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LC RC 전권 평

청아비 2020.07.02 21:30 조회 수 : 64

폐광의 풍경,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바위 위에서 흔들리는 모습,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의 반향, 공기 중에 스며드는 불안한 부패의 냄새를 공들여 묘사합니다. 탐사자들은 불길한 분위기에 무서움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다잡아서 발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전진합니다. 갑자기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탐사자들이 돌아볼 때, 바위 뒤에 웅크려 앉은 흉측한 형체가 등불에 비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형체는 개를 닮은 괴이한 코에서 쉭쉭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아, 구울이네요. 누구 근거리 무기 가지고 있어요? 총은 효과가 떨어져서요."
 
도서출판 초여명에서 나온 크툴루의 부름 TRPG 시나리오북 [이름 없는 공포들]의 서문입니다. 뭔 얘기냐면, 크툴루라는 장르에서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감을 떨어트린다는 거죠.
 
그리고 이 "러브크래프트 다시 쓰기" 라는 이름으로 야심차게 출범한 이 시리즈는 절반 정도가 그렇습니다. 공포를 잔뜩 불러일으키고는 김을 팍 새게 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공포조차도 아니거나! 제가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책이었고, 솔직히 잘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기대감에서 너무 벗어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대체로 실패인 것 같아요.
 
읽은 순서대로 평해보겠습니다.
 
[별들의 노래]는 이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말 잘 쓴 크툴루 소설입니다. 그게, 당연한 것 같은게 왜냐면 위에서 언급한 [이름 없는 공포들]을 낸 초여명이 바로 이 작가분의 회사거든요. 제대로 된 공포 소설이고, 러브크래프트의 재해석도 성공했고, 김을 새게 하는 일도 안 했고. 제가 처음 읽은 것이 이런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소설들에 대해서도 꽤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악의와 공포의 용은 익히 아는 자여라]는, 단편집입니다. 무려 아기공룡 둘리를 소재로 한 크툴루 소설과, 인셀을 소재로 한 크툴루 소설, 작가님 말씀하시기로는 스폰지밥을 주제로 한 크툴루 소설이지만 사실 그건 잘 모르겠는 소설. 이렇게 세 개가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 느낌이라기보단 그냥 홍지운 작가가 쓴 소설들 세 편이라는 느낌이지만, 나쁘진 않았습니다.
 
[우모리 하늘신발]은 굳이 꼽자면 가장 나쁜 책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작가가 크툴루 소설을 쓰기 싫어한 것 같아요. 흡혈귀 얘기라도, 지구 흡혈귀 얘기라도 크툴루식으로 재해석하지 못할 것 없잖아요? 굳이 외계인을 쓰러트리는 우리 지구 흡혈귀 짱짱맨 같은 영웅담 같은 걸 썼어야 했나. 기대한 내용도 아니었고, 무섭지도 않았고, 러브크래프트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야기의 완성도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크툴루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만 그렇지 크툴루가 들어간 순간 뭐랄까. 이야기가 대충 진행됩니다.
 
[뿌리 없는 별들]에는 두 단편이 있습니다.[우물 속의 색채]는 [우주에서 온 색채]의 재해석입니다. 무섭긴 한데,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에 대한 공포,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입니다. 물론 그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된 게 크툴루적인 요소가 전면으로 나온 순간 갑자기 공포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산만해지는지 모르겠어요. 흠. 훨씬 더 무서울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공감의 산맥에서]는 [광기의 산맥]의 재해석인 동시에 어슐러 르 귄의 소설에 대한 재해석입니다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전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 외에 다른 정보가 필요한 소설은 뭔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 소설을 읽지도 않았을 뿐더러, 애초에 공포 소설의 형태도 띄지 않은데다가 별로 재밌지도 않은 재해석인 이 작품에 뭔 평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재미없진 않았는데, 진부한 소재활용이었습니다.
 
[친구의 부름]은, 어라 만화네요. 만화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림은 적당히 무섭되 불쾌하지 않고, 크툴루적인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이게 진짜 크툴루 만화인지 아니면 크툴루를 끼워넣었을 뿐인 이야기인지는 너무 명확하죠. 역시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역병의 바다]는 [인스머스의 그림자] 및 [데이곤]의 재해석입니다. 왜 주민들이 심해인들과 교배하는지 그 설명을 나름대로 하고 있고, 러브크래프트 느낌도 나고 현대적인 느낌도 나고 재해석도 성공했고 그냥 이게 김보영 작가다. 라고 좀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걸 기대했어요.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여성의 생리라고 하는 것을 불결함과 공포와 연결지은 수작입니다. 여성으로써 가지고 있는 속사정과 그 공포를 외부의 공포와 연결지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정말 대단합니다......만! 갑자기 작품에서 나온 공포의 대상인 [빈오재]가 곧 [크툴루]라고 할 때 팍 식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완성도 있는 괴물을 만들었으면 그냥 오리지널로 밀고가지, 크툴루라고 말 안 하면 크툴루 소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크툴루 장르에 대해서 조금 고정 관념이 있었던 것인가.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김이 팍 샜습니다.
 
[외계 신장]은 한국적인 소재를 의식한 작품으로, 한국의 무당과 크툴루를 연결시킨 시도가 훌륭한 공포소설이었습니다......만! 역시! 또! 갑자기 상대를 [기어오는 혼돈]으로 칭하고! 김을 팍 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무당이 불러온 건 묘사로 볼 때 크투가죠? 으아악 제발 오리지널 신으로 부탁합니다....... 마치 이건 "네가 [기어오는 혼돈]인가?" "아아. 그러는 너는 크투가?" 하는 장면을 보는 것 같다구요. 충분히 좋은 공포소설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왜 크툴루를 집어넣는 과정에서 전부 똑같은 실수를 하는 건데요.
 
 
아무튼,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낮은 시리즈였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리뷰/비평 게시판입니다 텍스트릿 2018.05.28 144
72 2019년 1분기 출간 장르 소설 리뷰 대회 텍스트릿 2019.02.26 59722
71 백합 향유층 분석 [2] file yora 2019.11.17 35187
70 황교익 세대의 신화 홍유진 2019.01.22 8350
69 한국 웹소설 장르(판타지 등)를 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file 이브 2019.09.20 2307
68 방탄현상은 왜 전세계에서 일어나는가-《BTS 예술혁명》, 무라카미 하루키와 《문단 아이돌론》, 《세카이계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사엔 2018.06.09 2120
67 냉면-냉면의 정통. 홍유진 2019.02.01 1449
66 갑각 나비 총평 청아비 2019.05.07 1291
65 SSS급 자살헌터 : 문피아의 중심에서 도덕론을 외치다 jc159 2020.01.04 1215
64 이 세계는 멸망해야한다 jc159 2020.01.19 1119
63 '진화된 BL'장르와 '주체'의 신화 - 미조구치 아키코, <BL진화론> 이융희 2018.07.17 934
62 감상, <사라잔마이>의 상징적 해석 (덤으로 우테나 조금) 김휘빈 2019.11.06 930
61 <이윽고 네가 된다> 리뷰 - 백합과 레즈 사이 [2] 키안 2019.09.17 917
60 백합과 퀴어 서사의 교차 (상) [2] file yora 2020.02.22 844
59 파랑새는 스마트 폰 안에 있다-버드박스 홍유진 2019.01.03 840
58 일본의 백합 만화 시장에 대해 이것저것 nanmi 2019.09.20 822
57 백합 논쟁에 대한 첨언 : 남성향 백합과 여성향 백합, 그리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이브나 2019.09.24 797
56 엄마 왔으니까 문 열어-[앤트맨과 와스프] file 홍유진 2018.07.04 720
55 ‘백합’과 ‘레즈’는 뭐가 다른 거야? [7] yora 2020.04.05 643
54 테세우스의 배 평 청아비 2019.12.05 640
53 답변을 맺음. [3] 키안 2019.09.24 614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