민의 결과물인 것처럼 둔갑해 있던 것이다. 이러한 풍경은 소위 말하는 ‘순문학’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웹소설 바깥에서는 웹소설을, 그리고 장르 소설을 상상력의 결과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 역시 웹소설을 쓰고 8권으로 완결을 지었다고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듣는 게 “그 긴 소설을 쓸만큼 상상력이 대단하시군요.”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장르적 문법, 즉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물이다. 단순화하면 이렇다.

 

해당 심사자는 결국 라이트노벨, 그리고 좀비 문학 등 다양한 형태의 장르문학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는 장르문학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유년기의 체험 세대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현대 웹소설의 근간이 되는 장르 판타지의 시작은 보통 1995년 나온 퇴마록 또는 1998~9년 사이에 출간된 1세대 판타지 소설들로 잡는다. 그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대여점이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들은 또한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를 산 적도 없다. 그들은 이미 대학 담론장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이 읽고 경험해왔던 소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데 그것을 제대로 규명하고 가이딩할 어떤 기준점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장르소설, 그리고 가장 첨단의 웹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단순히 상업 문화를 읽어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 깊숙이 침투한 멀티 디바이스 ‘스마트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젊은 세대, 그 집단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이해를 위해,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인터넷 장르소설 연재 플랫폼 브릿G의 작가들끼리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있다. “왜 우리 작가군에는 석/박사 급의 고학력자들이 많지?” 였다. 그것은 고학력자들이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소설을 독해할 수 있는 나이를 초등교육을 마친 12세에서 13세 정도로 칠 때, 20년 동안 발전해온 대중 장르소설 시장의 향유자는 30세 전후의 나이대를 형성하고 있고, 그 나이대가 대학원에서 한참 연구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렇게 ‘웹소설’과 ‘장르소설’에 대한 연구를 위해 힘쓰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 다시 여기에서 한 차례 더 변화한다.

 

우리를 읽을 수 있는가

 

앞서 라이트노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자. 일본은 자국의 장르소설들에 대해 연구하고 비평하기 위한 방법론들을 꾸준히 모색하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비롯해 몇 개의 라이트노벨 집단군을 ‘세카이계’로 묘사하는가 하면, 그러한 세카이계를 둘러싼 담론들이 전개되었고, 그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붙였다. 그곳에선 장르적 유행을 특정 문예 경향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담론을 누적, 연구해오고 있다. 즉, 장르를 읽기 위한 전문적 방법론과 비평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럼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에 존재하는 장르비평의 풀은 무척이나 좁다. 만화나 추리, 좀비나 공포와 같이 역사가 오래된 장르만이 일부의 방법론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서 예시로 소개했던 라이트노벨, 판타지, 로맨스 등의 작품을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서사를 분석하는 것뿐, 무엇이 장르문학인지 아닌지 제대로 된 정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불모지의 형국이다.

 

우리는 앞서 한국에 장르비평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을 짚어보았다. 그렇다면 그러한 필요성 속에서도 한국의 장르소설 비평이 형성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장르문학이라는 공간이 직면한 문제점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돌파해야 할 문제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 장르소설 시장의 창작자와 소비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체험 세대가 오기 전 연구들이 교육적 측면, 또는 서사와 문학성에 대한 필사적인 연결짓기에만 골몰한 까닭은 그들이 연구하려고 하는 대상을 독자적 가치를 지닌 서사형식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누적된 역사가 없었던 초기 세대의 장르소설을 두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으나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통용되기는 무리가 있다. 지금 장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번 읽어볼까?”하는 신규 독자보다 웹소설의 형태 이전, 종이책을 매개로 한 장르소설 시장부터 꾸준히 읽어온 독자들이 많다.

 

두 번째는 웹 콘텐츠 시대에 많은 창작물이 웹, 그리고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어플리케이션으로 소비되는 만큼 매체와 플랫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특히 플랫폼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디에서 소설이 연재되는가에 대한 이해로 그치지 않는다. 최근 레진코믹스와 웹툰, 웹소설 작가들이 보여주는 갈등은 플랫폼이 웹 창작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갑을 관계를 구성하는지 플랫폼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또한 2년 전부터 있었던 봄툰과의 사건은 웹 창작자와 플랫폼, 그리고 소비자인 독자와의 관계망을 보여준다.

 

플랫폼을 사용하는 소비자는 인터넷을 무작정 유랑하는 디지털 노마드가 아니다. 웹소설은 어떤 플랫폼에 어떤 프로모션 전략을 가지고 올라가는지가 수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플랫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조이고 웹소설이라는 대상을 읽는데 핵심적인 요소인데, 이러한 플랫폼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그 기능성에 주목하거나 또는 플랫폼 자체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웹소설 플랫폼 중 ‘문피아’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업로드 되는 소설들의 제목은 유머 사이트에 종종 올라올 정도로 독특하다. ‘이계에서 힘을 얻다’ 라던가 ‘축구를 너무 잘함’ 같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 제목이라고 하기엔 날것 그대로의 형태를 띈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이 웹소설의 형태가 된 것은 문피아라는 플랫폼의 성격 탓이다.

 

작품의 장르, 키워드 구분이 없고 단순히 제목과 표지만으로 서칭에 노출시켜야하는 만큼 저러한 제목은 마치 작품을 보여주는 ‘카테고리’를 만드는 자체 카테고라이징 행위인 셈. 그렇기에 문피아의 제목들은 이렇게 변용이 되었다. 이렇듯, 웹소설의 플랫폼은 단순히 소설의 연재 공간이 아니라 소설의 정체성이나 내용, 그리고 구조를 결정짓는 그 자체의 규범이 된다.

 

세 번째는 엄밀한 장르의 구분이나 정의도 부재할뿐더러 해당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방법이 부재한 까닭이다. 이것은 필자만의 독특한 경험일지 잘 모르겠다. 필자가 06년도부터 출간한 판타지 소설의 장르는 순서대로 ‘퓨전’, ‘게임판타지’, ‘헌터물’이다. 이는 외국에서 들여온 판타지를 바탕으로 국내 도서대여점 시장과 맞물려 변화된 한국 판타지소설의 변화과정을 똑같이 훑고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SF관련 행사나 장르소설 관련된 행사 등에 참여해도 좀처럼 끼질 못한다. 배척받고 무시받는다는 느낌도 든다. 어떤 강연에서는 같이 장르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요새 나오는 글들은 가치가 없고 좀 허무하다.” 등으로 폄하되는 풍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심지어 웹소설로 돈을 벌겠다는 출판사 사장이 날 앞에 앉혀놓고 왜 네이버 웹소설에서 베스트에 들어가는 그 작품들이 그렇게 형편없냐며 일장연설을 한 적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며칠 전 브릿G에서는 웹소설 집담회를 두고 웹소설은 상업가치에 치중해서 그것으로 끝날 소설이라며 폄하하는 글을 열심히 올린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건 라이트노벨 시장의 부활이었다. 소소한 유머처럼 보이겠으나 그만큼 장르소설 안에서 해당 장르를 즐기는 팬들은 굉장히 엄격한 기준으로 장르와 장르 사이를 분절하여 구분하고, 독자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작품을 소비한다. 그리고 상호배타적으로 작품을 가른다.

 

그런데 이 기준이 무척 애매하여 이 작품이 라이트노벨에 속했다가 판타지소설에 속하기도 하고, 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작품이 외부에서 갑자기 SF, 또는 판타지 딱지를 달고 날아와 안착하기도 한다. 유명 출판사들이 플랫폼에 판타지 소설이라고 순문학 작가들을 가져다가 앉혀서 웹소설을 쓰게 했으나 실패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이렇게 하위장르의 구분조차 혼란스러운데 그러한 하위장르에서 또 축소되는 구조, 클리셰들을 읽어낼 방법론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부분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마주한 문제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뚫고 가기 위해 이야기를 전환하고자 한다. ‘읽을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읽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여기 뉴미디어비평스쿨에서 이러한 커리큘럼을 통해 새로운 시대 뉴 미디어를 읽어낼 동량을 인큐베이팅하겠다는 목적과도 상충된다. 바로 비평담론공간 ‘텍스트릿’이다.

 

텍스트와 스트릿의 합성어인 텍스트릿은 서브컬쳐 중에서도 서사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하는 웹소설 및 장르문학 전반을 비평하는 담론공간이다. 아직 누적이 필요한 이 공간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 할지 함께 고민하고 직접 창구를 열어 소통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장르문학의 인정투쟁을 넘어서 장르문학을 읽기 위해 방법론을 제시하고, 이러한 장르문학이 과연 이 세계를 어떻게 규명하고 있는지를 사색하는 데 의의를 둔다.

 

특히, 최근 웹 콘텐츠 시장의 혼란한 상황에 이러한 담론공간의 존재는 단순히 비평의 서술로 그치지 않고 비평가가 수행할 사회적 책무까지 수행할 수 있으리라.

 

 

 

+

 

텍스트릿 필진 이융희 의 글입니다.

인문학협동조합에서 진행했던 뉴미디어 비평스쿨 1기 웹소설 파트의 발제문(2018-1-29)을 전문 옮겨놓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게시판 사용시 유의사항 및 업로드 팁. 텍스트릿 2020.02.10 144
공지 자유비평 게시판입니다. 발췌를 해 갈 경우 출처를 꼭 밝혀주세요. Textreet 2018.04.18 292
60 SF 연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Textreet 2018.04.20 316
59 옆집의 영희 씨와 함께 지내는 방법 - 정소연의 『옆집의 영희 씨』와 한국 SF의 사고실험 file Textreet 2018.04.20 416
» 우리는 읽을 수 있는가, 우리를 읽을 수 있는가 Textreet 2018.04.20 227
57 SF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중력들 - 배명훈의 『예술과 중력가속도』에서 나타난 상상력의 의미 Textreet 2018.04.20 271
56 결국엔 이야기가 남게 될 것이다 - 김창규의 『우리가 추방된 세계』가 보여준 한국 SF의 이야기 가치 file Textreet 2018.04.20 576
55 『회색인간』에 대한 소고 file 텍스트릿 2018.04.20 713
54 게임 판타지와 가상현실 (1) file 텍스트릿 2018.04.20 1299
53 무협의 정의와 연구 범위에 대해 텍스트릿 2018.04.23 575
52 사랑과 돈, ‘사치’의 이중주 -로맨스에 등장하는 ‘신데렐라 플롯’의 변화에 대하여 file 손진원 2018.04.24 3576
51 로맨스, 과거부터 현재까지 (1) 텍스트릿 2018.04.25 1870
50 재미는 아집적이다. [3] 진a 2018.04.29 519
49 메타 웹소설에서 나타난 장르문학과 웹소설에 대한 인식 file 이융희 2018.04.29 1242
48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 텍스트릿 2018.05.03 823
47 웹소설 문장 전략(1) file 텍스트릿 2018.05.05 1310
46 웹소설 문장 전략(2) file 텍스트릿 2018.05.07 725
45 로맨스, 과거부터 현재까지 (2) file 텍스트릿 2018.05.14 1093
44 작품은 플랫폼의 공짜홍보물인가 - 플랫폼은 왜 남의 노동력을 공짜로 쓰는가? [10] 텍스트릿 2018.05.21 17320
43 #웹소설_관련_이야기를_타래로1 텍스트릿 2018.06.03 271
42 SF 작가로 산다는 것(김보영 : SF 작가) 텍스트릿 2018.06.09 1243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