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만든 영웅들〉

전민희 작가님을 만나다 (3)

 

: 장르문학계라는 영역을 20년간 바라보시면서 느끼신 소회나, 또는 장르문학이라는 영역에 필요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 개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큐레이팅하고 그를 통해 계보를 쌓거나 해도 되는데, 장르문학계라는 넓은 범위에서는 어떠한 특정한 형태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넓을수록 좋다고 할까요? 사람들이 모여서 많은 이야기를 할수록 담론은 풍부해지니까요. 예전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재화는 사람의 관심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장이 있으면 그 속에서 다툼도 발생하고 토론도 발생하며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죠. 평론을 하는 분들에겐 그 장의 여러 지평들을 규정하는 작업이 비평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전체 장을 놓고 보았을 때 바둑판무늬를 그리듯 틀을 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제일 중요한 건 양적으로 많이 모이는 일이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이 굉장히 좋은 때에요. 무척 인기 있고 좋은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많이 나오고 있죠. 또 그런 인기작들에 다양한 형태의 독자가 모일수록 더 좋고요. 그 인기작들로부터 수많은 파급이 생겨날 것이고, 지망생분들이 그 파급을 보고 연구할 수 있게 되겠죠. 이 인기작의 장점은 무엇이다, 저 인기작의 단점은 무엇이다 하는 식으로요. 

사람들이 연구를 통해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거든요. 자신만의 어떠한 요소가 들어가서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죠. 그래서 실패작이 많이 나온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만큼이나 장이 커졌다는 반증이니까요. 아마 이건 여느 시대가 다 그랬을 텐데, 관심이 모이면 당연히 실패작도 많아집니다. 동시에 관심이 모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 종합하면, 장르문학계라는 하나의 넓은 계에서 우리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또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평론가는 평론하고 작가는 작품 쓰며 좋은 작품들을 꾸준히 양성하되, 지금보다 좀 더 확장돼서 담론이 활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작품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작품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피드백을 고려해서 하나의 작품을 쓰는 것으로 발화하는 거지만, 평론을 하는 분들은 조금 얘기가 다르잖아요. 여러 작품을 읽고 그 안의 흐름을 추적해서 지평을 찾으시잖아요? 그 작업 자체는 사람들이 길을 찾는 데 굉장히 도움을 주니까요. 요컨대, 영역이 다른 거죠.

 

: 다양한 영역들이 공존하는 게 되게 중요한 것이겠네요?

 

: 영역도 다르고 역할도 사실 다른 거죠. 평론하시는 분들은 작품을 끊임없이 비교 분석하고, 좌표를 찾아 위치시킬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창작하는 사람들은 장 안에 다양한 담론들이 등장할 수 있게끔 하는 게 중요하고, 평론가분들은 모인 것들 안에서 이정표도 세우고 결도 읽어내고 좌표값도 만드는 작업들을 하고 계신거죠.

 

: 게임을 굉장히 즐겨서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서브컬쳐 계열의 게임이나 만화 소설 체험이나 경험이 글을 쓰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나요? 

 

: 사실 요새는 게임을 안 한 지 오래되었어요. 게임도 종류가 나뉘잖아요.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게임과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게임. 저는 그 세계에 몰입할 만큼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게임을 좋아하거든요.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서사는 세계 자체에 대한 몰입에 시간이 덜 들어서 인물만 따라가도 되는 경우가 많은데, 판타지 세계는 월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작품의 진짜 재미에 닿을 수가 있죠. 요컨대 전 짧은 시간 잠깐씩 들어갔다 나오는 형식의 게임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건 아침부터 밤까지 푹 빠져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이죠. 하지만 그런 게임을 못 한 지가 수년째가 되었어요. 도저히 그럴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그런 게임들은 일상 파괴자잖아요. (웃음)

그리고 창작에 영향을 주느냐라고 여쭤보셨는데 저의 경우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저는 게임을 대학 입학 이후에나 접해보았고, 그러니 사실상 고전 RPG류는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대항해시대를 좋아했다고 인터뷰에서 여러 번 말했는데, 그것도 대학생 때 처음 해봤거든요. MMORPG도 몇몇 작품만 해보았을 뿐이에요. 만화도 거의 안 봤어요.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만화를 빌려와서 보게 되었는데 저는 그림을 보다보면 정보를 놓쳐요. 이미지 하나하나에 숨어있는 정보를 찾지 못하고 글자로 먼저 눈이 가거든요. 그러니까 늘 만화를 보더라도 겉핥기로 보는 상황이 되어버리죠. 애니메이션도 많이 보지 못했고요. 어린 시절에 서브컬처라고 불리는 분야의 수혜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란 셈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나름대로는 다양한 곳에서, 이를테면 신문에서도 재미있는 요소를 찾아내곤 했거든요. 다른 세계의 낯선 상황을 알게 되는 것도 좋았고, 요약 보도된 사건의 이면을 추리하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기고문을 보냈다가 상품으로 전신환 증서(요즘도 있나 모르겠네요) 같은 신기한 것을 받아보기도 했죠. 신문의 거의 모든 면을 너덜너덜해지도록 잘라서 스크랩을 했기 때문에 날마다 구멍 투성이 신문을 보다가 지친 아버지께서 ‘너는 신문을 제일 마지막에 봐라’고 순서를 정해주기도 했고요. 

물론 보편적으로는 서브컬처를 향유한 경험과 장르문학 창작이 연결되는 사례가 많죠. 남이 만든 세계를 보면 나도 만들고 싶어지고, 그렇게 모사를 하며 최초의 창작 의욕을 받게 되니까요. 그런데 저의 경우에 일단 구상된 세계를 촘촘하게 채울 때는 다른 다양한 것에서 도움을 받아요. 최근에 제가 영감을 받은 것은 어떤 회화 작품이었어요. 항구를 그린 작품을 한참 보고있다가 새로운 세계관이 떠올랐죠.

 

: 그럼 네 번째 연대기 신작이 나오는 건가요?

 

: 그건 모르겠네요. (웃음) 이런 식의 접근은 아키에이지의 설정을 짤 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게임 속에는 맵이 많잖아요. 각 맵은 모두 달라야 하고요. 그러다보니 맵마다 다양한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때 도움이 되었죠. 무언가를 창작할 때, 아직 스토리가 없는 원재료 단계에서 첫 번째로 스토리를 뽑아내어 보는 것도 좋은 경험 같아요. 약간 막 짜낸 생과일주스처럼요. (웃음)

 

: 웹소설 시장이 커지면서 전업으로서 창작을 지망하는 수많은 작가 후배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고 싶으신 얘기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으신가요?

 

: 어느 정도 양을 쌓아놓고 시작하라든가, 벌이가 있는지 고민을 해보고 직장을 퇴사하라든가, 보편적으로 누구한테나 도움이 되는 조언들이 있죠. 하지만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 아닐까 해요. 각 개인들은 전부 다른 거예요. 이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있고, 하루 종일 몰두해야만 쓸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라면 직장을 그만둬야죠. 그 선택 때문에 본인이 후회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거든요. 누군가는 투잡이 잘 되는 타입일 것이고, 잘 안 되는 타입도 있을 것이고.

물론 목표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예전에 비슷한 질문을 받았었던 적이 있는데, “소설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어요. 저는 두 질문의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작가는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의 학과를 졸업하면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죠. 결국 작가란 작품을 써서 완결이 되면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건지 작가가 되고 싶은 건지 구별하셔야 하는데, 직업으로서 작가를 바라본다면 다시 보편적인 조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글을 작품으로써 완벽하고 멋지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은 먹고 사는 문제니까 보편적인 조언을 따르는 것도 좋겠지요.

저는 처음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소설을 썼어요. 『세월의 돌』을 종이책으로 출간하기로 한 뒤에 직장과 병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퇴사했죠. 그때 ‘내가 계속해서 직업 작가가 될 수 있는가?’는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 퇴사하지 않고서 열 권의 책을 종이책으로 내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릴 것 같았고, 이 작품은 반드시 완결을 지어야겠다는 결심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본인의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쓸 자신이 있고, 매일 얼마 이상의 분량을 써낼 수 있다, 공개해서 어느 정도의 평가도 얻었다, 그 무렵에 스스로가 판단을 내리고 달려가는 거죠. 왕도는 없어요. 각자가 다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인생에서 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간병을 해야 한다거나, 내 가게를 돌보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이를 가지거나 하는 상황들이 와요. 이 모두가 이를테면 투잡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몰두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지 말고 많이 써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투잡의 상황이 오면, 그 상태에 적응해서 해나가는 수밖에 없죠. 

 

: 글을 수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내가 쓴 글을 감상하기 위해서 차분히 읽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과거의 글을 볼 때마다 어떤 부분을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 윈터러 개정판 후기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죠. 3부를 쓰기 위해서 1, 2부를 다시 읽어봤어요. 완결한지 너무 오래되었으니까요. 사실 그 시기에 『룬의 아이들』 1, 2부가 절판된 상황이었어요. 출판사가 절판을 시키고 싶어하거나 책이 안 팔려서 그런 건 아니었고 제가 직접 요청했었어요. 시간이 좀 흐르니 제 이야기가 제 눈에 안 차기 시작했거든요. 소설의 모든 면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우리가 좋아했던 세계명작 소설을 읽으면 느끼곤 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여전히 재미있긴 한데 지금 시대랑 약간 안 맞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쑥 드는 거죠. 더구나 지금 시대는 옛날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으니 20년 된 작품에서 그런 느낌이 발견 안 될 리가 없죠. 

그런데 3부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1, 2부를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니 ‘시대가 지나긴 했지만 시대를 넘어서 계속 갈 수 있는 면모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정을 해볼 만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래서 3부만 출간하려 하다가 1, 2부를 다시 내는 쪽으로 출판사와 이야기를 했죠.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저에게만 보이는 단점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단점은 독자분들이 거의 발견을 못 해요. 제 눈에만 보일 수밖에 없는 단점들이죠.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제 글을 독자의 입장이 되어 읽어보니까 단점들을 일일이 발견하면서 읽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들을 우선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거라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1, 2부를 다시 살려내고 싶어진 거예요. 독자로서 순수하게 “왜 이건 다음 얘기가 안 나오지?”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되었죠.

 

: 최근 대중영역에서 드라마나 영화처럼 한국 판타지 콘텐츠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포립’을 비롯해서 미디어믹스의 전선에서 이런 부분들을 체험하셨던 세대로서 조언하실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저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영상화가 아니라 게임화였죠. 포립은 지금의 게임들과 비교한다면 아바타 채팅에 가까웠던 것 같네요. 그때까지는 없었던 서비스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이죠. 사실 제가 제일 깊이 관여했던 것은 아키에이지예요.  『룬의 아이들』이랑 연결된 테일즈위버, 포립같은 경우는 초반에 일찌감치 캐릭터 프로필 같은 설정들을 짠 후에 일정량을 보내드리고서 제작이 시작되었죠.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크게 관여를 안 했어요. 챕터 스토리 같은 경우도 제가 아니라 내부의 시나리오 라이터들이 쓴 거였고요. 얼마 전부터는 ‘이런 형태로 스토리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어떨까요?’하고 미리 의견을 물어보시게 되었어요. 제작사 내부의 시나리오 라이터는 계속 바뀌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스토리가 헷갈리는 일은 어쩔 수가 없거든요. 

아키에이지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달랐어요. 설정을 만들어 드리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제가 먼저 세계와 스토리를 만들어 전달하면 그걸로 어떻게 게임을 제작할까 하는 단계까지 함께 난상토론을 했어요. 처음에는 2주에 한 번씩 회의를 하다가 나중에는 1주일에 한 번씩 만났죠. 그 기간 동안 매번 A4로 15페이지 내외의 새 글을 가져갔어요. 뭐를 먼저 쓸지 제약도 없었어요. 과거의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종족의 스토리를 쓰기도 하고, 한 맵의 설정을 파고들 때도 있고. 어느 정도의 양을 업데이트해서 회의를 하러 가면 대표님, 기획팀장님이랑 모여서 읽은 감상을 이야기하고 ‘이것을 이렇게 게임으로 풉시다! 이건 이렇게 만듭시다.’ 그러면서 되게 재미있는 토론을 했어요. 모든 작품은 프리프로덕션 때가 재미있어요. 실제 프로덕션으로 가면 고생을 많이 하니까요(웃음). 그렇게 몇 년 간 작업을 진행하고 그 이후 만드는 과정에서도 초반부까지는 관여를 했죠. 그러다가 어느 시점쯤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만큼의 관여를 못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게임이 출시가 되었지요. 

아키에이지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강연 요청을 많이 받았어요. 대부분 게임 회사와 소설가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죠. 그때는 제가 경험한 작업 과정을 설명 드리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이게 보편적인 걸까?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 게임사를 만나서 작업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아키에이지처럼 프리 프로덕션에서 열린 마음으로 즐겁게 토론하며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드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한가로운 시대가 아니잖아요. 제작 기간이 짧아지기도 했고, 모든 것을 오픈해놓고 월드를 만들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잘 없으니까요. 작더라도 완성도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게 더 대표적인 제작 방식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제가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걸 케이스 스터디 이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더라고요. 돌이켜 생각해볼수록 아키에이지의 제작과정이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보통은 초반에 설정을 전달하고 손을 떼거나, 아니면 내부 시나리오 라이터로 참여하거나 둘 중 하나죠. 저처럼 계속 외부 인력으로서 글을 쓰고 관여하고 감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중간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들어와 달라는 제안을 받긴 했는데 일정상 불가능할 것 같아 사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아키에이지의 고문으로 남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한번 손댄 세계관은 언제까지나 저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스로가 나중에 봐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퀄리티를 내야겠다, 그런 각오로 매번 작업을 대하죠. 가끔 다 완성된 게임의 세계관에 살짝만 손을 대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하는데 저 자신의 기준으로 만족스러운 작업물을 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에요. 어디까지 재량을 줄 수 있는지 먼저 얘기를 해보고, 출시 임박이라 거의 고치지 못한다든가, 그런 상황이라면 이름만 빌려주는 일은 피하는 것이 저의 독자나 해당 게임의 유저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요.

게임계에 몸담았던 경험은 소설 쓰는데도 도움이 됐어요. 예컨대 게임하는 유저들 입장은 만원 지하철에서 웹소설을 읽는 사람들과 비슷해요. 레벨업을 해야 하는데 스토리가 툭 튀어나오면 그걸 주의 깊게 읽을 여건이 되지 않죠. 그럴 때는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해요. 전달할 때 유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 고려해야하고요. 유저가 여유가 있는 구간에 스토리가 배치되어야 하고, 또 몰입해서 플레이하는 구간에 스토리가 배치될 때 생기는 전달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 거죠. 그런 작업을 해보다보니 웹소설이라는 시장에 맞는 전달 방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됐고, 핸드폰으로 읽는 분과 종이책으로 읽는 분의 입장 차이도 알게 되었어요. 스스로의 생각을 전환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태양의 탑』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 『태양의 탑』은 참 고생이 많은 작품이지요. 처음 시작할 때 7, 8권짜리로 구상해서 짜놓은 얼개와 엔딩이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5권(현재 구성으로는 4권)까지 진행했거든요. 그런데 외부적 사정으로 출간이 중지되고 오랫동안 멈춰 놓았던 이야기를 이어서 쓰다 보니까 변화된 저 자신과 당시의 얼개 및 엔딩 사이에 어긋나는 부분이 생겼더라고요. 

2000년에 나오던 책이 상황이 꼬여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건데, 당대에 완결되는 것이 최선이었겠으나 그러지 못했다면 차선을 찾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5권과 6권에서 양쪽을 타협시켜 가며 간격을 좁혀 왔어요. 그런데 엔딩까지 중도적으로 내려니 쉽지가 않네요. 본래 제 스타일은 이야기를 제가 원하는 곳까지 밀어붙이는 건데, 태양의 탑은 기묘한 상태에 걸려 있다보니 그럴 수가 없는 거죠. 하지만 아직도 좋아해주시고 오래 기다려주신 분들이 많으니 실망스럽게 엔딩을 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듭니다. 제가 미싱링크를 찾아낼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긴 시간 인터뷰에 힘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꾸준히 전민희 작가님을 사랑해주시는 팬 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한 종류의 월드를 이루는 작품을 수십 년이나 좋아해주시는 분들께 몇 번이나 놀라고 감사합니다. 『룬의 아이들』 3부를 쓰기로 결정하고 나서 넥슨에서 테일즈위버 업데이트 쇼케이스때 3부에 대한 발표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영상을 촬영했지만, 당일 테일즈위버 업데이트 분량도 많았고 음악공연도 있어서 그냥 가볍게 한 꼭지 정도 발표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반응을 보니 3부 발표가 너무 큰 화제가 되어버려서 당황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의 반응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어요.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무언가를 계속 기억하기도 힘든데 심지어 여전히 좋아하다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렇듯 오래 좋아하고 기다려주셨던 독자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리는 한편으로, 무언가 불가능한 일을 해내신 분들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저에게 생겼어요. 만약 제가 똑같은 상황이라면 무엇 하나를 이렇게 길게 좋아할 수 있을지 확신을 못 하겠거든요.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 1권이 나올 때 사인회 규모 문제로 블로그에서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오시겠다는 분들이 무척 많으셨어요. 그래서 번호표를 나눠드리게 되었고 서점이 문을 닫아야 하니까 최대 500명까지로 했는데, 그 많은 분들이 끝까지 기다려주신데다 제 앞에 오셔서 눈물을 쏟는 분들이 정말로 많았어요. 그 많은 분들이 ‘3부를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저는 어딘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서 ‘읽어주셔서 고맙다고 제가 말해야 하는데 이게 어찌 된 거지…….’ 또 많은 분들이 편지를 주셨는데, 편지마다 10년이든 20년이든 또는 1년이든 제 글과 함께 하며 겪었던 인상적인 경험들과 진심어린 감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놀라서 이런 생각도 했죠. ‘이분들은 어째서 글도 이렇게 잘 쓰시는 거지?’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이런 멋진 분들에게 어울리는 멋진 것을 보여드릴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요. 꾸준히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늘 좋아하셨던 같은 것을 드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새롭고도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저의 최선은 항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지 않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런 변화가 어떤 분들은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실망스러울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 느끼고 계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설은 엔딩까지 가봐야 아는 거니까, 저는 좋은 것을 드리기 위해 저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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