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장르의 탄생 – 해시태그와 장르문학

3편 #여공남수 #걸크러시 #조신남

걸크러시와 조신남


“조신하게 살림하는 남자를 원한다.” 코미디언 김숙이 “가모장”적 발언으로 인기를 끌게 된지 어느새 3년이 지났다. 당시 김숙의 발언들이 유쾌했던 것은 가부장제를 미러링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미러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얼마나 유효했는지와는 별개로, 김숙의 유머들은 현대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웃음과 해소의 문법 뒤에서 그녀는 그동안 여성들이 사회로부터 받았던 수많은 요구들을 그대로 남성들에게 들려줬다. 그녀가 ‘숙크러쉬’라고 불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가장 답답한 상황에 대한 그녀의 일침은 실제로 여성들의 삶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체증이 덜해지는 효과를 준다.


이러한 ‘미러링’이 여성의 욕망으로 변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여성들의 사회적 욕망이 있었기에 김숙의 유머가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7년 플랫폼 리디북스(ridibooks)의 최고의 여자 주인공상을 받은 『황제와 여기사』의 폴리아나는 “그런데 내게 필요한 건 가정이 아니라 부인 같단 말야.”라고 말한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주된 욕망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갖지 못하는 직업, 기사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후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주변의 이야기에 폴리아나는 가정보다는 부인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소설 속에서 그녀가 부인을 얻지는 않는다. 이 대화문만 얼핏 보면 남자의 발언같다. 하지만 이 욕망이 여자라고 없겠는가. 폴리아나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한편으로 그녀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싸우는 캐릭터였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출발해서 차츰 주변의 여자 캐릭터들을 이해하게 되는 성장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원작에서 ‘박색’이라고 강조한 그녀의 외모도 영향을 미쳤다.


최근 3년간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는 주체적인 여자 주인공을 가리키는 걸크러시와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는 조신남 키워드가 유행하고 있다. 물론 각 소설들에서 걸크러시와 조신남 키워드의 구체적인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크게 보자면 걸크러시 여자 주인공들은 권력, 재력, 능력, 외모 등을 갖고 사회적인 불의나 답답한 상황들을 돌파해나가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왕이나 여기사와 같이 사회적인 영역에서 활약하는 여자 캐릭터들이 많은 편이다. 조신남은 이미 교화된(domesticated) 남자 주인공들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한 가정 내에서 여성과 살기에 최적화된 남자 주인공들이어서 적어도 여자 주인공들에게는 무해하다. 권력, 재력, 무력, 외모 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과시하거나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다정다감하고 관계 지향적이며 여자 주인공에게 의존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조신남 캐릭터들도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스펙트럼에서 여성성을 더 강조한 남자 캐릭터들을 보통 조신남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보인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걸크러시 여자 주인공과 조신한 남자 주인공의 유행의 뒤에는 분명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누리던 것들을 여성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가장 보수적이라는 로맨스 장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로맨스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변하고 있고 그로써 새로운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조형이 유행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또한 사회적인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캐릭터들의 사랑으로서의 로맨스

 

연구자들은 로맨스 장르에 대해서 정의할 때,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놓지 않는다. 낭만적 사랑은 이론적으로는 사회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개인과 개인이 만나 자유의지로 사랑을 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는 개념이다. 물론 이 개념은 18, 19세기 유럽이라는 시공간에서 공적 영역에서의 생산과 사적 영역에서의 재생산, 그에 따른 성역할 분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되었기 때문에 가부장제 질서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과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계급의 탄생, 귀족과는 구분되는 삶의 방식의 중심에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결국 로맨스 장르에서 낭만적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이야기들의 집합을 로맨스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도 로맨스 장르를 비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많은 논자들이 이야기하듯 우리는 더 이상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세대가 아니다. 더 이상 낭만적 사랑이 뒷받침하는 삶의 방식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다. 결혼은 이해관계와 타이밍이 맞아야 할 수 있고 향후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헤어질 수 있는 계약관계다.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위기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 우리가 낭만적 사랑의 표현으로서 로맨스 장르를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로맨스 독자들이 사랑의 개념을 캐릭터들의 화학작용, ‘케미’라는 단위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한 걸크러시와 조신남과 같이, 로맨스는 일정한 속성을 지닌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로맨스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들의 속성이 어느 정도 데이터베이스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장르를 즐기는 독자들과 작가들의 데이터베이스 속 캐릭터들이 서로 상호소통하고 생각하는 과정들을 로맨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들이 얼마나 어울리는지가 좋은 커플의 기준이 된다. 이상적인 여성성을 체화하고 있는 여자 주인공과 이상적인 남성성을 체화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선택지가 열린 것이다. 두 캐릭터의 상호 작용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여전히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걸크러시 여자 주인공과 조신한 남자 주인공의 유행은 캐릭터들의 사랑으로서의 로맨스와 관련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이성애 관계에 있어서의 젠더 규범은 과연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이성애 커플에서, 혹은 성관계에서 남자 캐릭터가 능동적인 행위를 하고 여자 캐릭터는 그에 반응하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일까? 물론 여전히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남성성의 화신으로서의 남자 주인공과 여성성과 재기발랄함을 갖춘 여자 주인공의 전통적 조합은 인기가 많다. 아무리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젠더 규범을 교육한 사회적인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 조합이 절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도 수많은 캐릭터들의 조합 속에서 이 전통적 조합은 점차 상대화될 것이다. 걸크러시와 조신남 키워드의 등장과 유행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여공남수: 이성애에 대한 또 다른 상상

 

걸크러시와 조신남 키워드가 던진 젠더 규범의 문제에 가장 극단적으로 답하고 있는 장르가 여공남수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공남수’는 남자 캐릭터간의 로맨스를 다루는 BL(Boy’s Love)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용어다. 범박하게 이야기하면, BL의 성관계에서 삽입하는 쪽이 공,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이 수다. 여공남수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성관계에서 여자 캐릭터가 남자 캐릭터에게 삽입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남녀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거나 통제력을 갖는 경우를 가리킨다. 남자 주인공은 마초 같은 캐릭터일 수도 있고, 조신남 캐릭터일 수도 있다. 즉, 여공남수물을 결정짓는 중요한 방점은 여자주인공과 관계의 권력구도, 역학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여공남수는 여자 캐릭터를 중심으로 관습적인 이성애에 대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역전시키거나 교란시키는 장르라고 조금 더 확장시켜 정의할 수 있다.


보통 여공남수물은 19금, 혹은 고수위 키워드와 결합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작품들이 그나마 인기를 많이 얻는다. 고수위 로맨스의 경우,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연애 이야기 외에도 성관계의 묘사에 있다. 즉, 일반적인 젠더 규범이나 도덕관에서 벗어난 이야기더라도 허용범위가 조금 더 넓다는 말이다. 로맨스가 성애라면 그 안의 ‘케미’에는 육체적인 문제도 분명히 포함된다. 19금 여공남수물들은 성관계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시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최근 리디북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19금 여공남수물 중 하나는 오메가버스 세계관을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둘은 한명의 여자 주인공에 여러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역하렘물이다. 이 외에도 남존여비를 뒤집은 여존남비(女尊男卑) 세계관을 채택하기도 하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와 여성중심적인 사회를 병치시켜 비교하기도 한다.


여공남수물은 웹소설 시장 안에서 그다지 인기가 많은 장르는 아니다. 이 키워드를 선택하고 있는 작품 수도 적을뿐더러, 그 중에서는 도무지 여공남수라고 부를 수 없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실 소수의 작품이 창작되고 소수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장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공남수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장르야말로 로맨스가 캐릭터들의 ‘케미’라는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장르는 도덕적, 윤리적인 문제와는 관계없이 두 명 이상의 등장인물들의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기’의 이성애는 어떤 모습인가?

 

 

김휘빈, 『추상의 정원』 (#걸크러시 #조신남 #여주 중심)


『추상의 정원』은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공적 영역에서 가장이자 경영인이며 조향사로서, 무엇보다 그녀 자신으로서 인정받고자 투쟁하는 여주인공 나딘의 이야기이다. 당시의 법과 사회적인 관습은 나딘이 여자라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서의 ‘남성적인’ 역할 수행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인 알랭은 그런 나딘을 걱정하면서도 그녀의 곁에서 지켜보며 같이 싸워나간다. 걸크러시 여자주인공과 조신한 남자 주인공의 역학 관계를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에 녹여내 보여주고 있다.

 

 

우룬, 『로맨틱 섹슈얼』 (#여공남수, #오메가버스)


『로맨틱 섹슈얼』은 최근에 완결이 난 고수위 여공남수물로 BL의 오메가버스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다. 오메가버스는 남녀에 알파, 베타, 오메가의 젠더가 결합하여 총 6개의 성(性)이 존재하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알파는 오메가를 임신하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캐릭터들의 신체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는 알파인 여자 주인공과 오메가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자 알파에게 상상의 기관인 ‘관’이 있다고 상상하여 이중삽입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임신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진부한 로맨스 플롯의 남녀 관계를 역전시켰다고 볼 수도, BL에서의 공 역할을 여자로 바꿨다고 읽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통해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 신체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의 관계를 통해 세계관(사회), 권력, 성역할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노원, 『우리 엄마가 물건은 함부로 줍는 게 아니랬어』 (#여공남수 #BDSM)
매우 상식적인 여자 주인공에게 어느 날 남자 주인공이 주인님으로 모시게 해달라며 나타난다. 여자 주인공이 내면화하고 있는 젠더 규범을 따르는 이성애 관계와 실제 남자 주인공과의 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약한 BDSM물로 고수위 로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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