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해외에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두 작품의 결말에 적잖게 당황했다고 한다. 범인이 붙잡히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살인의 추억>과 주인공인 현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괴물>의 결말은 해외 관객들의 예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두 작품은 장르의 계보에 속해 있으면서도 해피 엔딩이라는 장르의 규칙을 어기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국내 관객들한테 그 사실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거나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장르의 규칙이 깨부숴진 그 부분을 지당하게 받아들였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말에 따르면, 봉준호는 <괴물>을 찍을 때 현서의 사망을 괴물의 출현과 함께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성일이 목격한 바에 따르면 관객들은 현서가 죽은 결말에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https://seojae.com/web/mal/mal200609.htm ). 사람들은 어째서 <괴물>의 결말에 어떠한 감정적인 거부감도 느끼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이 한국 관객들한테 익숙한 방식의 서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은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 같은 작품들을 교과서를 통해서라도 접했을 것이다. 주제 의식의 전달을 위해서 주인공을 죽이는 작품들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한테 현서의 죽음을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장르의 이야기적 관습보다도 근대 문학의 이야기적 관습이 한국 관객들한테는 더 익숙하고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괴물>이 개봉했던 당시에 사람들은 '<괴물>은 뻔한 할리우드의 영화와는 다르다. 할리우드에서 <괴물>이 만들어졌다면 잘생긴 백인 남자 배우가 괴물을 죽이고 가족을 구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라는 패러디 글을 만들면서 노는 데 열중했다. 그들은 <괴물>이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드러나는 리얼리티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만들어진 장르의 규칙은 멀지만 현실(혹은 현실의 재현을 자청한 사실주의 소설)은 가까이에 있었다. 

 

 

비슷하게 <살인의 추억> 역시 장르 영화이지만 장르 영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사람들한테 받아들여졌다. 영화 개봉 당시에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관객들한테 명료한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양쪽 다 처음부터 등장 인물들의 실패를 예견한 채 이야기가 흘러갈 때, <살인의 추억>에서 이야기의 방점은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어째서 실패했는지에 찍힌다.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는 수사 반장의 애청자다. 그의 시선은 장르의 세계를 향하고 있지만 그의 몸은 현실에 묶여 있다. 그래서 그는 번번히 실패한다. 이때 박두만은 범인을 잡아서 권선징악을 구현해내는 데 실패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박두만을 통해서 그 시대 공권력의 실패를 보고, 더 나아가서 그 시대 전체를 비판할 수 있는 매개로 그를 받아들였다. 어째서 박두만이 장르적인 해피 엔딩을 얻지 못했는지, 어째서 그 시대 한국 사회는 그런 행복한 결말을 맞지 못했는지가 <살인의 추억>의 방점이었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둘 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영화다. 감독 본인뿐만 아니라 그 영화를 소비하는 대중들도 장르의 관습에 대한 의심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이 두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한 문화권에서 발생한 장르가 다른 문화권에 이식될 때는,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관습과 규칙이 의심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그리고 관습과 규칙에 대한 의심으로 발생한 공백을 채우는 것은 현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그런 예로 분류할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영국에서 십대와 이십대를 보냈지만 미국에 와서 추리 소설가가 되었다. 그가 전업 작가가 된 계기 중에 하나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으로 인해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의 작품들은 미국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고 미국의 주류 문학계에서도 존중 받는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 챈들러가 보기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챈들러는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이 담겨 있는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썼다. <심플 아트 오브 머더>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챈들러는 추리 소설이 살인 사건을 유희거리로 다룬다는 면에서 사람들한테 종종 괄시 받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세상의 리얼리티, 폭력적인 범죄와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현실("비열한 거리")이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추리 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은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우의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이지만, <심플 아트 오브 머더>에서 챈들러는 추리 소설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고장으로 영국을 꼽는다. 영국에서 발달된 추리 소설이 미국으로 역수입될 때 챈들러는 그 작품들의 세계에 의심을 느꼈고 그 의심으로 인해 발생한 공백을 현실로 채운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챈들러의 작품들은 제도적인 문학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비슷한 사례를 이영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반지의 제왕>의 여러 고유 명사를 차용한 점 때문에 저작권 위반으로 비판을 받았을 만큼 톨킨의 영향이 드러나 있지만 동시에 <반지의 제왕>에 대한 의심 역시 배어나 있다. <드래곤 라자>와 <반지의 제왕>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이 차이가 드러난다.

 

 

반지의 제왕 : 주인공들이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음(샤이어) -> 외부에서 사악한 세력이 등장 -> 주인공들은 마을 바깥으로 나오고 결국에 모험의 끝에서 절대악인 사우론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 -> 세계는 사우론이 기승을 부리기 전의 평화롭고 이상적인 상태로 회귀. 

 

 

드래곤 라자 : 주인공들이 사는 화목한 마을이 있음(헬던트) -> 그 마을에는 아무르타트라는 블랙 드래곤이 있고, 아무르타트가 거느리고 있는 몬스터들 때문에 헬던트에서는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흔하게 나옴 -> 주인공 후치 네드발은 몬스터의 침공 때문에 어머니가 사망한 뒤로 아무르타트를 맹렬히 증오함. 그리고 결국에 아버지마저 아무르타트 토벌대에 자원 입대를 했다가 포로로 잡히게 되고, 후치 네드발은 아무르타트가 요구한 보석금을 구해 오기 위해 마을 바깥으로 여행을 떠남 -> 하지만 그 여행의 과정을 거치면서 후치 네드발은 아무르타트 역시 세상을 구성하는 일원이기 때문에 아무르타트를 척결해야 할 악으로 여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음. 후치 네드발은 결국에 아무르타트한테 인간들 곁에서 사라져달라고 부탁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아무르타트가 인간에 의해서 변화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음. ->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세상은 기존의 평화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로 가득함.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이영도는 절대 악이라는 개념을 믿지 못하다는 것과 평화로운 세상으로의 원상 복구를 믿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문제의 원흉은 샤이어 바깥에 있다. 한반지를 되찾으려고 하는 사우론 뿐만 아니라 샤이어를 침공한 사루만 역시 샤이어 외부에 있는 존재다. 샤이어에 거주하던 주인공들이 외부의 절대 악과 맞서게 되는 것이 <반지의 제왕>의 내용이라면, 아무르타트는 그 자체로 헬던트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이다. 후치 네드발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칼 헬던트는 아무르타트가 사라진다면 헬던트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화목한 공동체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후치 네드발은 처음엔 그것에 반발하지만 여행을 하는 와중에 그것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 사우론의 파멸을 통해 세상이 평화로운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반지의 제왕>의 결말과 다르게 <드래곤 라자>의 이야기에는 한 번 일어난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관념이 배어나와 있다. 후치 네드발은 크라드메서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인간이 드래곤이라는 종을 과하게 변화시키거나 파멸시키고 있다고 느끼고, 인간과 교류를 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드래곤인 아무르타트한테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결말에 이르러서 후치 네드발한테 아무르타트는 절대 악이 아니라 그저 인간과 다른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점 때문에 아무르타트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후치 네드발은 그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르타트한테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크라드메서를 비롯한 드래곤들이 인간처럼 변하거나, 인간한테 살해당하면서 드래곤이라는 종이 위협받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목격했다.

 

톨킨 본인은 <반지의 제왕>이 소설(novel)로 불리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로망스 영웅담(heroic romance)으로 여겼다고 한다. 서구권에는 로망스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이 쓰이고 읽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와 단절되어 있는 한국에서는 서구권에서 당연시되는 요소가 의심되었다. 때문에 이영도는 <드래곤 라자>에서 <반지의 제왕>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절대 악을 물리치면서 세상의 평화를 되찾는다는)를 의심했고, 이후에 여러 지면을 통해서 장르 판타지는 소설의 한 종류임을 강조했다. 이영도는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전을 통해 유지되는) 문단 제도 바깥에서 태어난 작가지만 그의 문학관에는 제도화된 문학 교육의 영향이 배어나오고 있다. 이영도는 2004년에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게제한 <장르 판타지는 도구다>라는 글에서 장르 판타지가 문학성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가질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말했다. 그렇게 문학, 더 정확히 말해서 소설의 형식으로서의 장르 판타지를 믿었던 이영도의 글에는 서구의 장르 판타지에 대한 의심 역시 일정 부분 배어나오고 있다. 이영도의 소설은 판타지의 낭만을 이어받았다는 데서 장르적이지만 서구의 전통을 일정 부분 의심해서 태어난 버젼이었다. 이영도한테 판타지 소설은 로망스가 아니라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novel)과 로망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간략히 말해서 소설은 이야기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형식의 산문 문학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 

 

 

흔히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시작했다고 말한다. 라만차의 시골 양반 돈 키호테는 기사도 로망스를 미친 듯이 탐독하다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잊어버린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모든 것을 기사도 로망스의 구성 요소로 해석해서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기사도 로망스 서사를 구축하려고 한다. 길을 가다가 풍차를 발견하면 '저것은 사악한 거인임에 틀림없다'라고 판단하고 그 풍차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말을 몰고 돌진해 가는 식이다. 돈 키호테가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돈 키호테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그를 비웃거나 놀리는 식으로 이 희극에 가담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돈 키호테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돈 키호테랑 똑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 계속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일어난 일에 해석을 덧붙이고, 자신이 들은 소문을 자신이 겪은 일과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돈 키호테가 기사도 로망스라는 허구의 이야기에 근거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해석하려고 하듯이, 사람들도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 독자적인 해석, 불확실한 소문을 실제와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근거해서 사고한다. 돈 키호테보다 더 세속적일 뿐, 결국에 그들도 돈 키호테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돈 키호테가 만나는 사람들의 주된 고민거리는 사랑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오해하거나 소문에 마음이 휩쓸려서 관계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그들이 자기 주변의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은 실재와 만나면서 어떻게 발달하거나 부서지는지를 보여주는 게 <돈 키호테>의 내용이다. 이야기는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부산물이지, 그 자체로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스 비극에서는 신탁이 내려오면 그 예언은 실현되기 마련이다. 등장 인물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들은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 반면에 소설의 태도는 설령 누군가의 예언이 현실에서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두 가지 사건이 독립적으로 일어난 것일 뿐이며, 그 두 가지 사건에서 인과 관계를 발견한 것은 우리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예언이 일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리는 없다. 그저 우연이 겹쳐서 두 가지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을 뿐인데 우리는 그것에 허상의 인과 관계를 부여할 뿐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형상일 뿐이며 그 자체로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산문 문학에서의 근대는 이야기라는 게 허구라는 것을, 우리 머릿속에 있는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역시 <돈 키호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에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해석이 아니냐는 의심이 작품에서 배어나온다. 주인공인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는 주변 사람들한테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미트리가 살인범이라는 게 결국에 주변 사람들의 해석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문제를 파고든다. 재판장에서 검사는 드미트리가 보인 행동들을 나열하고, 그 행동의 이면에 있는 심리를 추정하면서 그가 살인범인 게 분명하다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이에 드미트리의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드미트리의 행동 이면에 있는 심리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당신의 해석에 불과하다. 당신은 앤 래드클리프 같은 고딕 로맨스 작가처럼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도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식이 감돌고 있다. 산문 문학임에도 이야기와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소설(novel)의 특성이 드러나 있다(한글 번역본에서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저 대목이 보통 '당신은 소설을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닙니까?'와 같이 옮겨지는데 영역본에서는 '당신은 로맨스를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닙니까?'라고 옮겨진다). 그리고 저러한 의식은 한국의 장르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도 이어진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용의자는 심증적으로는 살인범이 분명하다. 형사들은 '증거는 없지만 살인범이라는 게 분명한 악당을 쫓는 서사'에 자기 자신을 대입해서 박해일을 강압적으로 몰아세우지만 영화는 결국에 그 서사가 형사들의 머릿속에만 있던 해석에 불과했으며 그 자체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며 끝난다. 이야기가 허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혹은 현실 앞에서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도 저런 태도가 배어나와 있다.  

 

 

이영도는 장르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판타지를 썼다고 말할 수 있다. 장르의 낭만과 미학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영도의 작품들에는 톨킨의 세상에 대한 의심이 투영되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고른이 왕에 등극하는 장면은 질서의 회복이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이방인이 북부의 왕으로 선출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세상의 혼란과 변화를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는 신들에 의해 첫 번째로 빚어진 종족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며 세상에 완벽히 들어맞는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에서 엘프는 강하고 현명하고 늙지 않는 존재임에도 세상의 다른 종족들과 어울려 지낼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떠나려고 한다. 이루릴(엘프)과 엑셀핸드(드워프)가 처음엔 반목하지만 서서히 우정을 쌓게 된다는 <드래곤 라자>의 이야기는 분명히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와 김리의 관계가 반복된 것이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 관계에 다른 해석을 더하고, 그 과정에 자신이 <반지의 제왕>으로부터 변형시킨 엘프라는 종족을 통해서 '진정한 조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돈 키호테>가 기사도 로망스와 대치하는 관계를 형성했듯이 이영도 역시 일정 부분 <반지의 제왕>과 대치하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드래곤 라자>에서 칼 헬던트가 아무르타트 원정대의 패배를 알리러 국왕을 알현한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칼 헬던트 : 헬던트 영지의 주민들이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창조의 실패물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부적합하며 몰가치적이며 무목적이며 야수적이며 비탄스러운 폭력에 의해 그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사… (요약하자면 닐시언 국왕이 사악한 아무르타트를 토벌할 군대를 헬던트 주민한테 보내주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얘기) 

 

 

닐시언 국왕 : 오늘 중엔 끝납니까? 간단히 말해 주십시오.

 

 

저 대목에서 칼 헬던트는 아무르타트를 "창조의 실패물"이라고 지칭하지만 사실 그게 큰 의미 없는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는 1권에서 이미 후치 네드발한테 아무르타트 역시 헬던트를 구성하는 일부분 중에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닐시언 국왕 역시 그것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겹다는 투로 그런 표현을 모두 지워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 중에 누구도 '세상의 질서에 어긋난 사악한 괴물'과 같은 서사가 자신들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들이 대항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타락해서 창조자의 섭리를 거스르거나 처음부터 그릇되게 빚어진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창조의 실패물"인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오크가 도살되어 마땅한 악의 졸개라면 <드래곤 라자>에서 오크는 여덜 별의 종족 중에 하나로 다른 종족들과 동등한 존재로 그려진다. 물론 그들은 인간과 끝없이 대립하는 관계지만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는 오크를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체로 여겼기 때문에 오크들을 대미궁에서 해방시키며 '오크의 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후치 네드발 역시 종장에선 오크들한테 직접 화해의 선물을 제안하면서 공존을 모색한다.

 

 

후치 네드발은 길시언 바이서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길시언이 오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죽이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후치 네드발 본인 역시 분명히 오크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겪으면서 직접 오크를 죽이기도 하고, 오크한테 생명을 위협 당하기도 했지만, 오크를 죽이는 길시언을 처음 본 순간 반감을 느낀 것이다.

 

 

 

그 남자가 싸우는 모습은 어쨌든 그렇게 멋있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 <오크들도 생명인데…>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면 어쩌라는 거냐? 라고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니까. 내가 오크들을 세상에 창조한 것이 아닌 이상, 난 오크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살해가 부당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누군가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딱딱한 얼굴로 내 존재 이유를 물어오면 난 정말 할말이 없다. 내가 <왜> 세상에 있는 거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외엔 없다. 비참할 정도로 없다. 그러니 오크들을 죽이면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는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그 남자는 그 이유를 아는 듯이 보이고 그 강철 같은 의지로써 오크들을 도륙한다는 것뿐이다. (후략)

 

 

 

후치 네드발은 열일곱 살 소년답게 다소 치기 어린 심리로 오크를 베어죽이는 길시언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가 불확실하다고 느낀다. 자신은 어째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오크와 끝없이 불화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길시언 바이서스는 후치 자신과는 다르게 세상에서의 위치가 확고한 어른처럼 보이고, 그럼에도 오크를 간단히 쳐죽이고 있다는 것에 후치 네드발은 불편함을 느낀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후치는 길시언과 절친한 관계가 되고 그를 자기 마음 속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길시언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까지 겪은 다음에는 오크들을 다시 만났을 때 화해의 선물을 주면서 공존을 모색한다. 그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오크 역시 이 세상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드래곤 라자>는 <반지의 제왕>의 로망스 영웅담 서사와 대치하는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고, 후치 네드발이 로망스 서사를 넘어서서 자신의 현실을 대변할 서사를 찾는 과정을 그린다고 요약할 수 있다. 아무르타트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후치 네드발의 성장 과정을 정리할 수 있다. <드래곤 라자>는 아무르타트를 토벌하기 위해 헬던트 영지에 불려온 화이트 드래곤 캇셀프라임의 모습을 후치 네드발과 마을 주민들이 구경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화이트 드래곤의 바로 옆에서 역시 하얀 말을 타고 걷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고상한 취미군. 흰 드래곤 옆에 백마라. 게다가 어울리게도 소년은 흰 망토까지 두르고 있었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드래곤 라자야. 드래곤에게 잡혀  먹힐 염려는 없겠지만 저 말은 정말 불쌍하군."

 "응?"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드래곤 옆에서 저렇게 나란히 걷기 힘들걸."

 "어머? 그렇구나."

 "어쩌겠어. 자기가  하얗게 태어난 잘못이지.  그러니까 화이트 드래곤 옆에서 '혹시 절 잡아드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라고 묻는 눈으로 걸어야 되는 것이고."

 "하하. 후치.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네."

 "하하하! 이 놈, 정말 그럴듯하게 말하는군?"

내 말을 들은 주위의 어른들과 제미니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고 나는 침을 퉤 뱉었다. 

화이트 드래곤을  귀족으로 바꾸고 백마를 평민으로 바꾸면 꽤나 그럴 듯한 은유가 되지만 우리 마을의 단순한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제기랄. 내가 이상한 것인가? 사실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도 좋고 평민들을 괴롭히는 이야기 속의 영주들과는 아무런 유사점도 없다.

 

 

 

이 대목에서 흥미롭게도 후치 네드발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 속의 세상과 자신이 있는 현실이 불일치한다는 것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 후치 네드발은 분명히 중세 유럽을 본 딴 판타지 세상 안에 있지만 그 세상은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오는 모습(악덕 영주가 피지배자들을 괴롭히는)과는 다르다. 이때 "평민을 괴롭히는 이야기 속의 영주들"과 현실의 영주님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후치 네드발한테 다행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설을 내뱉게 하는 울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접한 이야기가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점에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로 조명될 수 없는 불분명한 현실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하고 의심을 품고 실망을 한다. 이야기와 현실의 괴리, 그리고 그 현실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호한 인식이 후치 네드발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후에 이어지는 <드래곤 라자>의 내용은 후치 네드발이 직접 현실을 접하면서 거치는 성장을 다루고 있다.

 

 

뒤이어서 후치 네드발은 제미니와 함께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칼 헬던트를 찾아간다. 세 사람은 술을 마시게 되고 후치 네드발은 칼한테 아무르타트의 파멸을 위해 건배할 것을 제안한다. 칼 헬던트는 그 말에 '용맹무쌍한 후치 네드발군이 악명 높은 아무르타트를 무찔러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예를 얻을 것인가?' 라는 농담으로 답하고 후치 네드발은 당황한다. 후치 네드발은 아무르타트의 파멸을 맹렬히 염원하면서도 실제로 그 복수를 하는 주체에 가는 것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후치 네드발의 '자신의 현실을 갖고 싶은 욕망'은 '아무르타트를 맹렬히 증오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페르소나를 발달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후치 네드발은 자신이 어떻게 그 복수심을 실천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칼 헬던트가 말한 '어머니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악한 드래곤을 무찌르고 명예를 얻는' 로망스 영웅담의 서사는 후치 네드발한테 비현실적이게 느껴진다. <드래곤 라자>는 분명히 판타지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서구의 기사도 문학이 현실을 대변할 수 없다는 의심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후치 네드발한테는 임무가 생긴다. 헬던트의 영주가 직접 참전한 아무르타트 토벌 원정이 참패로 끝나면서 영주를 비롯해 많은 참전대원들이 아무르타트한테 포로로 잡힌다. 아무르타트는 참전대원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보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참전대원들 중에서는 후치 네드발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후치 네드발은 아버지를 살려내기 위해 수도로 떠나야 하는 이야기 속 임무가 생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해가면서 후치 네드발의 현실이 확장될 수록 그는 과거의 자신에서 멀어지고, 자신이 알던 이야기의 세상과도 멀어진다. 헬던트에 있던 시절에 후치 네드발은 칼 헬던트에게서 '우리 마을의 화목한 분위기는 아무르타트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아무르타트가 사라지면 그런 화목한 분위기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강하게 반발한다. 하지만 바이서스의 수도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정쟁과 모략을 알게 되었을 때 후치 네드발은 '만약에 아무르타트가 이곳에 있었다면 모두들 화목하게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존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한다. 후치 네드발의 변화된 인식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직접 아무르타트를 만나는 대목이다. 후치 네드발은 이제 아무르타트한테 어떤 증오심도 느끼지 않고, 그저 아무르타트한테 서쪽으로 떠나달라는 부탁을 한다. 후치 네드발은 이제 자신의 현실을 갖기 위해서 아무르타트를 증오하는 자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모험을 겪으면서 그의 현실은 확장되었고, 그는 자신이 속한 세상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인식하는 세상 안에서 아무르타트는 더 이상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또 다른 일원에 불과하다. 

 

 

<드래곤 라자>의 특징은 후치 네드발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기존에 익숙하게 여기던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혹은 그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현실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때 후치 네드발이 결별하는 것이 사실상 서구의 장르 판타지, 혹은 그 장르 판타지의 시원인 기사도 로망스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악덕 영주', '악명 높은 드래곤을 무찌른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이야기를 떠나서 후치 네드발은 자신만의 현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서구의 판타지 장르를 한 번 깨부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을 때 판타지 장르의 고풍스러운 멋이 돌아오게 된다. <드래곤 라자>에서 판타지 장르의 고풍스러운 풍미가 돌아오는 것은 서구 판타지 세계에 대한 의심이 한 차례 투영되는 과정을 거친 다음이다. <드래곤 라자>의 마지막 챕터에서 후치 네드발이 헬던트 영주와 재회하는 장면이 그런 요소를 보여준다. 

 

 

 

 

바위 뒤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처럼  낡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데다가 땟국물이 질질 흐르고 수염이나 머리 등은 엉망진창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그런대로 온전한 사람들 중에서 영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주님은 반가운 얼굴로 걸어왔다.  바위 위에 완전히 엎드려 있던 하멜 집사는 고개만 좀 들어올려 영주님을 바라 았다.

 

 "여, 영주님!"

 

 "하멜, 하멜인가! 고맙군, 반갑네! …...그런데 자네 뭘 흘렸나?"

 

 "영주님!"

 

 하멜 집사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고함을 빽 질렀다. 영주님은 웃으며 하멜 집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멜 집사를 일으킨 영주님은 곧 그를 포옹했다.

 

 "아, 하하하.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반가워서. 정말 고마워."

 

영주님의 백발은  멋지게 흩날리고 있었다. 단정한 하멜 집사의 모습과 지저분한 영주님의 모습은 정말 방랑하는 왕과 그를 기다리던 충신의 모습으로 보여 모자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포로들도 모두 웃으며 걸어왔다.

 

 

 

<드래곤 라자>의 마지막 챕터에서 후치 네드발은 아무르타트한테 보상금을 건네면서 포로로 잡혀 있던 참전대원들의 신병을 회수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주님이 집사와 재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이 이야기에 나오는 왕과 충신과 같다고 느낀다. 그는 더 이상 현실과 이야기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확고한 현실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장면에서 후치 네드발은 블루 드래곤 지골레이드에 의해 목숨을 위협 받는다. 이때 후치 네드발 일행은 레니를 크라드메서의 라자로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골레이드와 싸우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최후를 앞두고 제레인트와 후치 네드발은 비슷한 생각과 말을 나눈다.

 

 

제레인트 : 세피아파인 고개, 제레인트의 파멸. 노래 하나 될 거야. 이런, 제기랄! 안타깝게도 목격자가 없잖아?

 

 

후치 네드발 : (마음 속으로) '좋아, 시작할까? 세피아파인 고개. 후치의 파멸, 그 멋진 시작이다.'

 

 

 

후치 네드발은 저 대목에서 자신의 파멸을 딴 이야기나 노래가 만들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는 <드래곤 라자>의 초중반부에서 후치 네드발이 '드래곤을 죽이고 부모의 원수를 갚은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서사가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위화감을 느낀 것과 무척 대조적인 장면이다. 그는 더 이상 옛날 이야기나 노래가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이 새로운 이야기와 노래를 만들어내리라고 믿고 있다. 이는 송경아가 <드래곤 라자>의 해설에서 후치 네드발의 포지션을 전사라기보다는 음유시인으로 가리킨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지점이다. 후치 네드발은 단순히 싸우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 세상을 끝없이 해석해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인물인 것이다. 

 

 

 

<드래곤 라자>의 도입부에선 헬던트 경비대장 샌슨 퍼시발이 경비대원을 지휘해서 위어울프를 처치하는 장면이 나온다. 후치 네드발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잠깐 동안 샌슨 퍼시발이 바이서스의 건국자인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위대한 영웅인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윽고 샌슨 퍼시발과 다시 농담을 주고 받는 관계로 돌아가면서 샌슨 퍼시발은 그런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후치 네드발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영웅담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영웅담이 자신의 현실을 대변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르타트에 의해 어머니를 잃은 자신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다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 수 없듯이 자신의 친구 샌슨 퍼시발도 루트에리노 대왕과 같은 영웅담의 주인공으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여행을 거치면서 후치 네드발은 루트에리노 대왕에 관한 진상을, 핸드레이크가 루트에리노 대왕한테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한 차례 기존에 인지하던 세상에 대한 환멸을 거친 다음에 더 이상 그는 더 이상 세상을 낯설게 여기지도 않게 되었고, 이야기가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거나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도 않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제 이야기가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세상과 화해를 한 채 영주님과 집사의 재회를 바라본다.

 

 

 

<반지의 제왕>을 소설이 아닌 로망스로 생각했다는 톨킨. 하지만 서구에서 전해내려져 온 로망스의 전통이 한국에 와서는 의심되었고 이영도는 그 의심을 현실로 채워넣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에 대한 시위가 벌어졌던 경남 마산에서 나고 자란 이영도한테 '나라를 건국하고 통치한 위대한 국가 원수'라는 신화는 온전히 믿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영도는 로망스가 아닌 소설을 썼다. <드래곤 라자>는 후치 네드발이나 핸드레이크, 칼 헬던트, 넥슨 휴리첼 같은 인물들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그 인식은 세상의 실재와 계속 부딪치면서 어떻게 발달하거나 소멸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드래곤 라자>에서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에 현실과 등장 인물의 의식 사이에서 만들어졌다가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르 귄의 <로캐넌의 세계>가 산문 문학으로 고급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 작품들은 근본적으로 소설이 아닌 로망스다. 저 두 작품 안에선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이 하나의 영웅담을 위해 봉사한다. 서구에는 로망스의 유구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이 쓰이고 읽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영도한테는 로망스보다 차라리 소설이라는 개념이 더 익숙했던 것 같다. 그는 중고등학교에서 문학에 대한 제도권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 국문과에 진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판타지 장르가 소설의 일부분이라고 누차 강조했으며 나중엔 문예지에 그런 주장이 담긴 글을 실기도 했다. 

 

 

물론 이영도는 문단 제도 바깥에서 나온 작가다. 그는 문단 제도에 일관되게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게 제도적인 문학이라는 개념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이영도의 팬들도 이영도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이영도의 팬들은 문단 시스템과 무관하게 이영도 소설의 문학성을 믿었다. 그것은 문학성이라는 개념이 문단 제도와 별개로 성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00년도에 문학 평론가 정과리는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 판타지 소설 붐을 중심으로>라는 발제문을 발표한 바 있다. 정과리는 그 발제문에서 90년대의 판타지 소설과 무협 소설을 비교하면서, 판타지 소설은 작가들이 하나의 이름을 내걸었다는 면에서 무협 소설과는 다르며 이는 기성 문단에 유입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는 얘기를 남긴 바 있다. 하나의 필명을 내걸었다는 데서 판타지와 무협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은 무협 소설의 작가들이 자신의 필명을 갖지 못하고 유명 작가의 이름으로 작품을 냈던 관행을 말하는 것이다. <드래곤 라자>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한상운의 <양각양>만 해도 작품 집필에 아무런 관여한 바 없는 유명 작가의 이름이 '공저'의 형식으로 포함되어 있을 만큼 무협 소설 업계에선 유명 작가의 이름 하나 아래에서 신인 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내는 관행의 역사가 제법 길었다. 하지만 정과리의 주장이 억지스러운 것은,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 자기 이름(실명이든 필명이든) 내걸고 책을 낸 게 기존 문단 체제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표출이라고 한 부분이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책을 낸 건 그냥 상식적인 행보에 불과하며, 판타지 소설가들 중에서 문학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해도 그 믿음은 반드시 문단 제도를 통해서 실현될 만한 것이 아녔다. 신춘문예 응모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문학에 대해선 믿음을 가졌던 이영도처럼, 작가나 팬들 모두 다 문단 제도와 무관한 영역에서 문학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채 글을 쓰고 읽었다. 사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등단 제도를 통해 돌아가는 문단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이영도의 독자들이 판타지 소설을 무시하는 기성층에 대해 가진 불만은 '대체 왜 이영도나 전민희는 문단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지 못하냐?' 보다는 '대체 왜 학교에서 <드래곤 라자>나 <룬의 아이들>을 읽고 있으면 국어 교사들이 태클을 거는 것이냐?'에 가까웠다.

 

 

 

문단 제도와 무관하게 인터넷에서 발생한 문학적 논쟁의 대표적인 예로 귀여니를 들 수 있다. 귀여니는 이모티콘과 인터넷 방언에 기반해 쓴 픽션을 출간하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귀여니를 둘러싼 논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제도권 문학이라기 보다는 장르 팬덤이었다. 기성 문인들이 국문과나 문창과 수업 도중에 귀여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을 수는 있어도 공개적으로 귀여니를 질타한 적은 없다. 귀여니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에 나선 기성 작가는 다름 아닌 <퇴마록>의 이우혁이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freeboard&no=18044

 

 

https://blog.naver.com/amarese/140000467700

 

 

 

 

당시에 이우혁이 쓴 글들을 보면 문학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드러나는 대목이 많다. 이우혁은 자신이 대중 소설을 쓰지만 문학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귀여니의 작품들을 사뮤엘 베케트의 작품에 비교해서 문학적인 자장 아래에서 평가를 내린다. 이우혁은 문단 제도 바깥에서 활동했지만 제도적인 교육을 통해서 문학을 학습 받았을 것이며, 사무엘 베케트와 같은 고전 작가들을 읽으면서 형성하게 된 문학관이 있다. 당대에 장르문학을 읽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제도권의 시선이 투영된 문학관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문학관에 근거해서 이영도의 소설에 대해선 문학적인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내리며, 판타지 소설을 읽지도 않고 폄훼하는 국어 교사들과 불화하게 된다. 메시지(문학성)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져(문학 제도)는 부정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에서 판타지 장르는 해외의 이질적인 이야기가 수입되어 오는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한국인한테 서구의 장르 판타지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기보다는 의심을 유발하는 대상이었다. <드래곤 라자>가 순수한 이야기 글(로망스)이라기보다는 후치 네드발의 의식 안에서 이야기의 발달과 의심, 해체가 끝없이 반복되는 소설의 형태로 나타난 것도 서구 판타지 원전의 서사(악을 물리치고 세상의 평화 회복)를 믿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례가 드러나는 소재 중에 하나가 마왕이다. 한국 판타지에서 마왕은 육아일기를 하는 식으로 소시민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악의 마왕을 무찌르는' 고전적인 서사가 한국에서는 낯설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서구 사람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한국 사람들한테 마왕은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존재로 여겨졌다. 

 

 

2006년에 이융희의 <마왕성 앞 무기점>이 출간되었을 때 이미 판타지 장르는 한국에서 자리잡아 있었다. <드래곤 라자>가 <반지의 제왕>의 로망스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한지 9년이 지났고 <마왕의 육아일기>에서 소시민적인 마왕이 제시된지 8년이 지난 뒤였으며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이계로 진입한다는 서사가 하나의 장르로 범주화되어서 문화적인 토대가 쌓여 있던 시점이었다. <마왕성 앞 무기점>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태어난 일종의 메타 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왕성 앞 무기점>의 주인공은 한국 청년이고, 먼치킨이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할 만큼 판타지 장르에 익숙하다. 그는 신에 의해서 이계 진입 서사의 주인공으로 선택되었고 마왕을 없앤다는 임무를 받은 채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다. 하지만 그는 그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에 마왕과 협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신이 주인공한테 마왕을 끝장내라는 이야기 속 배역을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보통 내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작품들의 주인공들의 말버릇이 있다.

평범했던 내가 왜 이런 시련들에 맞서 싸워야 하냐고.

그들의 이야기는 잘못되었다. 그들이 경험했던 독특한 일상들은 이동 후 경험들에 비하면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니까.

 

 

<마왕성 앞 무기점>은 주인공의 저러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이 보기에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험을 겪기 이전에도 이미 평범한 일상을 살지 않았다. 다만 판타지 소설의 극적인 서사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이전의 삶을 평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주인공이 '마왕을 무찌르는 서사'를 거부하고 마왕성 앞에 무기점을 차려서 용사들을 상대로 무기 장사를 벌이려고 하는 행보는 그런 의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극적인 서사에 의해서 부정된 일상의 가치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에 마왕성 무기점에 머물게 된 용사 최 마일 같은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마왕한테 도전을 하러 갔다가 패배해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그가 처음에 마왕을 무찌르려고 했을 때는 몹시 비장한 태도를 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은 그냥 일상이 돼 버렸다. 마왕을 무찌르는 서사가 일상을 재현하는 서사에 잡아먹힌 것이다.

 

최 마일이 마왕성에 도전을 하러 갔다가 오면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것은 주인공과 마왕이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마왕을 무찌르지 않는 대가로 마왕한테 용사들을 죽이지 말 것을 요구했다. 마왕은 자신을 무찌르도록 신한테 운명을 점지 받은 주인공한테 저항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마왕 역시 원래 마계에 살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보니까 신에 의해서 마왕의 운명을 점지 받은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마왕과 공존하기로 선택한 주인공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돈을 버는 것이다. 마왕성에는 수많은 용사들이 마왕한테 패배한 다음에 남기고 간 무기들이 쌓여 있고 주인공은 그 무기를 모아두었다가 앞으로 나타날 용사들한테 팔아치울 계획을 짠다. 주인공은 마왕성에서 발견한 검을 두고 '황금으로 저 검과 똑같은 크기의 검을 만든다고 해도 저 검만큼 비싸지는 않을 거다'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한다. 마왕을 무찌르는 서사를 거부한 주인공한테 '마왕을 무찌르는 데 기여하는 무구로서의 가치'는 무의미하다. 주인공한테는 동일한 부피의 황금이 더 유용하다. 그 때문에 그 칼은 주인공한테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냉기를 뿜는 검'을 이용해서 냉동고를 만든다든지 주인공은 마왕성에서 발견한 무기를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용도로만 활용한다.

 

 

그런데 주인공한테 돈을 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인공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막연한 의욕은 있지만 그 돈을 이용해서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주인공은 부귀영화나 권력에는 오히려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는 어차피 신한테 선택 받은 용사이고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 자체가 강한 권력을 부여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권력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이 성욕을 가진 이성애자 남자라는 것은 여러 차례 드러난다. 주인공이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남자인 헤임을 보면서 여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타까워하거나, 무기점에 처음으로 방문한 손님들을 마주할 때 만약에 손님들이 여자 여럿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하렘 파티라면 여자 한 명 쯤은 자신과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런데 주인공은 분명 욕망을 갖고 있는데도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한테는 '돈을 많이 번 채 도시로 가서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고 마음에 드는 여자와 연애한다'와 같은 목적이 없다. 하다 못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큰 돈을 번다는 단순한 목적 같은 것도 없다. 주인공이 돈을 버는 것은 구체성 있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원래 살던) 현실 세계의 욕망을 모방하는 행위에 가깝다. 혹은 이야기를 지연시키며 자유 의지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주인공의 욕망일 수 있다.

 

주인공은 마왕성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심정적으로 거리를 둔 채 본다. 그 손님들은 자신이 마왕을 무찌를 용사일 거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이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가 발달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바로 신한테 직접 점지를 받은 용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서사가 허구라는 것을 알아본다. 마일과 데스티니는 자기 자신한테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허구의 서사를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손님들이 전근대적인 서사(로망스)를 자기 자신한테 부여하려고 할 때 주인공은 살짝 거리를 둔 채 근대적인 자의식을 갖고 그들을 지켜본다. <돈 키호테>에서 돈 키호테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그러듯이. 하지만 <돈 키호테>에 나오는 주변 인물들이 결국에 돈 키호테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한테 이야기를 부여하려고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나듯이 <마왕성 앞 무기점>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일상을 구축하기 위해 자신이 접한 이야기를 모방하는 인물이라는 게 드러난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돈 키호테는 자신이 읽은 기사도 로망스의 주인공들을 모방하여 욕망을 추구한다. 돈 키호테(주체), 욕망의 중개자(기사도 로망스의 주인공), 욕망의 대상(이상적인 기사)이라는 세 개의 꼭지점을 이룬 삼각형이 그의 내면을 지탱한다는 것이다. 그는 욕망의 중개자를 모방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기사도 로망스에 대입하여 해석한다. <마왕성 앞 무기점>에서도 이러한 삼각형이 형성된다. 주인공의 욕망에 대한 추구는 현실, 혹은 현실에서 읽은 이야기 매체에 대한 모방을 통해서 나타난다. 주인공은 처음에 무기점에 온 손님들을 마주했을 때 '혹시 손님들이 하렘 파티로 구성되어 있으면 여자 한명 쯤은 나와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성욕이라는 욕망은 주인공한테 '자신이 읽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매체를 경유해서 표출되는 것이다. 판타지 세계와 연관된 어떤 욕망도 없는 주인공이 일단 돈부터 벌어보겠다고 마왕성 앞에 무기점을 세우는 것은 현실 세계의 욕망을 모방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불분명한 것은 주인공의 자의식 그 자체다. 주인공은 현실에서 비롯된 구체적인 욕망이나 트라우마가 없다. 때문에 주인공은 이세계에서 돈을 벌려고 하지만 그 돈으로써 해결할 구체적인 욕망이나 트라우마는 없다. 주인공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판타지 세계에서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은 현실 세계에서 빈곤에 시달렸기 때문에 판타지 세계에서 그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 부를 쌓으려고 행동하지 않는다. 혹은 여자한테 외면당한 한을 풀기 위해 연애를 하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없다는 면에서 주인공은 차라리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녔다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던 현실 세계와 자기 자신을 불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라나한테 자신의 출신지를 설명하면서 주인공은 자신이 원래 살던 현실 세계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고, 마왕성 앞 무기점을 여관으로 개조해서 이런 저런 시설을 들여놓을 때도 자신이 현실 세계의 현대적인 시설들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느낀다. 이때 주인공의 내면 안에서 현실과 환상은 상호 보완하는 구도를 이룬다. 주인공은 현실을 통해서 환상을 해석하고(마검에 홀린 라나가 사라졌을 때 헤임의 절망한 얼굴을 보고 주인공은 '수능 시험 여러 차례 망치고 취직해보려다가 실패한' 얼굴 같다고 생각한다), 환상을 통해서 현실을 설명하려고 한다(라나한테 대한민국의 전래 동화를 설명할 때 주인공은 자신이 떨어진 판타지 세계에 맞게 적당히 각색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람들한테 자신을 소개할 때는 판타지 세계관에 있는 먼 대륙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설명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도달한 환상 세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로 환상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현실에 있던 자기 자신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환상 세계의 일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꾸며내려고 하는 것이다. 

 

 

후치 네드발은 어머니의 죽음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서 어머니의 원수를 무찌를 생각은 없다. 그는 그런 종류의 서사가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때 그는 자신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서사와,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 사이에서 방황한다. <마왕성 앞 무기점>의 주인공 역시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판타지 세계에서 그는 이방인이며, 마왕을 무찔러야 할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그는 마왕을 무찌르는 서사 안의 역할을 맡기를 거부하고 현실의 욕망을 모방한다. 그는 마비노기나 한국 판타지 소설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해석하려고 하며 외계인을 만났을 때는 'ET'나 '도우너' 같은 이름 중에서 무엇으로 그 이름을 정할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현실은 어떤 세상이었는지 몹시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가상의 정체성을 꾸며낸다. 그는 먼 대륙에 있는 '쥬'라는 부족의 일원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1권에서 주인공은 마왕한테 도전한 용사들이 패퇴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무기들을 수거해서 되찾아준다. 용사들은 주인공이 어떤 신묘한 힘을 가진 현자인 것처럼 여기고 주인공은 자신을 "현자 역을 맡은 멍청이"라고 생각한다. 마왕을 무찌르는 용사라는 이야기 안의 역할을 거부하고 환상 세계의 가짜 정체성을 선택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불안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의 환상 세계의 정체성은 진짜가 되어간다. 최 마일의 죽음이 주인공한테 트라우마를 안겨다 준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을 쥬 부족의 일원이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거짓말에 불과했지만 그는 최 마일과 우정을 쌓고 그의 죽음을 겪는 과정을 거쳐가면서 그 정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마왕한테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사망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직접 마왕을 무찌르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인 마왕 펠가를 살해한다기보다는, 펠가를 마왕이라는 이야기 안의 역할에서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마왕을 세상에서 없애버린다. 펠가는 마지막까지 주인공이 적대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펠가는 그저 신한테서 마왕이라는 직위를 받은 소시민에 불과하며, 주인공과 함께 인간의 생체 실험을 통해서 탄생한 마족+정령에 대항하기도 한다. <마왕성 앞 무기점>에선 마족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생명체들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이 더 사악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을 쓰고 읽는 한국인들한테는 머나먼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마왕이라는 개념보다 일제에 의해 생체 실험이 자행된 한국의 역사가 더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마왕 원정대가 패배하고 돌아왔을 때 주인공은 상심한 라나를 달래려고 하면서 자신이 어린 아이와 어른 가운데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다고 느낀다. 마왕 원정대가 패배해서 라나가 상심하게 된 것은 주인공이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 안의 역할'을 맡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이 라나와 같은 어린 아이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주인공은 이야기 안의 역할을 떠맡는 것을 거부하고 무기를 팔면서 자신이 더 이상 속하지 않은 현실의 욕망을 모방할 뿐이다. 하지만 마왕을 무찌르는 서사에 근접해 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기만의 파티를 꾸리게 되고 보다 뚜렷한 형태의 현실을 갖게 된다. 천사, 마족, 성녀, 이세계로 온 또 다른 한국인, 약소국의 왕세자와 동료들, 그리고 잠깐 동안은 미래인과 외계인까지 포함된 그 파티의 구성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마왕성 앞 무기점>은 일상물, 모험물, 영지물, 그리고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를 오마쥬한 SF까지 여러 장르를 오간다. 약소국의 왕세자와 그 동료들을 훈육시킬 때 주인공은 그들의 어엿한 스승이다. 결국에 마일과 펠가, 두 명의 '벨리' 중에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는 마왕의 존재를 세상에서 없애버린다.

 

 

<드래곤 라자>와 <마왕성 앞 무기점>은 공통적으로 서구 로망스의 고전적인 서사가 자신을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들의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서,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이야기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자신들이 주인공인 판타지 서사를 갖기 위해서는 서구의 서사를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작품은 <돈 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로망스 서사와 대치하는 관계를 이루면서 서사라는 것은 결국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게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허상인 게 아니냐는 인식을 보여준다. <마왕성 앞 무기점>은 물론 신에 의해서 창조물의 운명이 정해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신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죽음을 자초하는 등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한테 허상의 이야기를 부여하는지 보여준다. 혹은 자신의 욕망을 둘러싸고 어떤 이야기를 조직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네스가 데스티니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내가 데스티니를 따라다니는 것은 그가 내 생명을 구해줬기 때문이다. 난 생명의 은인을 보필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일 뿐이다'이라고 했을 때, 주인공은 아네스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고 고전적인 서사로 자신의 행동에 당위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단 것을 알아보고 그런 자기 기만을 그만 둘 것을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 라자>와 마찬가지로 <마왕성 앞 무기점>은 사실주의적인 형식을 지니지 않고 있을 뿐 근대적인 의미의 소설(novel)이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지만 문학의 주류층으로부터 미덥지 않은 반응을 얻었던 것은 단순히 환상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돈 키호테> 이후에 발달한 소설의 변천사와 완전히 무관했기 때문이다. <돈 키호테>, <마담 보바리> 등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다가 해소되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개개인은 자의적인 이야기를 자신한테 부여하려고 하는지 다루는 방향으로 소설이 발달했는데 <반지의 제왕>은 그에 완전히 무관심한 방향으로 쓰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서구의 판타지 서사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그 서사의 골자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기 때문에 로망스보다는 소설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후치 네드발과 무기점의 '마스터' 둘 다 서구의 장르 판타지가 자신들의 현실을 대변하지 못할 거라는 억압감을 느끼고 있고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욕망하고 있다. 그 때문에 톨킨의 인물들한테는 들이대기 힘든 욕망의 삼각형이 저 두 캐릭터를 상대로는 성립한다. <살인의 추억>이 장르 수사물인 동시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듯이 저 두 작품도 판타지 장르에 영향을 받은 만큼이나 관습적인 문학의 영향 또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마왕성 앞 무기점>에서 주인공과 줄리가 언급하는 여러 작품들 중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김유정의 <봄봄>이 동등하게 위치해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판타지 소설에 관습적인 문학의 영향이 배어 나와 있는데도 문단 비평가들이 비평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드래곤 라자>는 출간 당시에 정과리나 복거일한테 비평을 받았지만 이영도가 그 이후에 발표한 작품들은 <드래곤 라자>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뤘다고 팬덤 내부에서 평가 받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도 문단에선 없는 작품 취급 당했다. 이영도의 작품이 나빠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정과리나 복거일의 비평 둘 다 <드래곤 라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영도의 작품이 나빴다면 비판적인 비평을 하면 될 일이지, 아예 없는 취급을 하는 것은 일관성에 맞지 않는다. 사실 이영도의 작품 중에서 <드래곤 라자>만이 유일하게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은 출간 당시에 민음사에서 조선일보 등의 주류 일간지에 <드래곤 라자> 광고를 어마어마하게 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래곤 라자>는 기성 문단 비평가들의 레이더에 감지되었지만 다른 작품들은 감지되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 팬덤 내부에서는 이수영의 <귀환병 이야기>가 IMF 직후 한국 사회의 피로감과 절망을 다뤘다는 면에서 <드래곤 라자>보다 더 사회적인 시의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사회적 시의성을 강조하는 문단 문학의 풍토에도 불구하고 문단 비평가들이 다룬 것은 <귀환병 이야기>가 아니라 <드래곤 라자>였다. <귀환병 이야기>는 그들의 레이더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쓴 글에서 나는 김보영의 소설은 문단에서도 무조건 다뤘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김보영이 세르반테스에서 비롯된 관습적인 문학적인 가치를 문단의 누구보다도 충실히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문학이 사회에서 가지는 핵심적인 가치는 '이야기는 실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한테 부여하려고 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온 사회가 흥분에 휩싸인 채 '나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나 자신이 괴물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게 내가 사회에서 떠맡은 희생의 역할이다'라는 나르시시즘 서사를 자기 자신한테 부여하려고 할 때, 문학은 '그건 당신이 자기 자신한테 부여하려고 하는 허상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당신이 실제로 하는 일(괴물이 될 만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야기에 속아넘어간다고 해도 소설가들은 이야기가 사람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생물이며 그 자체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소설가가 사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보영의 문학적인 성취가 탁월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아름다운 문장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저런 정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김보영의 <스크립터>나 <얼마나 닮았는가>에는 공통적으로 이야기가 허상에 불과하다 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스크립터>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들을 '멸망해가는 세계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영웅'이라는 서사에 끼워맞추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제 3자가 보기에 그들은 온라인 게임의 롤 플레잉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는 괴짜들일 뿐이다.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승무원들은 선내의 인공 지능이 인간의 의체에 자신을 넣어달라고 요구하자 공포에 휩싸여서 '인류를 파멸시키기 위해 폭주한 인공 지능' 같은 서사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대입한다. 하지만 인공 지능이 보기에는 인간의 파멸을 자초하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비이성일 뿐이다. 결국에 두 작품 다 장르의 고전적인 서사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차례 선포한 다음에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직조해내는지를 보여준다. 그 결과 <스크립터>의 결말에선 고전적인 판타지 서사가 되살아난다. 주인공들의 세상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공격한 운영자의 행동은 그 자체로 영웅들한테 시련을 내리는 신의 행동이 돼 버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운영자마저도 한 세상의 끝을 알리러 온 신의 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얼마나 닮았는가>에선 인간이 어떤 비이성을 토대로 세상을 인식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밝혀진 다음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육신에 깃들어 고통을 감내하기로 결정한 구세주'라는 또 다른 고전적인 서사에 도달한다. <드래곤 라자>나 <마왕성 앞 무기점>과 마찬가지로 두 작품 다 서구에서 유입된 장르 서사에 대한 의심을 한 차례 해소한 다음에야 장르적인 미학이 깃든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의 장르 안에서 이야기를 발달시키는 작품과 이야기를 반성하는 작품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셉션>이 가상 현실이라는 SF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발달시켰다면 <저 이승의 선지자>는 그 이야기의 실재성을 돌아보았다. 나반은 타락해가는 세상을 하나로 통합해서 치유한다는 목적에 따라 행동했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한테 부여한 이야기일 뿐이며 일시적인 해석에 불과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는다. 그래서 <인셉션>에서 콥은 꿈에서 만난 자신의 아내한테 '당신은 허상에 불과하다'라고 쉽게 선포하지만 나반은 결말에서 자신이 가상 현실에서 겪은 모든 일들이 실재였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문단 문학은 장르를 불문하고 이야기를 반성하는 성질의 작품들을 다뤘어야 했다. 소설의 사회적인 가치는 결국에 인간이 자기 자신한테 이야기를 어떻게 부여하는지 그 과정을 반성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단 문학은 등단 제도라는 보수적인 틀 안에서 유지된다. 그들한테는 좋은 문학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좋은 문학을 선별하는 능력이 자기 자신들한테 있다는 상징 권력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작품을 감지하는 그들의 범위는 등단을 한 작품이거나, 문단 문학과 유사한 성향을 띤 작품으로 한정된다. 문단 문학에서 김보영이나 김창규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김초엽은 받아들여진 것은 작품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김초엽의 작품들이 문단 문학에 익숙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1인칭 여성 서술자를 내세운 <관내분실> 같은 경우에는 신춘문예 당선작이라고 이야기해도 믿을 만큼 문단 문학과 흡사하다. 김초엽이 포괄적인 독자층으로부터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김초엽의 사례에서 문단 문학이 포용하는 범위는 좋은 문학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들한테 익숙한 문학이라는 게 드러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자신들과 닮은 것만 문학의 범주로 넣는 단순한 취향의 공동체에 머물 것이라면 사회에서 그들한테 보장된 문화적 권위는 회수되어야 마땅하다. 

 

 

이융희님은 '순문학은 없다'라는 글에서 제도권 문학이 웹소설을 포함한 문학 전체에 미치는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일정 부분 동의하고 일정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드래곤 라자>와 <마왕성 앞 무기점>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한국 판타지 소설의 형성에도 분명히 관습적인 문학의 영향이 배어나와 있다. 이융희님의 얘기대로 장르문학의 독자적인 지층을 살펴보는 과정에도 관습적인 문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무시한다면 어째서 00년대 초반에 판타지 소설 팬덤이 귀여니를 향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관습적인 문학을 담당하는 문단 세력은 그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장르 문학과 건강한 상호 관계를 맺기 힘든 부분이 있다. 문단 문학은 자신들이 '양질의 문학'을 담당하고 있다는 상징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질서 바깥에 있는 적대적인 세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장르 문학은 그 표적으로 제격이다. 때문에 문단 문학은 장르문학을 필요로 하지만 장르 문학은 문단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장르문학의 비평에서 문단 문학이 호명될 이유가 없다는 이융희님의 논지에 공감을 한다.

 

 

사실 문단 문학이 자기들의 체제 바깥에서 쓰이고 읽히는 모든 관습적인 문학들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들의 시스템 내부에서 창작되는 문학들도 전부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단 제도가 총체적으로 고장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문제까지 이 글에서 다루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겠다. 원론으로 돌아와서 정리하면 봉준호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하나의 장르가 다른 문화권으로 이식될 때는 당연하게 생각된 장르적 관습이 의심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그 관습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해당 문화권의 현실이다. <드래곤 라자>와 <마왕성 앞 무기점>도 그런 의심이 팽배해 있는 경우이며 그 때문에 이 작품들은 <반지의 제왕>이나 <로캐넌의 세계> 같은 순수한 모험담이라기보다는 주인공들이 모험담의 필연성을 끊임 없이 의심하고, 세상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그 해석이 끝없이 달라지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 판타지가 영미 판타지를 닮지 않았다는 것은 흔히 '판타지 소설은 문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된 정과리와 같은 문단 비평가들이 '한국 판타지 소설은 문학이 아닌 게임의 텍스트 버전이다' 와 같은 주장을 펼칠 때 그런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한국의 판타지 소설 작가들은 서구의 로망스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로망스가 아닌 소설의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톨킨이 아닌 세르반테스의 뒤를 따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어쨌든 톨킨이 로망스를 썼을 때 이영도가 소설을 썼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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