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야기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관계를 재정의하기 시작하며 친구일 때에 드러내지 못했던 욕망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오래 사귄 익숙한 친구와 관계에 색정적인 신체접촉이 끼어들었을 때 어떻게 될까에 관한 이야기다.

 

 

별빛 아파트 505호와 504호 주민들은 마침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공동으로 키우는데, 504호 딸 함아름과 505호 아들 백범영은 끊임없이 부딪치며 10년이 넘게 함께 자란다. 맹수와 같이 사나운 인상을 한 백범영은 마침 이름조차 범이어서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함아름은 백범영의 침대에서 자신과 범영 둘 다 벌거벗은 상태로 깨어났다. 두 사람은 그 날 실제로 교합을 했는지 아닌지를 술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고, 범영 쪽에서 열성적으로 그 날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기를 제안하다 결국 정식으로 교제하게 되어 이런저런 방해를 물리친 끝에 결혼을 추진한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상황-오해-해명-화해의 도식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과 주인공 두 사람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오해를 수습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다.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친구에서 연인으로 조정하기로 합의한 이후에 해묵은 오해까지 모두 끌어와 협상 테이블에 꺼내 놓고 화해를 시도한다. 반면, 방해꾼이나 대적자에 해당하는 자들은 주인공들을 멋대로 오해한 뒤 자신들의 판단을 당사자들에게 강요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낸다. 주인공 커플에게 날아드는 뒷말과 소문은 근거 있는사실로 둔갑해 둘을 옥죄는데, 이러한 소문을 당사자가 접하게 되는 과정은 지긋지긋하도록 현실적이다.

소문과 모해와 음해를 대하는 주인공 두 사람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범영이 주로 나쁜 소문에 개의치 않는 유형이라면, 아름은 그런 소문을 아예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이 만들어 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둘이 처한 환경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백범영은 고등학생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특출한 축구 선수로, 사상 최대 연봉을 마다하고 함아름의 곁을 지키기 위해 국내에 눌러앉은 인물이다. 언제든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한국을 떠날 수 있는 그는 직접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뒤에서 편의를 보아 줄 사람이 꽤 많다는 소리다.

함아름은 평탄한 학창 시절을 거쳐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에 돌입한 사회초년생으로, 어디를 가든 오지랖 넓은 자들의 참견을 좋게 들어 넘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기에 십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을 저 하나만 희생하면웃고 끝낼 수 있다는 식으로 조장하는 자가 반드시 곁에 있어 좀체 긴장을 풀 수 없는 처지다.

함아름은 위에서 말한 상황-오해-해명-화해도식을 처음부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환경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다. 작품에서 함아름의 위기 상황은 대부분 이렇게 타인이 상황을 오해하도록 내버려 둔 데에서 비롯한다.

백범영이 갈등을 해결해 온 방식도 실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아름과 다르게 그는 당사자에게 협상을 시도하고 그것이 풀리지 않으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즉 그는 상황-오해-해명상태에서 무리하게 갈등을 봉합해 문제 상황을 덮었다. 작품에서 백범영이 취하는 위기 대처 방식은 이러한 패턴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이러한 위기 대처 방식의 차이가 둘 사이 분쟁의 원인이 되었고, 이를 문제 상황이라고 인식한 둘은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화해하여 진정한 합일을 이룬다. 둘 사이의 갈등은 여기에서 발생하고 봉합되어 소멸한다. 다행히도 여기에서 두 사람의 앞날이 어두울 것이라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의 위기 상황 중 불필요하게 가부장주의의 암운이 드리운 부분이 있는데, 대강 이런 것이다. 함아름은 회사 선배에게 오랜 기간 스토킹을 당했다. 그가 아무리 현명한 태도로 상대편을 거절했어도 선배는 계속 아름을 찾아와 괴롭혔고,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범영이 애인을 자처함으로써 아름을 위기에서 구해 낸다. 선배가 순순히 물러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남자들끼리의 서열 싸움에 밀렸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범영이 파워게임을 통해 아름을 캣콜링으로부터 구하는 패턴은 다시 몇 번 더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물론 두 사람을 안정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들어갔겠지만, 그 순간 함아름에게 필요한 사람이 꼭 백범영이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려니와 더구나 여성들에게 애인이든 남편이든 소속할 남자가 있어야만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 같아 읽기에 달갑지는 않았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관계를 재정의하는 과도기의 끝물에 연인으로서 상대방이 어떨지를 생각하는 대목에 들어갔는데, 백범영이 내가 얘 남자친구요하고 천명하는 한순간을 위해 그 상황을 설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 선언을 통해 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었다면, 이다지 게으르고 폭력적인 장면을 넣을 것이 아니라 온화한 분위기에서 단호하게 선언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사건을 만들어 넣었어야 한다.

 

비슷하게 음습한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장면으로 백범영이 함아름의 의상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범영은 면접을 준비하는 아름의 치마 정장이 너무 예뻐서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이 또한 둘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에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다. 애초에 범영은 교합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그 날부터 아름에게 예쁘다는 말을 주저 없이 건네는 캐릭터이다. 면접 정장을 트집잡는 장면에서 노린 것은 필시 귀엽고 무해한 방식으로 독점욕을 드러내는 범영의 사랑스러움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그가 떼를 쓰는 장면에서 정작 드러난 것은 사랑스러운 질투를 표출하는 귀여운 주인공이 아니라 소유욕과 통제 욕구를 음습하게 드러내는 허우대 멀쩡한 보통 남자이다. 이는 숱한 사회적 지위를 제치고 굳이 아름과 친구인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구애를 시작한다는 설정이 지닌 동등한 관계라는 환상을 제대로 깨부수는 역할을 한다. 소유욕과 통제욕은 평등한 관계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장면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이 질투였다면, 표현이 과했다. 만일 진실로 범영의 소유욕과 독점욕과 지배욕을 표현하기를 원한 것이었다면, 이미 범영은 아름과 몸을 섞는 장면에서 그 순간 아름을 지배하는 자는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므로 역시 이러한 복장 지적은 필요치 않은 장면이다.

 

남성 우월주의적 권력을 과시하는 장면은 또 하나가 있는데, 여성의 외모 권력을 대비하고자 스포츠 아나운서 최하영과 함아름을 화장 여부 등으로 비교하려는 장면이다. 아름은 최하영이 참석하는 자리에 화장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그 앞에서 화장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선언한다. 이는 아름의 열등감을 촉발해 관계에 위기를 가져오는 설정으로 기능하지만, 정작 아름과 범영의 관계가 꽉 물린 해피엔딩으로 확정된 후에는 이러한 열등감을 두 사람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취급 방식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효용도 없이 그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을 강화한다. 범영의 여자친구로서 아름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예전부터 활발하게 활동하는 스포츠 아나운서와 이제 막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잡지사 인턴의 사회적 지위 격차를 짚어 준 상황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러니한 것은, 직접 상황을 감당하는 것은 아름이되 해결은 범영이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아름은 여자들의 세계에서 치졸한 방식으로 수모를 겪는다. 그 이유는, 최하영이 오래전부터 백범영을 연애 상대로서 노리고 공략했다는 정황이다. 다시 말해 백범영이라는 남자가 없다면 둘 사이에 접점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무익한 대치를 끝내기 위해서는 백범영이 나서서 연애와 관련한 기류를 직접 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애에 관한 한, 함아름과 백범영의 위기에서 전면으로 나서는 것은 높은 확률로 백범영이다. 이 작품이 당대를 살아가는 20대 중반 커플의 연애를 사실적으로 그렸음에도 이 세계가 다분히 작위적이라는 티를 내는 것은 이러한 상황 설정 때문이다. 두 사람을 천생연분으로 묶기 위해 만들어 낸 시련이 너무 흔하고 관습적이다. 그 설정 때문에 두 사람이 받는 부담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점이 독자를 이야기에서 현실로 끌어내린다. 이러한 해결사 역할을 남성 쪽에 몰아 줌으로써 작품은 평범한 연인의 동등한 연애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남성을 가부장으로 세우는 기존 사회 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게으른 태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교류는 로맨스의 클리셰로 굳어진 몇 가지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상호 존중을 바탕에 둔 차근차근한 관계 진전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주지하다시피 이 작품의 시작점은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육체관계가 있었느냐를 놓고 한 침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대치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연인과 친구를 가르는 기준점은 육체관계일 수 있는가? 함아름이 백범영과 앞으로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 고민하는 지점도 이와 잇닿아 있다. 백범영은 오래도록 첫사랑을 앓았으면서도 함아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문제의 밤 이전에는 함아름을 철저히 친구로 대한다. 함아름은 이제껏 백범영을 친동기간처럼 생각하였으므로 실제로 핏줄이 다르더라도 그와 연애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 아침에 말 그대로 도망친다. 두 사람에게 연인이라는 선택지가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명백히 같은 침대에서 깨어난 그 아침 이후이다.

 

 

둘에게는 긴 시간 함께 지낸 정분에 더해 헤어지기 싫다는 공통의 정서가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함아름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이웃사촌으로 지냈듯 앞으로도 백범영과 이웃으로 지내야 둘 사이에 이별이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백범영의 경우에는 12년 동안 마음에 품은 첫사랑을 더는 친구의 위치에 두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즉 아름에게 그 밤은 사고였지만 범영에겐 그 밤이 기회이고 빌미였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여기에서부터 틀어지게 되며, 다른 문제들을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 만큼 관계에 대한 재정의는 커다란 쟁점으로 부상한다. 당사자 두 사람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친구였다고 간주하는 데까지는 동의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주변인의 반응이다. 가족을 비롯한 학교 동창이나 두 사람의 지인은 이 둘의 연애 또는 사전 교섭 기간을 최소한 10년 이상으로 잡는다.

 

, 아름과 범영의 경우에는 교합을 나눌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를 연인으로 정의했다. 반면 주변인들은 오랜 기간 친밀한 교분을 나눈 것만으로 두 사람을 연인 또는 그 사전 교섭을 진행하는 사이로 엮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이성 간에 친구는 존재할 수 없으며 둘 사이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한쪽이 상대방을 연애 상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빚진 바가 크다. 두 사람이 친분을 유지하고 더 깊은 사이가 되기 위해 연인, 나아가 부부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주장의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작품 내에서 교합은 두 사람이 상대방을 향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소재로 기능한다. 둘이 흡입 성교까지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와 몸을 섞는다면 어디까지 행동하느냐 하는 문제는 때로 함아름의 불안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백범영의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둘 사이에서 교합은 감정을 촉발하고 해소하는 가장 알기 쉬운 이벤트다. 처음 서먹했을 때는 페팅과 키스만으로도 벅차하던 둘이 점점 성기의 결합을 동반한 정사를 원하게 되는 과정은 둘의 감정이 각종 외부 요인으로 인해 널을 뛰는 시기와 일치한다. 행위뿐 아니라 이들이 정사를 나눌 때 어떤 공간을 사용하느냐 하는 점도 정서와 깊이 관련된다.

 

초기에 집에서 스킨십을 나눌 때는 서로가 관계에 조심스러웠지만, 점차 호텔, 자가용, 펜션 등 외부 공간에서도 색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되는데 외부에서 정사를 나눌 때쯤에는 이미 둘은 서로에 대한 독점욕을 인정하고 연인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둘 사이 정서적인 관계가 육체적인 관계에 면죄부 또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집안에서 결혼을 강권한 이후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정사를 나눈 침실에서 나왔다는 점이 상징적이라 하겠다.

 

이렇게 신체를 접촉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게 되는 것을 두 사람의 성장과 엮는 시도는 아름의 과거를 독자에게 공개하고 나서야 개연성을 얻는다. 범영의 독백으로 아름이 어릴 때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면, 어릴 때 함아름과 지금의 함아름이 이렇게까지 성격이 다른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퍼즐 하나를 맞추게 되기는 하지만 그 타이밍에 당장 필요한 정보는 아니다. 그러나, 함아름이 과거의 유괴범과 비슷하게 건장한 현재의 백범영을 의지하는 수준을 넘어 그와 정사까지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함아름의 상처를 백범영이 감싸 줄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는 의미이므로 고무적이다. 둘은 이런 식으로 과거에 주고받은 상처를 서로 감싸 안고, 상대방이 외부에서 받아 온 상처 또한 드러내어 치유한다. 집채만 한 백두산 호랑이 백범영이 함아름의 곁에서는 양순한 고양이로 애교를 부리고, 고만고만한 만년 을인 함아름이 백범영의 곁에서는 당당하게 바로 서는 힘은 두 사람이 일구어낸 가장 값진 성과이다. 이 작품을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두 사람이 결혼했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에서 연인으로, 또 연인에서 부부로 관계를 바꾸는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헤쳐 나왔기 때문이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것도 집안끼리 공동 육아를 하다시피 아주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을 정말로 평생 함께할 사람으로 바꾼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많아서 안전한 만큼 위협적이다. 서로의 어깨에 짊어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어쩌면 그런 부담감 때문에 몸정에서 맘정으로라는 키워드를 달고 모르는 사람끼리의 하룻밤 정사를 시작점으로 삼는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람 간 사귐에 있어 이전의 친소 관계가 교분에 양분이 될망정 심각한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 설파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딱 그만큼만 교류를 한 채로 인연은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붙잡고 싶고 좋아지고 싶은 사람과는 서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간단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2019년 3월 7일 단행본 출간, 리디북스 독점 "옆집에는 호랑이가 산다" 단행본 구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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