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연재) 블랙스타 10회 장혜란

시스앤 2019.12.06 04:43 조회 수 : 30

준호는 칵테일을 바라보더니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싫으시면 제가 마실게요. 생각보다 먹을 만하네요. 맛있어요.”

수향이 아라의 칵테일을 제 앞으로 끌어당기려는데, 준호가 수향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수향을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그제야 수향은 자신이 미성년 신분(?)으로 음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뜨끔한 표정으로 준호의 눈치를 살피는 수향의 표정을 보고서야 준호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야 인마, 마시란다고 술을 넙죽 받아 먹어? 아주 담배도 피지 그랬어? 아주 신났네 신났어. 나참 기가 막혀서. 쪼그만 것들이 발랑 까져가지고 노는 꼬락서니들 하고는. 너 벌써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마셔. 이런 게 원래 뒤로 취하는 거야. 일어나. 아라도 만났으니 이제 그만 가자.”

준호의 말에 수향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직 안 끝났어요. 이제 곧 영화도 한대요.”

준호가 너 여기 놀러왔냐, 하는 말이 입끝에서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럼 가봐. 기다릴게.”

수향은 준호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미안했지만, 영화동아리에서 직접 만든 영화라면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 모임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갔다. 무슨 단서가 될 만한 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영화 상영이 시작되려는지 이미 방 가득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 아이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유경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수향이 들어오자 손을 들어보였다.

영화는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시작했다. 먹구름이 선명해 그 사이로 별과 달들이 드러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면들은 온통 암울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연속이었다. 뉴스에서 따온 듯한 각종 사고 장면들, 전쟁의 참상, 세계 어딘가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아이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가득찬 병동, 노인요양시설 따위의 사회복지시설, 노숙자 집합소인 듯한 어떤 거리. 뭔가 희미한 일관성 같은 것은 있는 듯했지만, 아라 말마따나 수향도 주제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어지던 다큐화면들이 끊기고 일반적인 영화 같은 화면이 나타났다. 교복을 입은 어떤 예쁘장한 소녀가 길을 걷고 있는 뒷모습으로 시작해 화면은 그아이의 일상을 뒤쫓았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학원으로 이어지던 그아이의 발길은 마지막으로 친구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클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아이는 교통수단 없이 꽤나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을 내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과감없이 따라가기만 하는 건조한 화면은 일탈적인 클럽 나들이마저도 한없이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그 장면에서 수향은 애들이 만든 영화치고 제법이다 싶은 감탄을 느꼈다.

그리고나서 소녀는 아무도 없는 집안으로 들어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소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 그때 카톡 메시지 알림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카톡을 들여다본다. ‘잘 들어갔어라는 문구와 함께 화려한 이모티콘이 떠있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그래, 오늘 개재밌더라. 내일봐하는 글자를 입력하고, 역시나 우스꽝스럽고 화려한 이모티콘을 찾아 넣는다. 그 우스꽝스러운 이모티콘과 울 것 같은 소녀의 표정이 번갈아 교차편집되고 이어서 소녀는 발작적으로 휴대폰을 벽에 던져버린다. 소녀는 흥분한 듯 호흡이 거칠다.

그리고 문득 소녀는 책상 맨 아래서랍을 열고 무엇인가를 급하게 찾는다. 소녀가 꺼낸 것은 조그마한 상자다. 그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기괴한 철물들이 가득 들어있다. 손톱을 손질하는 듯한 모양의 칼도 있고, 수술용 메스 같은 칼도 있다. 소녀는 그중 하나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소중히 끄집어낸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티셔츠를 끌어내려 쇄골아랫쪽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곳에 칼을 긋는다. 선연하게 올라오는 붉은 피. 그 피를 바라보고 있는동안, 흥분한 듯 가빠져 있던 소녀의 호흡이 점차 가라앉는다. 소녀는 휴지를 가져와 피를 닦아내고 또다시 칼을 긋는다. 그런데 그 상처가 점점 어떤 무늬를 만들기 시작한다. 별모양 무늬.

거기까지 봤을 때 수향은 숨이 턱 막혀오는 걸 느꼈다.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하고 정신이 멍해지며 눈앞이 노래지는 듯도 했다가 흐려지는 듯도 했다. 수향은 있는 힘껏 유경의 팔을 쥐었다. 그제서야 수향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경은 황급히 수향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괜찮아? 미향아. 정신 좀 차려 봐.”

그때 준호가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수향이 얼떨결에 손에 쥐고 있던 호출기를 누른 것이었다. 준호는 수향이 식은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는 낮빛이 새파래졌다.

무슨 일이에요?”

해준이 유경과 함께 수향을 부축하며 물었으나 유경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별모양 상처에 놀라긴 했으나, 그 의미를 헤아리기도 전에 수향의 이상반응에 놀라 뛰쳐나온 것이었다.

병원 가자.”

준호가 수향을 안아올리려하자, 수향이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조금만 ...토하고 나면 ...괜찮을 거에요.”

수향은 간신히 말하고 유경과 해준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갔다. 준호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으나, 여자화장실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앞에서 마냥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보조석에서 준호의 웃옷을 덮고서 가수상태에 빠져있던 수향은 차가 멈추자 곧 정신을 차렸다. 수향이 급히 자세를 고치고 걸치고 있던 준호의 웃옷을 돌려주려했으나 준호가 그것을 받아 다시 수향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좀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너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혹시 어디 안 좋니?”

수향이 겸연쩍은 듯 웃었다.

. . 심각한 건 아니고요. 그런데 그보다 혹시 오늘 모임에서 본 필름 구할 수 있을까요? 좀 확인해 보고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수향은 잠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초조함과 불안에서 나오는 듯한 동작이었다.

형사님 슬래셔 무비 본 적 있죠? 저도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너무 이상해요. 너무 생생하고 너무 리얼해서... ...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스너프 필름이 되는 건가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화에서 자해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너무 생생했어요. 스티븐 스필버그도 아니고, 요새 애들이 어떻게 영화를 찍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추어 아이들이 만든 영화의 특수효과가 그렇게 생생할 수가 있을까요? 전문가한테 보여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수향은 다시 그때 느낌이 살아오르는 듯 몸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문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수향을 끌어당겨 가볍게 품에 안았다. 수향은 준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준호가 부드럽게 수향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는 점점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잠시 후 수향이 준호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고마워요, 형사님. 이제 괜찮아졌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그 영화를 보고나서 생각난 게 하나 있어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M. 헤르포트 박사라는 사람이 쓴 미디어와 현대인의 심리분석에 관한 책이 하나 있어요. 그러니까 대충 말하자면, 우리가 뉴스에서, 미디어에서 접하는 화면들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다큐가 맞는 건가하는 질문에서 시작한 글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튼, 이런 저런 내용의 짧은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인데, 그 중에 블랙스타라는 제목의 글이 있거든요. 오래 전에 읽은 거라 잊고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보니까 그 내용이 어제 읽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러니까 헤르포트 박사는 그 글에서 블랙스타라는 용어를 만들어쓰는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발산할 수 없는 감춰진 검은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파괴적이고 불안한 현대인들의 내면심리를 대상들인 거죠. 일본의 이지메도 예시로 나와있는데, 박사는 이지메란 사면초가에 놓인 불안한 개인의 모습을 감상하며 집단이 카타르시르를 느끼는 행위라고 설명하죠. 왜냐면, 집단의 위력에 의해 강하게 통제당하는 그 불안한 개인이란 바로 일본인 개개인의 내면 심리의 초상이거든요. 자신의 감춰진, 사회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상, 이지메의 대상,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왕따당하는 아이를 헤르포트 박사는 블랙스타라고 지칭해요.

그 외에도 블랙스타의 예시가 많이 나와있는데, 대체로 사회적으로 강한 혐오의 대상인 경우가 많아요. 동성애자 같은 경우도 대표적인 케이스죠. 그외에도 일반적으로 약하거나 추하다는 이미지를 지닌 존재들이죠. 아무튼 그 블랙스타라는 모임의 이름이 만일 거기서 따온 거라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지능적으로, 의식적으로 그 블랙스타라는 아이들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필름으로 기록한다, 뭐 그런 뜻이야?”

아마도.... 석현규, 도희상. 그 아이들이겠죠.”

그건 또 누구야?”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블랙스타의 핵심멤버라는 것만 들었어요. 도희상이라는 아이는, 말하자면 천재 영화감독 같은 앤가봐요. 중부고등학교 학생인데 나름 유명한가봐요.”

준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수향의 말은 너무나 충격적이라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너무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 않는가. 수향의 말대로 미미도 아라가 맞았다. 블랙스타가 정말 그런 모임이라면 이건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 것인가.

준호는 새삼 수향이 받은 충격을 이해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충격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준호는 다시한번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누르고 그냥 가만히 수향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향은 그런 준호의 마음을 읽은 듯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준호에게 전화로 대강의 사실을 전해들은 해준 역시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알아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필름을 구하는 게 급선무 같네요. 전문가한테 감정의뢰해 보죠.”

미향이가 많이 놀랐겠네요. 저도 정말 그런 일은 금시초문이에요. 아무튼 해당부서에 요청에서 알아보죠.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국내에는 없는 일일 거에요. 필름은 공개적으로 시사회까지 했다니까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학교에 요청하면 아마 바로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한번 확인해보죠. ...미향이 잘 달래주세요. 많이 놀랐겠어요.”

해준의 노력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필름 감정을 마치기까지 만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명 영화감독 출신인 모예술대학 영화학과의 학과장은 수향의 말이 맞았음을 입증해주었다.

 

대여섯명의 남녀가 뒤섞인 도박판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짙은 화장을 한 푸짐한 몸매의 아줌마 하나가 두꺼운 금팔찌를 두른 손에 패를 쥐고 멤버들앞에 진열된 화투장을 훑어보며 신나게 고를 외쳤다. 못 먹어도 고지. 아니야. 이번엔 제대로 먹을 고야. 헤헤. 그녀가 노리는 패는 난초 띠였다. 그 예쁜이만 손에 넣으면 아침부터 수백만원이나 까먹은 본전을 한번에 만회할 수 있을 것이었다. 돌아가는 판을 보니 아무래도 난초를 가진 연놈은 없었다. 그건 분명 저기 가운데 있을 것이고, 그녀의 흑진주색 매니큐어 칠한 통통한 손에 뒤집혀지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 남은 패는 두장뿐이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날 가능성도 적었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은 박씨였는데, 그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비광은 지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창 달아오르는 도박판 주위에는 속칭 꽁지라는, 도박판에서, 수표나 귀금속 따위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는 바람잡이들이 남의집 불구경하듯 구경에 열이 올라 있었다. 그들은 도박판에 절대 끼지 않았다. 그저 돈을 바꿔주고 받는 잔돈푼의 수수료를 바라고, 때로는 사기도박판의 바람잡이 노릇으로 부수입을 올리며 판에 끼여있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경찰과 사복 형사들이 구둣발로 들이덮쳤다. 도박판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고,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었던 여자는 순식간에 그 짜릿한 판타지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추하고 수치스러운 현실 앞에서 몸을 빼려고 발버둥을 쳤다. 남자들이 순식간에 어디선가 사시미라는 불리는 회칼들을 빼들었다.

이번 사기도박판을 짜고 작업을 벌이던 놈들이 조직폭력전과범들임 사전에 알지 못한 형사와 경찰들은 곧 맨몸으로 몸싸움에 돌입했다. 조직의 행동대장 출신으로 한때 영등포를 휩쓸었다는 땅개라는 별명을 가진 땅딸한 초로의 늙은이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이었다. 아직 삼심대로 팔팔한 나이인 데다 유도, 검도, 합기도 고단자인 준호에게도 버거운 상대였다.

근육으로 다져진 땅개의 날렵한 몸이 준호의 허점을 파고들 때마다 준호는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하며 주먹과 다리로 칼든 손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놓쳐버렸다. 한동안의 치열한 몸싸움 끝에 또한번 땅개의 칼이 준호의 배를 노리고 날아왔으나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바람에 잠바 앞부분에 예리한 칼자국이 났다. 싸움이 길어지자 아무래도 나이든 땅개 쪽에 조급한 기운이 서렸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칼을 든 손놀림에 대번에 영향을 주었다. 땅개는 충분히 방어할 태세도 갖추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칼을 날리기 시작했다. 준호는 옆구리 옆쪽으로 칼이 깊이 들어왔다 거둬지는 찰나에 몸을 눕히며, 칼을 뻗기 위해 무게 중심을 지나치게 앞쪽으로 두는 바람에 서둘러 빠지지 못한 땅개의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고 즉시 몸을 굴리며 일어나 곧바로 칼든 손을 밟았다.

준호가 땅개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동안 한솔은 나머지 한 놈을 맡았고, 원석은 칼을 든 채 주변을 위협하다 순식간에 창문으로 몸을 던져 달아난 놈을 뒤쫓아 거의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를 뛰었다. 그러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대치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그동안 주민신고로 출동한 지원인력 덕에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성공적인 진압이였다. 주택가를 파고든 사기도박판에 대한 제보가 들어온 것은 거의 한달여 전이었는데, 경찰은 좀처럼 꼬리를 잡을 수가 없어 애를 먹고 있었다.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우스를 자주 바꿔가며 판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한 것이 어젯밤이었고, 오늘 낮에 판이 벌어질 것이라는 정보에 한솔과 준호, 원석과 조두문이 여섯 시간 넘게 잠복한 끝에 검거에 성공한 것이다.

달려온 사기도박판 멤버들뿐 아니라 그 자리에 동석해 있던 먹잇감들도 범법자이기는 마찬가지인 데다, 그들은 주변에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신원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통에 뒤치다꺼리가 말도못하게 귀찮은 인종들 중 하나였다. 거기다 방화범 한놈과 좀도둑 두 녀석도 처리해야했고, 맡고 있던 사건 하나의 중요증인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침 오늘 연락이 닿는 바람에 증언도 받아야했다.

준호가 퇴근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섰을 때는 거의 열두시가 넘어 있었다. 준호는 그래도 퇴근할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속으로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묵직한 피로감이 어깨를 누르는 게 느껴졌다. 잠복근무 때문에 새벽 세시에 출근한 데다 이제껏 하루종일 숨한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종일 한끼밖에 먹지 못한 것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생각을 떠올리니 배가 고파져왔다.

집에 도착한 준호는 잠시 수향의 집 작은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동생이니 그곳이 수향의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나 지나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한번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지만, 방은 보지 못했다. 궁금했지만, 보여달라고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본 수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구빛 원피스가 잘 어울리던 모습도, 충격으로 괴로워하던 모습도 또렷한데, 이상하게 그게 무척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준호는 수향이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으나, 이틀동안 정신없이 바빠 전화 한번 해보지 못했다. 준호는 자신의 품에 가만히 기대오던 수향의 부드러운 몸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는 수향이 정말 괜찮은지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괜스레 주머니 속의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준호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정말 괜찮나. 후유증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한 염려가 다만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의 핑계임을 준호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집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준호는 그날 일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았다면 얼른 믿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믿기 힘든 건 블랙스타에 관련된 일들뿐이 아니었다. 그걸 밝혀낸 수향의 예민한 두뇌도 믿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똑똑한 거야 그렇다쳐도, 아직 어린애가 무슨 책은 또 그렇게 많이 읽었단 말인가. 수향의 나이를 오해하고 있는 준호에게는 수향이 천재적인 아이로밖에 여겨지질 않았다. 아이들을 깡통 속에 가두고 하향 평준화시키려는 제도권 교육에서 적응하기 힘든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학생이 아니라서인지 자신이 미성년이라는 사실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듯한 수향의 태도는 준호의 눈에 심히 거슬렸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고, 태연하게 한잔 더 마시겠다던 수향을 떠올리면 왠지 준호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가 제아무리 나이보다 성숙하다해도 결국 열일곱살 어린애일 뿐인 것이다. 그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를 어떻게 해야 도로 외양간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준호는 그 문제로 골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고민해 봐도 별뾰족수가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웬만큼 똑똑해야 컨트롤이 돼지, 정말 감당 안 된다. 감당 안돼.

경찰서를 나서는 해준은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수향이라는 너무 성숙하고 지나치게 똑똑해서 이제는 거의 기묘하게 느껴지는 여자아이, 블랙스타라는 괴물 같은 아이들, 너무 예뻐서, 또 대체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그 정체가 와닿지 않는 비현실적인 느낌의 아라. 그 속을 헤매고 있는 자신 역시 이상한 나라에 온 듯 낯설게 느껴졌다. 차리리 수향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했으나, 조사해보니 영화 속에서 자해를 하던 그 여자이이는 다름아닌 강음률이었다. 그 실제 상처사진을 해준이 갖고 있지 않은가. 영화 속에서 직접 만든 그 상처 말이다. 해준은 미칠 듯이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해준이 로비에 서서 정신을 차리려고 도리머리를 흔들고 있는데, 영민이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다 그런 그녀를 발견했다. 영민은 기척도 없이 잽싸게 해준에게 다가와 불쑥 말을 디밀어 해준을 놀래켰다.

뭐하십니까? 머리는 왜 흔들어요?”

영민의 머리는 젖어 있었고, 목욕을 다녀온 듯 가벼운 옷차림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리고뽀얗게 맑아진 얼굴로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야,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해준의 입이 저절로 비틀리며 욕설이 튀어나왔다.

근무 중에 사우나나 쳐돌아다니고, 제정신이야?”

영민이 시계도 없는 맨 팔뚝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며 빈정거렸다.

아무리 우리가 이십사시간 근무라지만, 법정 근무시간 끝난 게 언젠데, 아직도 근무 중 타령입니까? ...오늘 상태가 이상하긴 하네. 무슨 일 있어요?”

시끄러, 오늘 서 전체가 비상이었던 거 몰라? 다들 바빠 쳐돌아가는데 법정은 얼어죽을.”

,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 하루종일 난지도에서 쓰레기 뒤졌습니다. 중요 증거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정신나간 사람이 어딨어요. , 내가 진짜 조씨 가문에 욕될까봐, 두문 형님이라고 내가 말은 안 하겠는데, 그래놓고 자기는 잠복가고, 나만 개고생시키고. 글쎄 내가 살다살다 이런 헛짓거리는 평생 처음이네. 온몸에서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나가지고, 다들 제발 목욕 좀 하고 오라고 밀어내서 갔다오는 길이라구요.”

해준은 잠시 말문이 막혀 머쓱해졌다. 그러더니 문득 내가 왜 이런 놈하고 입씨름이나 하고 있지, 그 시간에 잠이나 자지, 하는 생각이 들어 말없이 영민을 지나쳐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영민이 그녀를 쫓아왔다.

이제 끝났죠? 잠깐만 기다려요. 나도 이제 삼십분만 있으면 끝나는데.”

내가 니 놈을 왜 기다려?”

약속했잖아, 술 먹기로....”

영민이 해준의 매서운 눈초리에 급히 말 끝에 요자를 달았다. 해준은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맞아, 그런 게 있었지. 피곤한데 쌩까? 기분도 꿀꿀하고, 지금 이놈 상대할 기분이 아닌데. 아니야, 지금 쌩까면 마실 때까지 시달릴거야. 빨리 해치우는 게 낫겠어.

삼십분이면 돼? 일초도 더 안 기다려. 삼십분 넘으면 난 약속 지킨 거야. 약속은 니가 깬 거야, 알아듣지?”

에이씨 진짜, 하여튼 못돼 처먹어가지고.”

해준이 노려보려고 눈에 힘을 주기도 전에 영민은 총알같이 사무실로 튀어갔다.

변개처럼 서둘러 영민은 간신히 삼십분 안에 일을 마치고 로비로 나왔다. 로비에 앉아 있는 해준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놓은 것은 정확시 이십팔분 25초만이었다. 해준이 정말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영민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해준을 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 말했다.

가요. 그냥 내 차 타고 가자.... 어차피 술 마실 건데.”

해준이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듯이 그러던지, 말던지.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해준은 영민의 옆자리에 타고는 문득, 요즘 이 차 자주 타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운전 안 하니 편하긴 하네. 왜 다들 돈 벌면 운전기사 부리는지 알겠다. 이놈 운전기사로나 써먹으면 딱이겠는데. 해준이 영민을 흘깃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돼, 너무 시끄러워. 난 말 많은 놈이 제일 싫어.

지금 속으로 내 욕 했죠?”

해준으로서도 뜨금해서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냐고요?”

해준이 놀란 눈으로 영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형사님, 형사님은 표정에서 다 나오는 거 알아요? 사람이 어찌나 단순한지. 애도 아니고 생각하는 게 다 보여. 그럴 때보면 노팀장님하고 진짜 판박이라니까.”

시끄러, 난 아빠 안 닮았어.”

서로 안 닮았다고 우기는 것도 똑같고. 둘다 딱 애야, .”

나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건드리지 마.”

오늘 좀 이상하긴 해. ? 무슨 일 있어요?”

몰라도 돼.”

아니지. 얘도 알아야 하나.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게 없잖아. 아라가 미미라고 해도, 걔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알수도 없고. 괜스레 걱정만 시키는 꼴인데, 아직은 말 안하는 게 낫겠지.

왜 아라 때문에? 나 신경쓰여요?”

해준은 이번에는 진짜로 놀랐으나, 생각해보니 영민이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카 일인데 당연히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으리라. 해준은 자기도 모르게 슬몃 영민의 눈치를 살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걱정하지마요. 신경쓰지도 말고. 형사님은 할 일이나 해. 나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뭐 도움될 만한 거 있으면 얘기해드릴게.”

해준은 아무 대꾸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영민의 차가 한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해준이 문득 목을 빼고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뭐야? 술 먹자며? 여기가 어디야?”

생각 안 나요? 장소는 내 맘대로.”

여기가 어딘데?”

내 집.”

해준이 인상을 쓰고 영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하자는 수작이야?”

뭐 하긴, 술 마시자니까. 뭔 걱정이야? 나보다 힘이 약해, 술이 약해? 쓸데없는 소리 고만 하고 내려...

해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 틀린 말도 아니네. 좋다. 가자. 아무데면 어때. 술은 양껏 준비해뒀겠지? 난 중간에 술 끊기는 거 제일 싫어.”

 

해준은 제집에라도 들어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원룸타입의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니 생각보다 깔끔한 정도가 아니라 먼지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이나는 느낌이었다. 해준이 집안을 둘러보며 한소리했다.

이십사시간 근무에 청소할 시간이 어딨어? 도우미 쓰냐?”

난 지저분한 데서는 잠 못 자요. 나는 형사님하고는 좀 달라서 싫은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더러운 거야. 오늘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 저녁은 먹었어?”

컵라면 먹었어. 사내자식이 까탈스럽기는. 하여튼 난 깔끔떠는 놈들이 제일 싫어.”

해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에 걸터앉아 잠바를 벗어놓았다. 영민이 인상을 찌푸리고 다가와 해준이 허물처럼 벗어놓은 잠바를 주워들며 말했다.

소파 놔두고 왜 남의 침대에 앉아요?”

해준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대꾸했다.

피곤해서 잠깐 누우려고. 아무데나 편한 데 앉으면 되지, 침대가 별거야? , 너는 여자가 침대에 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해준이 이기죽거렸다. 영민이 이번에는 정말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가 여잔 줄 알기는 아나 보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긴장감이 없지, 정말 이해가 안가.”

영민이 방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 술병과 안주를 세팅하는 사이에, 벽 한쪽 구석에 세워둔 기타가 해준의 눈에 들어왔다. 해준이 팔꿈치를 세워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받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저건 또 뭐야?”

영민이 해준의 시선을 따라 가더니 빈정거렸다.

, 기타라고 처음 보지? 워낙에 예술이니 감성이니 이런 거랑 담을 쌓은 분이니 알 리가 없지.”

너 저런 짓도 하냐?”

짓이라니? 기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기다려. 내가 이따가 분위기 잡히면 한곡 들려줄테니까. 원석이 형만은 못해도 나도 꽤 들어줄만 하다구요.”

원석이 형? 신 형사?”

영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도 기타 쳐? 보기랑 다르네. 생긴 건 곰처럼 생겨가지고.”

원석이 형이 어때서? 자세히 보면 분위기 있어. 나보단 못하지만.”

흐응, 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군. 저런 걸로 꼬시면 여자들이 잘 넘어온다는 건가?”

영민이 제법 정갈하게 차려진 술상 앞에 앉아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고만하고 그만 내려와서 술이나 마셔요.”

여기서 마시면 안 돼?”

난 침대에 뭐 흘리는 게 제일 싫어. 빨리 내려와요.”

싫은 건 하나 뿐이라더니.”

그게 그거잖아.”

해준은 아쉽다는 듯 끙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는 어느새 방석도 깔려 있었다. 해준은 묘한 표정으로 푸른빛 방석을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끌어당겨 그 위에 앉으며 말했다.

너 진짜 별짓 다한다. 남자 맞어?”

나참, 나야말로 별소릴 다 듣네. 사람사는 집구석에 방석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여자 맞아?”

여자 아니면 남자겠지. 아무려면 어때.”

해준이 맥주잔을 들어 따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영민이 맥주를 따라주고, 제잔에도 따른 뒤 해준을 따라하듯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마시라는 시늉을 해보이자, 해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주병 하나를 영민 쪽으로 밀었다.

이걸 싱거워서 어떻게 먹어. 빨리 타.”

뭘 시작부터 폭탄이야. 밤은 깁니다. 천천히 가십시다.”

영민이 말을 들어주지 않자, 해준은 맥주를 반쯤 마셔 여유를 만든 뒤 병째로 소주를 맥주잔에 따랐다. 그리고는 영민의 잔에도 소주를 부으려고 했다.

뭐야, 난 싫어.”

영민이 급히 손바닥으로 컵을 덮었다.

같이 마시자며? 같이 마시는 게 뭔지 몰라? 따라와야지. 넌 이 정도 접대 마인드도 없이 술을 마시자 그런 거야? 아무리 술을 몰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매너가 없어.”

해준이 거의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하여튼, 하여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한결같이 싸우려고만 드는지. 도대체 뭐 먹고 컸어. 노 팀장님은 딸을 어떻게 키운 가야? 제발 좀 내려놓고 쉬어. .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지시라구요. 인생 뭐 있어. 릴렉스 몰라, 릴렉스.”

영민의 말에 해준이 침대에 등을 기대며 이죽거렸다.

그래, 술 못하면 말이라도 잘해야지.”

그러나 아닌게아니라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에서 그렇게 각자 말없이 제 잔을 홀짝거리는 사이 해준은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상업공간에서 마시는 술맛과는 또 완전히 달랐다. 영민은 생각보다 시끄럽게 굴지도 않았고, 말없이 소파에 기대앉아 통유리창밖을 내다보며 술만 홀짝거렸다. 아라 때문인가. 하지만 제 집에서 맥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자기말마따나 묵묵히 릴렉스하고 있는 영민의 모습에서는 그게 정말 그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분위기 같은 게 있었다. 아무생각없는 듯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도 한 모순적인 두 가지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영민의 모습은 평소의 유들유들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요란한 거 좋아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은가보네.

영민이 단정하게 깎아낸 과일안주 하나를 포크로 집어 해준에게 내밀었다.

먹어봐. 유기농이야.”

뭔 농?”

해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술만 들이켰다. 깨끗하게 치운 집안에서 정갈하게 차린 상을 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영민이 안주까지 집어주는 데는 해준은 낯이 간지러워 손이 오그라들었다. 영민이 다가와 해준의 손에 포크를 억지로 쥐어주고 다시 물러나 앉았다. 해준은 능숙하게 손질한 과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설마 아라도 강음률이라는 애처럼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그래 그런 거라면 영민이 놈도 벌써 알았겠지. 음률이에 대해서 먼저 알아온 건 이놈이잖아.

유기농은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 또 유기농 타령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그럼 농약에 뒤발한 거 새로 사다 깎아줘?”

영민아.”

해준이 영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민이 흠칫 하더니 슬쩍 자세를 고치며 물었다.

뭐야? 왜 그렇게 느끼하게 불러?”

너 냅두니까 말이 점점 더 짧아진다.”

그래,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시자. 아무 생각도 하기 싫구만.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도대체 충원은 언제 해주는 거야.

 

지금 협박하는 거야?”

부탁이라고 해두지 뭐. 어차피 하는 거잖아. 그냥 찍게만 해줘. 뭐 그렇게 나쁠 거 없잖아. 다들 영화라고만 생각할 거고. 너도 그런 장면 하나쯤 기록해두는 거 나쁘지 않잖아. 호기심 없냐? 그런 걸 찍은 걸 보면 기분이 어떨지? 그리고 이 영화가 뜬다고 생각해 봐. 너 잘하면 연예인 될지 누가 아냐? 얼굴도 되고 하니까.”

희상의 말에 아라는 차가운 얼굴로 씹듯이 말을 뱉었다.

그딴 거 관심없어. 찍고 싶은 생각도 없고. 넌 정말 구제불능 변태야. 남들이 추어주니까 뭐나 되는 줄 아나본데, 제발 주제파악 좀 해.”

현규가 얘기안해? 그거 한강물에 던져버리겠다던데.”

아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라는 자신이 순간적으로나마 왜 이런 변태 녀석들을 믿었던 걸까,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이런 녀석들이 순순히 내맘대로 따라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정말 바보처럼 오만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실 그딴 거 잃어버린데도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이다. 아라는 마음 속으로 오기를 부려보았지만, 그렇게 생각되어 지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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