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3회 장혜란

시스앤 2019.11.11 23:20 조회 수 : 16

준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침 팀원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준호의 맞은편 책상에서는 정형사가 한창 보고서를 작성 중인지,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골동품 건은 어떻게 됐어?”

. 꼬리 잡았습니다. 그 자식 아예 외곽에다 작업장을 떡 벌여놨더라고요. 지가 갖다 판 거 말고도, 해외에서 들인 것까지 한두 건 이 아니에요. 거의 수십억 규모라니까요.”

수고했네.”

말도 마십시오. 대포폰으로만 연락하고, 대포통장만 사용하고, 대포차량에. 작업장에도 도통 직접 발길을 안해서, 잡는 데 애먹었습니다.”

정 형사가 우람한 몸통으로 뻑적지근하게 기지개를 켜자, 굵은 목에 힘줄이 솟았다. 정형사는 이제 스물아홉 완전한 신참이었으나, 우락부락한 생김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덕분에 언제나 그 외모로 형사2팀의 단골 농담거리가 되고는 했는데, 정규람이 범인을 손목에 수갑으로 달고 오기라도 하면, 이영민이 그 모습을 보고는 도통 누가 형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겠다며 놀려대곤 했다.

골동품 위조하는 놈인데, 오죽 치밀하겠어.”

박형사가 한마디 보탰다.

넌 또 왜 나왔어? 비번 아니야?”

노 팀장이 마침 들어서는 준호를 향해 말했다.

손우철이 잡아야죠. 그녀석 가족, 동창, 감방 동기, 사돈의 팔촌까지 인맥 모조리 뒤져서 갈만한 데 다 뒤져봤는데, 아무래도 다 아닌 것 같아요. 방향을 좀 바꿔봐야 할 것 같아요.”

웬만하면 갈 데야 뻔하지 않나, 해외로 튄 것도 아닐 테고, 어디로 간 거야?”

조두문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갑자기 도망간 놈이 꽁꽁 잘도 숨었네요.”

신원석이 조용하게 한 마디 보태더니 곧 뭔가를 챙겨서 일어났다. 조두문도 따라 일어서는 폼이 사건인 것 같았다. 준호가 무슨 일인가를 눈으로 묻자, 신원석은 별일 아닙니다. 좀도둑인 것 같아요하고는 곧장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갔다.

그때 노해준이 성격대로 시원스럽게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이영민에게 다가왔다.

이 형사. 이동선이 휴대폰 통화기록 어떻게 됐어?”

이영민이 스마트폰으로 뭔가 한창 딴짓에 열중해 있다 얼른 자세를 고치며 책상에 쌓인 서류더미를 뒤적거렸다.

, 여깄습니다.”

해준은 영민이 내민 서류를 잠깐 살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이것 뿐이야? 이게 한 달치야?”

일주일 치.... 아니었습니까?”

해준은 짜증스럽게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염병할, 제정신은 집에 두고 왔어? 뭘 들은 거야? 애인들한테 하는 거 반만 일에 신경 좀 써봐. 다시 뽑아. 그리고 되는대로 갖다 주고. 안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자꾸 쓸데없는 걸음하게 만들고 있어.”

해준은 순식간에 내뱉더니 홱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나 사무실을 나가기 전 그녀의 시선이 잠시 준호에게 머무는 것을 영민은 놓치지 않았다. 영민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해준이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시선 한번 주지않고 서류에 눈을 못박고 있는 준호의 옆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무심하시기도 하지... 쯧쯧.. 저렇게 섹시한 여자한테 그렇게 느낌이 없나? 남자 맞아?...”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옆자리의 박성식이 이영민을 흘깃 바라보자 이영민은 준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박성식 쪽으로 몸을 기울여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 형사님. 유형사님 애인 없죠?”

박성식이 점점 모를 소리라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준호가 모태솔로라는 건 경찰서에 내에 이미 유명한 얘기였다.

“.. 박 형사님.. 유형사님....혹시.. 게입니까?”

박성식의 귓가에 대고 한 말은 그러나 영민이 일부러 박성식의 귀가 아플만큼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렸다. 당연히 박성식의 옆자리에 앉은 준호에게도 들렸고, 준호를 포함 드문드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무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당황한 건지, 황당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영민을 쳐다보았다.

한창 무슨 자료엔가 몰두해 있던 준호는 이게 뭔, 뭐가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하는 듯이 짜증스럽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잠시 옆눈으로 영민을 흘깃 바라보았으나, 이내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뭔가 궁금한 듯한 표정으로 준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그 표정들은?”

기가 막힌 준호가 사납게 내뱉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제가끔의 일들로 다시 돌아갔다. 그때 차한솔이 영민의 자리로 건너와 허락도 구하지 않고 거칠게 그의 서랍을 열었다.

쓰고 나면 좀 돌려놔. 매번 이렇게 찾으러 오게 만들어?”

영민의 서랍에서 형광펜 셋트를 찾아내 집어들던 한솔은 문득 뭔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

.. 진짜,, 이런 걸 왜 여기다가.. 이 형사, 취미생활 같은 건 집에서 좀 하지?”

영민이 무슨 말인가 싶어 서랍안을 살피다 한솔이 말하는 바를 알아듣고는 킥킥 웃어댔다. 서랍 안에는 지난번 증거물 폐기 때 주워온 여자 속옷이 들어 있었다. 별생각없이 서랍 안에 던져두고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영민의 눈빛이 짖궂게 반짝거렸다.

그렇죠? 취미 생활은 집에서 해야죠?”

한솔이 이런 또라이 같은 놈, 하는 표정으로 신경질을 내고는 가버렸다.

 

여자는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딱히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몸매가 아름다웠고 개성이 있어 누가봐도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만한 여자였다. 나이는 마흔 초반 쯤 되어보였으며, 그 나이의 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연륜이나 자신감이 묻어나는 표정은 오만해보이면서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직 나는 젊고 예쁘고, 유치하고 무능력한 어린 계집애들보다 훨씬 더 능력있고 섹시하지. 난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녀의 표정은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분명 그녀의 그러한 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가있었다.

맨 처음 발견하신 게 언제죠?”

오전 열한 시 쯤, 그러니까 한시간 반 전이죠. 출장에서 돌아오니 현관문이 열려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딸이 집에 왔나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이상하다 싶었어요. 딸은 어젯밤에 친구네 집에서 자고 거기서 바로 등교하기로 했거든요. 혼자 자기 싫다면서요.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니 집이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자물쇠가 부서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문이 열려 있었을까요? 요즘 자동 도어락들은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열쇠가 걸리잖아요.”

현관에 있는 신발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 중 한짝이 문에 끼어 있었어요. 그것때문에 문이 닫히지 않고 열려 있더군요.”

그럼 집은 발견 당시 그대로인가요. 부인께서 어디 손 댄 곳은 없으신가요?”

, 그대로 두고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잘 하셨네요. 그럼 아직 뭐가 없어진 건지는 잘 모르시겠네요.”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아무래도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일층이 절도범에게 노출되기 쉽죠.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고, 혹시 모르니 자물쇠는 교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요즘 현관문 비밀번호가 노출되는 바람에 발생하는 도난사고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물쇠를 교체하실 때도 믿을 만한 곳에 맡기시는 게 좋습니다. 자물쇠를 교체해주는 사람이 집주인 몰래 락프리 비밀번호를 걸어두는 경우도 있거든요. 일단 현장을 좀 둘러본 뒤에 다시 말씀 드리죠.”

조두문이 여자와 말을 나누는 동안 신원석은 출입구를 꼼꼼히 살핀 뒤 베란다를 점검하고 있었다. 단지에서 유일하게 복도식으로 지어진 이 동은 베란다가 뒤쪽에 있었다. 복도로 난 창에는 모두 일제히 도난방지용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베란다는 임의로 설치되어 있어 들쑥날쑥이었고, 여자의 집에는 그게 없었다.

베란다 쪽은 어때?”

일단 강제로 열거나 침입한 흔적은 없어 보입니다. 바깥 쪽도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신원석은 조두문의 질문에 답한 뒤 곧장 현관을 나섰다. 조두문은 집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방이 두 개 뿐인 18평 복도식 아파트의 내부에는 복도로 면한 방 하나와 그 방과 대각선 방향에, 그러니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큰 방이 있었고, 그 외에 작은 방에 붙은 화장실, 거실 겸 주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고, 안방과 거실은 난장판이었으나, 딸의 방인 듯한 작은 방은 건드리지 않은 듯 했다.

거실 바닥에는 수건이 널려 있고, 책장에 꽃혀 있었던 듯한 책이며, 시디 따위가 뒹굴고 있었다. 거실장이며, 싱크대며 서랍이라는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으며 내용물은 모두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지문을 채취하고 감식반원 옆을 지나쳐 조두문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평소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흐트러진 물건들이 모두 새것처럼 깨끗했다. 가구도 반들거렸고, 옷장 안에서 끄집어내 온 방안에 널어놓은 옷들도 모두 깔끔하고 관리가 잘되어 상태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잔뜩 어질러져 있어도 그다지 보기 싫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무려나 서랍은 모두 빠져 있었고, 서랍에 들어 있었던 듯한 물건들도 모두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침대 매트리스는 들어냈었던지, 제자리에서 살짝 미끄러져 비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중없이 흐트러진 모양새가 아마도 아마추어 좀도둑의 짓인 듯했다. 조두문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여자에게 돌아가 말했다.

이제 둘러보시고 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보시죠.”

 

작은 얼굴에 턱이 뾰족하고 눈빛이 예리한 남학생은 키가 크고 스타일이 좋았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대체로 인근 고등학교 여고생들 사이에서 킹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단한 집안의 후광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 남학생의 이름은 석현규였다. 현규의 집안은 일제 강점기, 아니 그 이전부터 대대로 거부 집안이었으며, 위인도 배출한 명문가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지만, 사실여부는 불분명했다. 그저 분명한 것은 현규의 집안이 사학 재단을 여럿 가진 학원재벌가라는 것 뿐이었다.

아무튼 현규는 재벌가의 유일한 상속자인 데다 본인 또한 두뇌명석한 수재였으며, 거기다 어딘가 모를 카리스카까지 갖춘 아이였다. 그덕에 현규는 어디에서나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범한 학생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제법 잘나간다는 상류층 아이들 틈에서도 현규는 스타에 가까운 존재였다. 주먹깨나 쓴다는 소위 학교의 들도, 선배들은 물론, 선생들도 현규는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현규와 학원가의 패스트푸드 점에 함께 앉아 있는 아이는 현규와 또다른 이유로 역시 학교에서 유명한 도희상이라는 남학생이었다. 희상은 중키에 평범한 외모였으나 뿔테 안경 너머로 가늘게 반짝이는 눈빛, 하얀얼굴, 어딘가 모르게 지성적인 분위기, 예리한 직관과 희미한 불안이 뒤섞인 표정, 가늘고 섬세해보이는 손가락 따위가 어우러져 어딘가모르게 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넘어온거야?”

아직은. 하지만 곧 넘어올거야.”

음료수 빨대를 입에서 빼지 않은 채 우물거리듯 말하는 희상의 물음에, 현규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의 내용과 너무 다른 건조한 말투 때문에 언뜻 희상은 현규가 뜻하는 내용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헷갈렸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그때 희상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고정되는 현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입구에 이아라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라에게 머무는 것은 현규의 시선 뿐이 아니었다. 워낙에 인근 학교에서는 연예인 못지 않게 유명한 아라였다. 가게의 손님들은 대개 이 거리의 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으므로, 대부분 아라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희상은 그런 아라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주눅이 들고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주변 시선이 몹시 신경쓰였다. 언제나 그렇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당당한 아라가 희상은 몹시도 이상해보였다.

비가 올 듯 흐린 날씨였다. 공기 중에 물기가 느껴질 듯 눅눅했다. 그 때문인지 아라의 검은단발머리는 더 촉촉하게 가라앉아보였고, 미모는 더 빛났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요란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는 여느때처럼 그저 심상한 표정으로 현규과 희상이 있는 자리로 곧장 다가왔다. 그리고 옆자리를 내주는 현규를 무시한 채 자리를 비켜달라는 듯 희상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서있었다. 희상이 얼른 현규의 옆자리로 옮겨가자 아라는 빈자리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꺼냈다.

부탁한 거 줄래?”

그거야, 나한테 있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달라고.”

나중에.”

아라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넌 왜 대뜸 그것부터 내놓으라는 거야? 볼일 끝나면 두 번 볼일 없다는 식으로 말이야. 우리도 이제 대충 친구 먹은 셈은 되지 않아?”

아라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 하더니, 다시 표정을 굳히고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샌드위치를 경멸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 친구끼리 사이좋게 샌드위치라도 먹자고? 나 학원 시간 다 되가. 가봐야 돼.”

나도 이런 데서 노는 취미는 없어. 주말에 보자. 모임 있으니까 그때 봤던 데로 와.”

싫다면?”

그거야 니 맘이지. 오기 싫으면 관둬.”

현규는 제말만 마치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희상은 손도 대지 않은 현규 몫의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허겁지겁 현규를 따라갔다. 아라는 몹시 분했고, 갑작스레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늦을 거라는 예지의 전화에 혼자 이른 저녁을 먹고 잠시 바람을 쏘이기 위해 수향은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일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준호가 서 있었다. 수향은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곧장 지나쳐가려했으나, 준호는 엘리베이터에 탈 생각도 않은 채 수향을 붙잡았다.

고삐리, 다 저녁 때 어디가?”

수향은 잠시 당황했으나, 그저 있는대로 산책을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밥 때 다 돼서 무슨 산책이야? 아직 밥 안 먹었지? 내가 밥 사줄게, 가자. 지난 번에 빚진 것도 있고. 혼자 라면 끓여 먹기도 싫고. , 할 얘기도 좀 있고.”

수향이 대답하려는 찰나 마침 동출입문 입구로 들어서던 웬 남자 하나가 잠시 멈칫 하더니 말을 걸어왔다.

, 유형사님!”

준호가 돌아보니 영민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반가움이 완연한 영민의 표정에 비해 준호는 마치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는 한마디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

이 형사는 여기 웬일이야?”

저희 누님 집이에요. ~, 지겨운 얼굴도 밖에서 보니까 되게 반갑네.”

준호의 박대에도 영민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붙임성 있는 태도에는 뭔가 목적이 있는 듯 조금전부터 영민의 시선은 수향에게 붙박여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더니 고개로 수향을 슬쩍 가리키며 준호에게 시선으로 누구에요, 하고 물었다. 그러나 준호는 전혀 소개시켜줄 생각이 없는 듯 딴청을 부렸다. 수향 역시 가짜 이름을 대는 게 내키지 않았으므로 잘됐다싶어 이 틈에 빠져나가려고 슬쩍 몸을 돌렸다. 그런데 영민이 수향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얼굴을 수향 앞으로 바짝 들이밀다시피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영민입니다. 유형사님하고 같은 사무실에 있어요. ~ 미인이시네요. 인사드려도 될까요?”

수향은 영민이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 무시할 수 없어 어설프게 미소를 띄우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순간 준호가 수향의 손을 잡고 거둬들이며 말했다.

니 눈에 안 예뻐 보이는 여자도 있냐? 무시해, 알아서 좋을 거 하나 없는 놈이야.”

, 진짜 너무 하시네.... 미인 앞에서 이렇게 사람 면박을 주나, 민망하게. 진짜 오해하시겠네.”

말과 달리 전혀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준호에게 너스레를 떤 뒤 영민은 수향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아시겠지만, 유 형사님이 좀 튕기는 맛이 있죠? 그게 유형사님 매력 아니겠어요?”

수향은 영민의 우스갯소리에 평소 깔끔하고 무뚝뚝한 듯한 준호의 성격이 되짚어보여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미소를 지으니 맑은 수향의 눈빛이 더 반짝거렸다.

~~ 웃으니까 더 예쁘시네. 이름이 뭐에요? 여기 사세요?”

안녕하세요.”

수향은 이름을 말하지 않고 넘기려고 우물쭈물 인사만 하고 준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만 자리를 뜨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준호는 수향을 놓아주지 않고, 영민의 얼굴 쪽으로 파리 쫓듯 손을 흔들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인사했으니까 그만 가.”

그때 고등학생인 듯한 웬 교복차림의 남학생 하나가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그들 옆에 섰다.

끈질기게 들러붙던 영민이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꾹 다물고 미세하게 한쪽 눈썹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돌연 순순히 물러나며 준호에게 좋은 밤 보내십시오. 하고 쾌활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두세걸음 걷는 척 하더니 이내 준호를 돌아보며,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참, 제가 지갑을 깜박 잊고 왔는데, 만원짜리 한 장만 좀 빌려주세요.”

준호는 무심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려는데, 문득 지갑 말고 뭔가 손에 걸리는 게 느껴졌다. 준호가 그게 뭔가 싶어 지갑과 함께 묻어나온 그것을 손에 들고 가만히 살폈다. 무슨 빨간색 끈 같은 것이었다.

이게 뭐야, 준호가 인상을 쓰며 구겨진 끈 같은 것을 펴보았다. 그것은 영민이 사무실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장난을 쳤던 여성용 끈팬티였다. 준호와 수향은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고, 준호는 그것이 무언인지 알아차리자 거의 본능적으로 확 구겨서 손안에 감추었다.

준호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얼어버렸다. 이게... ... 여기에... 라고 중얼거리다, 곧장 영민의 장난임을 깨달았으나, 고개를 숙인채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수향을 보자 머릿속이 하애졌다.

그저 튀어나오는 장난감 뱀처럼 단순히 준호를 놀래켜주려고 꾸며낸 장난이 우연이도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영민은 통쾌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으려 했으나 괴상한 소리가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수향은 뭔지는 몰라도 분위기상 이 익살스런 남자의 짖굿은 장난임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민망하면서도, 동시에 당황한 준호의 표정이 우스워 수향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웃을 수도 없는 난감한 자신의 표정을 감추다가 말없이 목례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멍하니 그런 수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들리지도 않을 크기의 목소리로 야, 미향아, 신미향, 하고 부르더니 따라가지도 못하고 쩔ᄍᅠᆯ매기만 하다가 문득 영민에게 손에 쥔 속옷을 확 집어던졌다.

, 이 자식아, 너 빨리 안 튀어가. 빨리 가서 해명해, 인마. 이 자식이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 장난을 쳐도 어디서 이딴 장난을...”

준호는 얼굴이 모닥불이라도 끼얹은 듯 시뻘개진 채 말까지 더듬었다.

걱정마세요, 유 형사님, 미향씨도 재미있어 하는 것 같던데요,

영민은 재빨리 속옷을 받아쥐고 여전히 웃겨죽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쥐고 일층 끝쪽에 있는 누나의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 너 거기 안 서?”

그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남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지는 수향의 뒷모습과 두 남자의 수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수향은 얼마 전 미팅에서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 작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십분 짜리 세 편이면, 총 육십분 분량인 셈이었다. 단편이지만, 세 번에 나눠서 방영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세 편에 이야기를 균형있게 나눠야한다고 했다.

수향은 고민스러웠다. 자신이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건강이 더 큰 산이었다. 수향은 신경쇠약과 불면증 때문에 지금도 정기적으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다지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며칠 밤씩 잠을 못 이루며 두통과 구토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약도 정기적으로 복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비상시에는 약이 없으면 응급실로 입원해야할 만큼 상태가 악화되기도 했다. 때문에 수향은 집에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상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을 비울 때는 물론, 외출이 좀 길어지겠다 싶을 때마저 항상 약을 챙겨다녔다.

돌이켜보면 그런 건강 상태로 어떻게 글을 쓰나 싶을 정도로 용케 버텨온 셈이지만, 그만큼 수향으로서는 남보다 두세배 규칙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웬만해서는 밤샘 작업은 하지 않았고, 일이 잘되든 안 되든 마치 회사원처럼 무조건 나인 투 파이브를 고수했으며,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한 식단도 필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수향 스스로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느슨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일을 수향 자신의 페이스에 맞출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방송일을 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외부 스케쥴에 끌려다니게 될 테고, 그러다보면 몸에 무리가 갈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조금 무리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최근 두어달동안 한거의 약을 먹지 않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련이 커지면 어김없이 몸상태가 최악이었을 때가 떠올랐다. 다시 그렇게 될까 무서웠다. 수향은 아쉬웠지만 결국 서서히 거절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갔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수향은 두 시간도 넘게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았다. 뭔가 생각할 일이 생기면 하염없이 걷는 게 수향의 오랜 습관이었다. 수향은 문득 두 시간도 넘게 산책을 했음을 깨닫고 집으로 향했다. 동출입문이 시야에 들어오자 조금 전 일이 생각났다. 준호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떠올리니 수향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어떤 남학생이 자신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남학생의 시선은 분명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분명 오가는 길에 안면이 익은 얼굴이기는 했다.

“....누구신지...?”

남학생이 수향과 마주 서도 전혀 비켜서는 기색이 없자, 수향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남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 혹시 신미향?...”

수향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뭐라고 말해야할지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남학생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듯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한가득 떠올랐다.

혹시 어릴 때 대구에 살지 않았어? 칠곡초등학교 1학년 2, 신미향, 맞지? 나 모르겠어?나 김서준이야. 나 니 짝궁 앞에 앉았었잖아. 걔가 이름이 재원이였나. 암튼 니가 맨날 걔 지우개 잘라가고, 그러다 치고박고 싸우면 내가 말리다가 셋이 한꺼번에 혼나고 그랬잖아. 진짜 반갑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얼결에 니 이름 스쳐들었는데, 설마 했거든. 그러고보니까 어릴 때 얼굴이 많이 남아 있네. 왜 진작 못 알아봤지?”

수향은 선반에 올려둔 신경안정제를 떠올렸다. 이번엔 좀 오래 버티나 했더니..... 그러다 문득 수향은 자기도 모르게 서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을 정말로 낯익은 얼굴이었다. 수향은 서준이 낯익어보인 이유가 단순히 아파트에서 자주 마주쳐서여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옛날부터 수향도 잘 아는 아이였다. 미향이를 따라 집에 자주 놀러왔었다. 동그란 눈이 여자아이처럼 예뻤고, 항상 미향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미향이 시키는대로만 하던 순둥이였다. 수향이도 그런 서준이를 무척 귀여워했었다. 동생과 열한살이나 나이가 차이가 나다보니, 그때 수향은 이미 성인이었고, 동생과 그 친구들을 바라보는 눈도, 거의 엄마와 가까운 그런 것이었다.

서준은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키도 수향보다는 컸지만, 남자아이치고는 작은 키에, 작은 얼굴, 웃는 듯한 동그란 눈, 거기에 한없이 순하고 착해보이는 인상, 조심스럽고 느릿한 말투. 수향은 어린 시절 서준의 모습을 그대로 떠올릴 수가 있었다.

서준아! 정말 너구나. 세상에.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귀엽네. 착해빠지고, 맞아. 그대로야.”

수향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뒷감당은 생각도 않고 말을 쏟아냈다.

서준의 얼굴에 어린아이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미향이 맞구나. 반갑다. 나 이학년 때 전학왔으니까 거의 십년 만이다. . 이렇게도 만나는구나. 너 여기 살아?”

수향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에게는 오해를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나, 수향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득 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수향이 자신의 저 너머로 가 있는 서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는 아라가 서 있었다. 서로 아는 척은 하지 않았지만, 아라의 표정 역시 굳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잠시 시선을 주고 받는가 싶더니 둘은 동시에 서로를 외면했고, 아라는 그길로 둘을 스쳐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한동안 서준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리고 그 굳어진 얼굴은 수향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헤어질 때까지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때문에 수향은 결국 자신이 미향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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